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상희]충동의 심해
때때로 그런 사람이 있다. 현실을 직면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미치는 사람이. 유상희는 적어도 스스로가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신은 직면할 수 없어서 미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현실을 직면했기에 미친 것이다.
**
크게 뜬 눈으로 유상희는 제 입을 맞춘 남자를 보았다.
차가운 물속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자니 기묘한 안온이 찾아온다. 유상희는 그 사실을 깨닫자 입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삼키며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는 아직 쉴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해야 할 사명이 있었으므로. 이곳에서는 쉴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
제 뺨을 감싼 손을 붙잡으며 유상희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물속이라 보글거리는 공기 거품만이 올라올 뿐이다. 올라가야하는데…….
물속은 어두워서, 남자의 얼굴 윤곽만이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누구인지, 어떤 표정인지 제대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유상희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손을 보며 몸에 도리어 힘을 풀고야 말았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절박해서…….
……아. 원우구나, 도원우. 그런데 왜 저렇게 절박하지.
유상희는 생각한다.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이 메운다. 자신을 붙잡은 남자는 무어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물속에서 오로지 제게 입맞춰온 온기만이 따스했다. 유상희는 끝없이 가라앉는 와중에 도원우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마주 자신의 손을 잡으며, 어떻게든 자신을 끌어올리려고 애쓰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을 심해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도원우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상희는 이상한 기분이 된다.
깊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놓지를 못해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가여워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어떤 때에는 또다시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미쳐버린 여자의 곁에 계속 머무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항상 단순하고 바보 같은 짓만 골라했기에 알기 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유상희는 도원우의 행동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도…….
심해는 끝없이 유상희를 끌어들인다. 이곳만이 그가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속삭이면서. 그에 이끌리듯. 유상희는 가물한 정신을 놓으며 생각했다.
그래, 정말 이상해…….
**
퍼뜩 일어난 유상희는 제 머리를 쓸었다.
또 꿈이었다. 땀에 가득 젖어 축축한 것보다도, 그 내용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그는 한 구석을 노려본다. 유상훈과 찍은 사진을 놓아뒀던 곳이다. 이제 수십, 수백 번을 덧그려서, 눈을 감아도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생생하게 보였다. 가족들이 보다 못해 그 사진을 치워두었지만, 유상희는 알 수 있었다.
사진이 어떤 모습인지, 얼마나 큰지. 유상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고, 자신은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괜찮아.”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이 밤중에 유상훈을 찾아 뛰쳐나간다면 가족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는 선한 일이었다. 이불이 손 안에서 처참하게 구겨진다. “괜찮아…….” 유상희는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지금 공략할 수 있는 이계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미쳐서 뛰쳐나간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가족들이다. 몸이 덜덜 떨렸다.
“괜찮…….”
……두렵다.
유상희는 이제 두려웠다. 이 어두운 곳 한 가운데에 유상훈이 서있을 것 같다. 피투성이가 된 꼴로 바보 같이. 그렇게, 서서……. 어렴풋한 인영이 보이자 유상희는 비명을 질렀다. 상훈아! 안 돼, 가지마! 이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상희는 손을 뻗었다. 제 동생은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다. 그것이 조급했다.
“위험하다고 했잖니, 지금 어딜 가려는 거야!”
아니, 아니다. 지금 잡으면 유상훈은 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켜줘야 한다. 은광고로 가게 둘 수는 없다. 그곳은 너무 위험했다. 가면 갈수록 그곳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는 것을, 제정신이 아닌 자신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곳에 유상훈을 보낼 수 없다. 유상희는 악을 썼다. 어두움이 자신을 지나쳐 동생을 삼키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이리저리 흩날리며 무엇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바닥에 떨어지고, 인영은 간 데 없다. 흉포한 바람이 위로하듯 뺨을 사뭇 다정히 스치고 지나가고, 유상희는 손을 뻗은 채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두리번거리다가 인기척이 가까워오자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아…….”
벌컥 문이 열린다. 딸깍, 하고 스위치를 켜는 소리. 시린 빛이 순식간에 들어오자, 유상희는 숨을 몰아쉬다가 고인 눈물을 뚝 떨어트렸다. 울 것 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평온한 밤이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한 악몽이다.
**
왜 너는 항상 내 꿈속에서 나한테 입을 맞출까?
모르겠어. 왜 그렇게 간절하게 나를 보는지. 너는 그냥 내 곁을 떠나버리면 전부 편해질 텐데.
**
“원우야. 혹시, 정신계 스킬이 있니?”
뜬금없는 물음에 도원우는 총동아리회에서 제출한 문서를 읽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유상희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 목소리에 풍랑이 이는 것은 오히려 그였다.
학생회실은 언제나 밝다. 커튼을 쳐두지 않았을 뿐더러 햇빛이 잘 드는 위치였다. 넓은 학생회실, 도원우의 자리 가까운 곳은 나뭇잎을 넘어 창문을 통과하며 푸르른 빛이 들어있다. 유상희는 그 햇빛 가운데에 서서 웃고 있었다.
“……아니.”
도원우는 영문도 모른 채로 충실하게 답한다.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이상하다 여겨지긴 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유상희는 피로해보였고, 옛날과 같은 단정함은 찾아볼 수 없이 부스스 했지만, 평소와는 또 다른 기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저 아스라한 웃는 모습 그대로 햇빛에 부스러져 산화할 것만 같은 위태로움.
“그렇구나. 하긴, 원우 네가 그런 일은 하지 않겠지. 꿈에 계속해서 간섭하는 건 무리한 일이기도 하고…….”
“……상희야,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너한테 정신계 스킬을 썼어? 그럼 나한테 이렇게 물어볼 것이 아니라,”
“그런 건 아니야.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앉아줄래? …하지만 정신계 스킬이 아니라면 그런 꿈을 계속 꿀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문서를 내려놓고 일어선 그는 불편한 심정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늘진 낯을 한 것을 보고도 기분이 좋아진다면 이상할 것이다. 요즘 들어 계속 피곤해보이더라니, 꿈 탓이었나. 적어도 밤만큼은 꿈 없이 깊고 평온한 잠을 자기를 원했는데. 유상희의 얼굴을 보며 도원우는 툭 덧붙였다.
“애초에 내가……너한테 그런 스킬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알고 있어.”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다.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문서를 다시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도원우는 그렇게 생각한다.
“……원우야.”
“응?”
“입 맞춰볼래?”
새하얗게 웃고 있는 유상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도원우는 말문을 잃는다. 오늘따라 학생회실에서 계속 앉아있더라니, 이런 용건으로? 스킬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다. 의심받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상희 답지 않다. 도원우는 떨리는 손을 들어 문서를 집어 들며 최대한 태연하게 내뱉었다. 시선을 피한 채다.
“……안 돼.”
“왜?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아니야, 상희야. 아니야……. 너 답지 않아. 나는……네가 힘든 걸 이용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난 하고 싶어서 말하는 거야, 원우야.”
유상희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꿈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다잡던 온기를 기억한다. 그게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 다소 이상한 일이지만……. 왜 그게 떠오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이 복수는 기약이 없는 복수다. 유상희의 정신은 기우지도 못할 정도로 너저분하게 찢어지고 해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추억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분노는 꺼지지 않아서…….
왜 저렇게 슬픈 얼굴인걸까. 왜 그럴까.
유상희는 여전히 도원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알기 쉬웠던 소년인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착각으로 여겨졌다.
“그래. 하고 싶어서 말하는 거야. 해보면…… 알 것 같아졌어.”
인정한다. 자신은 아직 제정신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제만 해도 유상훈의 환영을 보았고, 오늘도 그 환영이 떠올라 계속 넋을 놓고 있었으므로. 몇날 며칠 잠을 자지 못해 피로해진 정신 위로 상실이 덧씌워졌으니, 제정신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이상하게 추운 것 같다. 아니, 추웠다. 유상희는 자고 싶었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 비정상적인 인력에 제 몸을 맡기고…… 그저, 그저 가라앉고 싶었다. 자신은 아직도 꿈속의 심해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다소 비이성적이었고, 확연하게도 충동적이었으며, 자신조차도 놀랄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평상시의 유상희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상희야…….”
도원우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다.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생겼구나.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 속에 담긴 어둑한 감정. 항상 보았던 얼굴인데, 가까이에서 보니 이렇게 낯설다. 유상희는 그것을 들여다보며 도원우의 뺨을 감쌌다.
아, 바보 같아.
입술에 닿은 온기가 따스했다. 자신의 팔을 절박하게 잡는 손이 꿈과 같았다. 슬픔으로 범벅이 된 눈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을 담고 일렁이며 자신을 응시한다. 차가운 물속에서 유일한 온기다. 가라앉으려고 하는 자신을 잡아주는 유일한 것.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부르더라? 유상희는 생각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상희는, 아직도 심해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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