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두 갈래 길
“하아, 하… … 완전히 지쳤어.”
쓰러진 두 포켓몬을 바라보던 이연이 중얼거렸다. 시선은 자신 앞의 두 사람에게로 향한다. 챔피언, 그리고 누군지 모를 건방진 꼬맹이.
하루 이틀 쌓아서 나오는 실력이 아니었다. 호흡을 맞춰 빈틈없이 서로를 보완하던 두 포켓몬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들이라면 어쩌면 아강을….
거기까지 생각한 이연이 말했다.
“… 이걸로 기분이 조금 나아졌어. 고마움의 표시로 하나 알려주지.”
우리 아쿠아단, 아니, 아강 님의 야망이 이루어졌을 때 세계는 ‘진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태어나기 전으로.
처음의 모습, 그것은 원시회귀.
태초의 모습으로 각자 대지와 바다를 넓히며 싸우는 그란돈과 가이오가, 그리고 들끓는 용암과 파도. 그것은 도저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공간이다.
의문이 많아 보이는 성호와 달리 제노는 그 섬찟한 광경을 떠올리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이들의 스케일에 비하면 로켓단은 귀여운 수준이었군.
“너희들의 진짜 목적이 그건가? 그것이 정말 포켓몬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나도 아직 정리가 안 되고 있어. 뭐가 틀리고 뭐가 옳은지….”
성호의 물음에 이연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어두워졌던 얼굴을 다시 새침하게 되돌린 그가 말했다.
“아마 아강 님과 무리들은 잠수정을 훔치기 위해 잿빛도시로 향했겠지. 그런 현실을 상대로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희들의 머리로 생각해 봐.”
그럼 안녕, 분명이 어딘가에서 또 만나게 되겠지만.
작별을 입에 담으며 이연이 우아하게 머리를 넘겼다. 잠깐, 기다려! 그에 성호가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제 포켓몬을 향한 이연의 지시였다.
“질퍽이, 독가스야!”
질퍽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탁한 공기가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메웠다. 페어리 타입에겐 치명적인 독 타입 기술, 제노가 님피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성호의 손길이었다.
“들이마시면 안 됩니다.”
메타그로스! 셔츠의 소매 부분으로 제노의 코와 입을 막은 성호가 그의 에이스 포켓몬을 부르자, 낮은 기계음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짙은 보라색의 연기 속 메타그로스의 안면부에서 나온 빛이 눈에 들어오고, 곧이어 사이코 파워에 의해 연기가 눌러졌다.
“모두 괜찮으신가요?”
아쿠아단은 연기를 틈타 이미 자취를 감춘 뒤. 성호가 묻자 곳곳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괜찮다는 답이 들려왔다. 연구원들이 서로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성호는 제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 손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이가 내놓은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은 성호가 아쉬움에 천천히 손을 떼어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물음에 작게 긍정을 표한 그가 계속 호흡을 참고 있었던 것인지 곧장 숨을 몰아쉬며 품 안의 님피아를 살폈다.
문득 성호는 그와 작은 토끼 포켓몬을 연상시켰다. 예민하면서도 제 기분을 잘 표하지 않는다. 그 신호는 아주 미묘해서, 아차 하는 사이 잽싸게 도망쳐버리고 만다.
제노가 경계하는 모습은 꼭 귀를 쫑긋거리는 포켓몬 같았다. 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래, 어떻게든 잡을 수 있겠지만 긍정적인 관계는 쌓을 수 없겠지.
온통 님피아에게 신경이 몰린 제노를 내려다보며 성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윤진, 네 말처럼 쉽게 될 것 같진 않아. 순간 쏘아지는 님피아의 매서운 시선을 피하며 제 친우를 탓한 성호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호에게 감사를 표한 연구소장이 이연이 단독으로 행동하면서까지 원했던 정보에 대해 알려주었다.
두 마리 전설의 포켓몬, 그란돈과 가이오가가 수천 년 전 일으킨 이상기상.
자연계에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써 변화한 가이오가는 전세계를 폭우에 휘말리게 하며 바다를 넓혀갔다.
가이오가의 이 변화를 ‘원시회귀’라고 한다는 것.
“원시회귀는 메가진화와는 다른 포켓몬 진화의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가이오가와 그란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져 진화 방법으로서는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녀석들이 알아내려고 한 정보는 이 원시회귀에 대한 것과, 원시 가이오가가 만들어낼 이상기상에 대한 것이 다입니다.”
설명이 끝나자 때마침 성호의 포켓내비가 울렸다. 윤진이었다. ‘아쿠아단이 해양박물관에서 잠수정을 훔쳐 갔어’. 윤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제노에게까지 닿았다. 아무래도 이연이 마지막에 말한 잿빛도시에서의 계획이 사실인 듯싶었다.
“날씨 연구소에 있던 건 자신을 서브 리더라고 지칭한 사람이야. 아무래도 너희 쪽이 당첨이었던 것 같네. 아쿠아단의 리더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보아 추적 중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성호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그다지 좋지 못한 대답이었다.
- 급하게 뒤쫓았지만 물길을 통해 이동하는 바람에 놓쳐버렸어. 지금 그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134번수로 주변을 수색 중이야.
그들이 아무리 호연지방 내에서 활동한다곤 하지만, 134번 수로를 통하면 갈 수 있는 곳이 많았다. 계속해서 망망대해를 탐색하는 것은 체력 소모가 너무 크다. 잠시 고민하던 성호가 말했다.
“그럼 일단 돌아와 줬으면 해. 서브 리더의 말을 토대로 추측해 보면 그들도 어딘가에 있을 본부에서 합류할 테고, 우리도 해안시티에서 재정비를 하는 게 좋겠어.”
- 오케이.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성호는 생각이 많은 듯, 오른손으로 제 턱을 쥔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제노 또한 조용히 그 옆에 남았다.
제노가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해안시티의 동쪽과 이어지는 124번 수로가 바로 아쿠아단의 본부.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일단 태홍에게 메시지를 넣었지만, 마그마단의 본부가 굴뚝산에 있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이쯤 되면 그냥 감이 좋은 건가. 외모에, 재력에, 인성에, 배틀 실력에, 이제는 운까지 그의 편인가 보다. 이 세계의 부조리한 형평성에 대해 속으로 따지고 있을 때, 성호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죠. 윤진을 기다리게 했다간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들을 거예요.”
가벼운 농담과 함께 그가 웃어 보인다. 제노는 그제야 자신이 그다지 좋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장 호연을 걱정하는 사람은 본인이면서도 타인을 챙길 여유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런 사람조차 세계가 정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안타까워할 처지는 되지 못한다. 그마저 바꾸지 못하는 운명을 어떻게 자신 따위 바꾸겠다고.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지도 않을 상상이 이어졌다. 상상 속의 자신은 성호에게, 당신은 곧 챔피언이 아니게 된다고 소리친다. 영원할 것만 같은 시간의 주인공은 사실 따로 있고, 우리의 삶은 그가 움직임에 따라 흘러간다고.
상상 속의 성호는 반응하지 않는다. 당연했다. 자신이 아는 것은 게임 속의 데이터인 성호이지, 살아있는 유기체인 성호가 아니었다.
손 같은 건 잡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온기 같은 건 모르고 싶었다. 그럼에도 제노는 거부할 수 없는 수순에 따라 느리게 그 위로 제 것을 겹쳤다.
그것을 강철만큼이나 단단하게 붙잡은 그가 제노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
무장조의 등에서, 제노는 내내 말이 없었다. 성호는 뭔가 실수한 것이 있나 자신의 행동을 열심히 돌아보았다. 손을 너무 티 나게 잡았나? 아니면 무장조를 독려한 것이 들켰나?
성호가 망설이며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선수를 친 것은 제노였다.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 데봉 코퍼레이션의 자리를 제안해 주신 거요.”
그 말에 성호가 제노를 살짝 돌아보았다.
확실히 그는 제노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 처음 이러한 얘기를 꺼냈을 때 윤진이 보여주었던 반응이 아직도 생생했다.
진지하게 따지는 그 모습에 성호는 그저 미묘한 웃음과 함께 윤진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제노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는 어려서는 데봉 코퍼레이션 회장의 아들로서, 커서는 호연지방의 트레이너들을 대표하는 챔피언으로서 살아왔다. 첫눈에 반한다는 철없던 시절에나 꿈꿨을 법한 로망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잡아놓을 수단으로 떠올린 것이 회사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겠다는 결심은 그와 접촉할 때마다 무너져 내렸다.
부족했다. 손끝이 닿으면 맞잡고 싶고, 가까이 있으면 끌어안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옷을 걸치고,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때 뱃속에서 피어오르던 기이한 만족감은 이루 설명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윤진. 아무래도 이건 네가 설명했던 유치한 감정들과는 다른 것 같아. 전혀 부드럽지도 달콤하지도 않잖아.
그가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자 제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신오에 있는 건 찾고 있는 물건이 있어서예요.”
“찾고 있는 물건이요?”
“네. 히스이지방에 내려오는, 신비한 음색을 가져 특별한 포켓몬을 불러낼 수 있다고 하는 피리예요.”
히스이지방이면 옛 신오지방을 칭하는 말이었다. 성호가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자 제노가 잠시 혀를 내밀어 제 메마른 아랫입술을 축였다.
“혹시 호연에는 그런 물건에 대한 소문이 없을까요?”
“음… 그러고 보니 저번에 윤진이 어떤 피리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순간 제노가 강한 관심을 갖는 것이 느껴졌다. 신화와 전설에 흥미가 있어 신오까지 간 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 뒤로 성호에게선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에, 제노는 살짝 긴장했다. 이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미끼일까. 제노는 실버가 했던 말을 인정했다. 자신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다, 성호처럼 감이 좋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덤벼드는 수밖에.
“그 피리, 제가 찾는 물건이 맞다면 받아들일게요.”
“정말인가요?”
“네. ‘맞다면’ 말이죠.”
제노가 거듭 강조하는 말에 성호는 그 물건이 대체 어떤 것이길래 그가 이렇게 매달리는 것일지 추측했다. 허나 가지고 있는 정보가 적어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제노가 내민 조건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므로.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보관함에 소장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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