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한 갈래 길
실버가 손에 든 몬스터볼을 강하게 쥐었다. 실버의 포켓몬 구성을 전부 아는 건 아니었지만, 물리공격력과 방어력이 높은 엘리게이가 나온다면 세비퍼를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제노가 물었다.
“교체할 거야?”
“…….”
실버가 두 포켓몬을 바라보았다. 실버의 시선을 느낀 주뱃이 아직 할 수 있다는 듯 더욱 힘차게 날아올랐다. 고오스도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실버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난 내 포켓몬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운 적 없어.”
“건방진 꼬맹이, 그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지! 세비퍼, 김밥말이로 주뱃을 묶어!”
“주뱃, 피해! 고오스, 핥기로 세비퍼를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거야!”
비슷한 레벨끼리의 싸움이란 이렇게나 격정적이구나. 제노가 한가로운 감상을 내리는 사이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직 마비의 효과가 남아있는 주뱃이 휘청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세비퍼의 김밥말이가 먹혀들어 갔다.
주뱃의 몸이 세비퍼에게 칭칭 감겼다. 주뱃은 더 이상 날 수 없다. 하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건 세비퍼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한 실버가 고오스에게 세비퍼를 향한 공격 명령을 내린 그때, 날카로운 것이 고오스에게 명중했다.
“고오스!”
“… 세비퍼의 꼬리야.”
고오스가 다가오는 틈을 노려 세비퍼가 깜짝베기를 사용했다. 꼬리로 공격을 할 수 있는 이상, 고오스가 세비퍼에게 다가가는 것은 무리였다. 사실상 2대1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독케일, 벌레의 야단법석!”
“고오스, 피해!”
날개를 이용한 음파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는 고오스. 공중에선 독케일이, 땅으로 내려가면 세비퍼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 슬슬 결판이 나겠다고 판단한 제노가 제 몬스터볼 하나를 손에서 굴리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주뱃이 낮게 울며 기합을 넣더니, 자신의 날개 힘으로 세비퍼의 김밥말이를 펼치고 있었다. 당황한 세비퍼는 조이는 힘을 더욱 주고, 둘의 힘 싸움이 벌어졌다.
강한 포켓몬이 되고 싶어. 강해져서 실버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집념을 가지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주뱃의 몸이 일순 빛나기 시작했다. 그 마음에 응하듯 고오스의 몸에서도 빛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로켓단이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저게 갑자기?!”
“지, 진화하고 있다옹!”
“이 타이밍에?!”
번쩍. 빛이 그치자 보이는 것은 골뱃과 고우스트의 모습이었다. 세비퍼는 눈이 부신 빛에 당황했는지 골뱃을 묶고 있던 김밥말이가 조금 느슨해졌다. 지금이 기회였다.
“실버, 지시를 내려!”
“주뱃, 아, 아니, 골뱃! 근거리에서 초음파! 고우스트도 섀도볼로 독케일을 날려버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리. 바로 코앞에서 초음파를 맞은 세비퍼는 그대로 쓰러졌다. 고우스트의 섀도볼도 명중하여, 독케일은 로켓단의 발치까지 날아갔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삼십육계 줄행랑이다옹!”
“잠시만, 어, 어어…!!”
쓰러진 포켓몬들을 챙겨 급하게 자신들이 타고 온 열기구로 달아나는 로켓단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자동으로 열기구에 탑승하게 되었다. 실버가 뒤를 바라보자 어느새 제노의 곁에 가디안이 서 있었다.
“가디안, 날려버려.”
고개를 끄덕인 가디안의 눈이 섬뜩하게 빛난다. 로켓단이 우왕좌왕하는 순간, 사이코키네시스로 가디안이 열기구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강한 염동력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바람이 일고, 멀리서 ‘불쌍한 내 인생~!’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냥 보내는 거야?”
“아차.”
어쩐지 쟤들은 하늘로 날려 보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제노가 머리를 긁적이자 실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때, 너 경찰 부르는 거 싫어하잖아.”
“시끄러워.”
툴툴거리는 실버의 곁으로 골뱃과 고우스트가 다가왔다. 여기저기 상처 입은 몸을 하고 칭찬받고 싶은지 실버의 앞에서 맴돌았다. 포켓몬들이 널 많이 좋아하나봐. 제노가 놀리듯 하는 말에, 실버는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오묘한 표정을 했다.
그런 실버를 두고 제노는 포푸니가 갇힌 우리로 다가갔다. 조금 멍한 표정으로 일련의 전투를 바라보던 포푸니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녕.”
“….”
“난 제노야. 널 위해 싸워준 트레이너는 실버라고 해.”
포푸니가 낮게 목을 울렸다. 붉은 두 눈엔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있었다. 호기심, 경계심, 그리고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제노는 후드를 젖히고 모자를 벗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모자챙으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가 걷히자,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밝은색의 눈동자가 태양 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포푸니를 위해 일부러 얼굴을 드러낸 제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포푸니는 물론이고, 실버 또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같이 나가자. 주인에게 데려다줄게.”
제노의 눈짓에 가디안이 철창을 일그러트렸다. 포푸니가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제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과 실버를 번갈아 보며 잠시 고민하던 포푸니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위에 올렸다. 철창에 잔뜩 부딪힌 손톱의 끝이 조금 깨져있었다.
“돌아가자.”
“아, 어, 그래야지.”
*
제노는 마을에 돌아가는 길에 다시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빛이 어쩐지 아쉬워, 실버는 저도 모르게 그 눈동자의 흔적을 좇았다. 산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입구에는 두 사람에게 단단지를 맡긴 남자가 불안한 듯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가, 둘의 모습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다가왔다.
“저기! … 괜찮아?”
“로켓단은 쫓아냈어. 자, 네 단단지. 돌려줄게.”
실버가 몬스터볼을 던지자, 남자가 양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아… 고마워.”
“그리고 포푸니도 찾아왔는데.”
실버의 시선이 닿자, 포푸니가 제노의 다리 뒤로 황급히 숨었다. 눈만 빼꼼 내밀고 자신을 살피는 행태에, 실버가 혀를 찼다.
“포푸니가 널 좋아하나 봐.”
“뭐? 싫어하면 싫어했지, 어딜 봐서 좋아한다는 거야.”
“자, 포푸니. 집으로 돌아가자.”
주인의 말에 이상하게도 포푸니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주인의 재촉에 마지못해 쭈뼛쭈뼛 발걸음을 옮기던 포푸니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실버의 옷자락을 잡았다. 실버는 당황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거봐, 널 좋아한다니까.”
“….”
“저… 괜찮다면 포푸니를 데려갈래?”
남자가 갑작스럽게 제안했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응. 어차피 난 트레이너도 아니고… 포푸니가 너희랑 같이 여행 하고 싶은가 봐. 뭐니 뭐니 해도 포켓몬은 소중하게 대해주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아니겠어?”
포푸니가 실버를 올려다보며 작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눈과 잠시 마주하던 실버는, 결국 포푸니의 몬스터볼을 받아들었다. 일말의 저항 없이 몬스터볼에 들어간 포푸니는 그렇게 실버와 함께하게 되었다.
“포푸니가 마음에 들었어?”
“흥. 강해 보이는 녀석이라 데려가는 것뿐이야.”
되지도 않는 변명을 들으며 작게 웃던 제노가 걷다 말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 그러고 보니 우리 뭔갈 잊고 있지 않아?”
“뭐?”
제노가 기억을 되짚는 사이, 포켓몬 센터 앞에서부터 심향이 손을 흔들며 두 사람에게로 달려왔다.
아, 맞다, 심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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