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그림자를 모르되(上)
그림자는 빛을 그리워 한다
“벌써 사흘 째다쿠뽀…….”
림사 로민사의 배달부 모그리였다. 편지 수십 통을 꾹꾹 구겨 담고 안갯빛 마을의 한 켠으로 배달 온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삼 일 동안 수 통의 편지가 각자 다른 곳에서 왔지만 수신인은 항상 똑같았다. 모그리는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마당 안쪽에 인기척을 느끼고 그만뒀다.
“편지 배달 왔다쿠뽀!”
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전사는 대문 너머에서 들리는 기운차고 발랄한 목소리에 아침 운동을 멈추고 대문을 열었다. 배달부 모그리는 전사가 문을 열자마자 양손에 미리 쥐고 있던 편지 묶음을 내밀었다. 대충 다섯, 여섯 쯤 되는 편지 봉투들이 싸구려 노끈으로 엮여 있었다. 편지 봉투들은 각자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우표나 도장도 전부 달랐지만 오늘도 여전히 받는 사람은 똑같았다.
“얘는 무슨 편지를 이렇게 매일 받아? 고생이네, 너도.”
“알면 좀 직접 받으러 오라 해라쿠뽀. 솔직히 이제 주소도 외우게 생겼다쿠뽀.”
“말은 한 번 해볼게… 주스라도 마실래?”
“바빠서 괜찮다쿠뽀.”
바쁘다는 말은 핑계가 아니었는지 배달부 모그리는 용건이 끝나자마자 곧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조그만 배달 가방을 메고 뒤뚱뒤뚱 날아가 버렸다. 매일 아침 하는 운동을 다 마치진 못했지만 편지를 받았기에, 전사는 대충 목에 두른 타올로 땀을 닦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한참이고 일러서 새초롬한 새벽의 끝자락 하늘이 거실 창으로 어스름한 빛을 들이고 있었다. 이 집에서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건 전사였고 아직까진 일어날 사람이 없었으니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거실 소파에 사무라이가 자고 있었기에 전사는 가능한 조용히 다른 방문보다 낮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학자~.”
방 주인은 인기척이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깨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밑줄, 메모가 가득한 펼쳐진 책들, 책상 정가운데에 펼쳐 둔 도면, 전투 대형 설계도와 던전 지도들, 며칠 간 폭발적으로 쏟아졌던 우편물들. 밤새 일하다 책상에서 잠든 것이 분명했다. 전사는 학자를 깨우는 대신 조그만 몸을 의자에서 덜렁 들어 침대 이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원랜 편지가 오면 곧바로 전해주는 게 정해진 규칙이었지만 과로한 몸을 더 혹사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어둑하게 켜진 전등 불을 끄고 나오니, 맞은 편 방문에서 건브레이커가 나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전사님.”
“일어났어? 아침 준비할까.”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할까요?”
“음… 샌드위치는 내가 할 테니까 스프 하나만 끓여줄래? 학자가 영 잠을 못 잔 거 같아서.”
건브레이커 역시 잠을 못 잔 학자가 아침 식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먼저 부엌으로 들어섰다. 장을 본 지 오래 되어서 재료가 풍족하진 않았지만 아침 샌드위치를 만들 만한 채소와 계란 정도는 남아 있었다.
“씻고 오시는 동안 필요한 것 꺼내 둘게요.”
“응, 아. 브로콜리 스프는 안 돼… 절대 안 먹을거야.”
그들은 서로 실없이 마주 웃고 돌아섰다. 전사가 씻고 나올 때 쯤 백마도사가 바깥으로 나왔다. 달리 예정된 일정이 없는 날이기에 임무 나갈 때 입는 치유사 장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격식 있는 옷으로 환복한 채였다. 언제 나왔는지 적마도사 역시 거실 소파 한 켠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두 마법사가 나오고 나서 닌자와 무도가도 거실로 나왔다.
“헉… 무도가님. 그거 잠옷?”
“어, 네! …혹시 안 어울려요?”
“아니 너무 귀여워서 물어봤어요.”
말대로 무도가가 입고 있는 것은 최근 트레저 헌터들이 미궁에서 얻어 온다는 옷감으로 만든 잠옷이었는데, 초코보 무늬가 가득 그려진 깜찍한 잠옷이었다. 귀엽다는 말이 저를 향한 것인지 잠옷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 채 헤실 웃던 무도가는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사무라이를 흔들어 깨웠다.
“사무님, 일어나요!”
그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뒤척이다 이내 소파 구석으로 웅크려 이불을 도로 덮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 쳐다보던 닌자는 조용히 무도가를 옆으로 밀어내고 신고 있던 실내화를 벗어 사무라이를 마구 두들겼다. 너다섯 대까진 그냥 웅크린 채 맞던 사무라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불을 확 걷어내며 일어나 닌자의 손에서 실내화를 빼앗았다.
“아, 진짜… 넌 뭐가 문제냐?”
“깨워도 안 일어나는 당신이 문제죠.”
한참 쉬어버린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사무라이는 결국 등쌀에 못이겨 억지로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는 잠깐 앉은 채로 졸다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곤 씻으러 방 안으로 비척비척 들어갔다. 그쯤 해서 아침 식사도 준비가 끝나서, 전사는 상차림을 건브레이커에게 맡기고 마지막으로 학자를 깨우러 들어갔다.
“학자, 일어나! 밥 먹자.”
말을 걸어도 학자는 좀처럼 깨어나질 못했다. 전사는 창을 가린 두꺼운 커튼을 옆으로 확 젖혔다. 이미 해가 다 떠버린 아침의 햇살이 강렬하게 학자를 비췄다. 얼굴에 쏘인 햇빛에 낯이 구겨진 학자는 이불을 끌어 얼굴을 가렸다. 아니, 가리려고 했다. 그 시도는 전사에 의해서 완벽하게 저지 됐다. 그는 조그만 이불 끄트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걷어 침대 아래로 흘렸다. 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마구 들이쳤다. 학자는 마지못해 일어나는 척 몸을 일으키다가 솜 베개를 휘둘렀다.
“야, 왜 때려? 밥 먹으라니까!”
“안 먹어.”
이쪽도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학자는 침대 아래로 떨어진 이불을 쥐려고 손을 뻗다 짧은 팔 탓에 닿지 않자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다시 잠들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고 커튼을 걷고 이불을 빼앗은 뒤 베개에 한 번 맞은 것은 학자의 아침밥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오래 함께 한 만큼 서로의 강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동시에 약점도 잘 알았다. 전사는 미리 들고 온 얼음 주머니를 꺼내 학자의 목에 예고없이 댔다. 이전에 없던 패턴에 소스라치게 놀란 학자는 바로 몸을 뒤집으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야! 미쳤어?!”
“5분 안에 안 나오면 옷 안에 얼음 쏟을 거야.”
예상대로의 반응에 전사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적당히 접어 침대 한 켠에 두곤 방 밖으로 나갔다. 어쩔 수 없이 학자가 일어나 아침 식탁에 앉으면서, 8명 전원이 기상을 마쳤다. 식탁 위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베이컨 샌드위치와 따끈한 양송이 스프가 주스, 커피와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엔 좀 조용할 법도 한데 사람이 여덟 명이나 되어서인지 아침 식사도 소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저 스프 좀 덜어주세요!”
“닌자. 국자 좀 줘 봐.”
“싫은데요? 제가 드릴 거예요.”
“…국자는 저한테 있습니다만.”
한 쪽에서는 무도가의 그릇에 스프를 덜어주는 문제로 소란스러웠고, 반대쪽에선 학자의 식단으로 시끄러웠다.
“샌드위치 좀 드시겠어요, 학자님?”
“전 됐어요… 스프만 주세요.”
“또 대충 먹지? 그러니까 툭 하면 픽픽 쓰러지는 거야.”
“한 조각 정돈 드시는 게 어때요? 베이컨 들어서 맛있는데.”
소란은 결국 백마도사의 권유에 못 이겨 학자가 한 조각 집는 것으로 끝났다.
아침 식사 후엔 각자의 일과가 시작됐다. 적마도사는 비술사 길드에서 빌린 서적을 돌려줘야 한다며 외출했고, 닌자는 점심 무렵 무도가의 잠옷을 핑계로 함께 국제 시장 거리에 가자며 함께 나갔다. 달리 할 일이 없던 사무라이는 드물게 늘어진 채 다시 거실에서 잠들었다. 전사와 학자는 식사가 끝난 이후로 계속 식탁에 남아 있었다. 전사는 그새 테이블 위에 둔 편지 뭉치를 열고 있는 학자의 앞에 따듯하게 데핀 우유를 한 잔 두었다. 근래 과로가 심해 피곤해 보여 차마 이틀 간 묻지 못했던 질문들이 기어이 튀어나갔다.
“요즘 왜 이렇게 편지가 많이 와? 어디서 온 거야? 개인적인 편지인가?”
“공격대 앞으로 온 편지야… 대부분이 자잘한 의뢰서고.”
“그럼 내 이름으로… 오는 거 아니었어?”
“네 이름을 몰랐나 보지.”
대꾸하는 목소리가 제법 까칠해서 전사는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건브레이커와 백마도사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두 분 다 계셨네요. 전사님이랑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시간 어떠세요?”
“이번에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있는데 아직 잘 안 돼서요. 학자님의 부담을 좀 줄여주고 싶어서 배리어 기술을 만드는 중이에요.”
“오, 그거 좋네! 근데 가능한 거야?”
“글쎄요. 가능할 지 불가능할 지는 제 나름에 달렸죠.”
백마도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사는 흔쾌히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학자에게 시선이 미쳤다. 우유를 홀짝이며 편지를 읽던 학자는 선 채로 미적거리는 전사를 흘겨봤다.
“왜.”
“중요한 의뢰 내용이면 옆에 있을까?”
“뭔… 나가.”
새침한 대답에 전사는 흘긋 눈치를 살피다 바깥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못 이겨 마당으로 나섰다. 전사가 밖으로 나서자 주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학자는 다섯 통 째의 편지를 도로 접어 편지 봉투 안에 넣었다. 이틀 전에 온 편지는 총 네 통이었는데 각각 라노시아, 검은장막 숲, 다날란, 그리고 모르도나에서 온 편지였고 각지에서 수행하는 의뢰였다. 의뢰 내용 자체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쉬운 난이도였는데 보상 액수가 상당히 커서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해결했다. 어제 온 편지는 세 통 정도였는데 기초 자료 조사와 네 명 정도가 필요한 토벌 임무, 전투 대형을 짜달라는 내용이었다. 자료 조사는 수중에 가지고 있는 책들로만 해도 한참 걸렸고 토벌 대상에 대한 정보를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전투 대형 역시 특수한 던전용이라 밤새 다 마치지 못한 참이었다. 한동안 대규모 전투로 다같이 고생한 후 얼마 없는 휴식기였기에 가급적 다른 멤버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며칠 간 무리한 것이었지만 사흘 째 되자 글자 읽는 것도 벅찼다. 학자는 잠시 고개를 젖히고 뻑뻑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지막 편지는 멀리 오사드에서 온 편지였다. 오래된 듯 색이 바란 편지지에 바른 글씨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수색 의뢰.
먼 옛날 오사드 대륙에서 사라진 남성 비에라를 찾고 있음.
“아~ 아. 휴식기에도 열심히 일하는구만.”
거기까지 읽었을 때, 누군가 뒤에서 학자가 읽고 있던 편지를 홱 낚아챘다.
“…사무님.”
극도로 피곤한 탓에 별 것 아닌 일에도 신경이 튀었다.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라면 화낼 일도 없는데 그저 누군가 끼어들어 방해한 것만이 짜증이 났다. 날선 반응에 사무라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낚아 챈 편지를 접었다.
“일 좀 그만 해. 그것도 병이다. 돈이 없어서 그래?”
“제 앞으로 온 편지예요.”
“어차피 의뢰서잖아? 혼자 고생하는 게 뻔하니까 미안해서 그러지. 이건 내가 처리할게~.”
그는 손을 휘적거리며 편지를 옷 속에 집어넣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편지를 빼앗겼다고 붙잡아 뭐라고 하기에 학자는 너무 지쳐 있었고, 눈앞이 뱅글 돌 만큼 피곤했다. 흐릿한 정신은 숙련된 용병인 사무라이라면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라는 막연한 낙관으로 이어졌다. 소모된 정신은 마모된 몸을 침대로 이끌어 이불 속에 파묻혔다.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하면 되겠지, 늦은 건 아무것도 없어…… 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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