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브] We’ll never have sex

티플링 파티 아스타브(테레즈) - 제목대로 안 합니다

무한화서 by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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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들의 피는 쉽게 지워지지 않더라. 테레즈는 갑옷 사이에 낀 핏물을 애써 털어냈다. 등 뒤로 들리는 티플링들의 웃음소리가 어지럽다. 그들의 손에 들린 와인잔의 찰랑임과 눈물 자국 비쳐 접힌 눈가가 오래된 그림 같다. 춤추느라 어지럽게 널린 발자국을 살금살금 밟아가자 구석에 일련의 발자국이 보인다. 그 끝의 아스타리온.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텐트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달빛이 섞인 붉은 눈동자가 섬뜩했다. 무언가 마음 먹은 듯 살짝 인상 쓴 눈가가 가까이 다가온 테레즈와 마주 치자 부드럽게 피어난다.

“모처럼 조용한 밤이네. 둘이서 시간 보내긴 딱인데, 무슨 뜻인지 알지?”

테레즈의 웃음소리는 사박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았다. 그런 마음을 먹은 건가, 테레즈는 빚은 듯 완벽한 그의 미소에 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뜻인데?”

"섹스 말이야, 자기. 사실 우리 오래 기다렸잖아."

이런 식으로, 찰나 동안 여러 생각이 테레즈를 스쳐 지나갔다. 그를 바라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이겠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스타리온은 테레즈 자신도 놀랄 만큼 마음이 동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의 목에 칼을 내밀면서 넘어질 때, 다치지 않게 허리를 감싸던 손길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비밀인지도 모르게 뻔했던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아스타리온이 조심스럽게 말할 때도 그저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의 차가운 송곳니가 자신의 목을 뚫었을 때, 새하얗게 질려가던 손으로 그를 겨우 밀쳐내고 본 그의 표정, 그 달뜬 얼굴을 봤을 때, 그래, 받아들여야 했다. 아스타리온이 그를 어떻게 하든 테레즈는 생경하게도 무력했다. 방금 분명 사지가 눈앞에 보였는데 그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고는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어떤 저주라기엔 너무나 오래된 감각이었고 그저 끌림이라기엔 끝없이 무거웠다. 테레즈의 눈길은 항상 아스타리온을 향했고 보지 않을 때도 감각이 곤두서있었다. 그가 테레즈를 이만큼 마음에 두진 않는다는 걸, 그래서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어디로 가려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자. 이 미친 짓도 우리 자신도 잊을 만한 곳으로. 이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던데, 다들 잠들었을 때 거기로 날 찾아와."

"그럴게, 그럼."

"좋아, 내 사랑. 거기서 보자고."

아스타리온의 말투는 가벼웠고 연극에 능숙한 바드처럼 몸짓과 표정이 완벽히 어우러졌다. 테레즈는 눈을 마주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가 익숙하다는 기색으로 저런 말을 할 때 그의 과거 속 수많은 이들처럼 웃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 아스타리온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기분일까. 그걸 감히 상상한다는 게 주제 넘는 일이겠지. 테레즈는 상념에서 마음을 걷어내려 하지만 아스타리온의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진 입가가 기억에 남았다. 그를 원하는 데에 상반된 감정이 든다고 해도, 결국 그의 제안에 응한 꼴이니 원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겠지. 테레즈는 떫을 만큼 신 와인을 잔에 가득 따랐다. 

그가 말한 대로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늑한 숲속 공간이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이미 테레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왔네. 기다리고 있었어, 너를 가질 순간을."

"아스타리온,"

테레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응? 왜 그렇게 겁 먹은 표정이야. 처음은 아닐 거 아니야?"

맞나...? 아스타리온은 작게 말했다. 테레즈는 그의 곤란하다는 표정에 작게 웃음이 났다. 긴장을 녹여내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테레즈는 말을 이었다.

"너, 나 좋아하지 않잖아."

아스타리온은 보여준 적 없는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럼 널 왜 여기까지 불러왔는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너 좋아해, 아스타리온.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테레즈는 기본 상식을 설명하듯 당연한 투로 말했다. 웃음기도, 하지만 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말투에 아스타리온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네가 날 영영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난 네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니면 네가 바랄 때까지 널 도울 거야. 카자도어를 죽이러 간다면 그때도 따라갈게."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좋으면 그냥 잘 수도 있잖아. 그리고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 카자도어가 오늘 우리가 죽인 고블린들만큼 만만할 줄 알아? 카자도어는 진짜 뱀파이어라고. 너 따윈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죽일 수 있어."

카자도어에게 맞선다니, 사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영향에서 벗어난 게 이백년만인데, 도망치는 삶이라고 해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았다. 카자도어를 겪어보지도 않은 이가 그를 죽이러 간다 말하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렇게 간단했으면, 그렇게 쉬웠으면 내가 이백년을 그렇게 살았겠어?

"그럼 죽지, 뭐. 너는 맞설 거 아니야? 진짜 뱀파이어를?" 

그건 그런데, 라고 아스타리온은 작게 말했다. 목숨을 내던진다고 말하는 테레즈는 두려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눈 앞의 아스타리온을, 그의 경멸을, 두려워했다. 그런 기색을 잘 찾아내는 아스타리온이지만 테레즈의 말에 그는 충분히 흔들렸다.

"...물론, 맞서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런데 그래야 할 거 같아."

아스타리온은 홧홧한 눈가를 가리듯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너, 날 사랑하기라도 해?"

"그건 아니고."

아스타리온은 테레즈의 건조한 대답에 작게 안심했다. 그 자신도 무슨 대답을 바랐는지 모르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네가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사람과 하룻밤 보낼 기회 놓치거나, 아니 그의 경멸을 살 위기에 처하더라도, 내가 그 이유가 되고 싶진 않았어."

아스타리온은 크게 웃었다.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이런 일은 겪은 적이 없었다. 재밌네, 아스타리온은 테레즈를 빤히 봤다. 이제는 그의 눈에 서린 불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고집이 똑똑히 보였다.

"자기, 그래서 우리 뭐해 오늘? 내가 하기 싫은 건 아는 거 같은데."

"다행히 와인은 네가 가져왔네. 그리고..."

테레즈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미술, 역사, 문학, 여러 종류의 책들과 함께 종이와 깃펜, 물감과 붓까지 나왔다. 진짜 이상해, 이상하다. 아스타리온은 그 꼴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잘 생각은 하나도 없었나봐?"

"아무래도? 네가 아까 야영지에서 네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아스타리온은 이제 자리 잡고 앉은 테레즈 옆에서 손때가 묻은 책을 집어들었다. 긴 밤이 이토록 기다려지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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