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두 갈래 길
결론만 말하자면 세 사람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해안시티에 도착했다. 경찰에게 붙들려 일을 정리하는 데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경계에 접어들자 캄캄한 하늘과 달리 불빛들로 환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 포켓몬 두 마리가 안정적으로 포켓몬 센터를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녹빛 머리, 새하얀 복장. 센터의 앞에는 어두운 밤에도 시선을 끄는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눈에 윤진을 알아본 성호가 무장조의 등에서 내리며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탁, 탁, 탁- 탁. 팔짱을 낀 채 오른쪽 발끝을 까딱이던 윤진의 움직임이 그제야 멈췄다. 그에 성호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매끈한 얼굴을 일그러트린 윤진이 시간에 맞지 않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미안, 사건의 인수인계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네가 지각하는 일이 한두 번이니? 시간을 지키는 것도 일루전이야!”
일루전이라는 단어가 그렇게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던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고 있자 크로뱃의 등에서 먼저 내린 실버가 뚱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왔다.
“혼자 내릴 수 있는데….”
“흥, 그렇게 말하고서 넘어지면 제법 봐줄 만하겠군.”
… 그래, 참 고맙다, 이 녀석아. 속으로만 비꼰 제노가 그의 손을 잡았다. 제노의 양발이 무사히 땅에 닿은 것을 확인한 실버가 크로뱃을 볼로 들여보냈다.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비행 포켓몬이 없는 제노는 실버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성호 쪽이 더 젠틀하게 제안해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실버가 대폭발을 일으킬 기세였기에 그의 뒷자리를 택했다. 정말로 나의 특성은 습기인가? 설마 내가… 우파…?
그래도 크로뱃의 등에는 처음 타봤으니 제법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번에는 무장조의 등에 타볼 수 있게 부탁드려볼까, 제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성호와 윤진의 제법 일방적인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성에 찰 만큼 떠들어댄 윤진이 성호의 뒤쪽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쪽은?”
“아, 그렇지. 제노 씨, 실버 군, 이쪽은 제가 말한 친구인 윤진이예요. 윤진, 여기는 제노 씨랑 실버 군.”
성호가 차례대로 소개했다. 성호에게 화를 내던 기색은 어디 가고, 금세 말끔한 얼굴로 돌아온 윤진이 말했다.
“루네시티 체육관 관장이자 콘테스트 마스터인 윤진이야. 잘 부탁해 실버 군, 그리고-”
이쪽의 레이디도. 그렇게 말하며 윤진이 제노의 한 손을 잡고 고상한 신사의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 과장된 인사에 실버의 표정이 대놓고 썩어들어갔다. 실버만큼은 아니지만 성호의 표정 역시 미묘해졌다.
제노가 조금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무엇을?”
“제가 여자라는 거요. 보통 말을 하기 전까진 잘 모르던데….”
“그 정도야 이 엘레강스한 나에겐 기본이지.”
가볍게 웃은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실버가 외투를 붙잡고 제 쪽으로 당겨 제노를 윤진으로부터 조금 떨어트렸다. 아쉽다는 듯 손을 놓아준 윤진이 물었다.
“두 사람은 어쩌다 내 친구와 함께하게 된 거지?”
“놀라지 마, 윤진. 이 두 사람이 바로 마그마단의 본부를 격파한 주역들이야.”
그 말에 윤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현 챔피언인 성호에게 인정받은 실력이라니,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메랄드빛 눈이 광채를 담고 반짝였다.
“그렇단 말이지? 저기, 두 사람은 어떤 포켓몬을 주로 다루니? 마그마단을 상대했다고 하니 역시 물 타입이겠지? 그렇지?? 나와 내 포켓몬들이 만들어내는 물의 일루전이 역시 최고로 우아하지만, 너희들의 일루전은 얼마나 엘레강스할지 궁금한걸!”
이런 실례, 오랜만에 만난 강자에 답지 않게 들뜨고 말았네.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우다다 쏟아낸 윤진이 흥분을 가라앉히곤 다시 자세를 잡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남은 이야기는 숙소로 가서 마저 하지 않겠어? 근처의 호텔에 레저베이션을 해두었거든. 자, 자.”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었으나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 윤진이 제노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가로등이 켜진 밤의 거리를 네 사람이 함께 걸었다.
*
호연지방 최대의 관광도시라는 명성답게 도시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커다란 빌딩.
혼자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면 절대 발도 들이지 않아 보았을 고급진 호텔의 엘리베이터 안, 프런트 데스크에서 카드키 두 개를 받아 든 윤진이 한숨을 내쉬며 구석에 짱박혀있었다.
“이 내가 이런 엘레강스하지 못한 실수를 저지르다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방을 내어주신 것만으로도 저흰 감사한걸요.”
전면이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의 바깥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을 구경하던 제노가 윤진의 혼잣말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쩜 제노 양은 마음씨도 이렇게나 골져스하니. 그가 우는소리와 함께 내뱉는 말들은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제노와 실버의 존재를 모르고 방을 두 개만 예약했던 윤진은 프런트 데스크에 추가 문의를 하였으나, 지금은 날이 따뜻해져 돌아다니기 딱 좋은 시기. 즉 해변을 즐기기 위해 해안시티로 몰려든 사람들이 가득하단 뜻이었다. 호텔 측이 내놓은 유감스러운 답에 절망한 윤진의 속도 모르고 엘리베이터 안에 흐르는 음악은 경쾌하기만 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윤진이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어른스러운 내가 양보하는 수밖에. 나와 실버 군이 방을 같이 쓸 테니 제노 양이 방 하나를 혼자 쓰도록 해.”
그리고 성호, 너는 밖에서 자도록. 산뜻하게 내뱉어진 윤진의 말에 성호가 빙긋 웃었다.
“아니, 내가 실버 군과 한방을 쓸 테니 네가 밖에 나가도록 해.”
“이봐. 내 의견은.”
“너의 눈부신 희생에 감사해, 성호. 실버 군도 나와 함께하게 되어 기쁠 거야.”
“아니, 난 싫다.”
“무슨 소리야. 실버 군은 오늘 처음 본 너보다는 나와 함께 있는 게 더 편할 거야.”
“아니, 그쪽도 싫어.”
갑자기 형성된 삼각관계에 제노가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미묘한 기싸움이 제법 팽팽했다.
실버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네. 제노는 장난을 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실버에게 코를 꼬집혔다.
제노의 코를 튕기듯 놓아준 그가 말했다.
“애초에 선택지가 왜 그따위야? 그냥 제노와 내가 한방을 쓸 테니 댁들끼리 자라고.”
“저기, 실버 군,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다 큰 남성과 같이 잔다는 건 좀….”
“제노 양에게 부담이지 않을까?”
딱히 부담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제노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실버가 그와 마찬가지인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우린 예전부터 같이 자던 사이라고.”
예전부터 같이 자던 사이라고.
같이 자던 사이라고.
같이 자던 사이….
그 미묘한 표현에 일순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의 시선이 실버에게 꽂혔다. 뭘 그렇게 보는 거냐며 성을 내기 위해 찡그렸던 그의 미간이 점차 펴지더니, 목 아래서부터 올라온 열기가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젠장, 그런 거 아니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선율을 깨고 실버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
윤진에게서 카드키를 챙길 때부터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식식거리던 실버가 객실의 문을 거칠게 닫았다. 문 떨어지겠다. 먼저 신발을 벗고 방 안에 발을 들인 제노가 한마디 하기 위해 그를 한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지금 건드렸다간 저거 폭발한다, 응.
“변태 자식들 같으니.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거야?”
“딱히 아무 말 하지 않았는걸.”
“눈빛이 불순했다고, 눈빛이!”
아직도 열기가 다 가라앉지 않았는지 약간 붉은 얼굴을 하곤 실버가 외쳤다.
솔직히 제노로선 그렇게까지 유난 떨 일인가 싶었지만, 실버의 반응이 재미있어 자꾸만 언급하게 되었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녀석 같으니라고.
다행히도 침대는 성인 둘을 수용하고도 넉넉하게 남을 크기였다. 이런 방을 각자 한 명씩 쓰려했다니, 윤진과 성호의 씀씀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외투를 옷걸이에 건 제노가 새하얀 시트 위로 풀썩, 드러눕는다. 두툼한 매트리스가 마치 수면처럼 출렁였다. 남이 사 주는 비싼 식사, 비싼 숙소 최고. 캐터피처럼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이불 안으로 들어간 제노가 능글맞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제 옆을 두드렸다.
“같이 누울래?”
“그만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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