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단의 쿨 큐티 진 보스님은 '몸이 바뀌는 시츄에이션' 따위 원하지 않아
안주문하신 모란이하렘도 같이나왔습니다
모란은 어제 사람들이 ‘라이트 노벨’이라고 부르는 소설을 읽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다 본방송을 챙겨보던 애니메이션의 갑작스러운 휴방 소식으로 절망하던 와중, 스쳐지나가듯 아카데미 홀 서재에서 책을 발견한 게 화근이었다. 읽으라는 듯 모란의 눈높이에 맞는 곳에 꽂혀있었던 책은 ‘아카데미에 이런 게 있어서는 안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침 할 게 없어지기도 했고 심심했던 모란은 홀린 것처럼 그 책으로 손을 뻗었다. 살펴보니, 표지는 꽤나 정상적이었다. 그림만 보면 일러스트 풍의 표지를 쓴 평범한 소설이라고 봐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책의 제목이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내가 하루아침에 학교의 인기 스타랑 ‘몸이 바뀌는 시츄에이션’을 겪고 보니, 이거 완전 초럭키잖아?!~
‘와… 이상한 건 둘째치고, 이 길이의 제목을 일러스트랑 같이 표지에 넣었다는 게 기적인데….’
학교에 이런 책이 있어도 되나? 나도 오타쿠지만, 우연히 보게 된다면 뭐지? 싶을 수도… 모란은 어떤 내용이길래 말도 안 되는 제목이 붙어있는지 궁금해 책을 대강 읽어보았다. 내용은 라이트 노벨의 전개로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존재감 없는 주인공이 학교 최고 인기인이랑 영혼이 바뀌어 하렘(가만히 있어도 성별을 불문하고 주변 사람들이 주인공(나)과 사귀고 싶어한다는 뜻이다.)을 차려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였다.
‘이러면 몸이 바뀐 다른 캐릭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안 나와있네. 그 이야기도 읽고 싶은데….’
하긴 그 시점이면 라이트 노벨로 쓸 만한 내용은 아니겠지. 모란은 책을 덮었다. 그의 감상은 ‘킬링타임용으로는 좋다’였다. 별 감흥을 주는 책은 아니었다. 라이트 노벨이니 당연한가. 근데 아카데미에 왜 이런 책이…? 모란은 의문스러웠지만 그냥 넘어갔다. 라이트 노벨 읽기가 취미인 학생이 있나 보지 뭐.
그러나 다음 날, 모란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걸 후회하게 된다….
*
“이젠 헷갈리지 않겠지?”
늘 함께 모여 보충 공부를 하거나 도와주는 교실, 여섯 명만 있는 공간에 난데없이 종이 한 장이 날아다녔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수학 공식, 언어학 지문, 수업 자료가 아니라……
모란 -> 비파
비파 -> 멜로코
멜로코 -> 모란
추명 -> 오르티가
오르티가 -> 피나
피나 -> 추명
“…적고 보니 한결 편하네!”
“아니, 정리한다고 이 상황이 납득이 되겠냐?!”
“으, 멜리… 나도 아니까 소리지르지 마… 나 평소에 크게 말 안 한다고….”
“뭐가 그렇게 어색한데? 그러면 너도 구부정하게 서지 마. 비파 언니가 평소에 얼마나 바른 자세인데…!”
“모란, 멜리, 둘 다 그만해.”
“아, 방금 말한 거 취소. 어색하다. 나 저런 나긋한 목소리 내본 적 없는데.”
보기 드물게 셋의 언성이 높아지는 동안, 상황이 배로 어색했는지 다른 한쪽에서는 비자발적 묵언수행을 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그룹과 조용한 그룹으로 나누어 집단 실험을 한다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화목하던 교실은 순식간에 침묵만이 흐르는 낯선 교실로 바뀌어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영혼이 바뀌었다.
여섯 명은 눈을 뜨자마자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불행하게도 운명의 장난인지 그날따라 각자 스케줄이 있어 방과 후에만 모일 수 있었고… 자세히 말하자면 하루종일 이야기해야 하는 아수라장을 거쳐 지금이 되었다. 꿈인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건지 모두는 그러니까, 이게 뭔데, 말하자면… 같은 말을 하다가 멍을 때리다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현실을 부정하다가를 반복했다.
소란이 가라앉고 나서 모란… 아니, 그러니까 지금은 멜로코가 다른 친구들 쪽으로 몸을 돌려 너흰 어땠냐고 물었다. 뭐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셋은 겨우 입을 열었다.
“소인, 오르티가 나리… 아니, 소인은 오늘 수학 수업이 있었는데, 소인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라길래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보건실로 도망쳤소이다.”
“하아…. 난 하루종일 언어학 수업 듣느라 죽는 줄 알았다. 다른 애들이 어디 안 좋냐고 물어보더라. 자세가 흐트러져서….”
“난 누가 뭐 물어보면 대답만 했어. 나처럼 말하다가 다른 친구가 닌자 말투 안 쓰네? 라고 물어봐서 아예 입을 닫고 있었어.”
“이쪽도 가관이네. 그래, 어제 읽은 그 라이트 노벨? 인가 하는 뭔가 때문에 이렇게 된 거 같다고?”
“응. 일어났더니 비파 언니 방에…. 그래서 수업 시작 전에 홀에 갔더니 책이 없었어. 분명 읽고 제자리에 돌려놨는데….”
“말도 안 돼. 다른 덴 찾아봤어?”
“내 눈앞에 바로 있던 것만 기억나서, 같은 책장에서 그 라인을 다 찾아봤는데 없었어.”
모란은 절망하며 고개를 숙였다. 납득하기 싫지만, 우리는 진짜로 몸이 바뀌어버렸다. 역시 그 책 때문일까? 얘들아, 미안해….
*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라이트 노벨? 이라는 게 다 그런 내용이야?”
“윽, 추명 얼굴로 물어보니까 진짜 어색하네…. 그렇진 않은데….”
오타쿠를 향한(2D 콘텐츠 한정으로) 일반인의 가혹한 질문에 모란은 어떻게 이걸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피나가 하렘? 그런 단어를 알긴 할까? 어쩌다 안다 해도 자세한 뜻까지는 모를 게 분명했다. 사람 하나에 여럿이 꼬여서 내가 더 얠 좋아한다고 싸우는 상황 같은 걸 알아서 뭐하는데….
“소인이 생각하건대, 이런 경우엔 주인공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 한 행동을 따라하면 될 것 같소. 그러면 내일쯤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소만….”
“그게, 문제가 있어.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책의 주인공은 원래 몸으로 안 돌아갔어.”
“…사실이오?”
“응. 문장도 생각나. ‘쿨 큐티의 삶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데 내가 왜 돌아가야 해?’라고….”
“쿨 큐티? 지가 뭐 페어리 타입이라도 된대? 아, 목소리 너무 낮아. 어색해, 잠시만….”
“티가. 진정해. 주인공이랑 몸이 바뀐 사람이 학교의 ‘쿨 큐티 인기 스타’여서…. 미안, 들으면서도 뭔 소린지 모르겠지? 아무튼 별명이 그랬어.”
오타쿠의 언어란, ‘청순한 인상의 미인’이라고 말하면 될 걸 굳이 ‘청순파’나 ‘청순계’라고 하는 것이다. ‘쿨 큐티’도 시크하면서 귀여운 매력을 전부 갖춘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생각해보니 라이트 노벨이 아니라 인터넷 소설 같기도? 어찌되었든 좋은 단어 선택은 아니다. 설명하기 어려워지잖아…. 오타쿠를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복잡해진 마음에 모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 그의 앞으로 비파가 다가왔다.
“모란아. 그럼 주인공이 어떻게 그 사람이랑 몸이 바뀌었는지도 기억해?”
“기억해. 자기 전에 ‘나도 쿨 큐티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다음날에….”
“존재감이 없는 설정이라고 했나?”
“응. 솔직히 난 그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아….”
모란은 아무 사람한테나 쉽게 이입할 정도로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쿨 큐티 인기 스타가 되길 바라는 존재감 없는 주인공’의 심리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 이입이 되지도 않았다.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인 적은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자신이 겪은 건 아니지만, 그 자리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그는 스타 대작전을 위한 사람을 모으며 알았다.
“역시 책을 한번 더 봐야 답이 나올 것 같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안 보여서… 아니면 그 사이에 누가 빌려갔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럼 물어보러 가야겠다.”
역시 홀 서재에 한번 더 가보는 게 답이겠지… 제목을 대고 대출 기록을 물어보면… 모란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좀더 해보자. 우연히 책을 읽었고, 다음날 단서가 있을까 싶어 서재를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찾아봤다. 어제 같은 위치에서 내 눈에 닿았던 곳까지는 다 뒤져봤다고…. 잠깐, 내 눈? 지금은… 내 눈이 아니잖아?
“아! 책장을 잘못 뒤져뫘어!”
모두가 한순간에 모란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착각했어. 어제 내 눈높이에 맞는 곳에 있던 것만 생각해서, 지금 내가 비파 언니의 몸에 있다는 걸 까먹었어!”
모란은 서재 갔다 올게! 라는 말만 남기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니까… 고개 숙여서 다시 찾아본다면… 모란은 익숙한 책장에서 한 칸씩 밑으로 내려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역시 어제의 그 책이 있었다. 모란은 그것을 집어들었다. 어제는 대강 봤으니 자세히 본다면 뭔가 다른 게…
‘안 나오네. 일단 빌려가기라도 할까.’
추명을 빼면 ‘라이트 노벨’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 친구들 사이에 보여주려니 모란은 아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제대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스타단 모두를 위해서라도.
*
다섯 명한테 라이트 노벨 읽기를 시킬 수는 없어 모란은 동영상 사이트의 줄거리 요약 영상처럼 열심히 책의 내용을 설명했다. 오타쿠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일반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는 그를 보며 오르티가의 몸에 들어간 추명만이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쓴 사람은 존재만으로 모두가 좋아하는 주인공을 만들고 싶었단 거네?”
“으, 응. 멜리는 역시 의도 파악이 빨라.”
“그런 사람이 어딨어?”
“그렇긴 한데, 비현실적이니 라이트 노벨이 아닐까…?”
“환상도 정도껏이지.”
모란은 태클 걸지 않았다. 멜로코의 말에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다. 존재만으로 모두가 좋아하다니, 그런 사람이 어딨어. 그나저나 내 얼굴로 저런 말 하는 걸 보자니 진짜 어색하다….
“실마리가 될 만한 걸 못 찾았어. 어떡하지?”
“모란아. 괜찮아. 조급해할 것 없어.”
“언니…. 고마워.”
걱정해주는 게 고마운 거랑 별개로 멜로코 얼굴에 사근사근한 말투라니…. 여전히 어색하다. 답이 나오지 않아 말이 빙빙 도는 상황에 모두가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 추명의 얼굴을 한 피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아이디어라고 하긴 뭐하지만 뭔가 떠올랐어.”
“편하게 말해도 돼.”
“아까 비파랑 말하다 네가 주인공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 게 떠올라서… 말이 안 되긴 하는데 라이트 노벨? 의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확실히 그쪽은 생각 못했네.”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겼다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지금만큼은 알아줄 필요가 있었다. 서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저주가 풀리고 행복해졌습니다~ 라는 건 흔하다 못해 널린 클리셰이다. 나도 그걸 이용해야 할까. 그러나 모란은 ‘널 이해해!’라고 말한다고 기적같이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모란 나리, 이건 어떻소? 이해하기 위해 반대로 모란 나리가 ‘쿨 큐티’가 되어보는 것이오. 소인과 다른 동지들이 ‘쿨 큐티’로 만들어주겠소!”
“에?”
그게 뭔데….
“아~ 띄워주는 거 자신 없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되어가는 거야…?
“티가. 그러지 않아도….”
모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안한데 혹시 이거 상황극이야? 라는 말이 차올랐으나 모두는 어떤 선택을 한 듯 비장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된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난 비파 언니의 몸인데다가, 다들 제 상태도 아니라 인지부조화 오고… 무엇보다 이런 방법, 많이 부끄럽잖아-!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멜로코의 얼굴을 한 비파가 선뜻 다가와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언니… 용기를 냈구나.
“모란아, 난 사실 처음 널 알게 되었을 때부터 네가 좋았어. 얼핏 보면 시크해보여도 사실 여린 면도 있고…. 지킴받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지켜주고 싶었거든. 일할 때 집중하는 모습은 멋있지만 이브이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을 때는 정말 귀여우니까. 난… 모란이랑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어.”
“아, 응, 고마워, 언니….”
고백할 때의 ‘좋아해’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디그다가 되어 구멍파기를 하고 싶다. 그것보다 이거 라이트 노벨 인기인 체험이 아니라 절체절명! ~생존을 위한 즉석 합동 고백쇼!~ 아니야? 다섯 명이 진지한 말을 하는 걸 듣자니 모란은 스쳐지나가듯 본 연애 프로그램 클립에서 그의 최종 선택은? 이라는 자막과 함께 여러 명에게 동시에 고백받은 출연자를 비춰주던 게 떠올랐다.
아냐, 이건 인물의 감정 이해를 위한 ‘인기인 체험’이다. …근데 인기인이 이런 말을 듣나? 인싸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모란이 폴리곤Z처럼 버벅거리는 와중 오르티가의 얼굴을 한 추명이 다음으로 나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오르티가의 요술봉을 쥐고 있었다. 오타쿠라고 그런 것까지 고증할 필요는 없는데.
“소인은 모란 나리와 분야는 다르지만, 소인이 오타쿠라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사람이라 아직까지도 감사하고 있소. 모란 나리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것 같소만, 소인은 모란 나리야말로 소인을 포함한 모두를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고, 고마워. 나도 오타쿠니까, 응….”
한 사람이 말을 끝내면 다음 사람이 얼굴을 내미는 게 인기인이라기보단 ‘고백할 거면 줄 서서 번호표 뽑으세요.’의 현실판 느낌이다. …이것도 나름 인기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나? 아무튼, 다음 번호표를 뽑은 사람은 추명의 얼굴을 한 피나인 것 같다.
“모두에게 미움받고 학생회장 자리에서도 물러났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너였어. 그때 난 날 받아들여줄 곳은 다신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덕에 스타단에 들어가고 나서야 진짜로 함께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아. 고마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했으면… 좋겠어.”
“아, 아냐. 나야말로 고맙지.”
세 번쯤 들으니까 해탈할 것 같다. 다들 불확실한 가능성인데도 이렇게까지나 나를 위해 열심히 해주다니…. 모란은 ‘존재만으로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라는 건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존재만으로’라는 단어를 제외한다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지금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피나의 얼굴을 한 오르티가도 마찬가지겠지.
“…아, 진짜. 난, 스타단이고 스타 모빌이고 처음엔 그런 거 하게 될 줄 하나도 몰랐는데, 다 떠나서… 전엔 괴로웠는데 함께하는 동안 즐거웠어. 물론 지금도. 그러니까, 고……마워. 와, 내가 살겠다고 이런 말까지 다 하네. 아무튼,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그러니까… 나도 모두와 같은 생각이라고.”
“충분히 알겠어, 고마워.”
이쯤 되니까 조금 덜 부끄럽다. 면역력이 생긴다는 게 이런 건가? 그나저나 …다들 왜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 진지하지? 단순히 분위기를 타서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진심 같잖아….’
존재만으로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처럼 되고 싶은 사람. 몸을 바꿔서라도 닿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자신일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모란은 반대로 평범한 주인공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어떻게 생각해야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라고 할까…. 까지 생각이 닿았는데 자신의 얼굴을 한 멜로코가 마지막으로 걸어왔다. 나는 나에게 고백한다…?
“난 네가 좋아.”
“어?”
“고마워. 스타단 하자고 말해줘서.”
“나, 나도….”
“앞으로도 함께하자.”
“그럴게….”
멜로코의 말은 단순했다. 애니메이션에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주인공과 이루어지는데….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는 건 그가 자기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라고 모란은 믿었다.
절체절명! ~생존을 위한 즉석 합동 고백쇼!~가 끝났다. 무언가 깨달았길 바라는 눈으로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모란은 어째서인지 그 시선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야 내일 우리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몸은 바뀌었을지언정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아니지만 ‘우리’고 그걸로 우리는 불안할지언정 흔들리지 않는다.
‘아…. 알겠다.’
모두의 마음을 듣고 나서야 무언가 보이는 것 같았다. 모란은 책을 찾을 때처럼 밑으로 손을 뻗었다.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답을 천천히 건져 올린다. 어쩌면 주인공이 ‘쿨 큐티’처럼 되고 싶어했던 건…
‘내가 나로 있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인 거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이라도 ’나‘로 만들고 싶어했던 게 아니었을까?’
존재감이 없다는 건 곧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런 상태가 익숙해지다 보면 ‘나’조차도 점점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모란은 비슷한 사람들과 ‘나’를 잃지 않고자 스타단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조차도 알고 있었을 당연한 사실을 모란은 지금에서야 정확한 언어로 깨닫는다. 너희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거야…. 몸이 바뀌었어도 내가 나임을, 우리가 우리임을 믿기에 우리는 견고하다.
문득 이 책의 주인공이 이야기 밖의 누군가를 시험하기 위해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내린 답은 네게 도움이 되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모란은 눈을 감았다.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피로가 풀려서인지는 몰라도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근데 나 여기서 자면 안되는데.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한 것 같다고,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내일이면 분명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고, 방에 들어가서 자야 하는데….
*
“모란 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모란은 눈을 떴다. 편안하다. 근데 왜 주변은 차갑고 딱딱하지?
“헉!”
나, 앉은 채로 잠든 거야?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분명 모두가 앉아있지는 않았는데? 모란은 어제의 일이 생각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잡히는 게 없어, 그렇다는 건.’
“나, 돌아왔어!”
“모, 모란 양? 괜찮나요?”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모란은 아차, 했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에 친구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클라벨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왜? 모란은 그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낙제를 면하려고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잠은 기숙사에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 모란 양? 왜 울고 있나요?”
“아니에요! 교장 선생님! 아무것도 아니니까 더 혼내주세요!”
“네?”
다행이다…. 모란은 눈물을 훔쳤다. 그는 아직 비몽사몽한 친구들과 교장 선생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모든 게 원래대로였지만, 책이 놓여있었던 자리에 책이 없었다. 모란은 그 사실에 놀라기는커녕 안심했다. 해결되어서 떠나간 거라 믿기로 했다.
모란은 혹시 꿈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뺨을 가볍게 때렸다. 오래 책상에 대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따뜻했다.
그제야 모란은 내가 나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BGM / 목소리가 있을 곳 - DAZ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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