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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한 갈래 길

“포푸니, 연속자르기!”

실버의 명령에 높은 울음소리로 대답한 포푸니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상대를 베었다. 그 공격에 야생 우츠동이 나가떨어졌다. 기절한 상대를 뒤로하고 포푸니가 종종걸음으로 실버에게 다가갔다. 잘했어, 그 짧은 한마디에 포푸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제저녁, 제노는 실버에게 ‘당신은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하고 실컷 혼났다. 어차피 곧 금빛시티에서 다시 재회하게 될 거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입을 다물고 실버의 창피함에서 기반한 신경질을 전부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두 사람은 황토마을에 심향을 두고 검은먹시티로 향했다.

황토마을에서 검은먹시티로 향하는 44번도로. 제노는 튀어나오는 야생 포켓몬이건, 엘리트 트레이너건 상관없이 걸어오는 싸움을 모조리 받아주고 있었다.

물론 상대는 실버와 포푸니가 했다. 딱히 전날의 복수는 아니었다. 이게 다 실버와 포푸니의 성장을 위한 거야, 암 그렇고말고.

처음엔 배틀에 익숙지 않아 하던 포푸니도 이제는 제법 실버와 합을 맞추고 있었다. 계속되는 배틀에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만히 풀밭에 앉아서 아주 편안하게 관람을 마친 제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지를 털었다.

“수고했어. 여기, 자뭉열매.”

포푸니는 열매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실버도 제법 지친 모양인지 말없이 그 옆에 털썩 주저앉을 뿐이었다. 그 사이 제노는 쓰러진 야생 우츠동에게 다가갔다.

기절한 우츠동에게 상처약을 뿌려준다. 이걸로 상처약 몇 개째인지. 거의 다 비어가는 통을 확인한 제노가 상처약을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저 멀리서 어렴풋이 동굴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가자, 부지런히 움직이면 오늘 안에 얼음샛길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

두 사람은 제노의 말대로 그날 얼음샛길의 초입에 들어서긴 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근처에서 야영지로 쓰기에 좋은 평지를 발견한 제노가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다른 곳과는 땅의 느낌이 다른 게, 아무래도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장소 같았다.

고정핀을 단단히 박아 넣은 제노가 저녁을 차리는 대신 가방에서 육포를 꺼냈다. 모닥불은 피우지 않는다. 근처에 쓸만한 장작도 없을뿐더러, 이런 곳에선 불을 피우기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노는 웅크려 앉은 채 육포를 뜯는 실버를 보았다. 티를 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으나, 얼음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풍기는 냉기에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얇은 자켓을 바라보던 제노가 입을 열었다.

“… 외투는 그거 하나뿐이야?”

“이런 곳에서 야영을 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냐고! 바깥하고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지!”

실버가 괜히 성을 내었다. 귀며 코, 손가락 끝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제노는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이라고 생각했다. 뭐,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날씨에 겨울용 옷을 파는 가게는 없을 테니까. 제노가 가방에서 두꺼운 외투 하나를 꺼내어 실버에게 건넸다.

“자, 이거 입어.”

“… 당신은?”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그는 볼에서 꺼낸 이브이를 껴안았다. 핫팩으로 사용되는 줄도 모르고 이브이가 좋다고 애교를 부렸다. 너 이용당하는 거야….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실버는 받아 든 외투를 입기 시작했다.

“….”

“….”

그리고 그 시도는 팔을 끼워 넣는 것에서부터 막혔다. 제노에게 꽤 품이 넉넉한 외투임에도 불구하고 실버가 입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저러다 옷 찢어지는 거 아냐? 그런 걱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실버는 억지로 옷에 몸을 끼워 넣는 대신에 담요처럼 덮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마 안쪽 주머니에 초콜릿 있을 거야. 그거라도 먹어.”

“… 이거 먹어도 되는 거 맞아?”

“싫으면 말던가.”

실버는 대체 언제부터 주머니에 들어있었을지 모를 정도로 구깃구깃해진 초코바의 포장지를 보며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희미해진 유통기한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포장지를 까서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초콜릿이 녹으며 달콤한 맛이 퍼지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안에는 견과류도 들어있었는지, 오독오독 씹을 때마다 고소한 맛이 났다.

“당신, 어디 추운 지역에서 오기라도 한 거야?”

“유적지가 설산에 있었거든.”

“그러고 보니 저번에 신오지방에 갔다고 했었지.”

그 말을 끝으로 침묵에 빠진다. 잠시 고민하던 실버가 외투의 후드 부분에 붙은 털을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다시 물었다.

“그런 낡아빠진 장소에 뭐 볼 게 있어?”

"많지.”

“예를 들면?”

“돌멩이.”

제노는 부러 실버의 흥미가 떨어질 만한 답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를 자극했는지, 질문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실력을 키우는 건 배지를 따서 특정 에리어에 들어가기 위해서?”

“….”

“그럼 배지는 서너 개 정도면 충분할 텐데, 어째서 리그에 도전할 정도로 실력을 키운 거지?”

“그럼 너는 어때?”

이 주제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줄곤 성의 없이 답하던 제노가 되려 묻자, 실버는 잠시 당황했다. 성공적으로 질문의 방향을 돌린 제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왜 강해지고 싶어?”

“그야 강해지면, 강해져서-”

- 모르겠어, 아버지가 하는 말은 전혀 모르겠다고!

- 알고 싶지 않아! 나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아!

- 강한 남자가 될 거야, 혼자서 강해지겠어!

강해져서, 그다음은? 실버의 머릿속에서 어렸을 적의 그가 외쳤던 말들이 울려 퍼졌다.

깜깜한 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버지. 이윽고 자신은 그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 아버지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도 나처럼, 내 등을 보면서 잡고 싶어 했을까?

답은 알 수 없다. 그때의 실버는 기어코 뒤돌아보지 않았으니까.

“강해져서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 꿈을 이루고 싶다, … 자신이 있을 곳을 찾고 싶다.”

계속해서 어둠 속을 헤치던 시야가 다시 밝아진다. 제노의 말에 정신을 차린 실버의 눈에 들어온 건 흐리게 빛을 반사하는 얼음 수정이었다.

“강해진다는 건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야. 힘이 목표가 되면 많은 걸 잃어버리게 돼. 자신도, 파트너들도.”

제노가 이브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브이가 그 손길에 맞춰 고개를 들며 작게 목을 울렸다.

“네가 강해지고 싶은 이유… … 한번 잘 생각해 봐.”

제노는 그렇게 말하곤 이브이와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실버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묘한 감상에 빠져들려는 찰나, 갑자기 텐트의 입구가 지익! 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제노가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맞다, 텐트 같이 쓸 거지?”

“머, 무, 뭐??”

실버가 파드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놀라.

“밖에서 잘 거야? 입 돌아간다.”

“그,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우리 둘이 같이 잔다는 거야!”

“그럼 나보고 얼어 죽으라고?”

“….”

제노는 뚱한 표정으로 답하곤 다시 텐트 안으로 사라졌다. 입구는 닫지 않은 채였다. 열려있는 지퍼 틈새로 살짝씩 보이는 안을 노려보던 실버는, 밖에서 잠들었을 때의 결과와 두 사람이 함께 자는 일을 저울에 대고 재어보다가 결국 텐트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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