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hird day
and the first letter,
The third day
and the first letter,
서재의 문을 여니 키 높은 책장들 틈으로 달빛이 들어온다. 높은 그늘로 가득함에도 이곳이 우중충하지 않은 이유는 따뜻한 종이로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를 맡으며 가장 가까운 곳에 꽂혀 있는 책을 꺼내 보았다. 손 떼 묻은 가죽 표지, 닳은 금박 장식이 책의 세월을 나타내는 것 같다. 자연스레 책을 펼치려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오늘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아틀리에에 처음 온 것이 마냥 기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편지를 쓰는 일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잠들 시간이 지나도 서재 밖으로 나가지 못하리라. 생각으로 시간을 자주 새곤 하는 자신의 성미를 잘 알았기 때문에 유혹을 뿌리치곤 책을 제 자리에 꽂아둔다.
자리를 잡은 곳은 서재 모퉁이에 놓인 책상이었다. 책더미로 파묻힌 곳이 꼭 비밀 요새 같다며 소리 없이 키득 이곤 의자를 끈다. 드르륵-. 아무도 없는 공간에 마룻바닥을 긁는 소리가 조심스럽다. 사뿐히 자리에 앉곤, 짐을 담은 보따리를 푼다. 오늘의 할 일이 적힌 노트, 아이디어 노트, 마법 전용 원형 메모지, 필담용 메모지와 펜, 그리고 편지지. 짐을 풀어 늘려 놓은 것만으로 작은 달성감을 느끼며 글을 적어 내려간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모두 잘 지내고 계시죠? 저는 무사히 아틀리에 르 파라디에 도착했답니다. 아틀리에에 들어온 지 셋째 날이 지나서야 편지를 쓸 수 있는 만큼 가슴이 진정되었어요. 너무 들뜬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이곳은 정말 신기한 곳이에요. 다른 아틀리에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카룬에서도 보지 못한 신기한 마법 도구들도 많고, 마법서들도 무지무지 많이 꽂혀있어요. 어떤 용도에 쓰는 기구이고,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 책인지는 모르지만 이것들을 알아갈 것이 정말 기대돼요. 기숙사 개인 방은 아담하답니다. 방에는 작은 창이 있어서 밖을 내다보면 멀리 있는 산과 까마득한 들판이 내려다보여요. 밖으로 나가면 탁 트인 하늘이 보이고요. 정말 아름다워서 언젠가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네요.'
쭉 적어내려다가 펜은 잉크에 담가두고 비죽비죽 번진 글씨를 바라본다. 두근거림에 손이 떨렸기 때문이다. 이곳을 졸업하게 되면 나도 진정한 마법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 대마법사, 운명, 행복. 떠오르기만 해도 두근거리는 미래를 때문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두근거리고, 소중한 무언가를 만나서 일까?
'처음 아틀리에에 도착한 날에는 모두가 돌아가면서 한 번씩 자기소개했어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정말 개성 넘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상냥하고, 따뜻하기까지요. 마음 같아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해 한명 한명 편지지를 꼭꼭 채워 적고 싶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그리고 내가 이 사람들을 더욱 잘 알게 되었을 때 소개해줄게요. 무엇을 좋아하는 친구인지, 어떤 꿈을 가진 친구인지, 그런 것들을 말이에요.
걱정마세요. 두 분 딸은 자기소개를 훌륭히 해냈답니다! 도중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아쉬웠지만, 스케치북에 미리 인사말을 적어두고 제 소개를 했어요. 부유 마법진을 잘 그린다고 칭찬까지 받았지요. 그리고….
쉬이 다음 문장을 적지 못한다. 펜을 쥔 손가락을 꼼질 거르느라 중지에 잉크가 묻은 것도 모르고 한참을 망설이다 글을 적어 내려간다.
'유독, 제 발표 때 모든 아이가 조용했어요. 스무 여명의 시선이 스케치북과, 수화하는 손끝,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입술을 향했지요. '조금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지루해하거나 재미없어하면 어떡하지?' 여러 걱정이 앞서더라고요.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해본 적은 없어서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발표를 끝낼 수 있어요.
엄마, 아빠. 나는 그런 발표가 있을 때 누군가가 건네는 농담에 바로 대꾸할 줄도 모르는 재미없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건 여전히 어렵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아틀리에에 모인 친구들이 오롯이 저에게 집중해주던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요. 5분 정도의 짧은 시간, 같은 말을 해도 남들보다 곱절은 더 걸릴지 모르는 순간 동안 친구들은 제 말을 분명 '듣고' 있었으니까요.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죠? 앞으로도 분명 더 행복한 일들이 가득할 거예요. 그럼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하세요. 또 편지할게요.
두 분을 정말 좋아하는,
라벤더 드림.'
잉크가 잠시 마를 때까지 적힌 글씨를 본다. 고르지 못하지만 떨리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글씨. 소녀는 잠시 턱을 괴고 눈을 감으며 이곳에서의 첫인상을 떠올린다.
가슴이 떨리도록 고요하고, 오롯했던 시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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