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호웅녀]Hidden piece
적호는 퇴로를 따라 도망치기만 하는 이는 되지 못했다.
4주차 주제 : 골목
목표 글자수 : 8191/5000
적호는 어둠 속에서 어딘가로 달리고 있었다. 빠른 발걸음 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분명 자신의 발걸음 소리다. 그 소리가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어디로 가고 있지? 나는 왜 달리고 있지? 적호는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계속 해서 목적지 없이 내달렸다. 어두운 골목으로, 골목 안으로……. 기약 없이 달리는 와중에 뒤쪽에서 들려오는 쫓는 이의 발걸음 소리는 표표했다. 전속으로 달리고 있음에도 사뿐한 걸음 소리는 멀어지지 않고 여전히 가깝기만 하여서. 그는 달리고, 달리고, 계속해서 어두운 저 안쪽으로…….
마침내 마주하는 것은 막다른 길이다.
적호는 깨달았다. 자신의 몰골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과 다를 바가 없으며, 지금에 와서는 벗어날 길조차 없이 완전히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는 것을. 이제는 정말……무슨 수를 두더라도 외통수였다. 다른 이가 앞에 있었다면 사냥꾼을 찢어서라도 이곳을 벗어날 터였으나 그는 그리할 수 없었다. 왜냐고? 왜였더라? ……아, 그래. 지금 그의 앞에……평생을 잊지 못할 곱고 사랑스러운 이가 눈앞에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적호의 망설임을 읽기라도 한 듯 앞길이 가로막힌 적호의 앞에 나타난 옛 정인은 곱게 웃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잠시만, 이럴 수가! 지금 자신이 또다시 미쳐서 웅족과 내통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웅녀는 여전히 붉은 천을 몸에 두르고 있었고,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그리고……. 고운 얼굴이 가까웠다. 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부드러운 온기가 입술 위로 닿았다.
**
“헉!”
적호는 눈을 떴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흐릿하던 물체들이 그제야 어스름하게 형체를 가진다. 쏟아지는 빛. 범이 가진 눈의 특성 탓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눈이 부시다. 아까의 꿈에 대한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인지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맥동했다. 적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버석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
그는 웃고 있던 고운 이를 상기한다. 자존심 강해 꺾이지도, 굽히지도 않던 자신이 당연하게도 몸을 굽히게 만들던 그 사랑스러운 이를. 꿈속 쫓기던 그 어두운 골목이 아닌……밝은 빛 아래에서 제 정인을 본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했다. 적호는 저도 모르게 입술 위로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꿈에서, 분명……. 아, 그래. 꿈이지. 꿈 때문일까, 갑자기 이전의 생각이 났다.
환한 햇살, 그보다 시선을 잡아끌던 붉은 웃음이 있었다. 햇살보다도 더 눈부시고 곱던 그 사람. 자신이 무어라 말을 건네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조곤조곤 답하던 고운 목소리. 기만과 배신으로 끝맺었건만, 꿈은 그렇지 않다는 것처럼 그의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두운 골목, 쫓기던 자신, 그 앞에 나타난 그의 정인. 그러한 종류의 꿈은 으레 그러하듯 적호를 아주 머나먼 과거의 감정으로 적시곤 한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환상이 너무나도 찬연해서……. 그리고 그제야 빛이 적응이 된 것인지 자신의 방에서 으레 보곤 하던 아침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고운 웃음은 여전히 눈에 아른거리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붉은색이 잘 어울리던 제 정인이…….
“아.”
……오늘은 날이 아닌가. 적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자신이 이능파가 흐트러질 정도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탓이었다. 기운을 다루는 것에 능한 황호라면 단박에 자신의 상태를 알아볼 터였다.
차디찬 공기가 주변으로 짙게 깔렸다. 적호는 한참 제 방 침대에 앉아서 이능파를 다스리며 꿈을 곱씹었다. 기이한 기분이다. 이 꿈이 무엇인가를 예고하는 것만 같다는 직감.
간만의 지각이다.
**
“적호, 오늘은 늦었구나.”
적호 몫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황호가 묻는다. 대수롭지는 않은 어조.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모습은 근심 하나 없이 오연하기만 했다. 적호는 말없이 평상시 앉던 제 자리에 앉았다. 꿈속의 붉은 빛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자, 그는 저절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필이면 그 꿈을 상기하는 것이 황호의 앞이라니.
“……잠자리가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래? 시킬 것이 있었는데 곤란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 해보겠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 정도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이능파부터 안정시키고 그런 소리를 하도록.”
그제야 적호는 아직도 제 이능파가 흐트러져 있음을 깨닫는다. 아니면 방금, 꿈을 또다시 상기하다가 흐트러졌거나. 적호는 묵묵하게 제 앞에 놓인 차를 들이켰다. 입 안 가득 번지는 것은 특유의 씁쓸한 향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한 문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
그는 황호의 물음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곧이곧대로 꿈을 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옛 정인을 꿈에서 보았노라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그에게는 없었으므로. 호족들에게 있어서 웅녀라는 이름은 치욕과 배신의 역사이다. 한반도에서 천신의 영향력을 줄이고, 신화계 호족이었던 적호를 전설계로 끌어 내리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므로. 그는 스스로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의심치 않는 것. 그리하여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 맹신의 대가로 돌려받은 이 기만도 사랑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적호의 표정이 절로 딱딱해졌다. 차향을 들이마셔도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를 않았다. “시킬 일이 무엇입니까?” 차라리 다른 일이라도 하면 이 술렁거리는 마음이 진정될까 하여, 적호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돌렸다. 제 친우의 시선이 내리꽂히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는 최대한 뻔뻔하게 모른 체 했다.
“……웅족의 동향에 관련된 일이다.”
“하겠습니다.”
“……적호.”
덧붙이지 않은 한숨이 딸려 오는 기분에 적호는 찻잔만을 바라본다. 황호의 목소리가 엄중하기도 했거니와……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저 지은 죄를 알아 지레 찔리는 탓이 컸다. 자신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 꺼내기는 했지만, 황호는 여전히 이번 일에 대해서 떨떠름한 것 같았다.
“쉬고 파악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지금 당장 알아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조의신이 세운 계획에 필요한 것이라면, 제가 적임자입니다. 적연을 쓰면 알아볼 수 있는 이도 없을 겁니다.”
“……다시 생각해라.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괜히 조의신이 자책할 거다. 나는 나의 은인이 자책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친우가 다치는 것도 보고 싶지 않군.”
“그 정도로 제가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퍽이나.”
차를 마시다 말고 결국 황호는 코웃음 쳤다. 전적이 여러 번 있었으나 적호는 문제를 모르겠다는 듯 아주 뻔뻔한 얼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다시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뻔뻔하기로 따졌을 때 호족 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 무뚝뚝한 흰 호랑이의 낯이 머릿속을 스친 까닭이다. 하긴, 애초에 적호가 마음먹고 하고자 하는 것을 정당한 이유 없이 꺾는 것도 고역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호족을 위한 일이라면.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소리 내어 웃었다. 적호는 묵묵히 주어진 차를 마셨다. 황호가 나잇값을 못하고 실없이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니, 은인이 또 어떤 흡족한 일을 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웃음을 멈췄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딱딱한 얼굴이다.
“곰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조의신은 잠들었던 곰들이 깨어났다는 가설을 세웠지. 그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
**
황호는 정말 쓸데없이 걱정이 많군. 설령 잠든 그 곰 새끼들이 깨어난다고 해도 뭐가 문제라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적호가 내심 생각했다. 나름 친우를 걱정해 다른 방도를 알아보고자 했던 황호가 들었다면 두통에 시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흑막쯤 되는 이가 아니라면 적호의 은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이는 매우 적었다. 그러니 저 역겨운 곰들이라면 오죽할까. 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 그분께…….”
……그런데 어째서인지, 기시감이.
그는 조금 더 빛이 있는 곳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어둠 속으로 몸을 분명 숨겼음에도 고혹적인 눈매를 지닌 여인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
확실하다. 붉은 눈 안에 가득 담긴 인영이 누구인지 확신하는 순간, 결국은 그 낯 위로 당혹이 서린다. 바보 같이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적호의 시선은 그 인영에게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붉은 천을 두르고 있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빛 아래에서 누구보다 고운 이. 저토록 고운 이가 또 있을까? 분명한 그녀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런 형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녀도 웅족인데…….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웅녀의 시선이 자신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머무르는 것을 보며 적호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아, 몇천 년 만의 만남인지. 그럼에도 여전히 기억과 다를 바 없이 사랑스럽고도 아름다운 이였다.
“웅녀? 거기에 쥐새끼라도 있나?”
“……그냥, 잠시.”
아무렇지도 않게 거두는 시선에 적호는 생각했다. 눈치채지 못했나? 그래, 사실 당연한 일이다. 적연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눈치챌 수 있었겠나. 당장 감히 웅녀를 입에 담은 저 누구인지조차 모를 곰 새끼는 자신이 당황해서 흐트러진 적연조차도 꿰뚫어 보지 못했는데. 아까 전까지, 웅녀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도 분명 그는 적연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운용했었다.
그러니까 분명……, 여러 가지의 복잡한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다시 꼬인다.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아까까지 기억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큰소리치면 안 됐나. 황호와 다른 호랑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아니지, 다른 호랑이들이야 자신을 어찌 보든 상관없지만 아들과 은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막막했다.
“적호. ……언제까지 거기 있을 생각인가요?”
복잡한 상념이 뚝, 끊어진다. 적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인가 다른 웅족들은 전부 사라지고,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린 채 자신이 있는 곳을 분명하게 응시하고 있는 웅녀만이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전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서……. “적호. 이미 중요한 이야기는 끝난 지 오래이고, 이곳에서 더 머물러도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답니다.” 적호는 생각했다. 오늘의 꿈은, 이런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있었건만 이상하게도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냥감과 자신이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 꿈처럼…….
“이곳은 위험하니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요. 이제 당분간 다른 곰들은 들어오지 않을 테지만 이곳은 혹시라도 호족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다른 자들이 여러 덫을 깔아둔 장소지요. 다행히도 아직까지 당신이 그 덫을 밟지는 않았지만…….”
적호는 한 발을 내디딘다. 그러나 웅녀와 완전히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절반은 여전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채였다. 시선이 마주하고, 적호는 예전에, 자신이 그녀의 말에 속아 넘어가 호신총을 파괴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와 영원히 함께 있기를 바랐건만, 그녀와 그가 바라보는 것이 그토록 달라서. 그래서 의심치 않았던 그에게 그녀는…….
“……왜 전부 알면서도 제 소재를 다른 웅족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
가느다란 빛이 웅족의 은신처 안에 맴돈다. 희뿌연 먼지가 두둥실 떠서 흩날리고, 가느다란 빛줄기를 등진 채로 서서 적호가 서 있는 어둠 안쪽을 바라보던 웅녀가 자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어둠에 반쯤 가려져 있었으나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숨긴다면 몰라도 말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마 웅녀 자신이 다시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적호만큼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터다.
“그건,”
그 목소리는 가늘었다. 하지만 어떤 큰 소리보다도 선명했다. 그를 바라보는 희미한 눈빛은 적호가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그곳을 함께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전부 그리움에 미쳐버린 적호, 자신의 착각……. “…….” 적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의심했으나 억측으로 여겨 묻어두었던 어떠한 예감을 다시금 떠올린다.
“……저도 잘 모르겠군요. 길을 알려드릴 테니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어요. 그곳 이외의 길로 나가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답니다.”
부채가 다시 웅녀의 입가를 가렸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일까? 적호는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아,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녀가 그를 위해 행동할 이유가? 그의 사랑에 대해 그녀는 기만과 배신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를 위해 행동할 리가 없었다. 이것은 또 다른 함정일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여기에서 이렇게 고민하는 것 또한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그녀와 연관된 모든 것들에 대해 적호는 답지 않은 행동들만 답습해 왔지만. 기만으로 인해 죄를 저지른 것이 수천 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적호는, 아직도…….
“나가지 않으실 건가요?”
“웅녀. 그대는…….”
이건 미친 짓이었다. 미친 호랑이들 사이에 있으니 자신도 머리가 조금 돌아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적호는 자신이 느꼈던 그 어렴풋한 예감이 확신이 되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실로 낭떠러지 끝과도 같았다. 적호는 어떠한 진실을 예감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행동할 수 있는 바는 없었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미 결론이 내려진 일이며, 자신은…….
웅녀는 그런 그를 위한 퇴로를 열어주었다. 그 정해진 길대로 걷기만 한다면 그는 몰릴 대로 몰린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앞으로 직진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호가 그 길을 통해 곧장 내달리지 못한 것은 웅녀가 자신을 보는 눈이 이전과 다르지 않음을. 조의신이 보여준 리플레이 속에서 자신이 죽어갈 때 울고 있던 그 여인이, 자신을 위해 저팔계의 배를 찢고, 검은 눈이 내리던 그 크리스마스에 찾아왔던 이가 누구인지 그는 이제는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다음번에 다시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적호는 천성적으로 자신이 불리하다 하여 퇴로를 따라 도망치기만 하는 이는 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같이 이곳에서 나가자고 해야 할까? 그러나 적호에게는 너무 많은 족쇄가 있었으며, 호족은 결코 웅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리라. 적호 또한 웅녀와 다시금 전과 같이 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더라도 저는 당신을 만날 생각이 없답니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찾아올 테니까요.”
“정말 곤란하게 구는군요. 당신은 여기에 오면 안 돼요.”
고운 얼굴 가득 난처한 기색이 서림에 가슴이 아팠다. 적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려는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며 웅녀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이 얽힌다. 좋지 않은 끝이었기에 다시 마주해도 전과 같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런데도 그들의 시선 안에 담긴 감정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표표한 발걸음으로 여인은 다가온다. 내내 그리던 얼굴이 적호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고, 여전히 고운 손이 적호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을 대하듯 가녀렸다. 언젠가 미친 곰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부부가 서로를 이렇게 애틋하게 여기는 중인데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참으로 괴로운 일이야…….
‘……그 미친 곰 새끼도 가끔은 맞는 말을 할 때가 있나.’
“정말이지 곤란해요…….”
당신은 여기에 와서는 안 되는데. 오랫동안 계획하고 숨겨왔던 것들이 발각되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곤란했다. 그러나 멀찍이서 밖에 보지 못했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몇천년간 각오하고 다져왔던 결심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웅녀는 난처하지만 그럼에도 애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굳어버린 남자의 뺨을 감쌌다. 하지만 정해진 길대로만 걷는 이가 아니기에 사랑했다. 그러니까.
“자세히 말해서는 안 되지만……적호. 이건 우리를 위한 일이랍니다.”
그러니까……. 속삭임과 함께 붉은 입술이 적호의 입을 막았다. 그는 여전히 따뜻한 이어서 더더욱 결심이 굳어졌다. 이 온기 서린 기억으로 그녀는 다시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야겠지. 이제 일이 완전히 끝나고, 그에 대한 모든 위협이 사라지기 전까지 웅녀는 절대로 적호를 다시 마주할 마음이 없었기에. 적호에게 입을 맞춘 웅녀가 살포시 웃으며 적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그를 밀었다. 어느샌가 손에 들려있던 아이템 카드가 반짝였다. 제 신형이 흐려지는 것을 보며 적호가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웅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테니, 이 위험한 곳에는 다시 오지 말아요.”
……그리고 그 또한 부디 이 기억을 잊지 말아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웅녀는 고개를 들어 잠잠해진 주변을 둘러본다.
아, 그가 없는 곳은 정말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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