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P

Dis-dis-so,

영어모르면서 영제짓기 아티스트

“안녕하세요.”

“아, 예. 그간 잘 지내셨나요, 모란 양.”

“아…. 네.”

인사. 예. 네. 짧은 말이 오고가는 동안에도 모란은 어색함을 떨칠 수 없어 괜히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가빈, 그러니까… 아카데미의 전대 교장 선생님이자 현재는 오르티가의 집사이다.

모란을 먼저 오르티가의 집으로 초대한 건 놀랍게도 본인이 아닌 눈앞의 이 사람. 주말에는 공부를 자신이 봐줘야 하는데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으니 여유가 있으시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라는 말로 시작한 부탁은 모란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살면서 한번 가볼까 말까 한 대저택으로 이끌게 했다. 굳이 자신을 초대한 이유는 아마 일면식이 있어서겠지, 라고 막연하게 추측했지만 그는 어쨌든 흔쾌히 응했다. 애니가 보고 싶었지만, 오르티가의 언어학 점수는 겨우 낙제를 면했을 뿐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진 보스로서 도와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아, 어색해. 벌써 집 가고 싶다.’

오르티가의 집은 생각했던 것만큼 커다랬고 복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길었다.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사람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마치 오타쿠나 열심히 할 법한 미형 캐릭터가 나오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중 부자 캐릭터가 사는 집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보통 그런 상황에선 주인공이 감탄하면서 여기저기 둘러보는 게 클리셰였으나 모란은 제발 방으로 들여보내 주든 빨리 나가게 해 주든 하나만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란은 괜히 뻘쭘해져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한발 앞서 걷고 있는 가빈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지만 아마 웃고 있진 않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 역시 그의 앞에서 편하게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모란이 가빈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좋은 감정이냐 하면 그 역시 아니다. 한마디로, 지금 이 분위기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게 될 정도로.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 그리고 그가 오르티가의 집사로 재취직했다는 걸 모란은 친구들과의 감격적인 재회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은 모란에게 어떤 쪽으로든 꽤나 무겁게 다가왔다. 누군가에게 고개 숙인 인사를 받던 사람이 이젠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다니. 막연한 추측이긴 하지만 설령 진짜 그렇다 한들 안타깝다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학교 돌아가는 일에 조금만 더 신경써줬으면 될 일이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녜요. 뭐, 딱히 할 일도 없고… 저도 친구가 아슬아슬한 성적대인 건 마음에 걸리니까요.”

모란은 피나나 비파 언니를 대신 부를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추명과 멜로코만으로도 버겁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어딘가 1대1 전담 마크라는 말과 비슷한 생각이 들어 우스웠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모두가 나서서 도와주는 게 맞았다. 누구든 유급하는 모습은 자신이 두고 볼 수 없었다.

“여기가 도련님 방입니다.”

“아, 네. 안내해주셔서 감사해요.”

“…….”

“……?”

“먼저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 교, 그게, 집사님? 은 안 돌아가시나요?”

“제 방은 지금 한창 정리 중이어서요. 잠시 동안은 도련님 방에서 일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예. 그럼 뭐….”

그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딱히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도 있을 텐데 왜 하필 티가 방이람. 역시 아닌 척해도 자신의 존재가 신경쓰이는 게 분명하다고 모란은 확신했다. 공부 봐주는 척 잡담하거나 놀 것도 아닌데 감시 아닌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냥 셋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색했다. 차라리 가빈이랑 단둘이 있는 편이 덜 어색할 거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좀 시설이 불편해도 아지트로 가겠다고 할 걸 그랬나.

모란은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간이 책상 위에 깔끔하게 놓여진 서류 더미와 노트북이었다. 저쪽이 가빈이 앉아있던 자리인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망연자실하게 의자에 누워있듯 앉은 오르티가가 보였다. 그 앞에는 자신이 앉을 자리, 그리고 넓은 책상… 책상 위가 조금 어지럽다는 것만 빼면 아지트나 교실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왔어?”

“아, 안녕. 뭔가 많이 안 풀리나 보네….”

“응. 보다시피.”

모란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책상 위 놓인 것들을 살펴보았다. 작대기만 수없이 그어진 언어학 문제집, 가빈이 정리해서 건네준 걸로 보이는 자료, 풀다가 짜증났는지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흔적 등 상한 흔적조차 없는 깔끔한 책상과는 달리 완벽한 개판이었다. 낙제 위험군에도 들고 싶지 않아서 열심인 건 알았지만 주말에까지 공부라니.

“굳이 부르고 싶진 않았는데… 너도 알겠지만 지금 상황이 이래서.”

“그건 괜찮아. 어디에서 막히는 건지 좀 봐도 될까?”

“볼 필요 없어. 전부 다니까.”

“아…….”

모란은 가방을 옆에 내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STC 회의 때도 이렇게 진지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오르티가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학업에 진지한 만큼 풀리질 않으니 짜증날 만도 하지. 문제집에 죽죽 그어진 흔적을 보며 모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나?

“가장 안 풀린다 싶은 건 있어?”

“여기.”

모란은 그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주인공이 자신의 애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대목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지문이라 빠르게 훑어보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애인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어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주인공 혼자서 그를 보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이러다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해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구구절절한 마음을 참 구구절절하게 써놨다. 주관적인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나서서 객관적으로 문제를 봐야 할 차례였다.

“이 부분이 왜?”

“며칠간 잠도 못 잘 정도로 보고 싶어하면서 연락은 왜 안 해?”

“그건… 중요한 시기니까 민폐가 된다고 생각해서겠지. 여기에도 나와있잖아? ‘시험을 망치게 될까봐 망설였다.’라고.”

“그럼 자기가 아무것도 안해놓고서는 왜 불안해하는데?”

“그건 별개 아닐까? 시험을 잘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랑 안 본 사이에 마음이 식었으면 어쩌지 싶은 마음은 같이 들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그것보다, 서로 사랑한다며 마음이 식니 뭐니 그런 생각은 왜 하는 거야?”

“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까?”

모란은 대답하고 나서 아차,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대답이람. 이런 모호하고 자신의 마음에서나 비롯된 두루뭉술한 답 따위 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예상대로 그는 그게 뭔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자기중심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생판 모르는, 활자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의 심리 따위에 이입하라고 하기는 역시 어려운 걸까.

“그으러니까, 서로 사랑해도 당연히 계속 함께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그건 어쨌든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겠지.”

“그런 마음까지 들 정도로 상대를 못 믿는다고?”

“…믿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

세상 모든 일이 믿음과 신뢰 속에서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란은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가빈 쪽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학생들을 믿어서 학교가 평화롭다고 생각한 걸까, 아님 교사진을 믿어서 잘못되더라도 바로잡힐 거라 생각한 걸까. 어느 쪽이든 교장으로서는 책임감 있는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믿음이 모든 걸 가져다 주는 건 아니기에 우리는 때론 의심한다. 의심이 관계를 틀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해야 하기에 남에게 조금 잘못되고 있는 것 같으면 쉽게 의심해보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뭐,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은 이해했어.”

“아… 응. 그 정도라도 이해했으면 어느 정도는 성공이네.”

오르티가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역시 내가 너무 어렵게 설명했나. 뒤떨어지는 과목은 없었지만 아는 것과 가르치는 건 별개거니와 언어학은 자신의 주 분야도 아니었다. 말로 길게 풀어서 설명하자니 말하는 자신도 어려웠다. 수학은 그냥 공식이나 풀이 방법만 이렇다고 이해시키면 그 후는 어떻게든 되는데.

“그러니까 어쨌든 계속 사귈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없어서 불안했고, 불안한 마음에 떠나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했는데 와중에 공부에 방해는 되기 싫어서 연락은 안 했다는 거잖아?”

“응.”

“그래서 결국 자기만 힘들어하고?”

“그으… 렇지?”

“진짜 바보 같네.”

“그렇네….”

그는 어떻게든 알겠다는 듯 말했지만 모란은 그가 이해했을지언정 공감은 못했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대강 맞장구쳐주려고 대답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문 속 생판 모르는 남은 바보 같았다. 결과적으로는 가까운 사람을 믿지 못했다는 부분부터 자신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무턱대고 믿는대도 다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믿어보고 싶잖아. 대책이 없더라도…

“이런 거, 역시 조금 어렵지?”

“응. 근데 이상하게 이해되는 게 생겼어.”

“뭐?”

“전에 피나가 공부를 가르쳐줬을 때, 문제에서 말하는 거랑 자기 생각이랑 다를 수도 있다는 걸 한참 설명해줬거든. 그때는 그걸 이해를 못했는데…”

“음, 그럴 수도 있지.”

“이젠 좀 알 거 같아. 피나도 못 알아듣는 내가 이해 안 되지만 그거랑 상관없이 낙제는 하지 말았으면 했던 거겠지?”

“그런 거겠지. 원래 자기가 이해 못하는 부분도 다 그러려니 하면서 사는 거니까.”

“뭐야? 갑자기 그런 말은, 누가 보면 벌써 졸업한 줄 알겠어.”

“아하하, 너무 해탈한 듯이 말했나….”

모란 역시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할 부류란 게 있었다. 이를테면 저기 앉아서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다 가끔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 같은…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혔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감정이 많이 개입되어 왜곡되어 보일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해해줘야 하는 건 아니지.’

자신과 가빈은 이미 서로의 할 일을 다 했다. 각자의 입장 속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남은 감정을 정리하는 것 역시도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씁쓸해할 것도 없다. 거기까지는 객관이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주관이다.

“티가.”

“왜?”

“좀 뜬금없는 소리긴 한데… 조무래기들 잘 챙겨주고 있지?”

“당연하지.”

“그래. 그거면 됐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뭐야? 갑자기.”

“앞으로도 주변 사람들 잘 챙겨줘.”

“진짜 뭐야? 아무튼 알았어.”

지금이 괜찮다고 너무 믿어 의심치 않은 나머지 무책임해지지 말고…. 그런 말은 아직 이르거니와 1년하고도 수개월 동안 팀 루크바의 보스로서 팀을 잘 이끌었던 사람에게 할 말도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도 지금 의심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믿음이라는 마음을 뒤집으면 바로 의심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실컷 떠들었더니 좀 배고파졌어.”

“그래? 밖에 나가서 차랑 과자라도 내오라고 할게.”

“고마워. 아, 나는 차보다는 탄산이 좋아.”

“아, 그랬지. 참. 알았어.”

오르티가는 그렇게 대답하며 방 밖으로 향했다. 가빈은 여전히 노트북과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전히 본인이 할 일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여러 일이 있었고 시간이 흘렀대도 사람이란 건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하다 모란은 문득 자신이 남의 집에서 배고프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건 예의가 아니었지, 문득 푸름의 집에서 간식이라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던 자신의 모습이 다시 생각났다.

모란은 다시금 아까 풀던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어째서인지 아까 가르쳐줄 때보다 훨씬 더 설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역시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굳이 또 말하겠다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이기적이었다. 문제 속의 사람은 지문을 끝까지 읽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충분히 믿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신도 사랑하는 친구들을 충분히 믿지 못해 불안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모란은 문제집을 내려놓고 앞을 바라보았다. 오르티가가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라는 표정으로 음료와 과자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스타모빌을 만들 때의 그가 생각나 모란은 픽 하고 웃었다.

그래… 아무리 여러 일이 있었고 시간이 흘렀대도 사람이란 건 어쩔 수가 없나.

BGM / 아훔의 비트 - 하뉴 마이고(vo. V 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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