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헤이라+할신] 그 날은 아무도 죽지 않았겠으나
* 29님과의 연성교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 아주 많은… 고증이 부족합니다. 제 캐해 와플 팬에 들어가고 만 두 드루이드에게 심심한 사과를 보냅니다….
케더릭 토름이 죽었다.
달오름 탑에서의 전투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어졌지만, 많은 사람이 바란 결말로 끝났다. 그림자 저주를 몰고 온 쐐기는 뽑혔고, 뼈의 군주의 형상은 사라졌다. 마인드 플레이어 군체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대지의 영혼이 자연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생존자 대부분에게는 가장 좋은 결말이겠고, 혹 누군가에게는 장장 백여 년을 끌어 온 전쟁의 승리였다.
큰 전투가 끝났지만 축하할 만한 정신도 없었고, 또 그럴 기운도 없었으므로 야영지는 시끌벅적하기보다는 도란도란한 분위기였다. 심하게 지친 몇은 아예 자기 텐트에 드러누워 나오지 않거나, 입구를 열어 둔 채 모닥불 가에 가끔 한 마디씩을 얹었다. 그들보다는 조금 더 기력이 남아 모닥불에 둘러앉은 이들은 조촐하게 술 몇 잔을 돌렸다. 이야기는 주로 설마 삼악신의 형상을 직접 대면할 줄은 몰랐다느니, 이제 발더스 게이트로 가면 그 이후의 행적은 어떻게 할 것인지로 흘렀고, 맞장구 없이 술만을 들이키는 사람도 있었다. 심란함, 혹은 해방감으로 술을 들이키다 보니 술병은 금방 비었고, 마지막까지 모닥불 근처에 남은 사람은 둘이었다. 무장을 풀지 않은 자헤이라, 그리고 흙바닥에 편히 앉은 할신이다.
사실상 자헤이라의 술잔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고, 할신의 옆에는 빈 병이 몇 개쯤 놓여 있었다. 그만큼 마시고도 흥청망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그의 재주일 것이다. 주위에는 벌꿀주의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향기가 감돌았고, 아직 잠들지 않았던 아스타리온이 그 주위를 지나가다 말고 인상을 찡그리며 사라져 버렸다. 자헤이라는 그것을 보고 픽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경계하듯 야영지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에는 여전히 언월도 한 쌍이 빛을 발했고, 눈매는 칼날의 예리함만큼이나 날카로웠지만, 기실 그의 눈매는 늘 무언가를 경계하느라 치켜올라간 지 오래 되었으므로 단순히 그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수도 있다.
“그 곳에 무언가 있소?”
할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았다. 술 탓일수도 있고, 모닥불의 소리 탓일수도 있다. 자헤이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지. 내 다음 목표가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없어도 좋지 않겠소? 이제 곧 더 밝아질텐데.”
“유감스럽게도, 아치 드루이드. 광신도는 달빛만 있어도 달려들더군.”
“‘전’이오, 고위 하퍼. 그 점은 실로 유감이군.”
밤이 깊어갈수록 술잔이 비는 속도는 줄었다. 그림자 저주가 막 걷힌 땅에서는 풀벌레 소리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밤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정적을 은은하게 메웠고, 먼저 말을 던진 것은 자헤이라였다.
“이제 슬슬 다 비운 건가? 아니면 아직도 모자란 건가? 달오름 탑에 있는 것까지 싹 긁었으니 더 나올 구석도 없을 텐데.”
“이 이상 바랄 정도로 몰염치하지는 않소. 그런 게 아니라… 비운 잔의 차이를 보니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길다. 할신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넓은 잔 속을 바라보았고, 아찔할 정도의 단내가 코를 찔렀다. 예전부터 그림자 땅의 술들은 모두 보관을 최우선으로 두었기 때문에, 이렇듯 향이 강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 점까지 이 곳을 세월에 박제된 공간처럼 느끼게 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자헤이라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축하할 날에 제대로 축하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고질병이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냐. 그런데, 굳이?”
늙은 드루이드가 목을 울려 웃는 소리는 비웃음이나 헛웃음과 닮았다. 그를 오래 겪지 못한 사람들이나, 그의 이야기가 훨씬 익숙한 사람들은 그 웃음소리만으로 자헤이라를 판단하곤 했다. 할신은 어느 쪽인가 하면 둘 다 아니었지만, 백여 년 전에는 그 소리가 비웃음으로 사용될 때가 훨씬 많았으므로 그렇지 않을 때를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동안 자헤이라의 옆얼굴에 떠오른 것이 미소라는 것을 알아챌 만큼은 연륜이 생겼다, 고 말할 수 있는 편이다.
“예전부터 그대의 호의는 둔한 이들이 알아채기 어려운 편이었지. 그대가 말에 조금 더 시간을 들였다면, 아마 하퍼 결사로 전향한 사람이 지금의 배는 되었을 것 같군.”
“하! 그런 이유로 목숨을 버리는 멍청이들이 이만하다는 데 감사해야겠군. 좋아, 할신. 하지만 내가 당신의 마음을 구구절절 풀어 설명하는 것보단 네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
할신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잔을 들어 입술만 적셨다. 이 우드 엘프는 그럴 때면 아주 오래된 나무, 혹은 세월을 그대로 버틴 바위처럼 보이곤 했다. 깊게 패인 흉터와 그 위로 새겨진 붉은 문신이 제멋대로 춤추는 불꽃에 도드라지고, 술기운 탓인지 마음의 무게 탓인지 느린 목소리가 행렬처럼 이어진다.
“아직도 나를 이런 식으로 털어놓는 건 굉장히… 낯선 일이오. 하지만 이 밤이 아니면 말할 수 없겠지.”
지나치게 오래된 장송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덤이었다. 사람이 마음에 무덤을 품고 살아갈 수는 없으므로, 할신은 자신의 마음이 전쟁 이후로 제대로 살아간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뒤처진 마음이 갑작스레 풀려난다고 해서 바로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이 땅에 그림자 저주는 걷혔지만, 그는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해방감과 맞닿은 공허감을 느꼈다. 이를테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걷던 이가 그 짐을 내려놓았을 때, 그 무게는 잠시나마 그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느끼는 텅 빈 감각과 같다. 하물며 곁에 아직도 짐을 진 이가 있다면 더했다. 그런 이야기가, 안주로 삼기에는 애매하게 쓴 맛으로 흘러나왔다.
자헤이라는 그런 감각을 모르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잘 아는 축에 속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거의 쉰 적이 없었고, 한 목표가 해결되면 바로 그 다음 목표를 찾곤 했다. 그것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의 천성 탓도 있겠지만, 짊어진 짐의 무게가 그의 천성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성질에 방랑벽과 일 중독 중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 지도 애매했다.
“뭐, 내가 술잔과 칼을 동시에 드는 이유는 별 게 아니야. 그냥 그게 내 습관이어서지. 유감스럽게도 다들 축하하며 즐기는 자리에서도 술 한 병만 갖고 사라지는 버릇이 든 지 좀 됐거든.”
술기운은 별로 재미없는 농담에도 웃음을 더해 주기 마련이라, 두 사람의 입가에 모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자헤이라는 손에 든 술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을 이었다.
“요컨대… 내가 짊어진 건 나의 무게일 뿐이지, 당신이 응당 느껴야 할 해방감에 무게를 더해 주기 위해서는 아니야. 사람의 삶이라는 게 다 그렇지. 가끔 겹칠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는 혼자인 것. 잘 알지 않나?”
“모르지 않지.”
“그럼 덜어내야 할 게 뭔지도 잘 알겠군.”
자헤이라가 잔을 들고, 시범을 보이듯 한 번에 내용물을 비웠다. 할신은 그것을 보고 한 번 웃었다.
“그렇지. 날이 밝으면 이 마음도 씻겨나갈 것을 알고 있소. 그래도 달빛과 옛 동지가 곁에 있으니 입이 열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군. 그러니 해야 할 일은 하나일 수밖에.”
그리고 잔을 들어 마지막 남은 술을 비웠다. 여전히 자헤이라의 입맛에는 너무 달았지만, 이 다음을 생각하며 마시기에는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마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술병도 그것으로 바닥을 보였고, 두 사람은 잠시 더 그 곳에 있었다. 태양이 뜨기에는 아직 멀었지만, 희미하게 하늘 끝이 밝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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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검색하는 앵무새
아니 진짜 샘 이게무슨... 저는 쪼그만 로그를 드렸는데 어떻게 이런 갓글을 주시는 거예요 첫 문장부터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무장을 풀지 않고 야영지 너머를 계속해서 경계하고 있는 자헤나 평소에는 대지 않던 술을 몇 병이나 비우는 할신이나, 마침내 삶의 큰 후회이자 짐을 덜어낸 사람들인 거죠... 이 승리를 다른 이들처럼 축하하기엔 둘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잖아... 와중에 성격 드러나는 거 하... 유채님 진짜 커비 아냐 할신이랑 자헤 핑퐁하는 대화 너무너무 좋아서 빵끗 웃었잖아요 호의를 삐뚜름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자헤와 그걸 다 읽어내는 할신... 저는... 유채님이 눈 앞의 정경이나 일견 고요해보이는 씬을 묘사하시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요. 모닥불가에 앉아 천천히 입에 술을 대며 느릿이 말하는 할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은 거 있죠... 그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애도하고 짐진 채 보냈으므로 풀려나는 데에도 시간이 드는 게 당연한 거죠... 마음의 상처란 게 원인이 해결됐다고 해서 단번에 낫지 않는 것인데 유채님이 빚어주신 할신이 정말 그러해서... 너무 기분이 이상하고(좋다는 뜻입니다) 행복해요 그리고 스스로를 몰아치는 데에 익숙해진 자헤... 멈추면 죽어버리는 상어처럼 항상 움직여야만 하는 자헤도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같은 사건의 종결을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보내는 이 순간이 넘 좋아요 유채님이 넘나 아름답게 빚어주심; 천재; 자헤가 결국 할신과 마지막 잔을 같이 하는 장면... 이 장면을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고 차분하게 넣어주실 수 있어요! !! !! 날이 밝으면 둘은 털고 일어나서 다음으로 나아가겠지만, 달빛과 옛 전우가 함께 있는 이 밤만큼은 남은 술을 같이 비우는 한 순간이... 아무렇지 않은 듯 고요하고 묵직해요 새삼 두 사람 정말 으른이고 견고하고 한 전쟁을 겪어낸 사람들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ㅠㅠ 하 너무좋다... 유채님 글 1421451903번 읽어야지? 넘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 너무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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