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안함

[아서레이] Marigold

LETHE by 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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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업화가 땅을 뒤집어엎던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명의 왕자가 죽고 왕이 죽고 한 왕자만이 살아남았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이들은 이전의 삶을 되찾거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농부들은 검을 내려놓고 일터로 돌아가고, 병사들은 무기 대신 무너진 건물을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장인들은 바쁘게 제 일에 몰두했고,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서 리오그난이 있었다.

 

또 다른 천 년을 시작하는 대관식이 끝난다. 잠깐의 어둠 뒤로 다시 떠오른 태양은 젊은 왕처럼 찬란하게 빛났고, 어리고, 늙고, 약하고,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은 펍의 술값과 하루치 끼니에 드는 비용을 아는 이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음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여신의 뜻대로 이 세계에서 에테르는 건재했으나 그 쓰임을 다한 대마법사의 예지와 그 섬세하고 무궁무진한 마법은 끝났다. 공작의 완드는 보기 좋은 지팡이가 되었다. 그래도 클레이오는 상관없었다.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해서, 가진 땅과 저택만으로도 여생을 넉넉히 보내기엔 차고 넘쳤으니까.

 

모든 일이 차곡차곡 풀려가고 있었다.

두 번째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아서 리오그난은 막사 안에서 홀로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듬지 못해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녹푸른 눈동자가 형형했다. 강철을 꼬아 만든 것처럼 단단한 팔과 손끝이 지도 귀퉁이를 찍어 눌렀다. 이미 한 차례 브룬넨과 전쟁을 치른 알비온으로서는 갑작스럽게 깨진 균형을 비틀어 벌리고 들어선 카롤링거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전쟁으로 훈련된 군사들과 기사들이야 충분했다. 문제는, 그 군사들과 기사들도 강철로 만들어진 게 아니요, 뼈와 살로 빚어져 있어 일정한 주기로 물과 식량을 소비한다는 점이었다.

브룬넨과의 전쟁은 각 국가의 장기臟器를 지지고 찢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잘 갈무린, 그 비옥한 토지들. 향기로웠던 과수원. 깨끗하고 맑은 샘물. 브룬넨이 가져온 독은 히드라의 독뿐만이 아니었다. 오염된 인간들의 피, 그들의 창병기에 발려 있던 그 저주들이 알비온의 땅과 물을 철저히 썩혔다. 보급품이 끊기면 어떤 맹장도 자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남은 식량은 사흘 치. 아세르 상단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이 전쟁은 새로운 왕을 3개월 만에 잃은 전쟁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국민들은 부랑자와 노예가 되겠고, 귀족들은 명예를 버리고 투항하겠지. 온갖 무게를 실은 금빛 속눈썹은 낮이고 밤이고 감길 줄을 몰랐다.

 

“폐하. 벌써 나흘 동안이나 침소에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시엘.”

 

막사를 밝히는 조명을 따라 이시엘의 붉은 머리카락 아래로, 어깨부터 쇄골까지 그늘이 졌다. 식수도 모자란 상황에서 씻는 것은 사치였으므로 가닥가닥 피와 먼지로 뭉친 머리카락은 본디 품었던 윤기를 잃었다. 다만 첼이 전쟁에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다듬어 줬을 게 분명한 단발만은 여전히 끝이 반듯했다. 피로로 짙어진 눈가 위로는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은 색으로 가라앉았다.

 

“저로서는 폐하의 무게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전쟁에서 패퇴하는 건 병사와 기사들일지언정 폐하여서는 안 된단 사실만은 압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상징과 다름없으시니까요.”

“프란에게 부탁해 둔 바가 있어.”

“귀족들이 평민원의 확장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귀족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

“계급은 쉬이 거스를만한 게 못 됩니다.”

“하지만 분쟁이 없으면 변하지 않아.”

 

아서가 이시엘을 돌아보았다. 굳건한 표정 위로 염려가 번짐을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아서는 그저 쓰게 웃을 뿐 멈추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안배하셨던 겁니까?”

“그건 아니야. 고민이야 오래 했었지만, 네 말대로 난 이 나라의 상징이고 전설의 재림이니까. 내가 권력을 쥔 동안에는 다음 세대를 위한 발판만 제대로 깔아둘 셈이었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고. 최대한 피가 적게 흐르는 방향으로. 예정은 그랬지. 숨겨서 미안해.”

“미안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는,”

“내 기사이지. 내가 왕이 아니라도 넌 나를 섬길 거고. 그러니 내가 왕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잖아.”

“……그렇습니다.”

 

아서는 고개를 숙였다. 늘어뜨렸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내려다보면 빈틈없이 박인 굳은살이 보인다. 그 어린 시절 이시엘과 같이 쌓아왔던 지층들이다.

 

“난 최선을 다 했어.”

“폐하.”

“그리고 이제 환시도, 미래를 알려주는 이도 없어.”

“…….”

“알잖아. 내가 몇 명을 죽였다고 생각해? 왕이기 앞서 나는 기사였어. 그리고 남의 목숨을 끊어본 적 있는 이는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끊어질 각오를 하지. 당연한 거야.”

“끊어지지 않을 겁니다.”

 

아서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자각에 잇단 반응이었다.

 

“각오를 했단 뜻이야. 보통 왕이 최전방에 나서는 일은 없지. 하지만 알비온 최강의 기사를 고작 지휘 막사에 박아두고 썩히는 건 병법으로서 그리 좋지 않은 수니까.”

“아세르 가에서 보낸 보급품이 나흘 내로 당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보급품은 아무리 쪼개도 사흘 분이고.”

“폐하.”

“만약에 말이야.”

 

다시 고개를 든 아서의 눈빛은 무겁지도, 피로에 잠겨 있지도 않았다. 언제나처럼 바다를 굳혀 만든 듯 푸르고 또렷했다.

 

“내가 죽는다면,”

“폐하!”

 

아서는 잠자코 손을 들어 이시엘의 말을 제지했다.

 

“…….”

“만약이라고 했어. 사지로 뛰어드는 취미는 없다고. 날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이시엘, 우리는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여야 해. 이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을. 그래야 그 최악이 닥쳐왔을 때 당황하지 않으니까.”

“옳습니다.”

“내가 죽으면.”

“예.”

“클레이오를 꼭 지켜줘.”

 

단단히 굳었던 이시엘의 얼굴이 미미하게 풀어졌다. 기세가 수그러든 목소리가 달갑지 않은 명령을 받아들였다.

 

“굳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저는 친구를 지킬 겁니다.”

“친구로서가 아니야. 내 명령이고 부탁이지. 클레이오는 내 최측근이야. 하지만 예측의 성흔을 잃고 나서 걔 뒤를 따라다니는 소문은 왕인 나로서도 막지 못했어.”

 

너무나 많은 미래를 누설한 탓에 여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발달한 미디어는 근거 없는 가짜 진실을 배양하는 온실과도 같았다. 아세르 가의 정보력은 탁월했으나, 언론을 조작하고 편집하는 건 정보력과는 다른 문제다. 이 나라는, 특히 귀족들은. 매사에 무심하고 자신들을 공경하지 않던 대마법사의 추락을 지나치게 흥미로워했다.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제 클레이오는 단순한 땅 부자로 취급받고 있어. 마법 고문은 마법을 쓰지 못하니 오를 수 없었고, 의석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고. 그가 딱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르길 원하는 작자들이 한 무더기인데 심지어 본인도 그 대우에 불만이 없어.”

“클레이오의 뜻입니다.”

“그래. 그래서 그 말을 받아들였어. ‘내 뒷소문 따위나 가십에 가뜩이나 모자란 인력을 낭비하지 말라.’라고.”

 

어느새 말아 쥔 주먹 안에서 손톱이 단단한 손바닥을 짓눌렀다. 아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걘 지금 동떨어져 있어. 그 애를 지켜줄 사람이 없어. 그 애가 지나치게 강했었던 시절 눌려 있었던 모든 것들이 솟아올라 그 애가 선 바닥을 뒤흔들고 있다고.”

“…….”

“이시엘,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죽으면, 망설이지 마. 내 시체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부디 클레이오를 지켜줘.”

 

구태여 대화를 더 잇지 않아도 이시엘은 알았다. 이것은 부탁이자 명령이고, 애초에 거부할 권한은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 이시엘은 자신의 왕의 목이 가장 높은 창에 깃발처럼 걸리는 상상을 억지로 밀어 치웠다. 어느 병사도 왕의 시신을 방치하지 않으리라.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쯤이야 상관없었다. 다만 자신의 왕을 그렇게 보내는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그 왕께서는 방금 클레이오와 자신의 시신, 두 선택지 중 한 가지를 아주 없애버렸다. 단 몇 마디의 말로. 이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예.”

 

언제나 그가 옳았다. 아서 리오그난은 잔인할 정도로 현명했다.

 

 

 

“행렬을 멈추겠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말들은 탈진해 쓰러졌고, 사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시가 급박함을 압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휴식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부디 한 번 더 생각해 주십시오. 여기서 저희가 완전히 무너지면 최전방의 모든 이들이 죽습니다.”

 

클레이오는 사납게 눈을 치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게나 내뻗친 머리카락을 단단히 붙든 진녹색 리본이 그의 궤적을 따라 흔들렸다.

 

“탈진하지 않은 말과 인원을 추려. 최전방까진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까.”

“아세르 님.”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준비해.”

 

보급관은 한숨을 삼켰다. 눈앞의 남자는 미쳤다. 미쳐서 이미 탈진해 길바닥에 나뒹구는 이들을 돌아볼 이성조차 없다. 그의 왕이 사지를 내달리고 있음은 이 나라의 누구라도 알았다. 하지만 절박함이 상황을 타개시키진 않는다. 그걸 모를 작자도 아니면서.

 

‘최소 본인 눈으로 왕의 생존을 확인해야 멈출 거야.’

 

보급관은 고개를 숙이고 마차 뒤로 돌아갔다. 말이 씨근거리며 거품을 무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클레이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법은 잃었다. 잃었으나, 클리오의 약속만은 건재해서. 이격이 작동하지 않았다면 진작 미쳐버렸을 터였다. 그만큼 클레이오는 절박했다.

 

‘최전선에 네가 왜 나가!!!’

‘클레이오.’

‘미쳤어? 넌 왕이야. 기사가 아니라고.’

‘이게 제일 피해를 줄이는 길이야.’

‘네가 죽으면 모두 무용지물이야!!!’

‘알아. 그러니까 안 죽을게. 응? 네가 확인하러 와. 절대 죽지 않을게.’

 

출정하기 전날 밤, 응접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클레이오의 어깨를 감싸 쥐고 다독이던 아서는 놀랍도록 침착하고 평온해 보였다.

 

‘보급선을 부탁해. 웬만하면 네가 직접 오진 않길 바라. 넌 민간인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넌 오겠지? 그러니까 네가 오기 전까지 절대 죽지 않을게.’

 

클레이오는 이 멍청이의 야윈 뺨을 올려붙이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고 억눌러야 했다. 기억은 선명하다. 완결된 사건 안에서 감정은 더욱 선명해지고, 장면은 기억을 복기할 때마다 조금씩 바뀌며 그 생동감을 유지한다. 무엇도 잊고 싶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단단히 깍지 껴 무릎 위에 얹고 또 그 위로 제단처럼 제 이마를 쌓았다.

 

‘네가 오기 전까지.’

 

그럼 내가 도착하면 죽겠다는 뜻이야? 그런 부질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이상 말해봤자 떼쓰는 짓이니까. 아서 리오그난은 늘 뜻대로 했다. 몇 번이고 덧쓴 세계 안에서 그의 운명은 이미 안배되어 있음을 명확히 알고서도 그랬다. 그는 운명을 점지한 여신을 증오하지도, 그 여신을 대리한 이에게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운명에 순응하되 최선을 다 하기. 그게 아서 리오그난을 고귀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죽지 마.’

 

분했다.

 

말을 교체한 마차가 진흙길을 박차듯 가로질렀다. 우레 같은 마차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이격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있었음에도 클레이오는 이격을 끄지 않았다. 혹시 네 숨소리를 놓칠까 봐. 간발의 차이로 널 놓치면 절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용서하지 못하면? 그 다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대로 끝이다. 클레이오 아세르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속도를 더 높여!”

 

 

 

“저기, 막사가 보입니다! 병사들이 보급선을 호위하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매복입니다! 횃불을 들고 있습니다!”

 

망원경으로 척후를 살피던 병사 둘이 비명처럼 희소식과 위기 상황을 전했다.

 

“전군, 장전!”

 

클레이오가 잇새로 욕지거리를 삼켰다가 마차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모두 엄폐해!”

“발사!”

 

귀청을 찢어놓을 듯 쏟아지는 포성과 그 포성을 찢은 탄환들이 미처 말과 수레에서 내리지 못한 병사들과 마부들의 머리통과 사지를 가림 없이 꿰뚫었다.

 

“대항 사격 준비해!”

“조준!”

“발사!”

 

이번엔 두 방향이 아니라 네 방향에서 총성이 터졌다. 두꺼운 나무판을 총탄이 헤집는 소리가 난잡했다. 그 순간,

 

“헉,”

 

옆구리를 스친 탄환이 클레이오의 허벅지로 깊숙이 박혔다. 이격으로도 억누르지 못하는 고통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신을 뒤흔들었다. 클레이오는 새어나가려는 비명소리를 애써 삼켰다. 눈썹 끝에 애타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떨어져 바지를 적셨다.

 

“폐하! 폐하입니다!”

“전군, 조준!”

“이런 개새끼들, 안 돼!”

“발사!”

 

클레이오는 번개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래, 말발굽 소리. 땅과 바퀴를 타고 올라오는 저 진동. 그 진동이 만드는 파문 중앙에서 가장 강렬한 에테르 반응이 터져 나왔다. 쏟아지는 진격의 원에 전방에서 사격하던 병사 수십이 베여 핏물 속에 처박혔다.

 

“클레이오!”

 

문고리를 찾는 손이 허공을 볼썽사납게 헤집었다. 손바닥에 잡히는 은과 철의 합금이 평소보다 차가웠다. 필시 제가 열이 오른 탓이다. 클레이오는 문을 열어 거의 구르듯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연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가누려 애썼다. 곧 초점이 잡히고…… 그래, 네가 보여. 죽지 않겠다고 했었지. 그래.

 

“클레이오!”

“……들리니까 그만 소리 질러.”

 

말에서 뛰어내린 아서가 클레이오의 어깨를 감싸 쥐어 빠르지만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드물게 떨리는 눈동자엔 정오의 햇빛이 핏방울처럼 튀어 있었다. 클레이오는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설핏 웃었다.

 

“하.”

“다쳤네. 여기서 조금만 돌아가면 돼. 금방이야.”

“살아 있었네.”

“그러기로 했잖아.”

 

어깨를 당기는 손길에 순응하며 클레이오는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갑옷에 닿았으면 움츠러들어야 정상일 텐데. 그런 실없는 생각에 젖어들면서. 총성과 냉병기들이 내는 소음이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밀려드는데도 그랬다. 가슴팍이 가라앉고 날뛰던 심장이 빠른 속도로 안정되는 것을 느끼면 웃음이 절로 났다. 아서가 이끄는 대로 클레이오는 천천히 몸을 세웠다.

 

“엄호해! 횃불이 보급품에 닿지 않도록 주의해라!”

 

전장을 찍어 누르는 목소리에 알비온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거세졌다. 클레이오는 자신을 부축하는 기사에게 실려 스러지다 무의식중에 아서의 손끝을 감싸 쥐었다. 가죽 장갑에 싸인 탓에 피부는 맞닿지 못했다. 아서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부드럽게 웃었다.

 

“다녀올게.”

 

가냘픈 손끝이 잠깐 단단한 가죽장갑에 감싸였다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돌아서는 등이 태산처럼 아득했다.

 

“클레이오 님, 이쪽입니다. 고개를 숙이세요.”

 

그리고.

 

“포탄이다!”

“마법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육중하게 허공을 가르는 포탄들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터졌다. 첼의 솜씨가 아니었다. 폭발에 휩쓸린 클레이오의 몸이 열화로부터 튕겨나가듯 밀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서!”

“당황하지 마라! 포병을 엄호하는 마법사를 조심해!”

 

아서의 옆얼굴 위로 햇살이 흩어졌다. 등 뒤를 돌아보는 눈동자와, 제 쪽으로 돌아서는 허리와 무릎을 모두 시야로 담으며 클레이오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날카로운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아서! 엎드려!”

 

마법들이 포탄과 함께 왕에게로 쏟아졌다. 좌표는 어긋나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자신이 개발한 아킬레우스의 창이 아서의 종아리와 어깨를 꿰뚫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한다. 입이 벌어지는 것보다 허파를 터뜨리는 비명 소리가 더 빨랐다.

 

“아서!!!”

“왕이다! 왕을 죽여라!”

 

순식간이었다.

기사들의 쏟아지는 칼날과, 그 칼날 사이로 해굽성의 참이 트는 길을 따라 눈부시게 반짝이는 금빛이 움직였다. 에테르를 두른 칼들이 강철로 만든 갑옷을 뚫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기묘한 위화감. 클레이오는 눈을 부릅떴다.

 

‘방패가 없어.’

 

아슬아슬하게 목을 비껴간 칼날이 갑옷 틈을 용케 파고들면 분수처럼 거꾸로 솟구친 피가 하늘을 물들이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클레이오는 사정없이 떨리는 사지를 다잡았다. 하반신이 날아간 기사가 생전 쥐었던 칼을 들고 비척비척 포탄과 함성 사이를 걸었다. 걸음이 곧 달음박질이 되고, 달음박질이 곧 질주가 된다. 안 돼. 죽지 않겠다고 했잖아. 나 아직 너한테 가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죽으면 안 돼.

시선이 필연처럼 마주친다.

기사의 칼날들이 사지를 옭아매는데도 아서는 기어코 어깨를 틀어 클레이오 쪽을 바라보았다. 곧 눈부신 에테르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서, 아서!”

 

검이 흙바닥 위로 떨어지며 한 번 허공으로 퉁겼다가 나자빠졌다. 클레이오의 앙상한 손가락이 피로 물든 갑옷과 뺨을 더듬었다. 손끝이 떨려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클레이오.”

“정신 차려! 조금만 돌아가면 본진이야. 치료받을 수 있어. 살 수 있어.”

“클레이오.”

“금방이야. 제발.”

 

아서가 흘린 피가 무릎과 종아리를 흥건하게 적셔도 클레이오는 개의치 않았다. 부릅뜬 눈 안에 담긴 애원이 참 예쁘다고. 아서는 감상을 잘 접어 품에 갈무렸다. 꼭 필요한 말을 할 때였다.

 

“클레이오.”

“제발.”

“이시엘이 널 엄호하러 올 거야.”

“일어나.”

“돌아가겠다고 약속해.”

“제발.”

 

아. 네가 우는 건 처음 본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보고 싶진 않았어. 내 손이 너무 더러워서 네 눈가를 닦아주지 못하잖아. 언제나처럼 따스한 웃음이 사락사락 흩어진다.

 

“넌 괜찮을 거야.”

 

거대한 축이 허물어진다. 이 순간 클레이오는 여신을 저주했다. 이렇게 헛되이 죽일 거라면, 왜 나를 여기로 이끌었습니까? 왜 그를 가장 높은 곳에 세웠습니까? 아서 리오그난이 세운 천 년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그의 죽음이 왜 기표가 되어야 합니까.

 

“넌 괜찮을 거야.”

 

얄쌍한 어깨가 아서의 이마를 받쳤다. 여기서 쓰러져선 안 된다. 클레이오는 이를 악물었다.

왜냐면,

난 괜찮을 거니까.

너는 언제나 옳았으니까.

 

“폐하! 클레이오!”

 

이시엘의 외침을 이격이 잡아낸다. 정신은 무섭도록 또렷했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네 죽음을 받아내야 한다. 네가 내 위에 누웠으니 나는 마땅히 너를 받쳐야 한다. 네 그림자는 내 그림자가 되니까. 어두운 일은 내가…….

 

“폐하!!!”

 

내가.

 

 

 

이시엘은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이오는 흡사 평범한 사람처럼 그 기척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클레이오.”

 

어깨를 감싸 쥐는 이의 체온은 따스했다. 닿지 않아도 옷감 안으로 모두 스밀 듯이.

 

“……마지막으로 아서가 한 말, 정말 평범했어.”

“…….”

“난 괜찮을 거래.”

“…….”

“그래서 괜찮지 않는 법을 잊어버리기로 했어.”

 

클레이오는 여전히 상복 차림이었다. 검은 색으로 통일된 블레이저와 바지. 흰 면장갑. 돌로 반듯하게 덮인 무덤가와 비석을 그새 돋은 여린 풀잎들이 감싸고 있었다.

 

“정말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놓지 못하겠어. 그 때, 꼭 청혼 받은 것 같았거든.”

 

어느새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이 클레이오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등이 봄날처럼 따스했다. 이제는 잃어버린 케이프를 걸쳤을 때처럼.

클레이오 아세르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오랜 기간 상복을 입었다. 이는 약혼자가 죽었을 때보다 훨씬 긴 기간이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전후 복구 사업에 기부했다. 착복이 일어나지 않도록 디오네가 손을 썼다곤 하지만, 어디로 몇 디나르가 새어나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서 리오그난을 인정하던 모두가 충격에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하늘은 맑고 따뜻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도 시간이 흐르면 봄볕이 닿는다. 클레이오는 고개를 들었다. 일식 한 점 없는 태양빛에 눈을 감으면 붉은 빛이 일렁거린다. 신을 잃어버린 기도문이 무덤 위로 소복이 쌓인다.

난 괜찮을 거야.

네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In the name of Arther.

I p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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