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2)
전사(Warrior)
그 아이는 유독 체구가 작은 사막 부족이었다. 어깨에 간신히 닿는 단발은 밀밭을 닮았고 옅은 안광이 찍힌 두 눈은 맑은 하늘색이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아이가 여자 아이인지, 남자 아이인지 알 수가 없었고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본들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측이 난무할 뿐이었다. 아이는 항상 인상을 쓰고 다녔는데 누군가 말을 걸거나 잡기라도 하면 매섭게 쏘아붙이곤 했다. 품에는 다 낡은 책을 한 권 안고 다니곤 했는데 어린 아이가 읽기엔 두께가 있는 무거운 책이어서 아이는 항상 오래 걷지 못하고 어딘가에라도 앉아서 옆에 책을 두고 쉬곤 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던 것은 어떤 여름 날이었다. 소년은 오전 훈련을 마치고 산호탑 바닥에 다른 길드원들과 모여 앉아 있었다. 그날은 마치 운명처럼, 점심 식사를 산호탑에서 했던 날이었다. 평소라면 식당이나 시장에 갔을텐데 무슨 우연인지 한 길드원의 부인이 싸준 도시락을 다같이 나눠먹기로 했다. 소년은 제 몫으로 받은 도시락 박스를 들고 산호탑 구석에 앉았다. 그래, 구석이었다. 하필이면 문의 바로 앞이었다. 산호탑의 거대한 정문이 벌컥 열린 것은 소년이 도시락 뚜껑을 여는 그 순간이었다.
“계세요?”
“아악!”
예고없이 거칠게 열린 문은 소년의 등을 퍽 치곤 밀어 넘어트렸다. 앞으로 넘어진 소년의 손에서 반 정도 열린 도시락 박스가 떨어져 바닥에 잘 구운 함박 스테이크를 떨어트렸다.
“아, 미안. 있는 줄 몰랐어.”
“야, 미안하다면 다야? 이거 점심밥이란 말이야!”
“하? 그러니까 누가 문 앞에서 밥 먹으래?”
가운데 앉아 있었던 뷔른쵠이 일어나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년은 먹지도 못하고 떨어진 스테이크가 아쉬워 처음 본 아이와 다투느라 그 이름을 듣지 못했다. 소년은 우선 서둘러 엎어진 도시락 박스를 다소 안전한 곳에 살짝 밀어넣었다. 음식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한들 소년에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흘린 소스가 아쉽고 치울 일이 번거로웠을 뿐. 소년은 잠시 도시락을 아련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고개를 홱 돌려 갑자기 등장한 당돌한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을 가뿐히 무시하고 뷔른쵠에게 걸어갔다.
“스승님 심부름으로 왔는데요. 모험가 길드에서 발행된 의뢰서예요.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그래. 일부러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군.”
“그냥 우편 부치면 될 것을 말이에요.”
툴툴거리는 아이를 보고 뷔른쵠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줄곧 조용히 길드의 가장자리에서 겉돌던 소년이 제법 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반갑고 기꺼웠다. 그는 이 재밌는 상황을 좀 더 보고 싶어서 아직 열지 않은 제 도시락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우린 점심 먹는 중인데 도시락이 하나 남아서 말이야. 괜찮다면 너도 먹고 가지 그래?”
아이는 빠르게 주변에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을 훑었다. 저마다 반찬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메인 메뉴는 소년이 방금 떨어트린 함박 스테이크였다.
“전 함박 스테이크는 좀…”
“잠깐만요. 마스터! 이런 놈한테 키렌 씨의 도시락 주지 마요.”
“하?”
아이는 옆에서 따지는 소년을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또래 미코테족보다 훨씬 큰 소년을 한참 쏘아보더니 뷔른쵠이 내민 도시락을 홱 낚아챘다.
“먹고 갈래요.”
“야!”
어린 아이들은 식사하는 내내 티격태격 다퉜다. 시작은 앉는 자리였다.
“거긴 마스터가 앉는 상석이야!”
“난 바닥에 앉기 싫어.”
“마스터! 좀 뭐라고 해요.”
“난 괜찮은데. 거기 앉아라, 꼬마야.”
“봤지?”
아이는 제가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박스 위에 앉았다. 소년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앓다가 저도 괜히 그 옆에 앉았다.
“야. 내 자리야!”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딨어?”
“몸집도 더럽게 커선 먹는데 불편하니까 내려가.”
“넌 그렇게 찌끄만데 같이 좀 앉지?”
아이는 신경질적으로 소년의 팔을 퍽 쳤지만 소년은 미동도 않고 스테이크를 잘라 먹었다. 키렌의 부인은 림사 로민사의 요리사 길드 출신 주방장으로 요리 솜씨가 매우 훌륭했다. 함박 스테이크는 나이프 없이 포크만으로도 잘릴 정도로 부드러웠고 깊은 풍미가 있는 소스가 함께 곁들여졌다. 잘 익은 반숙 프라이가 콘, 파슬리와 함께 올라가 있고 옆 칸에는 약간의 샐러드와 과일이 후식으로 담겼다. 앉자마자 신경전을 벌인 것이 무색하게 어느샌가 그들은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소년은 스테이크를 절반 이상 남기곤 깨작거리는 아이를 흘긋 보더니 결국 하지 않아도 됐을 참견을 하고 말았다.
“왜 안 먹어?”
“배불러서.”
“고작 그거 먹고? 안 먹을 거면 이리 줘.”
남길 음식이었지만 남에게 주는 것은 싫은지 아이는 왠지 새초롬한 표정을 짓곤 도시락을 집어가려는 소년의 손을 피했다.
“야, 안 먹는다며?”
“너한테 주긴 싫어.”
“그렇다고 아까운 음식 남길거야? 왜 샐러드는 손도 안 댔어.”
“그럼 그 오렌지 나 줘.”
한참을 이어진 실랑이는 소년의 디저트를 아이가 먹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아이는 과일을 좋아하는지 약속된 오렌지 말고도 옆에 있던 방울 토마토와 레몬 조각까지 야무지게 집어갔다. 그럼 그것으로 또 다시 작은 말다툼이 일어났다. 아이는 빈정거리며 혓바닥을 내밀곤 소년을 도발했고 소년은 도망치려는 아이를 붙잡곤 딱밤을 때렸다. 지켜보던 동료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도끼술사 길드에는 전에 없던 활기가 돌았다.
이전엔 없었던 즐거운 점심 식사가 끝나고 아이는 뷔른쵠에게 서명 받은 의뢰서를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소년은 그제서야 아이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이는 새침하게 쏘아붙이곤 소개 없이 떠났다. 소년은 아이가 떠난 뒤 바닥에 쏟은 소스를 치우며 아이에 대해 물었다.
“저 아이는 비술사 길드 소속이다. 투뷔르가임 아래에서 비술을 배우고 있지.”
“비술이란 건 뭐죠?”
“나도 잘 모르겠다만 사역마를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하더군. 숙련된 비술사들은 소환사나 학자가 되는데 특히 학자들은 군학마법을 다루는 치유사들이야. 가끔 연합 작전 때문에 비술사들이 길드에 오곤 해. 우리 길드에도 ‘알카 졸카’라고 불리던 라라펠 도끼술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비술사 길드에서 파견 나온 모험가와 그 해병대를 조사했었지.”
“어려운 이야기네요…….”
“그 애는 지식에 대한 열정이 엄청나서 밤낮없이 책만 읽는다고 하던데 비술에 대한 재능이 상당해서 장차 군의가 되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그런 녀석이 의사가 된다고요? 저라면 진료 받고 싶지 않을 거 같은데.”
“하하하! 까칠한 면도 있지만 그건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그런 것 뿐이다. 솔직하고 좋은 아이야.”
소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닥을 닦았다.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따박따박 따지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에 채인 등이 얼얼하고 종일 싸워서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파도 치듯 술렁였다. 가능하면 우연이라도 좋으니 한 번 더 마주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었다.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제게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것에 점심이 맛있었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이유를 붙였다. 오후에도 훈련이 있었고 다 끝나고 나서는 쉴 틈도 없이 주점으로 출근해 밤 늦게까지 일했지만 답지 않게 소년은 어딘가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궁금했다. ‘친구’라는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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