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ce homo

0.

클라렌던 하우스는 비어 있었다.

아서 리오그난은 그 본질적인 비어 있음을 목격하며 일종의 섬뜩함을 느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이곳을 공간의 주인이 부재할 때 방문한 적 없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자기 이외의 사물에 시선이 닿지 못하도록 하는 자였다. 아서는 자신이 형제의 이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바깥의 권능까지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언제나 형과의 대화에 목숨을 건 교전처럼 임했다.

이솔트의 성으로 떠나갈 때 멜키오르는 거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추억을 담고 아끼는 물건이라고는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서, 입기에 편한 낡은 옷가지 몇 벌 말고는 전부 원래 자리에 두고 갔다. 주인이 떠난 클라렌던 하우스에는 그가 쓰던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서 비어 있었다.

아서는, 생활의 흔적이라고는 없어 거의 사무실 같은 침실 내부를 둘러본다.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검박한 획일성이다. 백화점에서 구입한 가구, 대량 생산된 소품, 아주 저급은 아닐지언정 장인의 정성이 들어간 것도 아닌 공장제 집기들. 온통 공산품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왕궁의 일부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해온 것은 모두 세심한 힐레이다와 비서관의 공로이며, 거기에 주인의 심미안이 일절 개입하지 않았음은 누구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쌓인 서류철이며 메모 등속까지 여태 처분할 엄두를 내지 않아 그대로였다. 아서는 스스로 목적을 모른 채 그것들을 들추어 본다. 곳곳에 남아 있는 필체는 아서에게도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익숙함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다. 이 땅에서 문자를 해독할 줄 아는 신민 가운데 그런 필체에 익숙하지 않은 자가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게 흠결도 특징도 없이 아름다운 형태는 인쇄된 교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서는 오래된 카우치에 천천히 등을 기대고 앉아본다. 함께 배치된 낮은 탁자에는 멜키오르가 쓰던, 흔한 금장 장식조차 없는 찻잔 한 벌이 여전히 놓여 있다. 이곳에는 사람이 생활하며 필요한 물건이 다 갖추어졌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펜 한 자루도 더 없다. 누구든지 머무를 수 있기에 아무에게도 맞추어지지 않았다. 이 공간은 공적이며 잉여가 없다. 공간의 규격이라는 것이 물질로 현전한다면 바로 이런 형태이리라. 개인의 흔적이 결여되어 차라리 추상으로 화하고 마는 공간.

멜키오르가 흔쾌히 사용했거나 사용할 만한 물건은 너무 많고도 흔하여 특정할 수 없다. 저 도기 찻잔을 세상에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지 아서는 가늠도 하지 못했다. 그를 연상할 수 있는 흔적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 없다.

아서의 가까운 벗들은 그와 반대였다. 그들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질량과 경계는 명확했다. 그 애들은 모두 선호가 뚜렷하여, 한 시간만 두고 보아도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이 들고 난 데에는 어김없이 흔적이 남고, 하루를 살고 가더라도 반드시 그랬다는 표가 났다.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설명할 수 있었다. 살아감의 양태란 결국 찻잎과 설탕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기에 아서는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맞아들이고 미워하는 것을 내몰고자 왕이 되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군대가 호수에서부터 다다른 지금에 와 아서는 생각에 잠긴다. 대답은, 열쇠는 어쩌면 존재가 아니라 부재에 달린 듯도 하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밀어 치웠던 이름에.

부재. 어떤 초상도 그를 똑바로 그려내지 못했고 어떤 흔적도 그를 재현하기에 충분치 못했다. 그는 참으로 여기에 없다. 그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무엇을 특별히 즐겨 먹고 입고 쥐었는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떠올릴 수 없다.

당신은 말소리조차도 외국인을 위한 교본처럼 내었다. 교범을 따르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누구라도 당신처럼 발음하고 글씨 쓰는 것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지는 않는다. 오직 당신이 그렇게 한다. 그 혹독한 몰미와 몰경계만이 당신을 증거한다.

여기에 당신이 있었다.

한참이나 공백의 윤곽을 파헤치던 아서는 멜키오르가 사적으로 타인을 배제하고 마음을 들여 아꼈다던 단 하나를 가까스로 떠올려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창으로 걸음을 옮겼다. 꾸준한 정원사가 식재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무를 고르고 꽃을 심어놓은 모양을 보면 사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서가 목격을 시도했을 때 주인이 떠나간 정원은 이미 황폐하게 시들어 얼굴을 가지지 않았다. 클라렌던 하우스는 비어 있었다. 이토록이나 철저한, 처절한 부재 증명.

이제 펜 아래의 리오그난은 하나뿐임을 아서도 알 수밖에 없다.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만들던 부차의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서 리오그난은 이 세계의 적자이자 독자이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로서 던져졌다. 마침내 부속도 종속도 없이. 자기가 될 책임을 지고.

문득 아서는 부재를 향하여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허공에서는 응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늘이 그토록 공막한지를 어쩌면 아서는 지금까지 몰랐던 것 같다.

1.

달빛이 강에 내렸다. 물결에 빛발이 실리니 물 대신에 세월이 흐르는 듯했다. 강물은 깊고 믿음직스러워서 생애를 놓아보낼 만하게도 보였다.

시간의 이름을 가진 강가의 한 점에 멜키오르는 서 있다. 왼손에는 술잔을 든 채였다. 유리 술잔이 아니라 양철로 된 물잔이었지만 어쨌거나 이것은 축배잔이다. 비록 축하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아니 잔을 부딪칠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축하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독작한 잔을 쥐고서 멜키오르는 홀로 삶을 내려다본다. 오래고 지난한, 바람에 날리는 티끌이 가득하던 생애를. 고통을.

고통은 삶이었다. 삶의 뼈대였다. 뼈대의 마디마디였다. 살이고 피였다. 코로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먹어 삼키는 것이었다. 몸 안에서 뒤흔드는 것 들끓는 것 타오르는 것이었다. 숨을 틀어막는 물이었고 쳐든 고개를 물속에 도로 처박는 손아귀였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참혹의 지경에서 멜키오르는 오래도록 고통에게 애원하고 간청했다. 그는 고통에서 놓여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호흡을 벗어날 수 있는 생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멜키오르는 마침내 고통을 호흡하기를 택했으며 고통을 섬으로 삼아 그 기슭에 몸을 누이는 자가 되었다. 그는 세계의 포함 관계를 재구성했다. 세계 안에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고통이 있으며 그 안에 세계가 재한다.

그렇다면 고통이 사라진 삶에는 무엇이 있는가?

삶은 없다. 혹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 있음은 언제고 일체로 고액이기에.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그러하다. 죽음이 욕되므로 삶이 욕되고 평생이 일생이 아닌 세계에서는.

멜키오르는 달빛이 서술된 지상의 흐린 윤곽을 찬찬히 읽는다. 그 자신의 피로 쓰인, 한때 박애했으며 한때 증오했던 그 모든 글줄들. 지워지고 덧쓰이고 교체될 수 있는 문장들. 그토록 쉽게 으스러지는 인생.

생명을 쓴 책은 인물을 하늘로 이끌지 않았으며 녹명되지 않은 자를 불못으로 던지지도 않았다. 아니 그는 바로 녹명된 자였기에 불못에서 오래 탔다. 고쳐 쓰일지언정 지워지지 않는 이름의 기록 때문에. '기록되었으되', 말씀 때문에.

멜키오르는 발을 움직여본다. 반 걸음 앞에 시간의 강이 검은 아귀를 벌리고 있었다. 육신은 다 사그라졌고 강물은 힘을 가졌으니, 한 번 내딛는 것만으로 이 세상에서 그의 얼굴과 자리를 지워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을 가진 적이 있었다면.

그는 걸음을 도로 물린다. 죽음 또한 쓰임의 일부임을 그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자는 없어서이다. 구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멜키오르는 손을 흔들어 허공에 술을 뿌렸다. 그리고 웃었다.

평생이라는 단어, 삶과 살아감을 가리키는 모든 말에 절대적으로 선행하는 조건―쓰임으로부터 이름을 되찾아내는 것. 온전한 시멸이야말로 온전한 실존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토록이나 삶을 희구해 본 것은 실로 평생에 처음이라고 할 만했다.

멜키오르는 영구하고 불가역적인 공백이 될 것이다. 빈 곳, 말소된 흔적, 막막히 뚫린 구멍. 턱없이 건너뛰어진 단락 번호. 찬송의 한가운데를 끊고 멈춰선 적막. 말로 쌓은 세계를 진정 뒤흔드는 것은 침묵임을 그는 안다. 찬가의 반대는 저주가 아니라 침묵이고, 봄비가 허공에 고일 수 없듯이 자비는 부재를 덮을 수 없다.

그러니 사라진 것들에는 자리가 있었다. 기록의 본질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닌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 있기 때문에. 기억되는 과거가 정녕 특권적인 과거라면, 기억의 의의는 보전이 아니라 멸실에 근거를 둔다. 특권은 특권의 결여에 의하여 가장 적확히 설명되는 법이므로.

이제 멜키오르는 서사가 어떻게 끝나는지에 더 개의치 않으려 한다. 책을 불태우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원고가 정히 보전을 바란다면, 그렇게 하라. 피로 채식된 문장들을 그토록 자랑으로 남기고 싶다면.

어떤 결말보다 가혹한 침묵이 또한 영영 남을 것이다. 모든 개연과 당위를 열화시키고, 인과를 뒤바꾸며, 그럼으로써 필연을 우연으로 전환하는 침묵. 이제 서사는 우연과 행운의 자격 없는 잇따름에 불과하게 된다. 어느 훗날에 이 기록을 읽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기계장치 너머로 필히 서술의 공백을 목격할 것이다. 

그때에 독자는 발견하여 알게 되리라. 여기에 사람이 있었다. 부재하므로 은폐할 수 없는 존재가.

그리고 이야기가 쓰지 않음으로써 써낸 모든 절을 다 읽은 후에, 그는 빈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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