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XIV

빛은 그림자를 모르되(下)

그림자는 빛을 그리워한다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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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사전 준비로 전투 대형과 전략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토벌 회의는 금방 끝났다. 잠시 거실이 시끄러운 듯 했지만 피로한 학자가 먼저 들어간 후로 금방 조용해졌다. 주방에 남아있던 건브레이커는 거실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조용히 적마도사를 불렀다. 그는 예상대로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상태였고 가을 밤의 주방은 제법 쌀쌀했기에 몸에 담요를 두른 채였다. 식탁엔 백마도사가 따듯하게 우린 찻잔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막 착석하는 적마도사의 앞으로 조용히 잔을 밀었다. 백마도사는 링크펄을 빼라는 의미로 제 귀에 꽂힌 공격대 전용 링크펄을 빼냈다. 적마도사는 당황한 듯 멈칫였지만 순순히 지시를 따르는 건브레이커를 따라서 제 것을 빼냈다. 백마도사는 식탁 가운데에 모인 링크펄 세 개를 보며 담담하게 운을 뗐다.

“사무님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요.”

언뜻 들으면 심각한 상황일 지도 모르나, 둘 다 별로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놀랄 일이냐는 반응에 가까웠다.

“그 분은 원래 그러시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휴가를 얻자마자 3일 내내 쏟아진 비정상적인 우편과 해방 전쟁 중인 동방에 집중된 의뢰들, 그리고 그 의뢰 중 한 장을 가지고 사라진 뒤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우편……?”

“지난 달에 한 의뢰보다 많아요. 지금 여기 있는 게 전부도 아니에요.”

학자가 의도적으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도 했고 적마도사가 믿지 않는 눈치였기에 백마도사는 숱하게 쌓인 동방에서의 편지를 보였다. 그는 무지막지한 개수에 질겁한 적마도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편지를 빠르게 훑으며 맡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의뢰들은 바로바로 걸러 옆쪽에 두었다. 그렇게 추려낸 의뢰가 총 세 가지였다.

“…그렇게 함부로 막 빼도 됩니까?”

“용병에겐 절대불변의 철칙이 있어요. 비용 대비 이익이 적으면 취하지 않는 거죠. 학자님은 그 철칙에 아주 엄격하고, 거기에 더해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분이에요. 그 분이라면 이 열 건이 넘는 의뢰를 전부 수락하실 테죠.”

“그렇다면…”

“중요한 건.”

백마도사는 그렇게 말하며 편지칼로 산처럼 쌓인 편지 무더기의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시간이 없어요.”

앉은 키도 훨씬 큰 엘레젠 남성을 올려다 보는 녹빛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 타협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사소한 이견으로 다툴 마음도, 시간도 없었다. 사무라이가 들고 갔다는 의뢰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연락이 되지 않는 걸 고려하면 잘 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가 이 공격대의 구성원 중 가장 실력 있는 용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우편으로 의뢰가 이렇게 집중적으로 쏟아진 일이 여지껏 없었고 시세에 맞지 않는 보상, 공격대 수준에 맞지 않는 임무 내용도 의문스러운 마당에 단 한 장을 가지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마도사의 마음을 짓누르는 건 이른 오후 사무라이가 떠날 때의 모습이었다. 평소였다면 오후 시간엔 건브레이커나 백마도사, 전사 모두 각자 외출하거나 방에서 쉬었겠지만 오늘 만큼은 새로운 기술을 만든다고 예정에 없던 단련을 했다. 그 탓에 기술이 완성될 때까지 줄곧 마당에 있었는데, 두 수호자가 오랜만의 대련으로 들떠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 백마도사는 바깥으로 나온 사무라이와 마주쳤다. 백마도사는 의견을 묻기 위해 그를 불렀으나, 듣지 못했는지 사무라이는 그대로 백마도사를 지나쳤다. 그는 평소 눈을 가리기 위해 썼던 투박한 고글 대신 입마개 모양의 반가면을 쓰고 있었고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 목을 감싸는 부드러운 회색 털 깃, 왼쪽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상의는 질 좋은 갈색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드러난 오른쪽 팔뚝과 반대로 가벼운 보호대를 덧댄 왼쪽 팔은 새카맣게 감싼 채였고, 양손엔 살 한 점 보이지 않는 검은색 가죽 장갑을 꼈었다. 긴 상의에 가려진 허벅지엔 은색 보호대가, 그 아래론 아킬레스건을 쇠로 감싼 긴 부츠를 신었다. 끈과 남색 가죽으로 된 화려한 허리띠엔 동색 장식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띠에 매인, 단 하루도 그의 손에서 떨어진 적 없었던 회색빛 외날검. 그것 만큼은 여느 날과 똑같았다. 항상 고글 뒤에 가려져 있던 날선 눈은 짐승의 금빛이었다.

그는 한없이 한량같은 사람이지만 이유 없이 연락을 끊을 만큼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도가가 이곳에 있는 한. 백마도사는 무도가가 그의 역린(逆鱗)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니 필시 그가 무엇을 감추려고 든다면, 무도가와 관련 없을 리가 없어. 백마도사는 쿠가네에서 온 편지 한 장을 두 사람의 방향으로 펼쳐 놓았다. 학자에게서 몰래 숨긴 편지였다.

“그리고 쿠가네 무지코 극장에서 무도가님에게 공연 초대장이 왔어요. 정확히는 공연 의뢰라고 보는 게 맞겠군요.”

“요청 사항에 투척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부채춤 무용이라고 되어 있네요.”

무도가는 차크람이라는 독특한 투척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 무용을 익힌 공연가였다. 그가 공식적으로 공연단에 있었던 것은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수호천절, 별빛축제, 불꽃축제 등 특별한 계절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공연을 의뢰하는 편지가 오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도가가 무용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내는 개인적인 의뢰였을 뿐 공격대 앞으로 오는 것도, 공격대에서 관여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다같이 계절 이벤트 스태프로 일할 때는 있었지만 그 누구도 무도가에게 공연을 부탁하거나 강요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무도가는 공연 의뢰가 오면 항상 특별히 시간을 내서라도 응하곤 했고 특별한 요청이 없다면 항상 차크람을 사용해 공연하곤 했다. 그는 차크람이 꼭 누군가를 상처 입힐 뿐 아니라 치유하고 위로하기도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으니까. 그래서 더 이상 극단의 공연가가 아닌데도 여즉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았고 다른 무용가들은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무도가 자신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공연 의뢰주의 요구를 능력이 되는 한에서는 최대한 맞춰주는 성격이었기에 이런 빤히 보이는 함정을 의심도 없이 받아들일 것이 뻔했다.

“전란에 외부인을 끌어들인 공연을 하는 것 자체도 이상하지만, 동방인도 아닌 무도가님께 어울리지도 않는 요구사항이고 전체적으로 각지에서 왔을 이 의뢰서들이 죄다 전사님 앞으로 온 게 아닌 것도 이상해요.”

“…음. 공격대장이 전사님인 걸 잘 몰라서 그랬을까요?”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적마도사였다.

“반대일 지도 모릅니다. 실질적으로 의뢰를 받을 지 말 지를 결정하는 게 전사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정말 사흘 간 이것보다 더 많은 의뢰가 한꺼번에, 그것도 대부분이 동방에서 왔다면… 적어도 우연이라고 보긴 어렵군요.”

“학자님은 들이는 품과 보수를 비교했을 때 보수가 충분하다면 대부분의 임무를 맡는 사람이니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의뢰들이 무더기로 온 거겠네요.”

“그리고 어이 없을 정도로 상냥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요. 아마 첫날, 이튿날에 보낸 의뢰를 싹 다 혼자 해결할 줄은 몰랐겠죠.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일까. 찝찝한 내막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상황에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처지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백마도사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적마도사에게 질문했다.

“낮에 말씀하신 동방에서 온 의뢰는 무슨 내용이죠?”

“아… 동방의 사료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다 끝난 건 아닙니다만 현재로서는 반 세기 정도 전에 유행한 시로 추정됩니다.”

“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브레이커에게 적마도사는 짧은 설명을 붙였다.

“네. 더 자세히 분석해봐야 알겠으나… 쿠가네에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동방엔 겨울이 없을텐데요.”

“그러니 문학이겠지요.”

건브레이커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 백마도사가 따로 빼놓은 세 가지 의뢰를 살폈다. 한 장은 랄거의 손길 쪽에서 온 의료, 지원품 요청이었고 한 장은 도마 성과 맞닿아 있는 얀샤의 고위험 지대 탐색이었다. 마지막은 쿠가네의 울다하 무역상관에서 온 운송 임무였다. 시선은 마지막으로 집은 운송 임무 의뢰서에 멈췄다. 동부 알데나드 상회의 동방 지점이었던가. 문득 불쾌감에 입술 한쪽이 움찔거렸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노련함을 보였다. 목표에 집중하는 것만큼 생각을 비우는 데 도움되는 건 없으니까.

“그럼, 우선 적당히 흩어질까요?”

“마침 얀샤에 반 세기 전 시오카제 정에서 일했던 사람이 있다더군요. 이 두 번째 임무는 제가 맡겠습니다.”

“랄거의 손길엔 제가 가볼게요. 아무래도 저항군 상황이 좋지 않은 거 같으니까요.”

위급한 환자들이 많으니 치유사와 의료품들을 요청하는 의뢰서를 보고 적마도사는 의외라는 듯 백마도사와 의뢰서를 번갈아 쳐다봤다. 학자 못지 않게 손득을 잘 따지곤 했던 사람이었기에, 유독 없다시피한 보수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이 의뢰를 안 받으면 학자님이 가만히 안 둘 걸요.”

“아… 그렇군요.”

“그럼 무역상관엔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무도가님 앞으로 온 공연 의뢰는……”

“일단 수락 도장을 찍어서 반송하고 랄거의 손길 일이 끝나면 제가 가볼까 해요.”

“괜찮으시겠어요? 함정이라면 위험할 지도……”

“함정이길 바라고 가는 거니 위험하지 않으면 곤란하죠.”

백마도사는 얘기가 끝났다는 듯 자기 몫의 의뢰서 두 장과 링크펄을 들고 일어섰다. 적마도사 역시 챙길 짐이 많다며 제 몫을 들고 곧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말대로 며칠 전 받았던 자료들과 인터뷰를 기록할 문구, 관련 서적들을 부산스럽게 챙겼다. 의뢰와는 무관하게 낯선 동방의 역사 자료를 접하고 해석하는 일이 퍽 즐거웠는지 그는 흥분에 찬 얼굴로 짐을 다 챙기자 마자 사무실을 떠났다. 이슈가르드를 떠난 이후로 영영 잃어버렸던 작은 불꽃이 그의 안에서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래 전 박탈 당했던 작업을 다시 맡을 줄 몰랐기에 모든 순간이 과분해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행복했다.

백마도사 역시 가방을 챙기고 곧바로 밖에 나왔다. 가방 속엔 기본적인 소모품들과 옷 몇 가지가 들었고 손에 든 짐엔 사무실에 있는 갖가지 의료품들이 가득 들었다. 맡지 않기로 한 의뢰서들은 거실에 누군가 피워놓은 벽난로 안으로 던져버렸다. 주방의 테이블엔 여전히 건브레이커가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내용을 살짝 엿보니 학자에게 남기는 작은 메모였다. 불필요한 사족 없이 동방으로 함께 떠났으니 토벌이 끝나면 사무실에서 편히 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행선지를 남기지 않았다.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자는 빛이 있는 곳에 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절이 언젠가는 그리워질 테니까. 백마도사는 그가 메모를 다 쓸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 시선은 절로 건브레이커가 손에 쥔 의뢰서를 향했다. 그가 이 일을 불편해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 한 켠이 언짢았지만 구태여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에게 좋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했고 의도적으로 감춰왔다. 그것이 그의 치부라고 한다면 백마도사는 굳이 그것을 들추고 싶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이 일을 맡겠다 하였지만 사실상 제가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그러니 곧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다정한 칼날 같은 말은 꺼내지 않는 게 좋겠지. 백마도사는 말 대신 가볍게 건브레이커의 어깨를 감싸고 다독였다.

“먼저 끝나거든 무지코 극장으로 와요.”

“관객석에서 백마님이 춤추는 걸 볼 수 있는 기회인가요?”

“설마. 당신이 나보다 잘 추는 주제에.”

실없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끝나면 적마님하고 두부나 먹으러 갈까요, 휴가 연장된 사람들은 쏙 빼고.”

“사무님도 함께죠?”

“그 인간은 별로 사주고 싶진 않은데. 생각 좀 해볼게요.”

“하하…….”

백마도사가 떠나고 나자 새벽의 사무실엔 건브레이커 혼자 남았다. 그는 정갈한 글씨로 남긴 메모를 식탁 위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마찬가지로 간소한 짐을 챙겼다. 튼튼한 경량 장비, 백색 코트와 특수 제작한 장갑, 단정하게 끈을 묶은 긴 장화. 동방 지도, 물, 음식과 강화약, 나침반 등 모험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건들을 꼼꼼히 챙기고 서랍에 있는 작은 금고를 꺼냈다. 그는 거액의 돈을 꺼내 코트 안주머니에 넣고 전사와의 대련 후 잘 닦아 둔 건블레이드를 들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이 내린 건블레이드에 차갑게 굳은 제 얼굴이 비쳤다. 그림자 진 제 표정이 소름끼치리만큼 낯익어서, 그는 칼날을 비틀어 달빛을 치우고 말았다.

건브레이커는 마지막으로 출발하며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짧지만 긴 여행이 될 것이고 어쩌면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마음은 한없이 묵직했지만 딛는 발걸음은 반대로 경쾌했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똑바로 앞을 보며 걸었다. 어둑한 빛이 비추는 그림자를 따라서.

BGM

Amazarashi - 생명에 걸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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