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스자루루]어디서든 노크를 부탁드려요 1

현대 AU 대학생 스자쿠 X 재앙의 헌신 를르슈

Written by. 이스터

2024.05.04

쿠루루기 스자쿠는 꿈을 꾸지 않는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후로 그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 아마 제 꿈속을 찾아올 아버지의 표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겠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머니, 너무 또렷이 기억하는 아버지.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됐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겐 부모님이 물려준 많은 재산이 있었고, 준수한 외모와 좋은 학교 성적이 있었기에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잘 자란 청년일 뿐이었다. 그가 꿈을 꾸지 않는 건 오로지 저만 아는 비밀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스자쿠 군도~”

“안녕! 방학 잘 보내!”

기말고사가 끝났고, 대학생들은 청춘을 즐기러 거리로 뛰쳐나왔다. 같은 학교 선배인 미레이와 그녀의 동기인 니나, 스자쿠의 동기인 리발과 셜리는 종강과 후덥지근한 날씨를 핑계로 한계 없이 술을 마셨다. 막차에 맞춰 아슬아슬 하게 술집을 나온 일행은 시끌벅적한 소음과 네온사인의 중심에서 각자 손을 흔들었다. 일찌감치 기절한 니나를 부축한 미레이와 셜리는 셋이 함께 택시를, 리발과 스자쿠는 영양가 없는 얘기를 하며 아직도 사람이 북적이는 지하철에 올랐다.

꼬이는 발음으로 조잘대는 리발과 주위 사람들이 같이 내뿜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스자쿠는 더욱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서서히 아파오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졸린 눈을 꿈뻑였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리발에게 손을 흔들며 지상으로 걸어 나오자 훅 끼쳐오는 여름밤 공기에 습한 숨 한 번을 더했다.

“아, 너무 많이 마셨다… 미레이 선배가 너무 말술이야…”

올해 4학년인 미레이의 취한 모습은 교내 그 누구도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흥과 장단에 맞추다 보니 평소보다 과음했고 아파트로 가는 걸음걸음이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대답 없을 인사를 건넨 뒤 현관에 도착해서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갖다 대니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다. 꾸물꾸물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양말 한 짝도 벗지 못한 채 알코올에 잠긴 스자쿠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 스자쿠.”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스자쿠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방이 하얀 공간, 아무것도 없다면 바닥과 천장도 구별되지 않을 공간이었다. 다행히 눈앞엔 푹신해 보이는 1인용 카우치에 앉아있는 미남은 긴 다리를 꼰 체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카우치와 체스판과 장기말이 늘어진 테이블은 앤틱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손끝이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내뿜는다.

“누구…세요?”

이마를 덮는 찰랑이는 흑발,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할 자수정 빛 눈동자. 하얀 목을 감싼 크라프트와 그 아래로 마른 몸을 감싼 눈동자 색과 닮은 정복.

스자쿠의 물음에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이 체스판에서 떨어져 저를 바라본다. 보석을 박은 듯한 눈동자에 담긴 제 모습에 스자쿠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떠. 나는 제로- 다.”

-♪!!

“으헉!!”

미처 해제하지 않은 알람 소리에 스자쿠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상체만 세운 채 두리번거리는 이곳은 평생을 살아온 제집의 제방. 익숙한 벽지와 천장에 겨우 안도의 숨을 뱉는다. 7시를 힘차게 알리는 핸드폰을 끄고 찌뿌둥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불편하게 자서 그런가… 꿈을 다 꾸고…."

몇 년 만에 꿈을 꾼 참이었다. 목과 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뻐근한 어깨를 풀며 방 밖으로 나갔다. 청바지의 버클만 풀고, 술과 체취에 찌든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밀려오는 숙취와 갈증에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생수통을 꺼냈다. 드르륵- 손쉽게 뚜껑을 따고 그대로 입술로 가져가는데- 돌아본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인형에 미처 입안으로 들어가진 못한 물이 주르륵 스자쿠의 턱과 가슴을 적셨다.

“아 차거! 누, 누, 누구-….”

“정신이 좀 드나? 쿠루루기 스자쿠.”

거실 창을 통해 비추는 아침 햇살에 그 검은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여전히 다리를 꼰 채로 체스 말이 아닌, 거실 책장의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은 한 편의 그림 같았다.

곧 제 턱을 훔쳐낸 스자쿠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늘 순하게 둥글어져 있던 눈이 매섭게 쏘아본다.

“어떻게 들어온 거죠?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소파앞 낮은 테이블에는 이미 수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 덕분에 스자쿠네 집은 커다란 책장에 가까웠으나 워낙에 어려운 책이라 기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단 한 번도 꺼내진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기억이 안 나?”

“…무슨…”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은 남자가 저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는 베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내 이름은 제로다. 또 다른 이름은… 재앙.”

“재…앙…?”

제로가 몸을 일으켰다. 곧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 붉은 빛이 서리더니 거실 한쪽 벽을 메운 책장 속 책들이 회오리 치듯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스자쿠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어 얼어버렸다. 거실 천장에서 공중제비를 도는 두꺼운 양장본들을 보며 퍼뜩 스자쿠가 손을 내저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것들은 전부 아버지 유품이야! 원래대로 돌려놔!!”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책들은 날갯짓하듯 표지를 펄럭이며 날아가 책장 속으로 꽂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스자쿠는 손을 들어 제 볼을 아주 세게 꼬집었다.

“아야!…. 역시… 술이 덜 깼나…”

“내가 헛것이라도 된다는 건가?”

제로는 코 앞까지 다가와 손을 뻗었다. 마른 손마디가 스자쿠의 뺨을 감쌌다. 사람의 체온 같지 않는 서늘함에 스자쿠의 몸이 흠칫 떨렸다. 수 분 후, 결국 제로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은 스자쿠는 웃어른을 모시듯 공손히 여쭈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제로를 올려다보려니 그 매서운 눈매가 더욱 사나워 보였다. 벗어낸 상의 덕택에 훤히 드러난 마르고 탄탄한 그의 몸이 처량하다.

“그래서 제로님… 저희집에 오신 이유가…”

“나의 존재 이유가 뭐겠어? 당연히 재앙을 내리기 위해서지.”

“아니, 그러니까…그게 왜 저희집인건데요-”

스자쿠의 녹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제로는 그에게 손짓했다. 몸을 일으켜 다가가자 다시금 제로의 눈에 붉은 문양이 번뜩이더니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너는 재앙의 아티팩트가 맞아.”

이 세상엔 수 많은 우주가 있다. 그 우주는 사라지고 생겨나길 반복한다. 그리고 우주의 비가역성에 의해 소멸이 필요한 우주엔 재앙이 나타나는데-

“그러니까… 지금 제가 사는 이 우주는 소멸해야 하고, 나는 재앙이 찾아오기 위한 등대… 같은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이해가 빠르네.”

“…나 때문에… 우주가 멸망한다고요?”

“그렇게 생각할 건 없어. 이건 순리이자 운명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로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 그 소멸이란 건 어떤 건데요. 아마겟돈이라도 벌어져요?”

“나의 선택에 따라 다르지. 난 가장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을 할 뿐이야.”

스자쿠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를 짚었다. 본인이 재앙, 그러니까 신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남자도 믿기 어려운데 우주가 없어질 거라니. 이젠 슬슬 제가 제정신이 맞나 하는 자기의심까지 피어올랐다.

“…막을 순 없어요? 그냥 소멸 안 시키시면 안되나요?”

“부탁하는 건가?”

제로의 말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를 보자 스자쿠는 목덜미가 삐쭉 서는 감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뇨, 부탁이 아니라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거래?.”

“제로,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요. 내가 함께할게요.”

“내가 원하는 것이라…”

왜인지 물러서면 안될 것 같아. 본능적인 감각에 스자쿠가 부러 더 당당하게 밀어붙였다. 그가 만약 정말 ‘재앙’ 그 자체라면 저 같은 우주의 먼지 나부랭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래 봤자 그에겐 손가락을 튕기는 것 만큼 간단할 터. 하지만 스자쿠는 언제나 더 나은 인생을 위해 발버둥 쳤다. 불가능해 보여도 몸을 던졌다. 그러니 이번에도-

제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슷한 눈높이의 두 남자가 마주했다. 크고 올곧은 예쁜 초록색 눈망울을 보며 제로는 손을 뻗어 스자쿠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나는 운명을 개척하는 걸 좋아하지. 그저 수긍하고 살기엔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고, 불친절하니까.”

제로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왠지 슬퍼 보였다. 곧 스자쿠의 몸이 둥실 가볍게 떠올랐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너를 나이트 오브 제로로 임명한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살아라. 쿠루루기 스자쿠.”

“…예스, 유아 마제스티.”

스자쿠의 왼쪽 눈에 붉은색 문양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입술이 제 멋대로 움직여 충성을 바친다. 스자쿠가 멍하니 서 있자 제로가 툭 어깨를 쳤다.

“기분이 어때?”

“….이게…무슨…”

“가벼운 계약이지. 눈을 감아봐.”

스자쿠가 눈을 감았다. 제로는 연이어 말했다.

“머릿속을 비워. 그리고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고 속으로 되뇌어.”

‘를르슈..비..브리타니아…’

머릿속을 비우라니… 스자쿠는 차라리 집중하기로 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내 목소리가 들리나? 스자쿠?’

귀가 아닌 뇌 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스자쿠가 눈을 번쩍 떴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제로가 쿡쿡 낮게 웃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주문인가요?”

“아, 그건 내 본명이야. 내가 인정한 나의 종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해두지.”

나도 오랜만에 들어보네. 제로, 아니 를르슈가 말했다.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소리가 아닌 형태로 말을 걸 수 있어, 나는 네 심장박동도 느낄 수 있지. 너는 내가 존재함을 알 수 있을 거야. 네가 죽거나, 내가 이 우주를 벗어나면 마법은 자동으로 풀려.”

“좋아요. 알겠어요. 그래서, 를르슈가 원하는 건 뭐예요?”

“푸하하, 금방 이름을 부르는 구나.”

“그거야… 를르슈도…”

내 이름을 불렀잖아요. 하지만 스자쿠의 말허리를 가로챈 스자쿠가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원하는 건-”

스자쿠의 목울대가 마른침을 삼킨다. 세계정복… 이런 거면 어떡하지.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를르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긴장을 무색하게 했다.

“친절한 세상을 만드는 거야.”

***

자연스럽게 를르슈는 스자쿠의 집에서 지내게 됐다.

그는 잘 먹지도 자지도 않았지만 최소한의 식사와 수면은 필요로 하는 듯했다. 덕분에 스자쿠는 아버지의 침실을 내주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를르슈. 나 오늘 약속이 있어.”

오늘도 역시나 침대에서 책을 읽던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하늘빛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스자쿠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친구를 만나기로 했거든. 혼자 있어도 되겠어?”

“응 상관없어.”

가볍게 말한 그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를르슈의 말과 달리 스자쿠는 영 마음이 무거웠다. 나타난 지 한 달이 될 동안 두 사람은 늘 붙어있었다. 같이 운동을 가기도 하고 (를르슈는 몸을 쓰는 일에 서툴렀다), 마트를 가기도 했으며 (를르슈는 먹고 마시는 일에 흥미가 없었으나 입맛은 꽤 까다로운 듯 했다), 열대야를 피해 영화를 보기도 하는 등(를르슈는 생각보다 잘 웃었다.) 꽤 괜찮은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음- 를르슈. 내 친구들을 소개해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네 친구들?”

“응, 다 좋은 사람들이야. 를르슈가 바라는 친절한 세계에 꼭 맞을 사람들.”

를르슈의 바램은 친절한 세계를 만드는 것. 스자쿠는 우선 를르슈에게 친절한 세계를 만드는 것 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자쿠가 를르슈의 손을 잡아 끌었다. 를르슈에게는 마트에서 산 내의들 밖에 없었으므로 제 방으로 데려가 옷장 문을 열었다.

“를르슈가 같이 나가준다면 기쁠 것 같아.”

“…그래. 좋아. 마음대로 해.”

스자쿠의 티셔츠와 청바지를 빌려 입고 그의 신발까지 꿰어신은 채 두 사람은 쇼핑몰로 향했다. 미레이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자금력으로 이번 주말 미레이의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해변에 놀러 가기로 했고, 오늘은 그 전에 필요한 걸 사기 위해 모이는 자리였다.

“주말 내내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이번 기회에 친해져서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수많은 인파가 몰린 쇼핑몰을 지나며 스자쿠가 말했다. 를르슈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장소로 근처에 다다르자 셜리가 먼저 스자쿠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 옆엔 누구죠? 미레이 선배 들은 거 있어요?”

“아니 없어. 와 잘생겼다~”

“응-…”

“미, 미레이 회장?! 저런 스타일 좋아해요?!”

스자쿠가 를르슈와 함께 도착하자 여덟개의 눈이 동시에 한 곳을 바라보았다. 를르슈는 쑥스러운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를르슈 람페르지 라고 해요. 스자쿠와는 어린 시절 친구인데, 제가 이번에 근처로 이사 오게 됐어요.”

를르슈가 금세 말을 지어냈다. 스자쿠는 대충 맞장구를 쳤다.

“응,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서 여러분들한테도 소개해 주고 싶었어요.”

“아 그렇구나. 나는 미레이 애쉬포드야.”

“나는 셜리 페넷. 만나서 반가워.”

“나는 리발 칼데몬드. 리발이라고 불러!”

“니나…아인슈타인…”

“반가워요 모두.”

그린듯한 를르슈의 미소에 셜리의 얼굴이 한껏 붉어졌다. 눈치 빠른 미레이가 팔꿈치로 툭 그녀의 허리께를 쳤으나, 그녀는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스자쿠의 말대로 그들은 다정하고 친절했다.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니나를 제외한 셋은 를르슈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고, 그가 어색하지 않도록 티 나지 않게 배려했다.

수영복을 늘어놓고 열띤 토론을 하는 여자들을 기다리며 매장 앞 벤치에 앉아있는 를르슈에게 리발이 다가왔다.

“그, 람페르지 군.”

“편하게 를르슈라고 불러도 돼. 스자쿠의 친구면 내 친구기도 하니까.”

“아 그래, 그럼 를르슈. 혹시-”

“응?”

“피부가 하얗고 금발에 키가 크고 날씬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속이 깊고 이벤트를 좋아하고 잘 웃는 미인인 여자가 취향이니??”

“……아…?”

맥락없는 질문에 를르슈의 눈이 깜빡였다. 눈치 빠른 를르슈가 빠르게 주위를 스캔했다. 그리곤 금방 웃으며 장난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를 들면, 미레이 씨 같은?”

리발의 표정이 푸르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를르슈가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역시, 회장은 누가 봐도 예쁘고, 똑똑하고…”

“회장?”

“아, 우리 고등학교 때 미레이 선배가 학생회장이었거든. 스자쿠가 부회장. 내가 서기. 우리다 전부 같은 학교 학생회 출신이야.”

“그렇구나.”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운 스자쿠가 돌아왔다.

“무슨 얘기해 둘이?”

“아, 별거 아니야. 그냥 우리 같은 고등학교 나온 거.”

“아 그러네, 그 얘기를 안 했구나. 그런데 세 사람은 아직도 수영복 못 골랐대?”

“그러니까~ 하루종일 고르겠어. 말도 못 얹게 하면서.”

리발이 너스레를 떨었다. 자연스레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를르슈의 표정에서 아무도 알 수 없을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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