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 갈래 길
[ 얼굴도 못 보고 떠난다니 무척 아쉽네. ] 오후 02:43
[ 지금쯤이면 성도지방에 도착했겠구나. 부탁했던 자료는 네 컴퓨터로 보내놓았어. ] 오후 02:44
[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게. 유적과 관련해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 오후 02:44
[ 물론 배틀도 언제나 환영이야. ^^ ] 오후 02:45
통화권 이탈 상태였던 포켓기어는 신호가 잡히자마자 울려댔다. 화면 속 메시지를 모두 읽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마지막에 붙은 눈웃음 기호를 확인한 이의 눈꼬리도 따라 살짝 휘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말이다. 답장을 보내는 대신 포켓기어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가 돌산 아래에 보이는, 조용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
“제노님, 맡겨주신 포켓몬들이 모두 회복되었어요.”
검은먹시티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 포켓몬 센터에 들리는 것이었다. 바위를 깎아 만든 길을 지나느라 피로해졌을 피카츄가 금세 기운을 차리곤 간호순의 품에서 뛰쳐나왔다. 달려드는 녀석을 안아 들고 마구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지 높은 소리로 울어댔다. 팔랑이는 귀의 한쪽은 다른 피카츄들과는 다르게 커팅이 된 것처럼 삐죽삐죽했다. 피츄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특징이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눈이 잔뜩 쌓여있던 유적과 달리 마을은 따뜻했다. 부피가 큰 겨울용 옷들을 몽땅 세탁기에 집어넣은 그가, 품에 피카츄를 안은 채로 노트북을 펼쳐 난천이 보낸 자료를 한번 훑어보았다. 잠시 기다리자 경쾌한 세탁 종료음이 울렸다.
제노는 옷들을 곧장 건조기에 집어넣었다. 옷감이 좀 상하겠지만,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옷이기도 하고. 또 이곳에 길게 머무를 계획은 없었다.
완전히 건조되기까지 약 두 시간. 센터에서 준 방의 열쇠고리를 오른손 검지에 걸고 빙글빙글 돌리던 그는 곧장 검은먹체육관으로 향했다. 여기 관장이 드래곤 타입 전문가던가?
“피카츄, 맡겨도 될까?”
“피카피!”
늠름하게 가슴을 앞으로 내미는 폼이, 자신만 믿으라는 뜻 같았다. 그런 피카츄를 끌어안고 잔뜩 부비부비를 해준 다음, 한껏 정전기가 오른 몸으로 체육관에 들어섰다.
성도에서의 첫 번째 체육관 시합이었다.
*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피카피….”
작은 마을이라 그런 걸까, 오후에 도착했는데도 얼마 기다리지 않아 관장과의 배틀이 가능했다. 시합이 끝나고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온 제노가 시간을 확인해 보자 오후 5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아직 환한 태양빛 아래, 드래곤의 얼굴 모양을 한 검은색의 라이징배지를 비춰보던 제노는 그것을 대충 주머니 안에 쑤셔 넣고 대신 지도를 꺼내 펼쳤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고, 그냥 바로 출발하자.”
“피!”
“어디 보자… 44번 도로를 따라 쭉 서쪽으로 가면 인주 시티에 도착할 수 있어.”
“피카!”
인주시티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도라지시티다. 피카츄는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지도 위 인주시티가 그려진 부분을 작은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아니면, 그냥 숲을 가로질러서 도라지시티로 가는 건-”
“피카.”
“… 그냥 도로를 따라서 가는 게 좋겠지. 응.”
“피카피.”
진지한 얼굴로 제 의견을 피력한 피카츄에 제노는 한숨을 삼켰다. 하긴, 길 잃는 능력으로 애들을 괴롭히는 건 검은먹시티까지 오는 과정에서 실컷 했다. 피카츄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알겠다고. 작게 투덜거린 제노가 가방을 고쳐 맸다.
“그럼 가볼까, 인주시티로!”
“피-카!”
하여간 저 녀석은 배틀을 너무 좋아한다니까. 경쾌한 발걸음으로 종종 달려 나가는 피카츄의 엉덩이(씰룩거리는 모양새가 무척 귀엽다.)를 바라보던 제노는 따라 속력을 올렸다. 신오지방에선 한동안 유적이며, 연구에 지루했을 테니, 어울려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인주시티로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중간에 거친 황토마을에서 명물이라는 분노의 호두과자도 사 먹고, 덤벼드는 트레이너들의 삥도 뜯었다. 호두과자가 참 맛있었지. 단 걸 좋아하는 피카츄가 동의하듯 피, 피, 소리를 내었다.
하늘이 막 파랗게 밝아오기 시작한 이른 아침. 야영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한 제노가 피카츄와 함께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마을 근처에 다 와 가는지, 풀숲으로 둘러싸여 있던 흙길이 점점 정돈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점점 인기척이 느껴지고, 사람이 세운 인위적인 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주시티에 도착했다.
깎아내린 바위 표면들로 둘러싸여 삭막한 느낌을 주었던 검은먹시티와 달리, 인주시티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감탄이 나오게 만들었다. 일본풍으로 지어진 집들은 물론이고 높게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탑까지. 마을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아예 전통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말 근사하다. 그치, 피카츄?”
“피카!”
“여기선 조금 느긋하게 구경하는 시간을 가질까?”
“피카피!”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폴짝거리는 피카츄와 함께 홀린 듯이 탑으로 향했다. 신성한 기운을 내뿜는 그 탑을 한껏 올려다보던 제노는 문득 이곳에선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게 되었다. 바람에 가까운 그 마음을 안고서 탑의 입구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다구리- 정확히는 집단 폭행의 현장이었다.
… 지금 나랑 장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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