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두 갈래 길
133.
“그럼 이 더듬이,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오 박사가 줄자를 가져와 님피아의 리본 모양 더듬이에 대었다. 으르릉, 인상을 찌푸린 님피아가 불길하게 목을 울리기 시작했다.
“어, 어엉…?”
짜악-!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오 박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우당탕거리며 물건이 쓰러지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라디오에서 송출되는 소리만으로 상황을 파악한 제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 박사님 말 좀 잘 들으라니까, 떨어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성질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오 박사를 응원한 제노가 모자를 고쳐 썼다.
자정을 넘긴 시간, 아무도 없는 어두운 유적지에 제노가 홀로 서 있었다. 준비해 온 손전등을 켠 제노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루카리오와 가디안이 따랐다.
001.
다가오는 안농들은 루카리오에게 맡겼다. 섀도클로 몇 번에 나가떨어진 녀석들은 상대와의 힘 차이를 깨달았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덕분에 제노는 편하게 유적 안의 퍼즐을 풀 수 있었다.
동굴탈출로프, 기술 플래시, 그리고 물의돌. 안농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답을 알고 있는 제노가 순서대로 암호를 풀고 숨겨진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온통 쓸모없는 물건들뿐이다. 혹시나 해서 와보긴 했지만, 역시나다. 혀를 찬 제노가 마지막 방 앞에 섰다.
[ CHILSAEKJO ]
이곳의 벽을 여는 방법은 전설의 포켓몬, 칠색조를 데려오는 것. 허나 주인공이라면 몰라도 제노는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심향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인주시티에서 전통 무용수들의 도움을 받아 전설의 포켓몬을 만났을까. 호수의 세 포켓몬을 포획하면서 겪은 일을 생각한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인정받다니, 주인공들은 정말 대단하네.
그리곤 리그에 도전하게 되겠지. 라이벌 관계인 두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 생각은 자연스레 실버와의 마지막 대화로 이어졌다. 눈을 질끈 감아도 아른거리는 그 붉은색을 애써 지워버린다. 다시 날카롭게 눈빛을 벼린 제노가 루카리오에게 말했다.
“부숴버려.”
저것이 숨겨진 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 열쇠가 없다면 강제로 열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루카리오의 시선에 제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루카리오의 이런 면이 정말 싫었다. 그가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 싫다면 가디안에게 부탁하겠어.”
그 말에 가디안이 조용히 루카리오를 노려본다. 그제야 루카리오가 몸을 움직였다. 두 손아귀 사이에 새카만 기운이 구의 형태로 모이며 바람이 일었다. 그대로 벽에 쏘아내자 쿠르릉, 커다란 소리와 함께 돌들이 무너져 내렸다. 일어나는 먼지와 자잘한 돌덩어리들을 가디안이 막아냈다.
제노가 빠르게 안을 살폈다. 역시나 쓸모없는 물건뿐이다. 아무래도 난천이 찾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빠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제노가 숨겨진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여기에 더 이상 볼일은 없어. 목격자가 나오기 전에 떠나자.”
002.
- … 네, 다음 속보입니다. 알프의유적에서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고 있으며, 정확히 언제부터 다시 출입이 가능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사고가 아닌 사건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003.
[ 뉴스 봤어. 유적 출입이 금지됐다는데, 당신 설마 돌덩이에 깔린 건 아니지? ] 오후 02:04
비행기 안. 싸가지없는 문자의 내용을 확인한 제노가 수신인의 이름을 살폈다. ‘실버’.
화면에 적힌 두 글자에 그가 눈을 깜빡였다. 실버의 번호는 저장한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얘가 대체 어떻게 자신의 번호를 알아냈을지 생각하던 제노는 곧 이륙한다는 승무원의 안내에 포켓기어를 종료했다.
155.
‘도라지시티 근처 유적에서 사고가 있었대요. 누나도 거기 있어요? 사고에 휘말린 건 아니죠?’
꾹꾹, 자판을 눌러 내용을 작성한 심향이 마지막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대화 기록에는 온통 자신이 남긴 문자뿐이다. 전화는 받지 않지, 문자에는 답장이 없지. 그렇게 헤어진 이후 일절 연락이 되지 않는 제노에 심향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모자 위로 제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블레이범이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 별거 아니야. 그냥 생각이 좀 복잡해서.”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어 보인 심향이 모자를 고쳐 썼다. 자, 그럼 계속해서 가볼까!
156.
챔피언로드.
희미하게 빛이 드는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명의 트레이너도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던 심향의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가 심향 옆의 블레이범을 바라보았다.
“네 나약한 마그케인이 드디어 봐줄 만할 정도가 되었군.”
“실버!”
심향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에 심향이 경계를 끌어올렸다.
“지금부터 포켓몬리그에 도전할 거냐?”
그렇게 말하며 몬스터볼을 손에 쥔다. 심향 또한 몬스터볼을 꺼내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어. 몰라볼 만큼 강해졌지.”
설마 라디오타워에서의 일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도발한 그가 볼을 던졌다. 짙푸른 손수건이 묶인 왼 손목. 안에서 나온 것은 포푸니다. 용맹한 울음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이번에야말로 널 쓰러트려 주마!”
“바라던 바야!”
157.
“… 끝났다.”
자신의 마지막 포켓몬, 망나뇽을 볼로 들여보낸 목호가 그렇게 말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앞에는 새로이 챔피언이 된 소년, 심향이 서 있었다. 목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구나. 그렇지만 분명 졌기 때문에 느끼는 분함보다 훌륭한 챔피언 탄생의 증인이 되었다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
강해졌구나, 심향, 정말 강해졌어. 목호가 작게 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한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달려왔다. 오 박사였다.
“이야, 결국 해냈구나, 심향아! 포켓몬리그 제패는 정말 대단한 것이지!”
심향과 그의 포켓몬 사이의 유대를 칭찬한 오 박사가, 그를 전당으로 이끌었다.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 젊은 세대로의 교체. 둘의 뒤를 따라온 목호가 말했다.
“이 방에 들어오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리그 챔피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포켓몬들을 기록하는 장소.
“자 심향아! 어서 너와 네 파트너들을 기록하자꾸나!”
오 박사가 심향을 재촉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몬스터볼 여섯 개를 올려두었다. 그러자 전당 등록을 축하하는 메시지와 함께, 포켓몬들과 심향의 모습이 액자에 떠올랐다. 심향이 그것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 박사와 목호 또한 각자의 추억에 잠겨있었다.
심향이 전당에 걸린 액자들을 살폈다. 그중 상상만으로 그렸던 모습을 발견한 그가 액자 하나로 다가갔다. 붉은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 그를 빤히 바라보던 심향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모험을 계속할까 해요! 앞으로도 계속, 계속 강해져서 반드시 포켓몬 마스터가 되고 말겠어요!”
눈이 부시게 빛나는 그 모습에 오 박사도 목호도 삼 년 전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시간의 흐름이란 어찌 이리도 무색하고도 찬란한지.
몬스터볼을 다시 챙기고 모자를 고쳐 쓴 심향이 말했다.
“우선 관동지방으로 향하려고요.”
“그거 좋은 생각이지! 어쩌면 내 손주와 만날 수도 있겠구나.”
쉽지만은 않을 거다, 그 녀석은 아주 강하다고? 오 박사가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심향의 눈에 투쟁심이 다시 불타올랐다. 리그를 떠나기 전, 심향이 오 박사에게 물었다.
“혹시 오 박사님의 손주가 레드란 분인가요?”
“으응? 아니, 그 아이는 손주 녀석의 친구란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레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거니?
오 박사의 질문에 심향이 성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 박사가 오른손으로 제 턱을 문지르며 침음을 흘렸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저, 레드 씨와 시합해 보고 싶어요!”
오 박사가 심향과 눈을 마주한다. 투명하고 올곧은 의지. 결국 양손을 들어 올린 그가 말했다.
“… 그래, 그렇구나. 레드라면 아마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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