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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샛길 하나

그는 어딘가 우수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제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관동을 떠나왔어요. 아직도 박사님껜 죄송해요.”

“박사님?”

“오 박사님이라고, 저를 돌봐주신 분이세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기억을 헤집던 난천이 양손을 짝, 모았다.

“혹시 오용호 박사님을 말하는 거니?”

“네. 알고 계세요?”

“그럼! 마 박사님께 말씀 많이 들었단다. 포켓몬 도감을 발명하신 분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난천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그분이 네 할아버지이신 걸까? 그 물음에 제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호자 역할을 해주셨을 뿐이지 피가 섞이진 않았어요.”

난천은 입을 다물었다. 피가 섞이지 않더라도 가족은 가족, 그럼에도 확실하게 선을 긋는 제노의 태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난천을 모른 채 제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오 박사님의 ‘진짜’ 손자는 말이죠, 정말 강해요. 언제나 당당하고 멋있어요.”

“….”

“그 친구도 말이죠, 대단한 애라서요, 라이벌 관계인 그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정말-”

제노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가, 순간 멈췄다. 난천과 마주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시선을 떨구었다. 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난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천천히 다가온 손길이 제노의 뺨에 닿았다. 그리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난천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누구나 겪는 감정인걸.”

“….”

“있지, 여기 있는 동안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내가 네 깊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채워줄 순 없는 걸까?

다정한 빛을 띤 잿빛 눈동자에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자신은 이미 갤럭시단에 협력하고 있다. 고고학자인 난천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여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심장을 찔러왔다.

… 감사합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제노가 그렇게 말했다. 거짓임을 눈치챈 난천은 그 완곡한 거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식어버린 마음이 몸마저 차갑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제노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변화를 눈치챈 그의 포켓몬들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결국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제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의 물기를 꼼꼼하게 닦고, 준비해 둔 여벌 옷으로 갈아입는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 손짓에 난천이 따라 물 밖으로 나왔다.

동굴의 입구에 선 그가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공해 없이 깨끗한 밤하늘엔 별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난천이 머뭇거리며 첫 마디를 고민하는 사이, 제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숨결이 흩어졌다.

“난천 씨는 별과 달 중에 어느 쪽이 더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갑작스러운 주제에 난천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고민한 그가 답했다.

“당연히 달 아닐까? 하늘에서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존재니까.”

“… 역시 그렇죠?”

난천을 돌아본 그가 작게 웃었다. 그리곤 말했다.

“난천 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높은 곳에 혼자 있는 건, 고독한 일이라고.”

“….”

난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가득 찬 보름달을 바라보던 난천이 제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칼이 빛을 받아 조금씩 빛났다.

“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

“….”

“사실은 말이야, 나, 챔피언 자리를 내려놓을까 하는 고민도 했었어.”

난천의 고백에 제노의 눈이 동그래진다. 한 지방의 정점에 오른 뒤 느꼈던 권태와 무기력함을 떠올린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너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어. 내가 챔피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그때 그날 창기둥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난천이 제노의 옆으로 다가갔다. 시선을 마주한 그가 미소 지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도, 숨을 쉴 때마다 피어오르는 입김도, 모두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과 만나 무언가를 낳는다’….”

“….”

“신수유적에 적힌 문구야.”

별이 있기에 밤하늘이 어두운 것인가, 밤하늘이 있기에 별이 빛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점은,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기다릴게, 네가 챔피언인 나를 만나러 올 때까지.”

그때까지 난 외롭지 않을 거야.

제노는 난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딪히고, 깨지고. 서로 다른 생명이 만난다는 건 그런 일. 상처투성이밖에 없는 길이다. 그것이 두려워 제노는 몇 번이고 제게로 뻗어지는 손을 뿌리쳤다.

이번에도 그는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사박, 사박,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어둠 속에 녹아든 제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난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느낌. 제노가 안심시키듯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외쳤다.

“역시 그건 싫어요, 전 챔피언인 난천 씨가 좋거든요!”

“어머. 내게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니?”

“한 번 이겼는데 두 번은 못 할까봐요?”

“후후, 자만하면 못써. 리그에서의 나는 그때와는 다를 거야.”

난천을 따라 제노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제 나이에 맞는 표정.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고, 제노가 다시 외쳤다.

“이제 돌아가요! 남아있는 포켓몬들이 저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난천 또한 눈밭에 발을 들였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설산에 새겨졌다.

*

그날 밤, 역시나 제노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늦은 시간에 몸을 일으킨 그가 가방을 뒤적였다. 포켓기어를 꺼내 수신 기록을 확인한다. 오래전에 받았던 문자의 내용이 화면에 떠올랐다.

[ 계속해서 제의가 들어오길래, 상록체육관 관장을 맡기로 결정했어. ] 오후 11:44

[ 여러모로 속박되는 건 질색이라 줄곧 거절했지만…. ] 오후 11:44

[ 뭐, 내가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체육관으로 오라고. 난 항상 거기 있을 테니까. ] 오후 11:45

[ 아니다. 그래도 오기 전에 연락은 해. ] 오후 11:46

[ 이번엔 네가 먼저 남긴 문자를 받고 싶으니까. ] 오후 11:46

[ 항상 기다리고 있어. ] 오후 11:51

[ 아 방ㅇ금 말은 추ㅜ소, ] 오후 11:58

[ 추;ㅣ소임 ] 오후 11:58

[ 취소. ] 오후 11:59

제노는 기어코 답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자존심 강한 그가 남길법한 말을 한참이고 바라본다. 품에 안겨있던 이브이가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리고 뺨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주었다.

깊고 오랜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

그로부터 다시 약 1년. 난천의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갤럭시단의 일 또한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이는 제노가 난천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얻어낸 정보를 제공한 덕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번에 자리를 비우는 쪽은 제노였다. 바깥까지 마중을 나온 난천이 몇 번이고 빠진 짐은 없는지 확인했다. 점점 성의 없어지는 대답을 듣던 그가 제노를 바라보았다.

“정말 가는 거구나.”

“네.”

“나도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난천이 제노를 꽈악 끌어안았다. 제노가 팔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신도유적, 그리고 석밀무대에 관한 이론이 완성될 때쯤 제노는 갑자기 신오를 떠나겠다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 너는 무슨 내가 논문 쓰는데 그런 말을 하니. 당황해하는 난천에게 그가 말했다.

- 신도유적을 조사할 때부터 하던 생각이에요. 성도로 가서 알프의유적을 직접 살펴보고 싶어요.

난천은 고민에 빠졌다. 고고학 연구로 바쁜 지금, 본인이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그 말인즉 제노가 혼자서 신오를 떠나겠다는 얘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를 심부름 보내는 보호자의 심경이 된 난천이 그를 말렸지만, 제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게 제노는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알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렴.”

“네에.”

“연구에 진척이 생기면 자료는 모두 메일로 보내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몇 번 째인지 모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던 난천의 한카리아스가 크릉, 짧게 울었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이었다.

혹시나 깨질지도 모르니 난천이 준 알은 미리 오 박사님의 연구소로 보내두었다. 가방을 고쳐 맨 제노가 한카리아스의 등에 올라탔다.

“정말 고마워요, 한카리아스를 빌려주신 일도 그렇고, 여태까지의 모든 것에요.”

“됐어. 제대로 된 감사 인사는 다음에 받을게.”

우린 다시 만날 거니까, 그렇지? 난천이 눈을 찡긋거리며 하는 말에 제노는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이윽고 한카리아스가 높게 날아올랐다. 난천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귓가에는 세찬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 동안 허공을 날던 한카리아스가 구름을 가르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 한카리아스를 쓰다듬은 제노가 등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뎠다.

“수고했어, 이제 돌아가 봐도 돼.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낮게 목을 울린 한카리아스가 다시 날아올랐다. 가방에서 지도를 꺼낸 제노가 뚫어져라 그것을 살폈다. 어느새 몬스터볼에서 튀어나온 피카츄가 이마를 맞대고 함께 지도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

“피카피!”

피카츄가 작은 손을 뻗어 곧장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제노가 그 아래 적힌 글귀를 읽어보았다. ‘검은먹시티’.

“좋아, 그럼 한번 가볼까?”

“피카!”

피카츄가 폴짝거리며 먼저 뛰어나갔다. 제노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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