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TEP AT A TIME

문송안함 전력 | 아서레이 | *스포주의* 250화 이상 읽으신 분들만 열람하시길 바랍니다

by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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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플랫폼에서 업로드 했던 게시물입니다

one step at a time [ adverb ] : slowly, steadily, without rushing

아서는 기억의 세계, '영원한 겨울의 도시'에서 돌아온 이후 훈련도 마다한 채 레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의식도 없는 메마른 남자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3왕자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동이 트기도 전, 레이의 기숙사로 몰래 진입한 첼은 이미 자리를 잡은 3왕자를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배치한 의자에 앉아있는 아서를 빤히 바라보다 기숙사 문에 기대었다. 둘은 고통스러운 무의식 속에 빠져있는 마법사를 함께 쳐다봤다. 

 

"프란 화이트는?"

"... 못 온다고 말하던데."

"걔도 답답하겠네."

"허. 아주 끼리끼리 납셨네요."

 

아서는 고개를 돌려 입꼬리를 살짝 내린 첼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 걱정과 믿음이 섞인 묘한 불씨가 타오르는 듯했다. 자신이 선택한 주군의 시선을 느꼈는지, 첼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아서에게 말했다. 

 

"아서, 너도 좀 움직여. 레이가 너의 불타는 시선을 받는다 해서 일어나지 않아."

"... 곧 나갈 거야. 오전에 보고서 제출하려고."

"보고서? 그렇게 빨리 썼어? 네가?" 

 

아서는 별 다른 말 없이 도로 레이를 쳐다봤다. 3왕자는 항상 그랬다. 기사들보다 허약하고, 진언이 아닌 찬송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에테르를 부리는 마법사가 다칠 때마다 저 표정을 지었다. 자책감과 불안감이 맴도는 얼굴은 3왕자에게 흔히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가끔 인간이 아니라 사자 한 마리처럼 행동할 때와 괴리감이 느끼는 인간다운 표정이었다. 

 

첼은 알았다. 인간들은 탈의 종류가 있다. 

 

멜키오르는 너그러운 여신의 탈에 종말을 품고 있는 자. 아슬란은 고상한 피를 소유한 왕자의 탈에 학살을 품고 있는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3왕자 아서 레오니드 리오그난은 인간의 탈에 사자가 때를 기다리며 숨어있다.

 

천진난만하게 굴어도 그의 눈빛은 항상 총명했고, 망나니처럼 오밤중에 펍을 이리저리 싸돌아 다녀도 귓가에 들려오는 정보를 놓치지 않았다. 사자가 발톱과 이빨을 감추고 동네 강아지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의 생존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몸에 리오그난 가의 대가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예리하게, 섬세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자랐다. 

 

아서 리오그난과 검을 맞대고 훈련한 자가 느끼는 기사의 감각이었다. 

 

아서에게 자백할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첼은 아서의 저 인간다운 표정을 좋아한다. 커다란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제 나이 또래처럼 보여서. 잃을 것이 있는 인간처럼 보여서. 무언가를 잃을 게 있다면, 지키기 위해 그만큼 더욱 강해지는 게 인간 아닌가? 

 

"마도구가 레이의 몸을 이렇게 상하게 만들 거였으면......"

 

아서는 흐릿하게 뒷말을 뱉다가 입술을 아물었다. 첼은 그가 끝까지 말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레이는 '공작의 완드'가 절대로 아슬란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충고했고, 그의 친구들은 신의 대리인이자 자신들을 구제할 대마법사의 말을 어기지 않을 테니. 하지만 아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력을 가진 첼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의 안색은 생사를 오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왼팔에 자리한 검은 선이 꿀렁거리며 움직이자 그의 몸이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레이와 정반대인 느낌이 들었다. 레이는 묘하게 신성력을 담은 눈빛과 손짓이 존재하는 것 같았으니까.

 

"보고서는 어떻게 제출하려고?"

 

한동안 정적을 유지하다가 첼이 아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표정을 말끔하게 지우고 어깨를 으쓱였다. 지극히 평민다운 행동에 왕족의 얼굴을 하고서. 

 

"아슬란이 사인할 거야."

 

무미건조한 말투에 첼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아 어떠한 결과가 나왔는지 알고, 그것을 읊는 듯한 화법.

운명이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는 듯한 어구.

왕세자가 떠오를 법했지만 아서는 형제의 광기 섞인 눈빛이 아닌 고요한 단단함을 보였다. 첼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 레이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청록빛 눈안이 이른 햇살을 맞이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을 잠자코 쳐다봤다. 짧게 정리한 금발과 두툼한 눈썹. 오뚝한 코와 넓은 어깨는 멀리서도 왕족의 핏줄이 보이는 외향이었다. 첼이 아서를 조용히 지켜보고 아서는 첼이 쳐다보도록 놔두는 사이, 새로운 하루의 빛줄기가 창문 너머로 들어와 3왕자를 감쌌다. 기도를 하듯 두 손을 꽉 맞붙잡고 있는 아서를 잠시 바라본 첼은 농담 섞인 어조로 "행운을 빌게"라 말하며 남자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온전히 올라오고 레이의 손끝까지 햇살이 닿는 순간, 아서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마법사 곁으로 갔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있는 아서가 레이의 얼굴에 그림자를 입혔다. 아서는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레이의 짙어진 눈 밑을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거칠고 상처 많은 손이랑 대비되는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한 번 만지면 계속 생각나고 끝없이 쓰다듬고 싶어질 것 같아서 미루고 미루었던 욕망 가득한 충동이었다. 오늘만. 오늘만큼은. 그의 열기 가득한 체온과 느릿한 심장 소리, 그리고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감각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아서는 레이의 날카로운 턱선을 지나치고 그의 하얀 목덜미에 손등을 댔다. 무방비하게 그의 목이 쥐어질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아서는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움직여 레이의 왼쪽 어깨를 바라봤다. 분명 옷 아래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상흔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아서 리오그난은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이시엘과 함께 훈련하는 것도 좋아하고, 첼이 이따금 갖고 오는 와인도 좋아하고, 쌍둥이랑 하는 달리기 시합도 좋아한다. 술은 당연히 좋아하고, 어머니가 이따금 불러준 자장가 또한 여전히 좋아한다. 

하지만 아서 리오그난은 사랑해 본 적이 없다. 

사랑은 그에게 사치였다. 그는 절박했고, 무엇이든 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자신의 곁에 있기로 결정한 이들은 지키고 싶었으니까. 시간도, 능력도, 마음도 촉박한 그에게 사랑이 닿을 리가 없었다. 아서에게 사랑은 종이 위에 있는 활자,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노랫소리 뿐이었다. 

아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개를 틀어 창문 밖에 있는 해를 잠시 바라보다 침대에 누워있는 레이를 향해 몸을 기울었다. 자신이 행할 행위를 목격할 자는 오로지 저 따스한 햇살만으로 남기고서. 

"갔다 올게, 레이."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길게 끌어 불렀다. 부드럽게 감기는 이름은 아서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를 그리게 만들었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레이의 풀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아서 리오그난은, 우습게도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시작부터 불가능이었다. 어떻게 그를, 클레이오 아세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목숨을 받쳐 저를 구하고, 저를 인도해주는 신의 대리인을. 

아서 리오그난은 클레이오 아세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신의 설계인지 혹은 개인의 의지인지 모르겠으나, 아서는 상관없었다.

어떠한 세상이라도 기필코 자신은 '클레이오 아세르'를 사랑하리라.

느슨하게 잡고 있던 머리카락이 아서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 흘러내렸다. 한 번 더 잡고 빗겨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 미래에 네가 지금, 이 순간을 '읽게' 되더라도, 이것만큼은 용서해주겠지.

마음속에서 울부짖고 뛰쳐 나오고 싶은 사자는 잘 다독여주면 된다. 아직은 아니다.

그는 어떻게든 클레이오를 자신의 곁에 둘 테니까. 

그리고 그다음은. 

그 '다음'을 같이 생각해줄 레이와 함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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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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