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XIV

빛은 그림자를 모르되(中)

그림자는 빛을 그리워한다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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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돌아온 건 적마도사였다. 돌려 준 책보다 받아 온 책이 더 많은지 두께도 굵직한 책들을 잔뜩 들고 저녁이 채 되기 전에 돌아왔다. 품 안에 책을 가득 든 채 들어오는 적마도사를 발견한 백마도사는 마당에 쌓아 둔 박스에서 내려 와 자연스럽게 책을 나눠 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무슨 책이 이렇게 많아요?”

“멀리 동방 쪽에서 급히 조사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고 해서… 조만간 얀샤에 들러야 할 것 같은데 가기 전 사전 조사를 좀 하느라요.”

“어머나.”

백마도사는 조금 나눠 든 책을 앉아 있던 나무 상자 위에 내려두곤 적마도사에게 작게 손짓했다.

“새로운 기술 개발 중인데 의견을 좀 주는 게 어때요?”

“네, 좋습니다. 어떤 기술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배리어를 씌워주는 기술이에요. 물론 학자님만큼 단단하고 오래 지속되진 않겠지만요.”

“백마법으로 가능한가요? 그게.”

“글쎄요. 지금까진 안 됐지만 가능해질 지도 모르죠. 우선 시험을 위해서 두 분이 열심히 싸우고 계세요.”

말대로 마당 구석에선 전사와 건브레이커가 마주 보고 대련 중이었다.

“잠깐! 그건 반칙이지! 돌의 심장 안 쓰기로 했잖아!”

“아… 저도 모르게. 하지만 전사님도 방금 회복 기술 쓰셨잖아요?”

“윽… 그건 반사적으로…”

“…괜찮은 겁니까? 두 분 다 만신창이신데…”

“잘 되고 있네요.”

백마도사는 적당히 타이밍을 재다 스태프를 높게 들었다. 지천을 떠돌던 가을 바람이 마도사의 신체를 감싸고 일어나 치켜든 스태프에 핀 백합에 이끌려 모였다. 푸른빛 바람결을 끌어 안은 백합은 유월보다도 파릇하게 피어났다. 찬란한 청색으로 빛나는 궤적을 따라 공중을 한 바퀴 돈 백마도사가 바닥에 내려앉을 때 별처럼 뭉친 바람이 전사를 향해 돌진해 그물처럼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오! 뭔가 덜 아픈 거 같아!”

“그건 아까도 얘기 하셨잖아요.”

“아냐, 진짜야. 학자가 고무격려책 걸어줬을 때랑 비슷해. 더 아프게 때려 봐, 건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건블레이드 끝에 맺힌 파란 총탄은 그대로 튀어나가 전사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악! 이건 너무 아프잖아!”

“아… 미안해요.”

“역시 어떻게 해도 학자님 만큼 단단하진 않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쓸만 하겠어요. 바람은 가볍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위력은 낮아도 꽤 자주 사용 가능할 거고요.”

“그래도 백마법으로 배리어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니… 대단하십니다.”

적마도사도 한참 구경에 빠져 펼친 책은 무릎에 둔 채 박수를 쳤다. 건브레이커는 바닥에 자빠진 전사를 일으켜 세우고 새 기술에 이름을 지을 것을 권유했다.

“어느정도 완성이 됐으니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떨까요?”

“으음…….”

백마도사는 큰 고민 없이 새로운 기술에 이름을 붙였다.

“신성한 축복… 으로 할까요.”


닌자와 무도가가 돌아온 건 저녁 쯤이었다. 국제 시장 거리에 간다고 하더니, 이것저것 새로 산 물건들이 가득했다. 짐을 한 아름 들고 오는 두 사람을 맞은 건 한참 자고 일어난 학자였다. 여전히 낯빛이 어둑했지만 아침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소녀들의 쇼핑에 참견 마시죠?”

“저번에 장비가 부러져서 수리를 맡기고 왔어요. 이건 책상 위에 두고 싶어서 산 고양이 장식이에요! 이 주머니는 제비꽃 장식이 나왔대서 샀고, 이건 닌자님 입으실 잠옷! 그리고 다같이 먹으려고 간식이랑, 사무실에 식재료가 다 떨어진 거 같다고 건브님이 말씀하셔서……“

무도가는 학자를 붙들고 현관에 선 채로 산 물건들을 보여주며 한참을 떠들었다. 학자가 수다에 어울리는 동안 주방에선 저녁 준비가 한참이었다. 닌자는 양손 가득 식재료가 든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놨다.

“수고했어, 닌자!”

“정말로 수고스러웠어요.”

“아하하… 저녁 맛있게 할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녁 메뉴는 함박 스테이크인 모양이었다. 닌자는 아예 식탁에 제일 먼저 앉아서 식사를 기다렸다. 그 다음 자리에 앉은 것은 여전히 재잘거리고 있는 무도가와 피곤한 낯빛의 학자였고 스테이크와 샐러드, 감자튀김을 담은 그릇과 곁들임 반찬들이 식탁을 채우기 시작했을 때 쯤 백마도사와 적마도사가 착석했다.

“사무님은 제가 불러 올게요!”

“그 분은 아까 낮에 나가시고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먼저 먹죠.”

“사무 몫도 해놨으니까 이따 오면 주면 돼!”

처음부터 기다릴 생각이 없었는지 닌자는 이미 잘 익은 스테이크를 조금 잘라 입 안에 넣은 후였다. 서로 다른 식전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테이블은 하나였지만 대화 주제는 세 가지나 됐다. 닌자와 무도가는 오늘 쇼핑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세 마법사는 백마도사가 오늘 완성한 기술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두 수호자는 낮에 있었던 대련에서 있었던 해프닝에 함께 웃는 중이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한참을 식탁에 앉아 떠들곤 했지만 오늘은 한 자리가 비어서인지 다들 식사를 마치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일어난 건 닌자였다.

“무도가님, 오늘 산 옷 같이 풀어요.”

“좋아요! 아,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렇게 닌자와 무도가가 먼저 떠났고 건브레이커는 일곱 명 분의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사는 그새 식탁에 남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학자 옆에 붙어 있었고 백마도사는 두 사람이 낮에 사 온 간식을 꺼냈다. 작은 상자 안에 예쁘게 데코레이션된 조각 케이크, 마카롱과 타르트 따위가 알차게 담겨 있었다.

“우유, 주스, 차.”

“주스! 학자는 데운 우유.”

백마도사는 주문대로 오렌지 주스를 전사 앞에, 따듯하게 데핀 우유를 학자 앞으로 밀어주었다. 평소 같으면 작은 그릇에 먹을 걸 담아 방으로 들어가 쉬었을테지만 공식적으로 휴가를 낸 상황에 며칠 째 혼자 일하는 것이 못내 신경 쓰여 학자의 맞은편에 다시 앉았다. 빠르게 식사 정리를 마친 건브레이커도 커피와 홍차를 양손에 들고 백마도사의 옆에 앉았다. 둥근 찻잔에 우려낸 홍차는 백마도사의, 그리고 커피는 제 몫이었다.

“무슨 편지예요?”

“의뢰서예요. 원래 한 장 더 있었는데 사무님이 가져가셨어요.”

“별일이네요.”

낮 사이 우편이 더 온 것인지 테이블 위에는 아침보다 훨씬 많은 개수의 편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백마도사는 펼쳐져 있는 편지들을 몇 장 집어 읽었다. 말대로 하나도 빠짐 없이 의뢰서였고 의뢰 내용은 다양했지만 평소 받았던 의뢰보다는 확연히 쉬워보였다. 상당수는 그새 끝냈는지 완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편지는 아마 반송할 편지에 동봉할 보고서겠지. 슬쩍 보니 이틀 전에 온 의뢰들은 다 완수한 후였고 어제 온 것들도 거진 끝나가는 참이었다. 개수만 해도 상당했고 잡스러운 임무 특성상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을텐데 어느새에 마쳤는지. 백마도사는 바지런하고 성실한 성격에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옆에 있던 건브레이커도 슬쩍 의뢰서를 구경하다가 완료 보고서를 함께 써주겠다며 종이와 펜을 부탁했다. 전사는 백마도사가 접시에 꺼내놓은 쿠키를 하나 집어 손이 바쁜 학자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이거 생강맛이잖아!”

“생강맛 쿠키 맛있잖아.”

“그건 너한테나 그런거겠지.”

쌉쌀함과 기묘한 달콤함에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입에 집어 넣어준 성의가 있어 뱉진 않았다. 학자와 건브레이커가 내용을 다 써서 전사에게 주면 해당 의뢰서와 함께 접어서 새 봉투에 넣고 봉인한 뒤 겉면에 동일한 주소를 썼다. 백마도사는 세 사람이 편지를 쓰는 동안 아직 완료되지 않은 의뢰들을 살폈다. 어제 온 것 중에선 4인 토벌 임무가 있었고 나머지는 공통적으로 동방 지역에서 온 의뢰였다. 해방 전쟁을 치루는 중이라 전란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보호 임무부터 농산물 경작, 분실물 탐색, 지도 완성, 고위험 지대 탐색, 지원품 및 의료 지원 요청, 마물 토벌, 그리고……

“일이 많네요. 전부 할 생각인가요? 이 정도 양이면 나눠서 하는 게 좋겠어요.”

“으음… 휴가 기간이라…”

“하루 이틀 쯤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었으면 됐죠. 주소 쓴 건 이리 줘요.”

백마도사는 심드렁하게 받아치면서 마지막으로 읽은 편지를 접어 옆에 앉은 건브레이커의 외투 주머니에 슬쩍 집어 넣었다. 그리곤 천연덕스럽게 접시 위의 마카롱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남들 다 쉬는 휴가에도 일하는 게 뭐가 좋은지 학자는 편지 한 장이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어제 열심히 짠 전술지와 던전 지도, 도면을 봉투에 접어 넣고 있었다. 백마도사는 봉인된 편지에 우표를 붙이며 넌지시 말했다.

“그 4명이서 하는 토벌 임무 말이에요, 수락할 생각이면 학자님이 가시는 게 어때요?”

“동방 쪽 일이 훨씬 많아서 저보다는 백마님이 가시는 게……”

“적마님이 잠시 얀샤에 용건이 있으시다는데 저도 조금 흥미가 있어서 따라가볼까 했거든요.”

백마도사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을 천연덕하게 흘렸다.

“지난번 수송 임무 때 고생하셨으니 네 분이서 다녀오시고 좀 쉬세요, 특히 학자님.”

“으, 음…….”

학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저 대신 누군가가 과로를 하는 게 신경 쓰이는지 학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눈치를 살폈지만 그 뒤로 백마도사는 아무 말 없이 우표를 붙였다. 어느샌가 건브레이커도 조용해져서 식탁엔 펜이 사각거리고 과자를 와삭이며 찝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전사였다. 작업도 마침 대부분 마무리 되어가는 참이었다.

“그럼 닌자랑 무도가 불러올게~. 거실에서 작전 짜야하니까.”

“그래.”

학자도 따라 일어섰다. 건브레이커가 반송할 편지들을 노끈으로 엮어 일어서는 학자에게 내밀었다. 동방에서 온 의뢰들은 이미 식탁에 남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사무님 돌아오시면 적마님하고 네 분이서 가세요, 일이 진짜 많으니까… 토벌 끝나면 전사 데리고 갈게요.”

“그래요.”

거실에선 휴가에 왜 부르냐며 볼멘소리를 내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학자는 편지를 들고 토달지 말라는 앙칼진 대꾸와 함께 거실로 나갔다. 백마도사는 부엌 한 켠에 차갑게 식어가는 한 사람 분의 스테이크를 흘겨보곤 뒷말을 흘렸다.

“돌아오신다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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