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숙의 사람

장경고윤 | 제국의 사랑을 알게 된 태자 이쟁

by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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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안정후와 석달 동안 대량제국의 곳곳을 돌아다녔던 태자 이쟁(李錚)은 황숙의 말씀을 따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불안정한 미래를 노심초사하며 걱정하기보다는 궁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호기심이 생겼고, 다른 흥미와 취미가 생기니 때때로 떠올랐던 근심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이씨 혈통의 황태자 중 세상을 제일 넓게 본 황태자로 거듭나기 전, 그는 몸과 마음이 성숙해졌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본인의 세상에 사로잡혀 시야가 좁기 마련이었다. 어른들의 행동들이 가끔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을 테고 어느 행동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오해를 쌓는 경우도 있다. 이쟁은 오해보단 이해가 부족했다. 

대량제국의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이쟁은 황숙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비의 자리는 왜 여태 비어있는 것이며 후계를 정말 저로 두어도 괜찮냐는 질문이 함축되어있는 말이었다. 그 당시, 황숙은 모호한 답만 건네어 태자를 헷갈리게 했다. 

"나는 일생의 귀착점에 가 봤기에 생전과 사후에 더는 미련이 없고, 혈통을 남길 필요도 없구나."

당연히 이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량제국을 새로 굳건하게 만든 자가 황숙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그가 일생의 귀착점을 가 봤다는 말이 무엇인가. 바다를 가로지르고, 땅을 움직이고, 하늘의 먹구름을 손짓 하나로 치울 수 있을 것 같은 황숙이었다. 뭐라고 단정을 지을 수 없는 분위기가 그를 항상 감싸고 있었다. 그에게 모든 해결책을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안정감을 받기도 했다. 어린 이쟁은 그것이 그의 태생적인 면모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편안했던 궁의 침상을 벗어나고, 때때로 딱딱한 곡식을 먹고, 폭풍우를 맞으면서 자연을 느낀 태자 이쟁은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닌 끊임없이 갈고 닦은 황숙의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의 경험으로 생전과 사후에 미련이 없다는 것인가. 그것이 비록 혈통을 남기는, 대량제국의 황제로서 중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직 황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이쟁은 그의 말을 마음에 담지 않도록 생각했다. 걱정만 하면 무엇하리라. 황숙께서 다 생각해 놓은 것들이 있으시겠지. 

그리 생각한 이쟁의 세계관은 열여덟 번째 밤에 뒤집어졌다.

안정후가 이끄는 현철영은 변방을 순시하기 시작한 후로 어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질 않았다. 대량제국의 물결을 며칠간 이리저리 느낀 후 본토로 돌아와 철도 마차를 타고 태어나 처음 보는 푸른 광경을 이틀째 보는 날이었다. 유리창 넘어로 주황빛 노을이 찬란하게 들어와 안정후의 철갑을 빛내고 있었다. 철도 마차의 분리된 격리실에서 긴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아 대량제국의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던 참이었다. 

때마침 이쟁이 아직 자리에 있을 때 황궁에서 온 서신이 도착했고 안정후는 얇은 천가죽으로 돌돌 말린 서신을 확인하고 사뭇 다른 안색을 피었다. 어린 시절이라면 몰라도 더는 아이 취급을 받을 수 없는 태자에게 고자희는 번듯한 사령관의 모습을 지키는 편이었다. 조금은 덤덤하고 냉담하면서 이따금 다소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는 사람. 어른의 길을 걷고 있는 태자 이쟁에게 안정후 고자희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노을빛에 의한 착시인지 몰라도 한순간 안정후의 낯빛이 철갑을 두르며 국경을 지키는 강철 같은 흑오아가 아닌 평범한 사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표정처럼 보였다. 다른 이가 봐도 낯간지러울 것 같은 표정은 나타나는 동시에 금세 자취를 감췄다. 

일말의 환각이라 해도 믿을 법한 순간이었다. 

이쟁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안정후를 쳐다보다가 서둘러 시선을 내려 대량제국의 구불구불한 산맥이 그려진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신이 펼쳐지는 소리가 들리자 이쟁은 호기심을 자제하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자희는 서신을 들면서 읽고 있었기에 이쟁이 볼 수 있는 것은 서신의 백지상태인 뒷면과 그 너머로 보이는 흑안이었다. 왼쪽 눈매에 찍혀있는 붉은 점은 노을에 색이 바래져 부드러운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변방 순시 내에 안정후의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을 주로 봐온 태자 이쟁은 안정후의 누그러워지는 눈빛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눈빛 속에는 애정과 질책이 뒤섞여있는 포근함을 담고 있었다. 서신을 보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만 표출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태자 이쟁은 황궁에서 날아온 서신이 누구의 손에 집필되었는지 감히 추측할 수 있었다. 경성에서 안정후를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한 명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안정후는 콧바람 비슷한 소리를 내고 서신을 도로 말았다. 그는 끝까지 서신에 시선을 거두지 않고 부드러운 손길로 한 번 겉면을 매만지더니 사색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이쟁은 포근한 색감이 차가운 얼굴을 비추면서 낯설지만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안정후를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그제야 정신을 제대로 차린 것인지 안정후의 눈빛이 번쩍 빛나며 태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점이라고 없어 보이는 완벽한 안정후의 얼떨떨해 보이는 모습을 바라본 태자는 작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그럼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야겠습니다. 안정후 또한 서둘러 철갑을 벗으시지요."

태자 이쟁은 본인의 마차 칸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잊을 뻔했던 황숙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사람은 자라면서 예상치 못한 시기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고 숙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헷갈렸던 문제를 풀 수 있게 되고 도저히 포옹할 수 없었던 발상을 다루는 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이 순간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이고 일평생 한 번쯤은 꼭 겪어보게 된다는 견문을 넓히는 찰나였다. 태자 이쟁은 그 순간을 맞이하면서 떨떠름함보단 자연스러운 이해가 스며들었다. 황숙과 안정후가 함께 서 있을 때 느꼈던 기분이나 황숙이 안정후에 대해 얘기할 때 나오던 그 표정에 정의를 둘 수 있게 되었다. 

4숙, 크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는 말이 이러한 뜻이었습니까? 이쟁은 속도를 붙여 달리는 철도 마차 복도를 물드는 오색빛깔의 하늘을 바라봤다. 그럼 황숙은 언제부터 그 사람을 연모했을까. 이쟁의 기억 속에는 그들은 항상 저렇게 지내왔던 것만 같았다. 과거를 조금 더 거슬러 융안제가 살아있을 당시 정책을 뒤바꾸기 위해 조용히 판을 움직였던 황숙이 떠올랐다. 대량제국에 새로운 국법을 세우면서 조정을 천천히 바꿨던 안친왕. 신하들의 관심과 시선을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황형에게 의견을 제시하던 4황자. 

이렇게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쟁은 황숙을 여태 잘 몰랐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그를 한없이 좋아했고, 그의 옛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랐던 게 좋았을 뿐이었으니. 4숙은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태평 세대를 향한 길을 아주 오래전부터 걷고 있었다. 

이쟁은 지정된 마차 칸의 문걸이를 바라보다 걸어오던 복도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격리실에서 서신을 다시 읽고 있을 안정후를 잠시 상상하고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황숙의 철저함은 해외로 나가 전세계에서 학습을 받고 돌아와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한 4숙을 경계하라는 황후의 말에 진심이 담겨있었다는 것을 뚜렷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태자 이쟁은 경계보단 존경이 마음속에서 앞서 번졌다. 친히 안정후를 동반하면서 견식을 넓히고 돌아오라는 추천을 해준 황숙이었으니. 이쟁은 배치되어있는 책상 위에 저무는 빛을 고대로 받는 안정후의 장정첩을 필사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어울리는 두 사람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날 밤, 태자 이쟁은 마음 편히 잠이 들었다. 

황숙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된 것 같은 소소한 뿌듯함을 만끽하면서.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을 글쓴이의 주절

- 태자 이쟁은 황숙과 안정후의 관계를 깨닫고 조금 안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본인이 처리(?)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황족의 세계는 워낙 그런 법이니까요.

- 태자 이쟁은 조금 더 성숙해졌지만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하는 순수한 청년이란 생각이 듭니다. 왜 편히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요. 여러모로 섞인 감정이 해결되었기에 그런 거겠죠?

- 철갑을 벗으라는 뜻은 이중적이죠. 하루치 순방을 마친 안정후에게 어서 쉬라는 태자의 말이기도 하고, 어서 빨리 탈영해서 황제 곁으로 가라는(이건 그냥 글쓴이의 마음)

- 안정후의 장정첩을 10대 중반에 필사한 장경과 그 똑같은 장정첩을 10대 후반에 필사한 이쟁을 나란히 두고 싶었습니다. 변방을 순찰하면서 한 번도 그 장정첩을 필사하지 않았다면... 글쎄요. 그건 아닐 것 같아서요.

- 지극히...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태자 이쟁이 장경고윤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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