23화
한 갈래 길
메리프가 하나, 메리프가 둘, 메리프가- 아니, 너는 우르잖아. 넌 가라르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포켓몬이라고.
다시 메리프가 셋, 메리프가 넷…. 그렇게 머릿속으로 메리프를 이백오십 네 마리 세고 도망친 한 마리를 잡아 오기까지 한 뒤에야 제노는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불편함에 제노는 그다지 오래 잠들지 못했다. 그건 실버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모두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제노는 아침 댓바람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실버에게 텐트를 정리하며 물었다.
“많이 불편했어?”
“어.”
“나 잠버릇은 없는 걸로 아는데….”
“당신이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답하며 실버가 손가락으로 제노의 옆을 가리켰다. 따라 시선을 돌리자, 발치에서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이브이가 보였다.
“당신 이브이, 어젯밤 내내 나를 걷어찬 거 알아?!”
실버가 험악한 표정을 하고 이브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이브이는 실버가 텐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둘 사이를 갈라놓기라도 하려는 듯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좋을 테니 그냥 그대로 같이 자긴 했는데…
“얘 잘 때 얌전한 편인데…?”
“아 그러셔? 그럼 너 이 자식, 잠꼬대인 척 일부러 내 얼굴을 노려서 발로 밀어냈다 이거냐?!”
실버가 화를 내건 말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이브이가 제노를 앞발로 살살 긁으며 안아달라 보챘다. 제노는 당연하다는 듯 이브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 웃기는 행태에 실버는 더욱 격분했다.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거야?! 그 자식 때문에 어제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해 죽겠다고!”
“내가 잠들 때까진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은데….”
“어이, 너! 빨리 인정해! 일부러 그런 거지?”
실버가 이브이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자 잠시 으르렁거리던 이브이는, 이내 콧방귀를 흥, 뀌며 제노의 품속에 고개를 묻었다. 제노는 그 자그마하고 보드라운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미안. 우리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냥 성질이 더러운 거겠지!”
“….”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에게 듣고 싶진 않아.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켜낸 제노가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건 뭐야?”
“아이젠. 신발에 끼우면 얼음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어.”
“… 미리 묻겠는데, 그것도 사이즈 당신한테 맞춰져 있지?”
아차. 제노는 그제야 고개를 숙여 제 발과 실버의 발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도 제노의 외투를 망토처럼 겨우 걸치고 있는 실버에게 S 사이즈의 아이젠이 들어갈 리 없었다. 제노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자, 실버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냥 당신이 사용하지그래.”
제노는 얌전히 아이젠을 신발에 끼웠다. 벨트 부분을 당겨 신발에 꽉 맞게 아이젠을 조이며, 그가 물었다.
“그럼 내 어깨를 잡고 따라올래?”
“뭐?”
“잡을 게 있으면 더 나을까 싶어서.”
“바보 아냐? 내가 당신을 잡고 있다가 같이 넘어지면 어떡할 거야?”
얘는 참… 사람을 밀어내는 것치곤 다정한 구석이 있다니까. 제노가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을 하자, 콧방귀를 뀐 실버가 혼자서 얼음 미로에 발을 들였다.
“딱히 당신 도움 따위 없어도, 이 정도는 나 혼자아아아-!”
내디딘 발이 삐끗하며 얼음 위로 자빠진 실버가, 그대로 쭈우욱 미끄러졌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비명을 멍하니 듣고 있던 제노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미로 안을 향했다.
*
두 사람은 겨우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출구에서 아직 한기가 흘러나왔지만, 따뜻한 태양빛 아래 서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법 이른 시간에 출발했음에도 지금이 오후인 걸 보면, 꽤 긴 시간 얼음 미로에서 헤맨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유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실버를 노려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부딪힌 꼬리뼈 부근이 제법 아픈지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붙잡지 않은 게 미련한 것 같기도 하고, 기특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더 움직여야 했으므로, 제노는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실버가 그 모습을 보곤 제노의 곁으로 다가왔다.
“또 그 지도야?”
“그럼 뭐 보고 갈 건데.”
“뭘 보든 당신한테 길 찾기를 맡기진 않을 거야.”
“….”
제노가 뚱한 표정을 짓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은 실버가 손을 내밀었다. 뭐 어쩌라고. 가만히 그것을 바라만 보는 제노에 그가 말했다.
“당신 포켓기어 줘봐.”
내 포켓기어는 왜…. 실버는 제노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제노의 포켓기어를 낚아채 갔다. 그리곤 멋대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뭐해?”
“타운맵 업데이트. 대체 언제 적 버전을 쓰고 있는 거야?”
신오지방에선 포켓치를 썼기 때문에 포켓기어 안의 지도는 몇 년 전의 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실버가 투덜거리며 버튼 몇 개를 꾹꾹 눌렀다. 뭐가 되고 있기는 한 걸까. 제노는 궁금했지만 실버는 말없이 기기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결국 답답해진 제노가 실버의 옆으로 다가섰을 때, 실버가 말했다.
“뭐야, 라디오 기능은 잘만 되고 있네?”
“가끔 듣거든.”
특정 채널에서 오 박사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건강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다.
제노의 짧은 답에 대강 추임새로 답한 실버가 라디오를 켰다. 그러자 방송이 흘러나왔다.
- 지금 여기에 로켓단의 부활을 선언한다-!
로켓단. 그 단어에 실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제노는 태연한 표정으로 비주기를 찾는 내용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지금인가 보다.
“이상해. 어느 채널에서도 로켓단 녀석들의 얘기만 나와.”
“아마 라디오타워를 점령한 거 아닐까? 황토마을에서 간부들이 도망친 덴 이유가 있었던 거지.”
제노의 말에 실버가 혀를 찼다.
“과연.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는 거군. 쳇, 부활이니 뭐니, 쓸데없는 짓을…!”
“갈 거야?”
“당연하지!”
그러냐, 잘 다녀와. 제노가 멀뚱히 서 있자 공중날기를 위해 골뱃을 꺼내든 실버가 무언갈 깨닫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당신… 공중날기를 쓸 줄 아는 포켓몬이 없어?”
그렇다. 제노가 지금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 중엔 비행 타입이 없었다. 실버가 골뱃과 제노를 번갈아 보았다. 녀석이 사람을 둘이나 태우고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실버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어떡할 거야! 당장 금빛시티로 가야 한다고!”
“아니, 너 혼자 가면 되잖아….”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허나 낯설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목호가 망토를 펄럭이며, 망나뇽과 함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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