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한 갈래 길
두 사람은 포켓몬 센터의 바깥에 설치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지하에 있던 시간이 제법 되었는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실버의 붉은 머리가 더욱 진한 빛을 띠었다.
실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챔피언과 아는 사이야?”
그가 챔피언이 그린인지, 레드인지, 목호인지 알 수 없었다. 제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혼자 결론을 내린 것인지 실버가 말을 이었다.
“석영고원의 챔피언로드를 통과했겠군.”
“….”
“그렇다면 당신의 실력도 납득이 가.”
“….”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던 실버의 시선이 제노에게로 향했다.
“성도지방의 배지를 여덟 개 모두 모으고 다시 리그에 도전할 셈인가?”
“아니. 난 챔피언 자리엔 관심 없어.”
“그렇게나 강한데 어째서?”
“말했잖아, 원래 도라지시티로 가려 했다고. 내 관심사는 유적 탐사거든.”
체, 시시하기는. 실버가 부러 퉁명스럽게 답했다. 사람을 그렇게나 싫어하면서 눈치는 쓸데없이 빨랐다. 그의 질문이 더 집요해지기 전에 제노가 말을 돌렸다.
“고상한 도련님이 보시기에는 시시하겠지.”
“도련님 아니라고!”
그의 외침에 근처 나무에서 자그만 새 포켓몬들이 푸드덕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붉어진 얼굴이 제법 봐줄 만 했다. 그가 시근덕거리던 것을 멈추고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 그 녀석들은-”
“괜찮아.”
“어?”
어차피 이미 알고 있었고, 별로 관심도 없다.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실버는 실버야. 나는 그걸로 충분해.”
“…….”
멍하니 제노를 바라보는 실버의 얼굴에 빛이 들어왔다. 벤치 옆 가로등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벌써 그런 시간인가. 오늘은 감정 소모를 많이 해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피곤하단 느낌이 들었다.
“당신…”
“누나아-!”
멀리서 심향이 외쳤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니 그가 왼팔을 높게 들고 흔들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헉… 헉… 실버랑 같이 계셨네요!”
“응. 등록은 했어?”
“들어보세요! 체육관에 들어갔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안은 얼음으로 된 미로지! 겨우 만난 짐 트레이너 한 명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이미 시간 끝났다고, 내일 다시 오라면서 그 길로 다시 나가라는 거 있죠?!”
“결국 못 했다는 얘기를 참 길게도 한다.”
심향이 늘어놓은 하소연을 한 문장으로 일축한 실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향으로 인해 한번 끊긴 이야기의 흐름이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기회는 다음에도 있으니까.
“그럼 여기서 작별이다.”
“뭐? 왜??”
“왜는 왜야! 애초에 네놈이랑 같이 다니는 게 이상한 거였다고!”
잔뜩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던 실버가 흥, 가볍게 콧방귀를 뀌곤 심향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다.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실버가 심향을 완전히 등진 채로 말했다.
“나는 혼자서 강해지기로 결심했어.”
“엥? 그럼 누나랑은 왜 같이 다니는데?”
“….”
나왔다, 악성향 라이벌을 향한 선성향 주인공의 순박하고 잔혹한 질문….
실버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못 들은 척하는 편이 낫지. 그렇게 생각한 제노 또한 멀뚱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야말로 네 물렁한 마음과 약한 포켓몬들을 쳐부숴 주지.”
“….”
“알겠냐? 배틀로 확실하게 우위를 정하겠단 거다. 그리고 그 끝에 승리하는 건-”
실버가 잠시 말을 멈추고 심향을 흘긋 돌아보았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낸 그가 주먹을 꽈악 쥐어 보였다. 그의 결의에 따라 심향의 눈빛 또한 진지함으로 물들어갔다.
“… 세계 최강의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는 건 바로 나다!”
서로를 바라보는 라이벌의 한쪽 얼굴이 가로등 빛으로 인해 밝게 빛났다.
멋있긴 한데, 나는 빼고 해주겠니. 제노는 한줌의 먼지가 되고 싶은 심정으로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잠시간의 대치 상태가 끝나고, 대사를 마친 실버가 터벅터벅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피휴, 제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실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심향의 시선이 제노에게로 향했다.
“잠깐 작별이네요, 누나.”
“응? 아, 뭐, 그렇지.”
“아이스배지를 따고 나면 금방 두 사람을 따라잡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 반드시 챔피언이 되고 말겠어요!”
불끈 쥔 심향의 두 주먹에서 그의 의지가 묻어났다. 그렇구나, 힘내. 그의 운명을 아는 제노는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누나, 안 따라가 보셔도 돼요?”
“응?”
“실버 녀석, 가다 말고 저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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