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브+게일] 인생에는 언제나 계획이 있다
물론,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것 또한 있지만.
* 밥 님과의 연성교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게일의 지능을… 약 12 정도 깎아먹은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게일맨스 보고 오겠습니다.
언더다크에는 태양이 없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만큼 광대한 지하 공간을 헤매다 보면 그런 당연한 사실조차 잊게 되곤 했다. 버섯과 광물이 돋아난 돌벽은 끝을 가늠하는 게 의미없을 정도로 높았고, 인공적인 광원 따위는 기껏해야 그 주위를 조금 밝히는 데 그쳤다. 수서나무의 빛이 파르스름하게 물들인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이미 아는 색깔의 기억조차 지하의 빛으로 덧씌워졌다.
게일 데카리오스는 이런 풍경에 익숙하지 않다. 그에게 익숙한 것은 지하보다는 지상이었고, 개중에서도 그의 탑이었다. 근래에는 그의 깃털 달린 친구를 청결 면에서 심각하게 실망시킨 곳. 그 곳은 온갖 길 잃은 지식의 산물로 가득한 혼돈이었지만, 이 지하에 존재하는 것은 그런 수식어는 필요 없는 어둠이다. 그러나 그런 어둠에서도 살아갈 길은 생각보다 충분히 있었고, 개중 하나가 지금 일행이 꾸린 야영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온갖 버섯들과, 빛을 내는 작은 생물들이 돌아다니는 야영지의 풍경은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마법같았다. 방금 모닥불에 진짜 마법으로 불을 붙인 위저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일 수 있으나, 워터딥의 게일에게는 동화라는 비유보다는 마법이 여러모로 익숙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런 그에게도 근래 들어 익숙해진 게 몇 개는 더 있었다. 이를테면 야영지를 돌아다니며 제각기 준비를 하는 동료들의 모습이다. 불가 근처에서 정체모를 꼬치를 굽고 있는 카를라크-저건 이따가 검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와줄 것이 없는지 근처에서 대기하는 윌, 저녁 시간이면 늘 그렇듯 제 천막 근처에서 스크래치와 노는 중인 아스타리온이나… 식사 시간에도 야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음 일정을 체크하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타브라든가.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야영지 전체를 훑어본다. 분명 방금까지는 상자로 접근하는 아울베어를 막겠다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꼬마 아울베어는 할신의 품에 안겨 꾸룽거리는 중이었다. 어디 갔지?
“윌? 방금 전까지 타브가 저기 있지 않았던가?”
“아, 좀 전에 잊은 일이 없는지 보겠다고 마이코니드 군락 쪽으로 갔는데.”
그 말을 듣고, 위저드는 살며시 눈가를 좁힌다. 평소라면 전혀 문제되지 않았을 행동이다. 그러나 절망의 용광로에서 니어를 쓰러뜨리고 노움들을 구출한 이후로, 타브는 어쩐지 비에 젖은 옷가지를 항상 둘러쓴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를 바 없이 적당히 정중하고 적당히 유쾌한, 믿음직한 파티 리더였지만 발자국은 언제나 젖은 듯 무겁고 눅눅한 면이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는 슬픔보다는 묵직한 책임감, 책임감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는 마법이라면 수식할 단어가 너무 많아 탈이었지만, 이렇듯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자기가 아는 어떤 말을 가져다 붙여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벌써 저녁 준비 끝났어? 늦게라도 도우려고 했는데, 내가 한 발 늦었네.”
그리고 그들의 파티 리더는 언제나 그보다 한 발짝이 빠른 편이다. 옷에서 포자를 털어내며 야영지로 들어서는 타브의 얼굴에는 그늘이라곤 한 점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옷자락보다 살짝 뒤처지는 발걸음, 미세하게 굳은 입매 등을 발견해낸다. 그리고 그의 진실된 섬세함은 그런 것들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당장 타브에게 묻지 않는 대신 끓이던 수프 솥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에서 온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뭉근하게 끓는 냄비 속을 저으면서 남은 잔 중 쓸 만한 게 무엇이 있는지를 떠올리는 것까지가 야영지의 가장 훌륭한 요리 담당이 꾸미게 된 계획의 전말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이후에는 대개 각자 하고싶은 일들을 하곤 했는데, 이 날 게일은 가장 깨끗한 양철 잔을 두 잔 찾아 깨끗하게 닦았다. 물론 엄격한 위생 관념에 따라, 샤워를 못 할지언정 식기만큼은 깨끗하게 닦는 게 이 야영지의 법칙이었지만,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마음의 준비’라고 해도 좋았다. 잘 닦은 잔에 따뜻한 물을 붓고, 무언가 우릴 만한 것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어 야영 물자함을 뒤졌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어쩔 수 없이 물만이 든 잔 두 개를 들고 야영지 구석으로 발을 옮기는 것이 오늘의 절차였다. 그리고 그 준비는 헛되지 않아서, 익숙한 인영이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게일을 반겼다. 지금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걸음에 눅눅한 기운이 묻어나는 것 같은 타브였다.
“고마워. 웬 거야? 우리 야영지의 큰 손께 따로 챙김받을 정도로 착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오, 그럼 아까 딥 노움들을 구한 건 우리 파티 리더의 거울상이었던 건가? 진지하게 타브와 마법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드는걸.”
“이렇게 나오기야?”
“물론 일정 부분 농담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너와 진지하게-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건 진심이야.”
잔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연기 사이로, 게일 데카리오스는 타브의 얼굴을 본다. 그 표정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크게 부정적이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그는 머릿속에 마련해 두었던 온갖 언어를 다른 곳으로 치워 두고, 오로지 사실만을 무기로 묻는다.
“이런 말을 해도 실례되지 않는다면, 물론 실례가 된다면 부디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 타브, 너 요즘 힘들어 보여.”
대답이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뜨거운 물을 홀짝이는 소리가 몇 번 울렸을 뿐이다. 그리고 따뜻한 것을 마셨을 때 으레 그렇듯, 속에서부터 데워진 숨이 한 번 흩어져 나온다. 타브는 말하고 싶지 않다기보단,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혹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게일 데카리오스는 그 모든 표정에 충분한 인내를 두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시간에 필요한 것은, 두 사람의 잔이 식지 않도록 가끔 반복해서 거는 마법뿐이다. 타브의 입이 열린 것은 잔이 반쯤 빈 후였다.
“음, 사실 그렇게 크거나 중대한 문제는 아닌데…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감이 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바드식 표현인가? 이해하기 쉽고 좋은 비유라고 생각해.”
“그런 셈이지. 창작에도 기운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근래 들어 조금 더… 체감하고 있어.”
그와 타브는 언뜻 눙치고 넘어가는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에서 핵심을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는 오래 지냈다. 둘 모두 이 대화에 각자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임했고, 그런 마음은 대화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지 않아도 전해지는 법이다. 이대로 서로에게 진심이 전해졌다는 것을 체감한 채 잔이 빌 때쯤 잠자리를 꾸려도 좋았겠지만, 그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어한다. 그는 타브에게 일정 이상의 친애를 갖고 있고, 타브가 이대로 지친 채 걷지 않기를 바랐다. 위저드의 손 위에 그가 자주 쓰는 거울상이 나타난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다만, 이번에는 누군가를 공들여 조각하거나 제 자신의 거울상을 빚는 것이 아닌, 아주 단순하게 뭉개 작게 실체화시킨… 이를테면 진저맨에 가까웠다. 타브의 눈매가 언제 지쳤냐는 듯 부드럽게 가늘어졌다. 그의 이러한 ‘마법적’ 설명을 꽤 자주 들은 덕이다. 상대의 그런 표정을 눈치챈 위저드도 다분히 연극적인 태도로 거울상을 움직여 정중히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이어진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작은 게 너와 나, 그리고 우리고, 이 주위를 돌고 몸으로 들어가는 게 우리의 에너지야. 혹은 기운, 조금 유머를 섞자면 개인적인 위브라고도 할 수 있겠지? 이걸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물론 주문도 쓸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쓰이지. 걷고 말하는 기본적 행동에서부터, 우리의 선택과, 그 선택을 이행하는 의지에 따르기까지 말이야. 그런데 이 에너지는 고갈되었다는 것을 알기는 매우 쉽지만, 채우기는 꽤 어렵지. 그러면? 남은 에너지를 어떻게든 유효활용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남은 에너지만으로 자신을 지탱하려고 하면-이쯤에서 에너지가 작은 거울상의 주위를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는데, 어쩌면 여기에서 멈추는 것도 하나의 해결법이었을 것이다-이렇게 되어버리지.
펑! 소리와 함께 거울상이 터져나갔다. 순수한 위브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위로 무언가가 튀는 등의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일은 일어났고 게일은 의도하지 않은 블랙 조크를 했다는 결과까지 추가로 얻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고, 드물게 눈을 끔벅거리며 아무 말도 않는 타브를 눈앞에 두고 지능 20의 머리가 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명석한 두뇌가 도출한 결론은, 그냥 솔직한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과정이 좀 험해지긴 했지만, 요컨대, 네가 너무… 혼자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야. 이런… 종류의 에너지는, 가끔 남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채워지곤… 하더라고.”
아, 그런 말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단순하게 느껴지는지. 이 대화를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그토록 수많은 지식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아주 짤막한 진심 한 문장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앎에도, ‘그래도 이것보다는 좀 더 낫게 꾸밀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런 어색함을 타파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그 진심의 주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아, 알았어, 게일. 네가 무슨 말 하려는 지 알겠어. 정말이야.”
그러면 그토록 어색한… 내보여짐을 느끼고 있었는데도, 목표가 이루어졌다면 어쨌든 좋지 않은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 또한 워터딥의 게일이 근래의 여행을 통해 얻은 결과일 것이다.
“좋아, 괜찮아, 타브.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건 내 계획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뤘으니 된 것 같군.”
“그래, 손도 따뜻해졌고.”
“물론 그것도 내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지.”
“넌 나중에 바드로 전향해도 잘 할거야.”
“오… 내가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다고 하면 지나친 겸손이겠지. 타라가 좋아한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언더다크의 어두운 저녁도 조롱조롱 저물어 간다. 여행은 내일도 계속될 것이고, 조금 북돋아진 기운은 또 다른 발걸음의 연료가 된다. 그러나 적어도 내일부터는, 그가 보는 발걸음에 눅눅함은 사그라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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