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흔에 대하여
살파랑 고윤과 원화제 얘기(둘이 CP 절대 아님)
* 어떤 오타쿠는 140자 캐해에 또 살을 붙여서 글이라고 우기곤 합니다. 병약 속성()과 고십육 시절 원화제에 대한 애증 얘길 쓰고 싶었는데요, 캐해가 이게 맞나 싶네요…….
* 본편 완독 스포 있습니다! 모티프로는 사기와 시경(중에서도 관저) 참조했습니다.
하늘까지 높이 치솟은 기와지붕 너머로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따뜻한 석양빛으로 물든 난간 위로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고고한 새는 길쭉한 날개를 펴고 제 깃털을 고를 뿐, 사람이 지나가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침 난간을 따라 계단을 오르던 소년도 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소년은 거대한 문을 지나 높다란 담 사이를 나아갔다. 종횡으로 뒤얽힌 회랑도 익숙한지, 날랜 발소리에 망설임이 없었다. 늘씬한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군청색 비단 옷자락이 사락사락 스쳤다.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옥패 장식은 귀한 신분을 드러냈다.
날듯이 이어지던 걸음은 화려한 전각에 도착해서야 겨우 멈추었다. 문턱에 선 태감은 소년을 보자마자 허리를 굽히며 낮게 속삭였다.
“궁에서 뛰시면 예법에 어긋납니다, 소후야.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문제의 체통 없는 소후야, 고윤은 말없이 씩 웃어 보였다. 고윤이 멋대로 구는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정도는 황제가 어련히 봐줄 것이다. 만인지상인 천자께서 너그러이 넘어가신다는데 누가 감히 말을 더하겠는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짧게 한숨을 쉰 태감이 크게 아뢰었다.
“폐하, 안정후가 들었사옵니다.”
안에서 나직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다. 고윤은 기운차게 어전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상소문을 훑던 원화제는 인사를 듣자마자 공무를 전부 옆으로 치워버렸다. 소위 ‘친아우’, ‘가장 총애하는 아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황제의 모습은 더없이 다정해 보였다.
“왔구나. 그래, 출정 준비는 잘 되어가느냐?”
“예,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문제없이 마쳤습니다.”
고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체격이 아주 건장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당당한 기세는 봐줄 만했다. 세상 두려운 일이 없는 열다섯 소년다운 분위기였다. 자신만만한 소후야가 진정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고윤은 내일 날이 밝자마자 처음으로 전장에 나설 예정이었다. 예전부터 선대 안정후를 따르던 부하들이 몇 번이고 몰려와 요청한 일이다. 원화제는 이런 상소문이 올라올 때마다 곧바로 반려했다. 가장 좋은 사유는 건강이었다. 병치레가 잦아 가련한 아이를 멀리 내보낼 수 없다. 장공주 고모님의 외동아들이 잘못된다면 선제 앞에서 고개를 들 면목이 없어진다. 자식이 다친 후에 더욱 독하게 밀어붙였던 선대 안정후에 비하면 그야말로 온정이 흘러넘치는 처사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어디서 무슨 기연을 만났는지, 고윤은 임시로나마 눈과 귀가 뜨이는 약을 찾아왔다. 때마침 지방에서 터진 폭동은 좀처럼 진압되지 않았다. 조정에서 보낸 인선은 매번 실패했다. 명색이 현철 3부의 정통 후계자인데 이런 사태에 나서지 못하게 막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요절한 3황자처럼 곧 죽을 운명이거나, 비단 이불에 감싸 평생 가둘 계획이 아니라면야.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원화제도 무장들의 청을 물리기 어려워졌다. 고윤이 첫 출정을 앞두기까지 켜켜이 쌓인 사연은 이토록 복잡다단했다.
아무리 혼란하다 한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원화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인자하게 웃었다. 고윤은 황제의 호의를 아낌없이 누리는 것처럼 가슴을 쭉 폈다. 따스하게 실내를 밝히는 와사등 아래서 두 사람이 사이좋은 가족마냥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책상 위에 놓인 찻잔이 서서히 식었다. 찻물이 미지근하게 식고 향이 전부 날아갔을 즈음, 원화제가 고 장군을 친히 시험하겠다며 질문을 던졌다.
“명장의 자질이 무엇이지?”
“전략에 능통하되 덕을 갖추며, 군율을 엄히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휘하 병졸과 동고동락하는 장수를 명장이라 합니다.”
“장수가 갖추어야 하는 덕은 무엇이더냐?”
“총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신의입니다. 둘째는 검약이며, 셋째는…….”
고윤은 고구마 뿌리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물음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실전 경험은 차치하고, 병법을 논하는 언변이 청산유수 같았다.
본디 고윤은 타고나길 사고뭉치였다. 눈과 귀가 어두워져 성격이 달라진 후에도, 구중궁궐로 불려와 다시금 변해가면서도 얌전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서생 나부랭이는 못 됐다. 그렇다고 아예 글을 모르는 밥통으로 자라지는 않았다. 좋든 싫든 황자들과 나란히 앉아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 배운 가닥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문장을 알아야 한 번 말썽을 피워도 더 크게 피우지 않겠는가? 이런 연유로 익혀둔 내용을 또박또박 읊는 동안, 원화제는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흡족하게 들었다. 이따금 손뼉을 치며 칭찬하기도 했다. 이따금 헛소리를 섞어서 허풍을 떨어도 나무라지 않았다. 과연, 태자도 쉬이 누릴 수 없는 총애였다.
그렇게 마지막 질문까지 답을 맞힌 고윤이 내심 숨을 돌리던 차였다. 별안간 원화제가 미간을 좁히며 낯빛을 바꾸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냉담한 시선은 소년을 건너뛰어, 그 뒤에 드리운 검은색 구름을 응시하는 듯했다.
“안정후는 양후(穰侯) 위염(魏冉)의 고사를 아는가?”
순간 와사등이 흔들리면서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목이 졸린 사람처럼.
천 년도 더 전에 있던 이야기다. 위염은 옛 진(秦)나라에서 왕조 삼대를 보좌한 명장이었다. 실력이 뛰어나 출정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기로 유명했고, 사리 판단에도 모자람이 없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 섬긴 소양왕(昭襄王) 때는 반란을 진압하고 적대 세력을 제거하는 공까지 세웠다. 애당초 소양왕이 즉위한 것부터가 위염이 뒤를 든든히 받쳐준 덕분이었다. 사사롭게 족보를 따라가자면 위염은 소양왕의 외숙이기도 했다. 다시 없을 충신이자 측근이었던 셈이다. 명분과 실적을 두루 갖춘 위염은 당대 최고관직인 승상까지 올랐다.
이렇듯 나라에 충성을 다한 백전노장은 대대손손 영화를 누렸을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신하가 지나치게 명망이 높으면 자연히 왕의 경계를 사는 법이다. 소양왕 역시 위염을 흰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때마침 위염이 욕심을 부리다가 꼬투리를 잡혔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소양왕은 제 할아버지 때부터 일했던 원로대신을 가차 없이 숙청해버렸다. 명예롭던 권신의 마지막은 초라한 문장 한 줄로 끝났다. ‘부귀함이 극에 달한 순간 실각했다’고.
고윤은 어떤가? 목숨을 건사하기만 한다면 원화제는 물론이고 그다음 황제까지 모시는 군후가 될 것이다. 다음의 다음까지 황제 삼대를 볼지도 모른다. 다음 황제들은 그를 황숙이라고 부를 테고, 안정후는 크든 작든 실권을 쥐리라. 어디서 비명횡사하지만 않으면 현철 호부와 대량제국의 병권이 그리 만들어줄 터였다. 그러니 원화제가 굳이 호칭을 바꿔가며 질문한 의도는 분명했다. 날아온 칼날을 모른 척 넘기기에는 극진한 사랑과 극심한 견제 사이에서 외줄을 탄 경험이 차고 넘쳤다.
“……예, 폐하. 심려치 마십시오.”
고윤이 침묵한 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찰나 간에 교차하는 만감을 읽어냈는지, 원화제가 돌연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달래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긴장할 것 없다, 그저 네 배움을 시험했을 뿐이다. 과연 부족함이 없구나. 태연하게 말을 이어가던 원화제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다가가자, 소년의 가냘픈 손을 쥔 황제가 천천히 손바닥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십육, 상처는 영웅의 표지란다.’
느닷없이 아명으로 불린 고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원화제는 온화하게 미소 지으면서 마저 글자를 썼다.
‘손빈은 무릎뼈가 잘리고도 병법가로서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한비는 말을 더듬었으나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지. 눈과 귀가 불편해도 두려워 말고, 망설이지도 말아라. 십육, 너는 훌륭한 영웅이 될 것이다. 짐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획 한 획 힘있게 적어준 원화제는 고윤의 손을 감싸 잡았다. 부드러운 손마디 하나하나에 따스한 인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윤은 잠자코 붙잡힌 채 옥좌에 앉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당장 등을 돌리고 싶었다. 억눌린 숨이 목을 태웠다. 선대 안정후가 듣거든 당장 목 매달 비단끈부터 내릴 감상이겠지만, 손바닥에 글이 쓰일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약과 온정을 가르쳐준 사람 앞이어서일까, 속으로 내리눌렀던 응어리가 왈칵 솟아올라 아우성을 쳤다. 폐하, 아뢰옵기에 황공하오나 신은 전설 속의 영웅이 아닙니다. 저는 상흔과 타협해야 하는 현재가 두렵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흩트려 두신 현철영이 맞이할 미래 또한 두렵습니다. 어명을 받들어 제가 망설임 없이 나아간다면, 그리하여 말씀하신 대로 뛰어난 위인이 된다면, 곧바로 제 수족을 베어버릴 분도 당신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고윤은 원화제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잘 알고 있다. 영웅이니 믿음이니, 모질게 채찍질한 뒤에 쥐여주는 사탕 같은 소리다. 문제가 있다면 저를 아끼는 마음이 진짜라는 것이다. 저를 두려워하며 상처 주는 마음이 진실한 만큼. 이 손을 제외하면 사탕을 건네줄 이도 남지 않았다. 십육이라는 아명을 애틋하게 불러줄 사람 또한 없다.
하지만 복잡한 속내를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만방자한 것은 괜찮다. 아둔한 멍청이여도 좋다. 심지어 괴팍하게 굴며 난장판을 쳐도 살길은 있다. 다만 연한 속살을 드러내지는 말아야 한다. 황궁 사방을 둘러싼 담장 안에서는 누구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윤은 눈을 내리깔면서 담담히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등불이 다시 한번 위태롭게 흔들렸다.
증기 새는 소리가 낮게 깔리면서 어디선가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찬 바람을 느꼈는지, 원화제가 흠칫 몸을 떨더니 손을 거두었다. 고윤도 재깍 물러서서 제가 섰던 곳으로 돌아갔다. 용좌보다 한 단 낮은 신하의 위치로. 문밖에서 궁인이 분주히 움직이는 인기척과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전각의 증기기관을 점검할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와사등이 말썽이더니 바깥에서도 알아챈 모양이다. 원화제는 별것 아닌 일에 유난을 떤다면서도 이만 가보라며 손짓했다. 고윤은 말없이 두 손을 들어 어전에 예를 올렸다.
밖으로 나와보니 기울어진 해가 지평선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땅거미가 내려 유리 기와가 온통 핏빛을 띠었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바닥을 타고 검붉은 색조가 번졌고, 그 위로 핏기없는 소년의 얼굴이 투명하게 비쳤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밑에는 산 사람과 죽은 위인들의 그늘이 달라붙어 있었다.
빨갛게 물든 길을 나아가 문 앞에 다다르자 끼익끼익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아득한 저편에서 신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종소리와 함께 안정후부 대문이 활짝 열렸다. 반쯤 녹아내린 듯 침상에 누워서 염주를 굴리던 고윤이 반짝 눈을 떴다. 이런 시각에 후부로 들어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한 명뿐이다. 어찌 오늘은 조정의 밥통들이 제구실을 했는가, 폐하께서 귀가가 빠르시군. 슬며시 미소가 났다.
전쟁이 끝나고 장경이 제위에 오르면서 고윤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삶을 살게 되었다. 물론 현철 호부는 아직 안정후 손에 있다. 국경 순시도 빠짐없이 나간다.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르던 과거에 비하면 가히 비단 보료에 굴러다니는 생활이라 할 만했다. 집주인이 안정을 찾으면서 메마른 모래바람이 들이치는 변방만큼이나 황량하던 후부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경부터 달라졌다. 방안 화병에는 항상 계절에 어울리는 꽃이 꽂혔다. 창문 밖을 보면 작은 연못가에 늘어진 나뭇가지가 하늘거렸다. 정원을 정비할 때 물을 채우고 가꾼 보람이 있어, 이따금 연못 한가운데에 둔 모래섬에 새가 날아들기도 했다. 때마침 오늘은 물수리 한 쌍이 앉아 깃을 고르고 있었다. 둘이 딱 붙어 앉고도 못내 그리운지, 꾸욱꾸욱 울며 서로 부르는 모양새가 퍽 정다웠다. 예전 같으면 약 없이는 보지도 듣지도 못할 풍경이다.
고윤은 새들을 응시하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어릴 적 원화 선제가 했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상흔이 영웅의 표지라더니, 전장을 휩쓰는 살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되자 눈과 귀가 낫지 않았는가. 한 걸음 물러난 장군에게는 그놈의 표지를 지울 자격도, 아슬아슬한 외줄에서 내려올 자격도 생기는 게 아닐까. 나이를 먹더니 실없는 생각만 늘었나? 흉터 남은 손가락 사이로 염주 알을 몇 개 더 굴리려니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새 문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마당에서 장경이 가복과 나누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별일은 없었는지, 석반은 어찌할지……. 이것저것 물으며 조용조용 분부하는 어조가 듣기 좋았다. 거리를 두고 들어도 괜찮지만, 가까이서 들으면 필시 더 좋으리라. 흐트러진 옷자락을 추스르고 일어서자 창틀 너머로 물수리가 빼꼼히 이쪽을 보았다. 꾹꾹거리다 부리를 다문 새들과 시선이 마주친 고윤은 피식 웃었다. 녀석들, 어디 너희만 짝이 있는 줄 아느냐? 안정후부에서는 요조숙녀가 아니라 구오지존께서 군자의 좋은 짝이다.
장난스레 눈을 흘겨준 대장군은 몸을 돌려 퇴청한 황제를 맞이하러 갔다. 그림자에 매달린 무게가 없으니 애쓰지 않아도 발이 홀가분했다. 가뿐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뒤에서 지켜보던 물수리들은 이내 훌쩍 날아올라서 경성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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