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파랑] 계명성(啓明星)
가슴에 늑대를 새긴 여인의 이야기
우르골 장경 합작에 글 파트로 참여했습니다.
합작 바로가기 ▶ https://wf74105.wixsite.com/spl-wj/
(※날조와 개인 해석이 있어요ㅠㅠ)
홀로 침상에 누워있던 여인은 그림처럼 눈을 떴다. 정월의 추위를 막아주는 문지방도 모든 것을 막아주지는 못해, 문 너머로 희미하게 앓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듣지 못했을 수 있으나 여인의 귀는 늑대의 것처럼 기민해서 잠을 설치는 소년의 괴로움이 똑똑히 들렸다. 고통스러운 앳된 목소리는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법도 했으나 여인은 가만히 누워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아이의 방문을 두드리는 귀신은 자신이 불러들인 것이니 이제와 쫓아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참 그 소리를 듣던 여인은 이불 밖으로 희고 긴 손가락을 꺼내어 이미 아는 셈을 하였다. 틀릴 리 없는 손가락 셈을 두어 번 더 하고, 그 모든 셈에서 손가락 두 개가 남는 것을 확인한 여인은 아주 반듯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두터운 겨울 이불을 걷어낸 여인은 침의만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정월의 한밤중 공기는 살갗을 찢을 것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여인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찬 공기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여인은 욕통을 들고 데워놓은 물을 받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았지만 창문은 열어두어 찬 공기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서늘해진 방 안에서 여인은 침의를 벗고 욕통에 흰 몸을 담갔다. 희고 고운 몸이었으나 고된 삶을 보여주듯 몸에는 어울리지 않는 흉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늑대의 얼굴만큼 보는 이를 압도하진 못하리라.
짝을 기다리는 늑대처럼 그녀는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턱을 들었다. 여전히 문 바깥에서는 악몽에 시달리는 새끼 늑대가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여인은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욕통에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인은 꿈 속에서 여러 해 전의 일을 떠올렸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타향, 더러운 토비들의 소굴에서 채 열 달도 품지 못한 아이가 삶이라는 고통을 재촉하던 날이었다. 여느 산부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마냥 조산에 괴로워하지도,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고통뿐인 삶을 시작해 남은 것이 고통일 것을 알면서도 품에 안은 핏덩이에 아주 잠깐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반미치광이와도 같은 상태로 그녀는 두 핏덩이를 어둠 속에 가두었다. 멍청한 토비들의 미신은 산모와 아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기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허름한 거처 입구에는 매일 정해진 시각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식사가 놓였다. 그것을 먹고 연명하며 그녀는 빛이 들지 않는 밤마다 아이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머리가 둘, 심장이 둘인 것은 자신이 아닐텐데도, 매일같이 생각과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살아남는 것이 자신의 아이였으면 하다가, 고통을 모를 적에 먼저 가는 것이 자신의 아이이길 바라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숨이 끊어진다면 그녀의 바람 중 하나는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먼저 축 늘어진 것은 곧게 뻗은 발가락이 예쁘고 자그마한 두 발이 한 손에 쏙 들어오던 자신의 아이였다. 고귀한 핏줄과 불결한 핏줄을 모두 타고난 자매의 아이는 과연 태생부터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혈통을 한 몸에 가지고 태어나더니, 제 사촌 형제까지 짊어지고 살 운명인 모양이었다. 얄궂은 운명의 아이와 남겨진 여인은 이제는 정말로 미쳐버린 것처럼, 그리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축 늘어진 아이를 정제하기 시작하였다. 그 손길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슬픔도 없었고,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사촌 형제를 받아들이고 살아남은 아이를 볼 때면 여인의 모진 마음에도 수만가지 잡념이 들었다. 이 아이는 자라도 진정으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빼어나게 자랄수록 그 손에 스러질 목숨이 많아질 것이다. 인간이 아닌 악신의 화신으로, 연기, 피, 살점을 몰고다니며 생 또한 그렇게 마감할 것이다…
하루고 이틀이고, 아이는 빠르게 자랐고, 점점 더 자매와 똑 닮아가는 그 얼굴이 종래에는 지옥도에 던져진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견딜 수 없을 때가 찾아왔다. 그 때마다 여인은 그 작은 아이를 갖은 방법으로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매와 닮아서 구하고 싶은 얼굴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면, 미쳐가던 도중에도 제정신이 퍼뜩 돌아와 살길을 열어주고 말기 일쑤였다.
장경. 여인은 아이를 그리 불렀다. 중원인들이 샛별을 부르는 이름은 두 가지였는데, 같은 별도 동틀녘 동쪽 하늘에서 반짝일 때에는 계명성(啓明星), 해 질 무렵 서쪽 하늘에 뜰 때에는 장경성(長庚星)이라 불렀다. 하나의 별에 두 가지 이름이라니, 한 몸에 두 아이가 있는 그 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겠는가. 자연히 악신의 독으로 정제된 그녀의 아이에게도 이름이 생겼다.
"계명."
창을 넘어 들어온 찬 공기에 욕통의 물도 식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없으면서도 있는 이의 이름을 나지막히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지만 묘하게도 가슴이 시렸다.
창 밖의 하늘은 아직 검푸른 빛이었지만 희미하게 옅은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고향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을 싣고 거연이 돌아올 테고, 그녀의 할 일은 끝이 난다. 장경은 살아남을 것이다. 제가 그를 그리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경은 우르골로 정제되었지만 그녀가 봐 온 실패작들과는 달리 총명하고 의젓했으며, 전설처럼 곱절의 무게도 거뜬히 들었고, 매일같이 무예를 수련했다. 이 아이는 그녀의 숙원을 이루어 줄 성공작이다. 그러니 그가 성공적인 악신의 후예로 자라나는 것을 구태여 지켜볼 이유가 더이상 없었다. 내일부로 그녀는 두 사람의 연의 끝을 고할 것이다.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 이제는 거의 식어 김도 나지 않는 목욕물에 몸을 모두 구겨넣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창을 보았다. 이제는 눈에 띄게 밝아진 동쪽 하늘에서 유달리 빛나는 별 하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 몸 속에 흐르는 장생천 신녀의 피가 퍼뜩 무언가를 일깨워주었다.
그 빼어난 아이는 최고의 무인이 되는 순간 현실과 악몽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치광이가 되어 그 목숨이 다 할 때까지 끝없는 전쟁, 파괴, 약탈을 몰고 다닐 운명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어찌 하늘 아래 최고의 무인이 둘이 될 수 있는가? 아이가 정점에 올라 스스로를 파멸로 밀어넣을 수 없게끔, 정점에 버티고 선 별이 있었다. 그 아이가 미쳐버린 채 자신을 잃고 수 많은 사람을 해치게끔 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무의 정점에 올라 우쭐대며 빛나는 몹시도 아름다운 별이.
여인은 깨달았다.
아이는 빼어난 성공작임에도 무의 정점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도,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는 증오와 의심 이상으로 커다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살육과 파괴를 일삼는 미치광이 이리의 운명이 아닌, 칠살(七殺)과 파군(破軍), 탐랑(貪狼)을 물리칠 영웅의 운(殺破狼)으로 흐를 것이다.
숙원을 모두 쏟아낸 저주의 찬란한 끝이 그녀의 감을 스치자, 한 순간이나마 부드러워진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갈 곳 잃은 미움은 한숨이 되어 나왔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물이 완전히 식어버린 욕통에서 걸어나온 그녀는 몸을 말리고 옷을 걸쳤다. 옷을 꺼내고 난 서랍 아래에는 종이로 감싸놓은 작은 병이 있었다. 이제는 정말 한 번 사용할 만큼만 남은 듯 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해가 뜨며 바람이 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고향의 것처럼 느껴졌다. 후걸은 계명성을 바라보며 낮은 곡조로 노래를 불렀다.
"가장 고결한 정령, 하늘의 바람도 그녀의 치맛자락에 입을 맞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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