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한 갈래 길
“누나 정말 너무해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미안, 정말 미안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무지 걱정했다고요! 전화하고 싶어도 연락처도 모르지….”
마구 따지고 드는 심향의 기세에 못 이겨 제노는 결국 연락처를 교환했다. 뭔가 계략에 넘어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심향은 두 사람이 없는 사이 전설의 포켓몬과 마주쳤다던가, 수호라는 청년과 배틀을 했다던가 하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벤트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심향의 얘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체육관에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도전은 한 분만 가능하실 것 같아요.”
아, 이런.
제노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둘 다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한 제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해도 괜찮지?”
“누나가요?”
“그래. 내 시합을 보면서 관장의 성향도 파악할 수 있고….”
그리고 너희 둘이 누가 먼저 배지를 딸지 싸우는 걸 보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해.
뒷말은 삼켰다. 둘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대충 납득한 모양새였다.
“누나의 경기,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번에도 한 방에 쓰러트려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는 거 아냐?”
… 실버의 시비는 무시하기로 했다, 응.
*
“우오오오-!”
중간에 폭포를 멈추는 과정이 있었지만, 어찌저찌 배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럼 승부해 볼까!”
관장 사도는 먼저 성원숭을 꺼냈다. 격투 단일 타입 포켓몬. 제노는 이브이를 꺼냈다. 몬스터볼에서 튀어나온 이브이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격투 타입을 상대로 노말 타입 이브이라니… 누나는 무슨 생각인 걸까?”
“….”
이미 한번 제노의 경기를 본 실버는 심향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관장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경기를 풀어갈 심산인 게 분명했다. 그 순수한 강함에 경탄하게 되면서도, 닿지 못할 지붕의 아차모를 향해 짖는 윈디가 된 기분이라 이상하게 속이 꼬였다.
뭐, 제노는 사실 이브이와의 친밀도를 배틀을 통해 크게 높이려는 속셈이지만 말이다. 꿈보다 해몽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성원숭, 태권당수!”
배틀이 시작되자마자 성원숭이 빠른 속도로 이브이에게 달려들었다. 이브이는 밀리는듯싶으면서도, 성원숭의 주먹을 한 끗 차이로 매끄럽게 피했다. 상대를 쉽게 보내버리려 했던 성원숭은 전혀 맞지 않는 공격에 점점 약이 오르는 듯했다. 허나 공격은 갈수록 정확도나 파워가 떨어졌다.
“이상하군, 성원숭의 공격이 점점 약해지고 있어.”
당연하지. 이브이에게는 항상 배틀을 시작하자마자 초롱초롱눈동자를 사용하게 지시했으니까.
“이브이.”
제노의 부름에 울음소리로 답한 이브이가, 제게로 달려드는 성원숭을 향해 땅을 긁어 모래를 뿌렸다. 그 탓에 성원숭의 주먹은 이브이 옆의 바닥을 내리쳤다.
“잔꾀를 부리는군. 공격은 하지 않는 건가!”
“전광석화.”
이브이가 발에 힘을 주고 바닥을 밀어내며 튀어 올랐다. 이브이의 공격이 정확히 성원숭의 옆구리에 박혀 들었다. 조금 밀려난 성원숭이 부딪힌 옆구리를 잡으며 일어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역시, 아무리 정확한 공격이어도 진화를 한 포켓몬과 하지 않은 포켓몬의 차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브이, 돌아와.”
성원숭의 주먹을 피하고, 전광석화로 공격하고, 다시 피하고. 그렇게 성원숭의 체력을 빼놓음과 동시에 약만 잔뜩 올린 이브이가 몬스터볼로 돌아갔다. 그동안 한 번의 공격도 명중시키지 못한 사도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내 성원숭도 느리진 않지만, 너의 이브이는 정말 잽싸군. 하지만 피하기만 해선 승부를 낼 수 없다!”
나도 알아. 그래서 교체하잖아. 다음으로 나온 것은 피카츄였다. 슬슬 성원숭은 보낼 때가 됐다.
“성원숭, 마구할퀴기!”
“피카츄.”
“피카!”
성원숭의 첫 번째, 두 번째 공격을 모두 피한 피카츄가 세 번째로 발톱을 휘두르는 순간에, 공격을 위해 성원숭이 아주 잠깐 큰 동작을 취하는 빈틈을 타 맹렬한 속도로 전기를 두르고 부딪혔다. 바닥을 길게 끌며 나자빠진 성원숭이 순식간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럴 수가, 내 성원숭이 이렇게 간단히 쓰러지다니…!”
이럴 거면 대체 왜 처음 포켓몬으로 이브이를 내놓았냐는 눈빛이었으나, 사실대로 답해봤자 기분만 나빠질 것이기에 제노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쉽게 당하지 않을 거다! 가라, 강챙이!”
배에 소용돌이 모양 무늬를 가진 파란 올챙이 포켓몬이 튀어나왔다. 강챙이는 물/격투 타입. 피카츄의 상성이 우위로, 전기 공격을 잘못했다간 강챙이가 한방에 나가떨어질지도 몰랐다. 곤란함에 제노의 미간이 설핏 좁아 들었다.
“강챙이, 최면술!”
“피카츄, 피해!”
뛰어올라 졸음을 유도하는 파동을 피한 피카츄가 조금 떨어진 옆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러나 피카츄의 행동을 예상한 듯, 강챙이의 주먹이 곧바로 날아들었다.
“강챙이, 파도타기!”
“피카츄.”
“피카!”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파도의 흐름을 피카츄가 높게 뛰어 피했다. 그런 피카츄의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 강챙이의 누르기였다. 그것을 아이언테일로 맞받아친 피카츄가 다시 바닥에 발을 딛었다.
파도타기로 인한 물살이 제노의 발치에까지 튀었다. 굽이 높고 가죽이 두꺼운 신발을 신어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양말이 젖어 찝찝했을 테니까. 제노가 한가로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한번 파도타기로 피카츄의 자세를 흐트러트린 강챙이가 물살을 가르고 피카츄에게 곧게 달려들었다.
“받아라, 힘껏펀치!”
“위험해, 파도타기는 힘껏펀치를 위한 시간 벌이용이었어!”
심향의 말에 실버가 피카츄에게 집중했다. 과연 저 피카츄가 이번 공격에 쓰러질 것인가, 아닐 것인가. 피카츄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았다. 듣기만 해도 몸을 움찔하게 만드는 타격음이 체육관 안을 울렸다.
“피카….”
“아니…?!”
“이럴 수가, 피카츄가…!”
하지만 놀랍게도 힘껏펀치를 정면으로 맞은 피카츄는 멀쩡히 두 발로 서있었다. 도발하듯 삐딱한 미소를 입에 걸친 채였다. 반면 강챙이는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접촉하는 순간 피카츄가 뿜어낸 약한 전격으로 몸이 마비된 것이었다.
“안돼, 강챙이, 피해!”
사도의 외침이 강챙이에게 닿았을 때는 안타깝게도, 기가 잔뜩 모인 피카츄의 꼬리가 휘둘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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