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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84화

샛길 둘

“레드, 이쪽은 내 동생.”

마치 자기 자랑을 하듯이 으쓱이며 그린이 말했다. 그에 레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린이 어린 나이에도 잘생긴 티가 나는 이목구비로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는다면, 레드는 뭔가, 뭔가… 감자 같았다. 그것도 막 흙을 털어낸 동글동글 알감자.

제노가 레드를 관찰하듯이, 레드 또한 제노를 바라보았다. 빤한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제노는 반사적으로 그린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에 제노를 제 쪽으로 조금 당긴 그린이 말했다.

“제노를 거기에 데려갈 거야.”

“….”

거기가 어딘데. 의문으로 가득 찬 제노와 달리 레드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곧장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린이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으므로 제노 또한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잘 다져진 흙길을 걸었다.

향한 곳은 근처의 동산이었다. 낮아서 오르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정해진 길을 벗어나 높게 솟아오른 갈대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꽤 힘들었다. 그린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야가 트이고 꼭대기에 있는 한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린은 달리기 시작했다. 제노도 따라 열심히 발을 굴려야만 했다.

“어때, 굉장하지? 우리 아지트야.”

마른 나뭇잎 몇몇이 매달린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 제노를 데리고 선 그린이 당당하게 말했다. 제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올라오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레드가 주섬주섬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뭘 하나 봤더니, 안에서 돗자리를 꺼내고 있었다. 제법 자연스러운 손길을 보니 아지트라고 칭할 만큼 자주 오는 모양이긴 한 것 같았다.

돗자리가 날아가지 않게 모서리에 가방과 신발을 벗어놓고 올라가자, 벌써 자리를 잡은 그린이 물었다.

“레드, 오늘은 너희 어머니가 뭐 싸주셨어?”

“….”

레드는 말 대신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것으로 답했다. 달칵, 잘 정렬된 밀폐용기의 뚜껑을 연다. 고기볶음, 맛살, 계란 등 여러 재료로 속이 채워진 유부초밥이 그 맛깔스러운 자태를 드러냈다. 넉넉한 양을 보니 레드의 어머니께선 이미 두 사람이 어떻게 노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그린이 사 온 간식들을 가방에서 꺼내자 아이들이 보기엔 제법 호화스러운 한 상이 되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아지트에서 이른 점심을 먹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간식 통을 비우고 있을 때였다.

품에 안겨있던 피츄가 무언갈 보채듯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제노의 손에는 레드의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신 오랭열매가 쥐어져 있었다. 피츄의 눈이 작고 동그란 푸른빛의 열매를 보며 빛났다.

“먹고 싶어?”

“피!”

제노가 들고 있던 오랭열매를 피츄에게 건넨다. 피츄가 양손으로 그것을 야무지게 잡아 한입 크게 물었다. 오독오독, 딱딱한 것이 씹히는 소리가 나며 피츄의 작은 볼이 빵빵해졌다. 귀여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레드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 오랭열매를 들고 몸을 옴싹달싹하는 게, 아무래도 피츄에게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마침 피츄가 열매 하나를 완전히 먹어 치운 것을 확인한 제노가 물었다.

“한번 줘볼래?”

“….”

레드는 여전히 말보다는 행동이었다.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조심스럽게 피츄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남은 즙을 낼롱낼롱 핥고 있던 피츄가 다가오는 기척에 귀를 쫑긋거리며 놀라더니, 레드의 손에 들린 열매를 확인하곤 제노를 올려다보았다.

“레드가 너한테 주는 거래.”

그 말에 피츄가 레드와 오랭열매를 번갈아 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직 낯선 사람은 싫은지 짧은 팔만 힘껏 뻗은 피츄가 열매를 잡자마자 다시 제노의 품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뒤이어 오독오독,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린이 투덜거렸다.

“뭐야. 내가 주는 건 쳐다도 안 보면서.”

제노가 그린을 피하고 싶어 하는 만큼 피츄도 따라 그를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레드가 뿌듯하게 승자의 미소를 짓자 그린이 대뜸 선포했다.

“레드, 너 앞으로 피츄한테 뭐 줄 때 나한테 허락받아.”

“… 왜?”

와, 말했다. 레드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오늘의 첫마디를 내뱉었다. 그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피츄는 제노의 포켓몬이고, 제노는 내 동생이니까, 내 허락을 받아야지.”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허나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 때문일까, 레드는 말도 안 되는 그 논리에 설득당한 것 같았다. … 그냥 바보인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문득 목이 말라진 제노가 마실 것을 찾았다. 허나 그린이 사 온 음료수는 두 병.

애초에 사람이 셋인데 두 개만 사는 건 무슨 의미야. 레드와 그린이 각각 하나씩 나눠 가진 페트병을 바라보던 제노가 그린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저기… 나도 좀 마셔도 될까.”

제노의 시선이 음료수에 향한 것을 확인한 그린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라고 부르면서 부탁하면 줄게.”

“….”

서열 정리가 아직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제노는 덩치 큰 개체에게 1위의 자리를 빼앗긴 야생 포켓몬이 된 기분을 느꼈다.

뭐, 그건 야생의 얘기고, 이쪽은 집주인의 손주이니 시키는대로 재깍재깍 따르는 것이 맞겠지만…. 제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린을 노려보았다. 저 미소가 너무 얄미워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 빨리 불러봐.”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 괜찮아. 안 마실래.”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제노의 거절에 그린이 황당하단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레드에게서 무언가 쑥 내밀어졌다. 보온병에 담아온 것인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보리차가 잔 대신 뚜껑에 따라져 있었다.

“….”

“고, 고마워.”

이거 나 마시라고 주는 거 맞지…? 왠지 기대로 가득 찬 레드의 눈빛을 마주 보던 제노가 그것을 받으려 손을 뻗었을 때, 불쑥 음료수병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노가 반사적으로 페트병을 잡았다. 대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이번에도 그린이 말했다.

“제노는 나랑 나눠 먹으면 되거든. 제노한테 뭐 줄 때도 나한테 허락받아. 내 동생이니까.”

또 그 소리.

“….”

너는 뭐라고 반박 좀 해라.

이쯤 되면 자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둘이서 싸우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묘한 기싸움은 아지트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계속되었다. 다시 내밀어진 손에 제노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잡으려던 찰나 레드가 말했다.

“나도 잡을래.”

“싫은데.”

“… 어떻게 해야 허락해 주는데?”

곧장 돌아온 그린의 거절에 레드가 물었다. 그린이 고민하고 있을 때 레드가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

“….”

지금 저걸 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적당한 두께에 마치 깎은 것처럼 매끈한 표면을 가진 나뭇가지는 아이의 눈에 제법 탐이 나는 존재였다.

레드가 내민 조건을 승낙한 그린이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마치 검처럼 휘두르며 앞장서서 갈대밭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손이 내밀어졌다. 이번엔 레드였다. 그제야 제노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두 사람이 손을 잡겠다는 게 아니라 나랑 잡고 싶단 의미였구나.

그러니까 내가 나뭇가지랑 교환됐다고….

마치 반려 포켓몬의 목줄을 자신이 잡겠다고 다투는 꼴이다. 체념한 제노가 레드의 손을 잡았다. 같은 나이일 텐데도 그의 손이 자신보다 조금 더 크고 따뜻했다. 어린 포켓몬들은 발 크기를 보고 얼마나 클지 가늠한다던데, 레드는 아마 쑥쑥 자랄 모양인가 보다.

이윽고 다시 샛길이 아닌,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등산로로 돌아왔다. 그쯤에서 멈춰선 그린이 대뜸 돌아보며 말했다.

“야, 이거 돌려줄 테니까 이제 내가 잡고 갈래.”

“….”

레드가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거절의 의미 같았다. 그린이 계속해서 고집을 피웠다.

“이제 필요 없어, 네가 도로 가져가.”

“….”

“어차피 제노는 나랑 같은 집에 들어가잖아.”

“… 무르기 없음.”

레드가 내뱉은 짧은 말로 인해 그린의 화에 불씨가 붙은 것 같았다. 제노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말다툼이 점점 심해졌다.

“뭐? 그런 게 어딨냐?”

“너도 전에 그랬잖아.”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레드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자, 제노의 얼굴이 불편함에 절로 찡그려졌다. 손을 빼내고 싶어 움직여보아도 레드의 손아귀 힘이 제법 강했다. 그린은 시끄럽지, 레드는 너무 말이 없지, 그냥 연구소로 가고 싶어졌다.

제노가 정신적 피로에 점점 지쳐가던 순간, 분위기를 깬 것은 의외의 존재였다.

“피… 피츄웃!”

제노의 품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피츄가 양 볼에서 작은 전격을 일으켰다. 따다닥, 정전기가 일고 세 사람이 각자 비명을 지르며 멀리 떨어졌다.

“….”

“….”

“… 쳇.”

짧게 혀를 찬 그린이 다시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손이 자유로워진 제노가 피츄를 고쳐 안으며 그 뒤를 따랐고, 레드가 가장 마지막에 자리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사이좋게 일렬로 서 집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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