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에(上)
그들이 만났을 때
이슈가르드의 빈민가에 바로 닿아 있는 재개발 구역, 지고천 거리의 한 모퉁이에 그림자 지평선이라 간판을 건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는 겉으로 보기엔 술집이나 다름 없었지만 출입하는 이들은 죄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는 용병들이요, 때론 무법자들이라. 벽을 뒤집으면 비밀스러운 방이 나오고 게시판엔 수상한 전단들이 가득하며 오가는 말들은 험악하기 그지없는 욕설과 의미심장한 겁박이었다. 용병들의 세계 중 가장 어둡다 일컬어도 모자람이 없을 그 수라장의 유일한 질서는 어느 휴런 남성이어서. 길을 잘못 찾아 열게 된 문 앞에서 집채 만한 용병들과 빛나는 쇠붙이들에도 기죽지 않고 만용을 부린 소년을 구한 것도 그 남자였다. 그로부터 5년, 소년은 고향인 림사 로민사로 돌아가지도 않고 틈만 나면 지고천 거리를 드나들었다. 자랑으로 여겼던 순수 학파의 치유서가 어느 날은 무거운 도끼가 되고 어느 날은 잘 벼린 외날검이 되었다. 그곳을 드나들며 기공방에서 만드는 총을 받기도 했고 전혀 다른 마법을 배우기도 했다. 배우는 게 빨랐던 소년은 어린 나이에 다채로운 능력을 갖춘 용병이 됐고 그들은 맹랑한 막내가 된 작은 라라펠 소년을 사랑했다. 세상이 그들을 손가락질 해도 소년은 그림자들이 그리는 지평선을 동경했다. 커다란 동경심이 그보다 더 큰 상처로 돌아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었다.
며칠은 가게를 닫을테니 나오지 말라던 말을 믿고 림사 로민사로 돌아갔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리움에 부푼 마음으로 처음으로 완수한, 도장 찍힌 임무지를 들고 갔던 가게엔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없었다. 간판은 떨어져 있었고 마룻바닥은 뜯어졌으며 습기 찬 벽은 핏빛이었다. 전등은 깨져 있었고 있던 가구들은 전부 박살이 난 채 제자리를 벗어나 굴러 다녔다. 다같이 귀여워하며 길렀던 고양이 시체엔 그새 구더기가 폈다. 구역질에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을 때 밟힌 것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손가락이었다. 소년은 짓눌려 부서진 손가락에 비명을 지르며 그림자를 빠져 나왔다.
반 년 간은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이슈가르드를 떠나 울다하로 향했다. 그동안은 그림자 지평선에 줄곧 물건을 납품했던 상회 백색사장에 머물렀다. 언젠지 모르게 울다하로 이적한 뒤 제법 크기가 커져 국제시장 거리의 한 켠에 제대로 된 사무소가 있었다. 백색사장의 주인 페드로는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 온 소년을 물리지 않고 따듯하게 반겼다. 그는 한동안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소년을 거두어 돌봐주었고 그 시간 동안 소년은 자질구레한 상회 일을 도왔다. 소년은 원래 셈을 잘했고 이치를 잘 따졌으니 장사에 제법 도움이 되는 일이 많았다.
이슈가르드로 가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질 쯤 소년은 가게로 돌아갔다.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것인지 소년이 도망쳤던 날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소년은 조금씩 가게를 정리했다. 떨어져서 폭설에 파묻힌 가게 간판을 꺼내 실내로 들여놓고, 이젠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어진 생명의 잔재들은 명복을 빌고 처분했다. 그러나 다 부서져버린 가구나 더럽다 못해 썩어버린 벽과 바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게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선 큰돈이 필요했다.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년은 용병업을 택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돈이 되는 의뢰라면 뭐든지 했고, 잔재주가 많았기에 직업도 필요하다면 자유자재로 바꿨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배운 기술로 누군가를 해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명분은 의뢰가 끝나고 손에 떨어지는 돈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소년은 조금씩 가게를 복구했다. 벽과 바닥을 바꾸고 원래의 것과 최대한 비슷한 가구들로 텅 빈 공간을 다시 채웠다. 생명과 마음의 값은 상당한 고액이었기에 가게는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갖춰갔다. 마침내 소년은 새로 만든 가게의 간판을 받았지만, 그 간판을 세우진 않았다. 가게의 주인, 넉살 좋게 웃곤 했던 그 남자의 자리에 비스듬히 세워뒀을 뿐이었다. 그가 온다면 언제라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소년은 그 전까지, 라며 매일 밤 가게를 치우고 그 속에 작은 촛불을 켜고 앉아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렸다. 그 뒤의 의뢰로 번 돈들은 그 남자가 그렇게 했듯이 이슈가르드의 빈민촌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베풀 줄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남는 돈을 들고 빈민가를 돌아다니곤 했다.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라고 소개하며. 한동안 이슈가르드에 쭉 머물렀지만, 그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또 자그마치 반 년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그림자가 사라진 지 1년 만에 소년은 오지 않는 남자를 찾아 떠났다.
단서가 전혀 없었기에 소년은 한동안 다시 백색사장을 들락거리며 페드로에게 사정을 물었다. 그는 간혹 새로운 단서들을 주긴 했지만 거의 수확이 없었다. 그래도 소년은 매번 고맙다며 의뢰로 벌어들인 돈을 주곤 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일부러 사람들과 접촉하고 용병과 모험가가 자주 모이는 곳이라면 빠짐없이 들렀다. 신분을 속이고 모험가 길드에 등록하기도 하고 유명 상회 소속 상인들이나 고객과 접촉하기도 여럿. 도움 되는 단서가 나올 때까지 헛수고도 1년이나 했다. 그리고 어느 가을, 소년은 기어이 ‘유효’하다고 말해도 좋을 단서를 찾아냈다.
소년이 남자를 만났던 건 찰나였다. 소년은 아주 짧은 순간에 남자가 쓰는 기술에서 스승을 엿보았다. 소년은 그저 지나칠 수 있었던 작은 우연을 붙잡았다. 허탕치고 돌아가길 반복했던 몇 년의 시간에서 그 남자는 가장 확실한 단서였다. 소년은 다짜고짜 그 남자를 붙잡기 보다는 조금 더 영리한 수를 썼다. 당시 림사 로민사에 머물렀던 소년은 그 동안 쌓았던 주변 인망에 기대서 그의 다음 임무를 알아냈고, 공석이었던 치유사의 자리를 가짜 신분으로 채웠다. 파티가 출발하고 끝날 때까지 남자와 소년은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불필요한 수고를 들이지 않는 노련함을 보였고 한 번의 합으로 동료의 능력을 잘 가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감당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정도의 템포로 파티를 이끌었고 그는 숙련된 수호자였기 때문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있을 터였다. 소년이 임무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심이 없지 않았더라면.
소년의 시선은 줄곧 파티의 선두에 있는 아우라 남자를 향해 있었다. 소년은 남자를 노려보며 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뜯어 관찰했다. 남자의 동작은 거칠고 다소 자유분방했던 스승의 것보다 절제되어 있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전체적인 움직임이나 몸의 무게중심,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한 기술까지. 그의 것이 아닌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소년에겐 마지막 확신이 필요했다. 가장 위급한 때에 생명을 대가로 찰나를 벌어낼 수 있는, 폭발해 사라지는 유성과도 같은 기술을 보지 않으면. 소년은 여유분의 에테르를 남겨두고 마지막 타이밍을 가늠했다. 설령 잘못된 생각으로 그가 크게 다치고 파티 전반이 위험에 처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년은 2년 만에 찾은 단서를 손에 쥐고 싶었다.
“저기, 학자님! 건브레이커님이 위험해 보이는데…”
쌍검을 휘두르던 닌자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낸 그 순간에, 건블레이드 끝에 맺힌 눈부신 빛이 맑은 하늘을 쏘아 올렸다. 굉음과 맞바꾼 무적의 방어막을 확인하자마자 소년은 소환수를 집어 삼키고 있는대로 에테르를 쏟아부었다. 그는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에도 치유사의 무모함과 거짓된 서투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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