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한 갈래 길
이런 미친, 대체 어떤 놈이 방안에 이따위로 옷을 널브려놓은 거야.
바로 나다. 제노는 어제의 자신을 원망하며 침대에서 기어 나와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샤워를 마치고 평소와 같은 민소매에 조거팬츠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포켓기어로 메시지를 보낸다. ‘저번에 주신 알이 부화했어요.’ 수신인은 난천이었다.
포켓기어를 침대에 던져놓고 거울 앞에서 완전히 말린 머리를 땋고 있으니, 알림이 울렸다. 그것도 여러 번. 입에 물고 있던 머리끈으로 마무리를 한 제노가 다시 침대로 다가가 포켓기어를 확인했다.
[ 지금 ] 오전 07:15
[ 통화 가능하니 ] 오전 07:15
[ 영상통화 ] 오전 07:15
[ ? ] 오전 07:16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말의 순서가 엉망인 난천의 메시지를 확인한 제노가 딥상어동이 든 몬스터볼만 챙겨 방을 나섰다.
센터 내에 비치된 공용 컴퓨터로 난천에게 영상통화를 건다. 난천은 곧장 연락을 받았다. 화면이 난천의 얼굴로 가득 찼다. 아침부터 미인을 보니 기분이 참 좋네. 제노의 품에 안겨있던 딥상어동도 마찬가지로 신이 난 듯 화면 속 난천을 향해 팔을 뻗었다.
딥상어동의 모습을 확인한 난천이 웃으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있던 한카리아스가 화면에 드러났다.
- 후후, 건강해 보이는구나. 혹시 날 알아보는 걸까?
딥상어동이 대답이라도 하듯 캬오 캬오 울어댔다. 사실 딥상어동이 난천을 알아보는지 확신할 순 없었다. 워낙 사람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애라 그냥 반가워하는 걸 수도 있었으니.
딥상어동과 인사를 나누던 난천이 문득 말했다.
- 이러니까 왠지 아이를 다른 지방에 유학 보낸 엄마가 된 느낌이네.
“하하, 그런가요?”
갑자기 엄마가 둘이나 생긴 딥상어동이 고개(라고는 하지만 거의 몸 전체)를 갸웃거렸다. 녀석의 머리 위 지느러미를 슥슥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까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 그럼 애기 엄마, 앞으로도 딥상어동을 잘 부탁할게.
“네에. 걱정 마세요, 여보.”
농담을 자연스럽게 받아치자 난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 이렇게 사적인 일로 먼저 연락하다니 놀랐어.
“난천 씨가 주신 알이니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자주 연락해.
“바쁘신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 네 연락은 언제든 기다려지는걸.
난천은 가끔 보면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내뱉었다. 제노가 머쓱하게 볼을 긁자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 네가 키운 딥상어동이 어떻게 자랄지 궁금해.
“어… 한바이트로 진화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
- 후후, 그래. 그리고 한카리아스가 되면 배틀하는 거야. 누구의 한카리아스가 더 강한지 겨뤄보는 거지.
난천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위해서 알을 준 건 아니겠지? 제노는 대답 대신 애매한 웃음을 흘리다가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아 참, 난천 씨, 사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요.”
- 응? 뭔데?
“찾아주셨으면 하는 물건이 하나 있어서요.”
아마 신오지방에 있을 것 같은데요, 그-
통화를 마친 제노가 새카만 모니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정말 그가 찾아줄지는 모르겠다. 신오지방에 있을 거라는 것도 추측에 불과하고… 제노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딥상어동을 쓰다듬고 있을 때, 갑자기 딥상어동이 제노의 뒤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황급히 뒤돌아보자, 그곳엔 실버가 서 있었다.
“….”
“어… 좋은 아침?”
실버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막 씻고 나온 것인지 그의 붉은 머리가 물기를 머금고 더욱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제노가 괜히 제 목덜미를 한번 쓸었다가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
“그렇구나….”
“….”
“… 점심으로 만두 먹지 않을래?”
“갑자기?”
“응. 어제저녁부터 먹고 싶었거든.”
짧게 한숨을 내쉰 실버가 말했다. 당신은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어. 제노는 그저 속없는 사람처럼 헤실거릴 뿐이었다. 실버가 흘긋, 그에게 시선을 두자 목에 걸린 은빛의 물방울 모양 펜던트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
만둣가게. 다시 모자를 눌러쓴 제노가 탕츠 위에 올린 커다란 만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걸 그냥 한입에 집어넣었다가는 세계 최초로 포켓몬이 아닌 사람이 입에서 불대문자를 뿜는 광경을 초래할 수 있었다. 얇은 피를 젓가락으로 살짝 찢자, 안에서 육즙이 흘러나왔다.
후, 후, 열심히 불어 열심히 식힌 뒤,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다 대어 마신다. 만족감이 입안에 퍼진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흑초에 적신 생강채를 만두 위에 올린 뒤, 곧장 입에 집어넣었다. 아뜨뜨, 숨을 뱉어내며 급하게 입안을 식히는 제노를 본 실버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그가 제노가 한 것처럼 제 몫의 만두를 찢는다. 오목한 숟가락에 차오른 육즙을 본 그의 눈이 기대로 가득 찼다. 후후 불어 육즙을 먼저 맛보고, 만두를 한입 먹는다. 뜨거움에 그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 마히다.”
“그히.”
제노가 뿌듯한 얼굴로 실버 쪽으로 만두가 든 찜기와 생강채를 밀어주었다. 다음번엔 생강채를 식초에 살짝 적셔서 같이 먹어봐. 실버는 순순히 제노의 말을 따랐다. 찜기 안이 순식간에 비기 시작했다.
야무지게 후식으로 푸딩까지 챙겨 먹으며 제노가 말했다.
“이향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해 봤어?”
“…?”
“검은먹체육관 관장 말이야.”
“아.”
그제야 제노의 말을 이해한 실버가 진지한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실버 몫의 푸딩 그릇은 이미 시럽 약간만을 남기고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설마 이 자식은 내가 진짜 만두나 먹자고 불렀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물론 맞긴 하지만.
“이향의 첫 포켓몬은 갸라도스. 네 코일이라면 상성에서 우위야. 고우스트도 괜찮을 것 같네. 공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잖아.”
“공중전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아, 필드가 물로 채워져 있거든.”
그 말에 실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물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장크로다일도 좋겠지만 갸라도스의 특성은 위협. 용의춤 같은 걸 쓸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문제는 또 있었다. 두 번째 포켓몬인 신뇽의 특성은 탈피. 대부분의 공격이 반감되는 드래곤 타입을 상대하기 위해 마비나 독을 건다고 해도, 탈피로 벗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제노가 중얼거렸다.
“고민되네….”
“내 시합인데 왜 당신이 고민하는 거야.”
“그래도 내 제자라는 애가 한 번에 배지를 못 따면 좀 그렇잖아?”
간만에 나온 제자라는 말에 실버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얘, 첫날 이후로 나를 스승이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자존심 세우기는….
실버가 알았다면 길길이 날뛸 생각을 하며 제노가 푸딩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실버가 물었다.
“… 그러는 당신은 검은먹체육관 관장과 어떻게 싸웠는데?”
“그냥 피카츄로 밀어버렸는데.”
“….”
상대가 물/비행 포켓몬을 꺼내는데 전기 타입을 어떻게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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