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 3

[아스타브] 하얗고, 조금 엉망인, 단 것

한시간만에 써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딴 게 화이트데이 기념?

조각보 by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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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아스타리온이 키샨과 함께 사는 나날은 거의 매일이 이마를 짚는 날이었다. ‘자기야 솔직하게 좀 말해봐 자기를 어엿한, 한 명의, 드루이드로 보는 사람들은 다 눈이 삐었대?’ 그러면 키샨은 늘 억울한 듯 표정을 구겼지만, 예컨대 대량의 미치광이혓바닥을 꽃다발마냥 책상에 올려두는 일이 일주일 연속으로 일어난다면 함께 사는 집에서 쫓겨나지만 않아도 감사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의 일은 꽤 얌전한 축에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평소보다 거칠었는데, 들고 온 물건이 많아서 발로 노크를 할 때 흔히 나는 소리였다. 아스타리온은 잠시 오늘은 쟤가 또 뭘 들고 왔을까, 고민했으나 이내 머릿속으로 두 가지 생각을 끝마쳤다. 첫째, 내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다. 둘째, 괜히 얌전한 걸 기대했다가 어이가 사라지느니 그냥 직면하는 게 낫다. 나름대로 쌓인 생활의 지혜였다.

“좋아, 오늘은 또 뭘 들고 왔는지… 이게 뭐야?”

“아스타리온? 문 열어준 거 맞지? 나 앞이 안 보여!”

그는 얼떨결에 문 앞을 가득 메운 새하얀 꽃 더미를 받아들었다. 아직 어린 풋꽃들인지, 진한 향보다는 축축하고 쌉싸름한 향기가 코 끝을 가득 메웠다. 꼭 그의 품 안을 가득 채울 만큼을 받아들고 나자 비로소 키샨의 얼굴이 제대로 드러났는데, 길고 하얀 곱슬머리 사이에 꽃잎이 잔뜩 붙어있는 걸로 보아 이 모양으로 걸어온 지 꽤 된 것 같았다. 온 머리카락과 뺨까지 전부 꽃잎을 붙인 모양새가 안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사이란 그녀의 입술 사이에 꽃잎이 붙은 것을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자기야, 너 이거 얼마나 먹었어.”

“얼마 안 먹… 왜 내가 이걸 당연히 먹었다고 생각하지?!”

“오, 네가 그저께 가져온 장미들이 무슨 운명을 맞았는 지 좀 보고 얘기할래?”

“장미잼 맛있잖아…!”

“네 머릿속에는 먹을 거랑, 그걸 어떻게 먹을지랑, 그걸 언제 먹을지밖에 없지?!”

“반 정도는 네 생각만 하거든!”

“나머지 반은 어쨌는데!”

매일같이 이 정도 수준으로 싸우기만 하면 싸움에 대처하는 실력도 늘기 마련인데, 두 사람의 대처 능력은 이상한 쪽으로 발달했다. 입으로는 그대로 싸우고, 손으로는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는 것이다. 우선 품 안에 가득한 꽃들은 적당히 빈 갈대 바구니에 들어차 식탁에 올려졌고, 키샨은 커다란 솥 하나와 그저께 가져온 설탕 포대를 들었다. 꽃 더미가 물 생성 마법으로 씻겨 내려갔고, 깨끗해진 꽃들이 솥에 쏟아지고, 설탕이 그 안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챈 아스타리온은 약간 어이없는 듯 입을 벌렸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두 손을 들었다.

“…앞으로 네가 가져오는 꽃은 다 먹을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

결국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건 참지 못했지만, 그렇게 타박을 하면서도 서로가 하는 일을 돕기 시작하는 시점이 둘의 가벼운 다툼이 끝나는 때다. 아스타리온은 솥 옆에 서서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키샨은 어차피 나 혼자 먹지 않냐고 투덜대면서도 포대를 기울이던 것을 멈췄다. 흰 꽃들이 반짝이는 설탕 알갱이와 섞여 솥 안에서 반짝이는 모양새는 꽤 예뻤지만, 단 것뿐만 아니라 음식 전반을 먹지 않는 뱀파이어 스폰에게는 너무 가혹한 단내를 풍겼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뭘 만들려고 꽃이랑 설탕을 이만큼 써? 돈 깨나 들었겠는데.”

“아, 게일이 알려준 건데… 설탕 절임이라는 게 있대서. 원래는 유리병이나, 그런 데 담는 거라는데… 우린 그런 거 없잖아.”

“맙소사, 그래서 솥에 냅다 부었어? 이런 건 분위기로 먹는 거야.”

“어, 먹어본 적 있어?”

아스타리온은 대답 없이 찬장을 한참 뒤진 끝에 유리로 된 용기 하나를 찾아냈다. 비록 크지도 않고 아주 예쁜 것도 아니었지만, 솥 안에서 꽃잎과 설탕을 얼마쯤 덜어내 담아 두니 꽤 볼만 했다. 용기는 창가에 얹혔고, 푸르스름한 인공 조명이나 붉은 불꽃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다채롭게 빛났다.

“그런데 이거 햇빛에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에 둬도 돼?”

“어, 그건 모르겠는데… 괜찮으니까 게일이 나한테도 알려준 거 아닐까? 그쪽도 나 언더다크에서 지내는 거 알 텐데.”

“…우리의 친구가 그만큼 똑똑하길 빌어 보자고. 마음대로 안 되면 또 속상해할 거 아냐?”

“나? 아닌데?”

키샨은 식탁에 양 팔을 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꽃잎이 붙고, 설탕 알갱이까지 몇 개가 붙어 이상하게 반짝거리는 모양새였다.

“물론 조금 속상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네가 또 도와줄 거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그러나 그렇게 조금 엉망이고, 엉뚱한 것이라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 그녀의, 이제는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이마를 한 번 가볍게 때렸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말하고 가져와, 작은 속삭임이 창문을 타 넘었고, 사과꽃과 설탕이 가득 담긴 용기가 조용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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