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3)
전사(Warrior)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다시 해가 떴다. 시간만은 무심하게 흘러서 계절이 한 번 바뀌는 동안 소년은 아이에 대한 것을 까맣게 잊었다. 그 아이가 다시 산호탑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고 소년은 친구를 바라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임을 알았기에 아이에 대한 것을 빠르게 잊어버렸다. 소년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기에 애쓸 것까지도 없었다. 그것이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고 아쉽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 있었던 해프닝일 뿐이라고. 다 낡은 여관 방에 누웠을 때나 가끔 생각이 날 뿐이었다.
그 해 가을에 소년은 드디어 처음으로 임무를 받았다. 성년이 되기 전에는 임무를 받을 수 없지만 어쩐 일인지 뷔른쵠은 하급 마물을 처치하는 임무를 소년에게 맡겼다.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곧 오랜 견습 기간을 졸업했다는 뜻이었다. 이제 소년은 어엿하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다만 소년은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길드에 소속하여 임무를 받는 정식 길드원이 되기로 했다. 물론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이곳에 머무르고자 했다. 길드를 떠난들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길드 마스터에게 진 은혜가 깊기에 떠날 수 없었다. 사정이 어쨌든 당장은 드디어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다는 기쁨이 느껴졌다. 소년은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첫 임무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답지 않게 지나가던 길드원에게 임무지를 펼쳐 보여주기까지 했다. 뷔른쵠은 아이가 잠시 기쁨을 만끽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소년에게 이번 임무의 파티원을 소개시켜주겠다며 소년을 데리고 림사 로민사 하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동료가 필요할 정도로 처치가 힘든 마물은 아니었기에 소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뷔른쵠을 따라갔다. 그는 광장을 지나 시장을 통해 항구 쪽으로 내려가더니, 비술사 길드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접수대가 보였고 접수대 옆에 키키룬족 상인이 접수원과 가격으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나무상자 위에 그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뷔른쵠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소년을 보고 인상을 팍 구겼다. 그리고 인상이 구겨진 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가 너와 함께 가 줄거다. 잘 부탁하지.”
“왜 얘예요? 경험이 많은 도끼술사로 바꿔주세요.”
“야, 누군 너랑 같이 가고 싶은 줄 알아? 그러는 너는 뭐가 얼마나 잘났다고!”
“흥. 난 이번이 열 여섯 번 째 임무거든?”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치곤 늘상 들고다녔던 책 표지를 펼쳐 맨 앞장을 소년에게 들이밀었다. 첫 장에는 성공한 임무지에 찍히는 모험가 길드의 도장이 정확히 열 다섯 개 찍혀 있었다. 움찔 뒤로 물러난 소년은 입을 달싹였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훨씬 어린 나이에 재능 있는 비술사로 임무를 받고 다녔다는 사실에 기가 눌렸다.
“외부 손님에게 예의를 지켜야지. 항상 겸손한 마음을 잊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너도 그 중 열 네 번 정도는 견학 갔을 뿐이잖아.”
“윽…….”
아이를 나무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하로 가는 계단 쪽에서 들려왔다. 비술사 길드 마스터인 투뷔르가임이었다. 그는 상냥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와는 이전에 한 번 인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강인한 다정함이 보이는 어른이었다.
“저 아이가 아직 미숙하니 잘 지켜줬으면 한다. 하급 마물이니 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 아이는 몸이 좀 약하거든.”
“별로 안 약하거든요.”
아이 역시 스승 앞에선 약해지는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두 스승은 임무에 대해서 몇 가지 논의를 하기 시작했고 소년과 아이는 어른들이 대화를 마칠 때까지 나무 상자 위에 나란히 앉아 기다렸다. 아이는 토라졌는지 소년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기류가 흘렀다. 소년은 문득 제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소년은 아이가 입은 부드러운 옷감의 의복과 빛이 나는 신발에서 아이가 유복한 집안 태생임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당돌한 태도와 곧잘 투덜거리곤 하는 말투, 어리광 부리는 모습에서 아이가 사랑 받고 자랐음을 알았다. 아이에겐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고 그것을 불러 줄 어른들도 많았다. 저보다 훨씬 어리고 약해 보였지만 박식했고 빛나는 꿈도, 열정도 있었다. 견습이라곤 해도 임무 경험이 수 차례 있다는 것도 부러웠다. 길거리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냈던 겨울날에도 느끼지 않았던 이상한 열등감이 느껴졌다. 소년은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모든 게 다 그랬다. 왜 문으로 사람을 쳐놓고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는지. 사사건건 시비 걸었던 이유는 뭔지. 왜 멀쩡한 음식을 잔뜩 남겼는지. 그 뒤로 왜 산호탑에 오지 않았는지. 오랜만에 만났을 때 반갑게 인사하기는 커녕 인상을 왜 구겼는지. ‘경험이 많은 다른 도끼술사’를 붙여달라고 한 이유는 왜인지. 그야, 제가 못났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건 소년 자신이었다. 그렇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말이야. 내 자신이 못난 건 잘 알고 있다고. 아이는 소년이 가지고 싶었던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저 입술을 어물거릴 뿐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소년은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잘 알았다. 소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아이는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무슨 할 일이 생각났는지 박스에서 내려가 지하로 달려갔다. 어른들의 대화가 끝나자 뷔른쵠은 소년을 투뷔르가임에게 인사시키고 도끼술사 길드로 돌아갔다. 아이와 놀고 싶다면 놀다와도 된다고 말했지만 소년은 괜히 자존심이 구겨져서 레스토랑 출근을 하겠다며 바로 상층 갑판으로 떠났다.
그날 밤엔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년은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다른 도끼술사를 붙여 달라고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소년은 증명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제 자신이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깟 꼬마 치유사 하나 없어도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혼자서 임무를 성공하면 하루종일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별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항상 혼자였고 이번에‘도’ 혼자일 뿐이었다. 그는 아주 오래도록 이 거리에서 살아왔지만 그 누구도 소년을 알아차려주지 않았다. 뷔른쵠에게 거두어진 그 다음에도, 소년은 항상 혼자였다. 그 뒤로 밋밋한 하루하루가 몇 년이고 반복되었다. 매일매일 걷는 거리인데도 처음처럼 낯설었다. 인파에 파묻힌 제 자신이 아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문득 협탁에 있는 작은 거울에 세상에서 더없을 정도로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코테 소년이 비쳤다. 길이가 제각각인 검은 머리카락은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침대 위로 흩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잿빛이었다. 얼굴엔 어디서 생겼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흉터가 몇 개 있었다. 좀처럼 웃지 못하는 그 얼굴이 어딘가 저릿하게 아파서 소년은 거울을 등지고 누웠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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