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루루]어디서든 노크를 부탁드려요 2
현대 AU 대학생 스자쿠 X 재앙의 헌신 를르슈
Written by. 이스터
2024.05.05
스자쿠와 를르슈는 각자 가방을 짊어졌다. 그날의 쇼핑으로 를르슈에게도 꽤 많은 개인 물건이 생겼다. 자잘한 생필품까지 모두 구매하는 스자쿠와 를르슈를 보며 친구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아직 이삿짐이 다 정리가 안되어 그렇다는 핑계로 겨우 상황을 모면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곧 리발이 6인승 승합차를 몰고 나타났다. 조수석에는 미레이가, 뒷좌석에는 안쪽부터 셜리, 를르슈, 스자쿠, 니나가 차례로 앉았다. 차량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여름과 바캉스를 노래하는 음악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부서지는 빛무리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를르슈, 수영 할 줄 알아?”
여행으로 떨리는 마음만큼 다른 쪽으로 셜리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겨우 두 번째 봤을 뿐이지만 를르슈는 잘생기고, 친절했으며,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남자였다. 그녀는 수줍은 마음을 숨기며 먼저 말을 붙였다. 미남은 용기 있는 자가 쟁취하는 것. 행동력 있고 용감한 셜리였다.
“아니, 수영 해본 적 없어서-”
“아 정말? 나 수영부거든 내가 알려줘도 돼?”
“대단하다 셜리. 그럼 부탁할게.”
나이스 셜리 페넷!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벽한 찬스였다. 백미러로 음흉한 눈빛의 미레이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애써 모른 척 하며 를르슈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우와-”
“멋있어요 회장!”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도 해.”
개인 소유의 해변이라는 건 정말 어마어마했다. 사람이 없어 깨끗한 백사장과 고요한 공기를 가르는 파도 소리. 해변과 연결된 별장의 계단. 분명 엄청난 관리비가 들음 직했지만 여름 바다의 풍경은 그런 세속적인 생각을 뒤로 밀어버렸다.
여자들이 수영복을 갈아입는 동안 파라솔 두어개와 돗자리, 선베드까지 착착 펼쳐놓은 세 사람은 아이스박스에 담긴 시원한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그러고 보니 를르슈는 엄청 하얗다. 액티비티 같은 거 안 좋아 하나 봐?”
“응,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활동적인 스자쿠 옆에서 팔다리를 훤히 내놓고 있으려니 그의 흰 피부가 더욱 도드라졌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덥고 습한 공기에 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왔다. 결국 스자쿠와 리발은 걸치고 있던 반팔 셔츠를 벗어버렸다. 리발이 운동으로 다져진 스자쿠의 몸매를 부럽다며 조잘대다, 를르슈에게 고개를 돌렸다.
“를르슈는 안 더워? 땀을 하나도 안 흘리네.”
“어? 아, 그게-”
아뿔싸. 치밀한 를르슈가 미처 간과한 것. 인간은 정온동물이라 몸의 온도가 올라가면 낮추기 위해 땀을 분비한다. 급박하게 머리를 굴리는 그때, 알맞은 타이밍으로 뒤에서 저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오래 걸렸지!”
짙은 파란색 비키니에 얇은 카디건을 걸친 미레이와, 분홍색의 귀여운 비키니를 입고 리본 달린 밀짚모자를 쓴 셜리, 차분한 원피스 수영복 차림의 니나가 다가왔다. 리발은 달아오른 얼굴을 어쩔 줄 몰라 시선을 돌렸고, 스자쿠와 를르슈는 잘 어울린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설치하느라 힘들었겠다. 고마워 고생했어.”
미레이의 칭찬에 평소 같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뻔뻔하게 굴 리발이었으나 어째 눈도 못 마주친다. 다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여름의 한 장면 이었다.
서로 빠뜨리고 빠지고. 한껏 물을 뒤집어쓴 여섯 사람이 겨우 숨을 돌렸다. 때마침 아이스박스에 담겨있던 음료가 떨어졌고, 별장 안으로 스자쿠와 를르슈가 음료를 가지러 갔다.
“재미있어 를르슈?”
“응, 좋네. 네 말대로야. 모두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주종관계가 맞았다. 세상에 헌신한 재앙과 그의 기사. 하지만 왠지 스자쿠는 정말로 를르슈가 어린 시절 소꿉친구 처럼 느껴졌다. 를르슈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그 계약 마법 때문일까? 스자쿠는 를르슈가 들고 있던 아이스박스를 낚아채 뺏어 들었다.
다 마신 음료를 쓰레기통에 넣고 차가운 맥주와 물, 콜라 따위를 담은 가방을 다시 들고 나가려는데 주방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통로에 걸린 가족사진에 를르슈의 시선이 머문다.
“미레이 선배 어릴 때인가 봐. 지금이랑 똑같네.”
를르슈의 옆에 선 스자쿠가 말했다. 스자쿠는 단정하고 귀여운 원피스 차림의 미레이와 그녀의 뒤에 나란히 서 있는 부모님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혹시… 를르슈도 가족이 있어?”
“…응.”
를르슈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스자쿠는 왠지 그 목소리를 듣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실컷 물놀이를 하고 먹는 밥은 허술했지만 맛있었다. 식사 후엔 다 같이 불꽃놀이를 하기로 했기에 바닷바람을 막아줄 얇은 외투를 찾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먼저 옷을 갈아입고 있던 를르슈가 있었다.
“를르슈.”
“응, 스자쿠.”
티셔츠 위에 긴팔 셔츠를 걸친 를르슈가 거울을 보며 대답한다. 스자쿠는 곁으로 다가가 뒷목의 셔츠 깃을 정리해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까, 가족이 있다고 한 거 말이야. 궁금한데 얘기해줄 수 있어?”
거울을 통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스자쿠는 똑같이 거울 속에 있는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한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하지만, 를르슈.”
그때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렸다.
‘쿠루루기 스자쿠. 나를 거역할 셈인가?’
‘…를르슈…’
‘내가 재앙을 유예해준 건 오로지 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임을 잊지 마.’
먼저 문을 열고 나간 건 스자쿠였다.
다 같이 모여 조잡하게 나마 어둠을 수놓는 불빛을 손에 들었다. 사진을 찍고 삼삼오오 모여 조잘댄다. 셜리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가 다 타버린 막대를 물통에 집어넣고는 맥주를 집어 들었다.
술과 피곤함에 잠겨 다들 잠든 저녁. 스자쿠는 목마름에 눈을 떴다. 잠들기 전보다 휑한 옆을 돌아보니 분명 옆자리에 누워있던 를르슈가 보이지 않았다.
“를르슈…?”
혹여나 다른 사람의 수면을 방해할까 살금살금 방안을 나온 스자쿠는 넓은 집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스자쿠를 찾았다.
“를르슈… 여기서 뭐 해?”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통로, 낮에 봤던 가족사진 앞에 서 있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가 그의 뒤로 다가갔다.
“를르슈, 나는 네가 궁금해.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는지,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 건지.”
“쿠루루기-…!!”
여전히 뒤에 서 있던 스자쿠가 를르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빨라진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파묻고 있는 갈색 머리칼을 돌아보았다.
“혼자서 슬퍼하지 마 를르슈. 그런 건 하나도 친절하지 않아.”
“… 내가 말했지. 너는 재앙의 아티팩트라고.”
“…응,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찾아올 수 있었다고 했지.”
“우주의 소멸이 순리이듯 네 인생도 운명의 점칠 이다.”
“무슨 뜻이야…?”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여전히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팔을 풀어낸 를르슈가 몸을 돌려 섰다.
“네 어머니, 아버지, 유피…”
“…네가. 유, 유피를 어떻게…”
“나의 종의 운명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유피, 유피가 내 운명에 연관되어 있다는 거야…?”
“재앙을 부르는 아티팩트의 운명이 그리 순탄하고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유피, 유피는…”
초록색 눈망울에 물이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스자쿠의 표정에 를르슈가 시선을 돌렸다.
“유피는 내 여자친구였어… 다정하고 착하고… 네가 말하는 친절한 세계에 가장 어울리는 아이였어.”
“그래 그랬겠지. 그러니 네가 사랑했겠지. 그래서 그런 거야. 나의 기사여.”
후두득 커다란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스자쿠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유피를 사랑해서… 죽었다는 거야…? 그것도, 그렇게 잔인하게…?”
유피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던 중 다친 길고양이를 발견한 그녀가 지나가던 스자쿠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유피는 몸이 약해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스자쿠는 유피에게 다니지 못하는 학교의 일상을 들려주었고, 유피는 스자쿠의 이야기를 들으며 빨리 나아야겠다고 치료의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스자쿠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날 저녁 그녀는 더럽고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살행당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고요한 저택을 스자쿠의 절규가 채웠다. 다행이 침실은 모두 2층이라 누군가 깨어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스자쿠는 짐승처럼 꺽꺽 소리 내 울었다.
“흑 유피, 유피…흐, 흐윽, 유피… 흐어엉. 유피!!”
“재앙의 운명이란 그런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내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듯이.”
“흐으, 흐억, 하으, 흑…”
“나의 기사여, 너의 주인이 명한다.”
를르슈의 보랏빛 눈동자에 붉은 문양이 나타났다. 그 어떤 때보다 깊고 진한 것이었다.
“나를 죽여라, 너의 주인을 베어라. 너의 검은 무엇이든 벨 수 있고, 너의 걸음엔 막힘이 없을 것이다. 그 분노를 양분 삼아 주인을 베고 너의 세계를 지켜라.”
스자쿠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고 동공 위에 붉은 문양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를르슈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번졌다.
“잘 있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
그때, 스자쿠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를르슈가 느끼는 스자쿠의 심박수가 빨라지더니 스자쿠의 입술이 열린다.
“…내가 베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네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따위 시련을 내린 운명이야…를르슈…”
풀썩- 스자쿠가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허겁지겁 겨우 그의 몸을 받아낸 를르슈의 얼굴엔 당황이 번졌다.
“스자쿠, 스자쿠, 정신 차려, 스자쿠!”
흔들어보지만 스자쿠는 미동이 없었다. 다행히 스자쿠의 고른 숨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느껴지는 심박수도 정상이었다. 제 품에서 잠든 스자쿠의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해서 를르슈는 하- 맥 풀린 한숨을 쉬었다.
“…살아라 스자쿠. 나를 위해 죽지 마. 오롯이 너를 위해 살아.”
를르슈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스자쿠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음날 아침, 거실 바닥에 누워 잠든 두 사람을 깨운 건 어리둥절한 표정의 네 사람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같이 지낸 지 한 달 남짓한 시간 중에서 가장 숨이 막혀왔다. 스자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를르슈도 원래 평범한 인간이었어?”
“내 기억이 조작된 게 아니라면. 맞아.”
“네 기억이 뭔데…?”
“나는 황족이었어. 브리타니아 라는 국가의.”
“…처음 들어봐.”
“소멸했으니까.”
를르슈의 대답에 스자쿠가 입을 다물었다.
“나의 아버진 황제였어, 많은 비를 두었고 그 중 한 분이 나의 어머니 마리안느 지.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냉궁의 왕비였지만 우리를 정말 많이 사랑해주셨거든. 나의 배다른 형제들과도 잘 지냈어. 나는 17번째 황자로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는지 형님도, 누님들도 나와 내 여동생에게 친절했지. 그러다 나의 아버지의 형이 나타났어.”
“…형?”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큰 아버지였지. 이름은 V.V (브이츠). 브이츠는 재앙과 가까웠고, 황제와 마리안느는 그 힘을 탐냈어. 재앙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결국 세 사람 모두 죽어버렸고…”
"죽어버렸고…?”
“내 앞에 마녀가 나타났다.”
***
“너희가 샤를 비 브리타니아의 아들과 딸이구나”
“…누구지 넌?”
를르슈가 나나리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어머니의 충격으로 하체와 눈을 쓰지 못하게 된 나나리는 낯선 음성에 제 오빠의 옷자락만 꾹 쥐고 있었다.
“내 이름은 C.C(씨츠), 네 아버지가 헝클어놓은 운명을 바로잡으러 왔다.”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야!!”
를르슈가 악을 썼다. 하지만 씨츠는 평온한 얼굴로 저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보랏빛 눈을 마주할 뿐이었다.
“너에게 브리타니아의 피가 흐르는데도?”
“그는 삿된 말로 어머니를 꾀어 죽게 만들었어. 나의 원수일 뿐이야. 그러니 썩 꺼져 이 마녀야!!”
“후후, 좋은 눈을 가졌구나 꼬마 황자야.”
를르슈의 등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나나리의 감긴 눈꺼풀 아래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모습에 를르슈가 더욱 가시를 바짝 세웠다.
“안 꺼지면 죽여버리겠어.”
“나는 맹랑한 인간을 좋아한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굴어보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씨츠의 모습에 를르슈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지금 저는 어린아이일 뿐. 차라리 이 마녀를 이용해 나나리를 보호할 순 없을까. 를르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버지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면 내가 아닌 나의 형님과 누님을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나와 나나리는 황권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
“그들은, 운명을 개척할 줄 모르거든.”
“…뭐…?”
“비운의 황자여, 나의 공범이 되어라.”
씨츠의 몸이 떠올랐다. 빛이 번뜩이며 그녀의 이마 위의 문양이 드러나고 붉은 빛을 발한다.
“운명을 거슬러 세상을 파괴하고 세상을 창조해라. 내가 너의 아군이 될 테니.”
***
“…를르슈는 성공했어?”
스자쿠의 물음에 를르슈가 피식 바람 빠지듯 웃었다.
“아니, 나는 모든 걸 잃었어. 나나리도 씨츠도.”
를르슈가 숨을 골랐다.
“재앙은 순리야. 브이츠와 씨츠는 그 순리를 지키는 운명을 타고났지. 나는 씨츠를 그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일개 인간이었고, 나의 삶의 이유이던 동생까지 희생시켰다. 그리곤 내가 그 재앙이 되어버렸다.”
“…….”
“재앙은 아주 거대한 힘이야. 그래서 스스로를 봉인하려 하지. 더 큰 악이 되어 악을 물리치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악 그 자체로 남아버렸어. 재앙이 되었어도 순리를 거스를 순 없었고, 그렇게 때가 되면 우주를 소멸시켰다.”
“…를르슈…”
“그 거대한 힘의 파편이 인간의 운명을 건드리면 그 인간이 아티팩트가 되어 때가 되면 나를 부르게 돼.”
“…….”
“그러니, 나를 죽여줘 스자쿠… 너의 상실은 나의 책임이야. 나는, 나나리와 어머니의 곁으로 가고 싶어…”
“를르슈.”
스자쿠가 낮게 불렀다. 그 목소리는 떨고 있지도, 젖어있지도 않았다.
“나의 상실이 너의 책임일 수 있어. 나를 낳고 돌아가신 어머니, 나의 실수로 돌아가신 아버지, 나와 만나서 죽게 된 유피… 나의 운명의 너의 힘 때문이라면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
“그래서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네가 원하는 건 친절한 세계라고 했지.”
“…나나리가 늘 말하던 거였어. 세상이 모두에게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그래 그러면 친절한 세계를 만들어. 그렇게 너의 책임을 다해. 영원히 살아서 너의 몸에 재앙을 봉인하고, 나에게 속죄해.”
“…….”
“그러면 나는 너의 종이 될게. 네가 원하는 친절한 세계를 위해 함께할게.”
“…흐윽….”
“나는 네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게 를르슈.”
“흐어엉-”
를르슈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덮고 서럽게 울어대는 모습에 스자쿠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체온이 그가 인간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느끼는 슬픔, 분노, 그리움. 그건 모두 스자쿠도 알고 있는 것. 그러니 마른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도, 결 좋은 머리칼을 향한 입맞춤도 스자쿠는 망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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