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안함

[아서레이] 언어의 온도

LETHE by 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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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nhFuDYlZ5k

사랑은 기성품이 되어버렸어.

완전히 닳고 닳았어.

줄곧 반복되는 게 지겨워 메아리를 멈추고 싶지만,

뭔가 다른 걸 들으려면 먼저 성대를 움직여야 해.

- 로맹 가리, <여자의 빛>

 

클레이오 아세르가 이 세상에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은 물병에 떨어진 잉크처럼 느린 듯 매끄럽게, 하지만 그 소문을 처음 퍼뜨린 자가 누구인지 조사할 수 없을 정도로만 사람들의 입 안에 섞여들었다. 누군가는 그가 신의 언어로 줄곧 예언하고 있는 거라 했고, 누군가는 그가 너무 많은 미래를 엿본 탓에 그의 언어를 세계 밖으로 떨어뜨린 것이라고 했다.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클레이오 아세르가 지난 한 달간 주워섬긴 말들은 지극히 단출하고, 일상적인 말들뿐이었으니까.

 

 

 

클레이오 아세르는 침대 귀퉁이에 혼자 앉아 있었다. 침실 안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고, 이따금 고롱거리는 고양이의 숨소리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소음이 없었다. 클레이오는 습관처럼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런 열감도 느껴지지 않는 반지가 거기 있었다. 분명 ‘약속’은 귀속되어 어느 세계에서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세계는 썼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이 세계의 언어와 통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약속의 범주가 아니고 그저 여신의 아량이었을 뿐이었나,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약속’ 자체가 불통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격은 온전히 기능하고 있었고, 눈꺼풀을 두 번 깜빡이면 고요한 저택 안을 맴도는 자그마한 기척들도 뜻대로 사라졌다. 다만 이 세계에 속한 문자와 언어를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할 뿐이었다. 클레이오는 실이 끊어진 것처럼 침대 위로 다시 누웠다. 솜털이 든 이불이 등허리 밑으로 푹 찌부러졌다.

 

그가 실어증 아닌 실어증을 겪게 됐음을 맨 처음 알아차린 건 베헤못이었다. 아침이면 늘 주고받는 가벼운 푸닥거리가, 입을 열고 혀를 굴려 무언가를 발음하는 순간 끝나버렸다. 뜻이 통하지 않는 목소리들이 날카로운 동물의 울음소리와 혼란에 젖은 중얼거림으로 바뀌는 데에는 채 몇 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메이드의 호출을 받고 방에 들어선 캔튼 부인은 자신의 이름자를 제외하곤 그 어떤 단어도 생소한 말을 주워섬기는 제 도련님을 보고 무심결에 이마를 짚어 주었다. 그 청산유수인 도련님이 뜻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고 있으니까 혹시 신열에 시달려 아픈 건 아닐까, 하고. 클레이오의 이마는 평소처럼 미지근하고 약간은 차가웠다.

소식은 빠르지만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곧 클레이오와 가깝고 친근한 사람들이 문안을 왔다. 다른 언어와 언어를 에테르로 이어 그 뜻을 통하게 만드는 마법은 없었으므로 제베디는 그저 다친 손주를 보듯 안타까워하며 그의 어깨나 가볍게 두드렸다. 디오네, 첼, 리피와 레티샤, 이시엘 또한 걱정스런 표정으로, 혹은 힘을 실어주려는 듯 가벼운 얼굴로 그에게 뜻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게 꼭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지.’

 

리피와 레티샤는 뜻이 통하지 않아도 클레이오의 곁에 앉아 무언가를 새처럼 종알거렸고, 첼은 바이올린을 켜 주었다. 이시엘은 조심스럽게 클레이오의 얼굴을 살피며 이따금 진중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표정만 보아도 그게 격려라는 걸 알았다.

클레이오와 소통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노력은 했다. 다만 클레이오도, 알비온 인들도 서로의 언어 체계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터라 교량으로 쓸 기본 지식조차 없던 게 문제였다. 수도의 내로라하는 언어학자들이 밀려들어 그가 하는 말을 구조화하려 했으나 연구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했다. 한국어의 언어 체계는 알비온어의 구조와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으니까. 언어학자들은 난처한 얼굴로 그에게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7. 클레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7개월이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너무 몰아세운 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한결같이 구는 사람이 있었는데.

 

클레이오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동이 터 불그스름한 하늘을 등진 금발 끝이 반짝거렸다. 창문 너머로 아서가 입을 벙긋거렸다. 아마도 ‘안녕.’ 이 아니었을까.

 

클레이오가 심드렁한 얼굴로 발코니 문을 열어주자 아서는 마치 제 방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더니 돌아서면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흰 카드보드지를 보여주는데. 클레이오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저 미취학 아동 수준의 단순한 그림은 한 달 내내 발전이 없었다. 오늘은 아마도…… 장미인가? 둥그런 소용돌이와 작대기, 그리고 그 작대기에 붙은 잎사귀 모양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랬다. 아서는 마치 아기에게 말을 가르치듯 한 단어를 연달아 발음했다. 저럴 때 따라하지 않으면 녹푸른 눈이 실망으로 둥글어졌기 때문에, 클레이오는 잠자코 그의 발음을 따라했다. 그리곤 하는 생각이, 알비온 어가 성조로 뜻을 구분했던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한 달 전까지 여러 나라의 언어들을 마치 모국어인 듯, 심지어 동음이의어도 맥락 오해 없이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약속’ 덕분이었으니까.

 

아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더니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베헤못이 우는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필시 아서를 타박하는 말이겠지. 그러면 아서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무언가를 발음했다. 베헤못을 보는 게 아니라 날 보고 있으니까 아마도 ‘너희 고양이’로 시작하는 말이 아닐까. 알 수 없었다.

 

“아서.”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나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여신이 날 공들여 네 곁에 꽂아줬는데 설마 번역기 하나 안 주겠어. 이것도 변덕이겠지.”

“너 또 괜찮다고 하는 중이야?”

“멜… 아니다. 어쨌든 왕세자가 언어학자도 보내줬으니까. 넌 언어에 대해 하나도 모르잖아. 시험 성적도 엉망이었고. 대표적인 예로 카롤링거어 말야. 네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곤,”

“나는 아서입니다!”

“그래. 그거.”

 

아서는 어린애처럼 웃었다. 그 웃음소리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으므로 클레이오는 어깨를 죽 늘어뜨렸다.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못 알아들으니 말릴 수도 없잖아.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클레이오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전달되지도 않을 말이니 전처럼 진실의 일부를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 점이 클레이오는 꽤 후련했다. 

 

“이제 그 문장은 알겠어. <나는 클레이오입니다.>”

“어, 정확해! 발음은 여전히 딱딱하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야. 지난번보다 훨씬 나은데?”

“이거로 무슨 소통을 해.”

“이제 <나>랑 이름 뒤에 어떤, 뭐라더라. 그래. 동사가 붙는 진 알겠네.”

 

아서는 열띤 얼굴로 카드보드지를 한 장 뒤로 넘겼다. 클레이오의 얼굴이 더욱 심드렁해졌다.

 

“<고양이>. 못 그렸어.”

“맞아! 고양이. 일부러 베헤못과 다르게 그렸어.”

“베헤못이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그래, 이름은 알아들으니까. 고양이겠지. 아무튼, 들어.”

 

클레이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막 카드보드지를 넘기려는 아서의 손목을 잡았다. 시선이 맞으면 조금 가라앉은 얼굴이 보인다. 어느 쪽이든 같을 것이다.

 

“네가 뭐라고 말하든 난 알아들을 수 없어. 아마 지금도 뭔가 오독이 쌓이고 있겠지. 그리고 그런 맥락 밖의 대화는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나아. 넌 언어에 대해 전혀 모르잖아.”

 

아서는 클레이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빙긋이 웃으며 카드보드지를 내려놓고, 빈 손으로 클레이오의 앙상한 손등을 감싸 쥐었다.

 

“너 지쳐 보여.”

“아서, 난 괜찮아.”

“클레이오, 나도 괜찮아.”

 

아서는 마치 어린 아이를 타이르거나, 머리맡에 앉아 잠자리 동화를 들려주듯 느릿하게 말했다.

 

“있지……. 나 처음으로 네가 <장미>라고 대답했을 때 기뻤어.”

“<장미>?”

“그래, <장미>. 그리고 네 말로는 [장미]라는 것도 알게 됐지.”

 

한국어 발음이 어눌했다. 하지만 뭘 말하려는 건지는 얼추 알았다. 명사는 오독하기 어려우니까. 문제는,

 

“그래, [장미]가 어쨌다는 거야. 단어 하나로는 무슨 뜻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어.”

“난 네가 내 말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었다는 게 기뻤어. 그리고… 네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앙상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 아서는 천천히 그 손등을 엄지로 문질렀다.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꽃을 준 적이 한번도 없더라.”

“…….”

“그제야 깨달았어. 나도 네 앞에서 발음해본 적 없는 단어가 많고, 보여준 적 없는 말들이 많다고. 대체로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지만, 그래서 네가 말하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네 마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

 

아서는 눈을 조금 내리깔았다. 여전히 앙상한 몸. 아무리 캔튼 부인이 좋은 음식을 먹이고 아침마다 운동을 한다 해도 나아지지 않는 체형.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다시 곧잘 여위고 마는. 아서는 그 몸이 썩 클레이오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비약하듯 넘겨짚으면서. 직감에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이 순간, 아서는 신이 환시로 자신에게 미래를 보여주거나 분명히 속삭이는 말이 없어도 알았다. 언젠가 클레이오가 자신의 말을 모두 알아듣게 되리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나이를 먹으며 은근슬쩍 그의 화법을 닮게 되었다. 진실을 숨겨서 거짓말을 하기. 모든 진실이 상황을 타개해주진 않았고 아서는 그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진 못했다. 그래도 말할 수밖에 없어. 네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내가 네 이름을 부르고 다정한 말씨로 네게 무언가 말했다는 사실은 남겠지.

다시 고개를 든 아서의 표정은 햇살처럼 환했다. 접힌 눈 사이로 그 예리한 푸른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 너랑 얘기하는 거 좋아해.”

“모르겠어.”

“너도 좋아해.”

“모르겠다고.”

“난 분명 너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너는 계속 불안해하네. 있지, 나도 그랬어. 네게 모든 걸 다 말하지 못하게 된 때부터 마음 한 구석은 죽 그랬어. 내가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면, 네가 나에게서 멀어질까 봐.”

“왜 이렇게 우직하게 굴어.”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널 혼자 남겨두고 싶진 않아.”

“왜.”

“아무래도 나, 널 내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체념한 듯한 표정 위로 아서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아플 때를 제외하곤 열이 오르는 일이 없을 것 같은 이마에 이마를 마주 대고, 그 서느런 온도에 의지하며 말을 잇는다.

“내가 계속 너한테 말해도 된다고 허락해 줘.”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이 스무살 갓 먹은 청년이 자신에게 절절히 구는 이유가 정말 우정 때문인지. 제일 친한 친구이자 중요한 측근이라서 그런 것인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풀이 죽었을 때만 자신을 찾아와 술 한 잔 기울이고 다시 기운을 차려 돌아가던 소년은 이제 이만큼 자라서. 무슨 의중인지 모르겠고. 나는 이따금 너를 훤히 알 수 있을 때가 나았다, 하며 내심 불안해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알비온 어로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불안해.”

“응.”

“숨기는 게 늘었잖아.”

“응.”

“이만큼 자랐고. 귀염성도 없어졌어. 물론 지금도 강아지 같긴 한데, 널 강아지 취급 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응.”

“넌 내가 뭘 얼마나 숨기는지 몰라야 해.”

“응.”

“그래야 네가 올곧게 살 거니까. 너는 세상을 바꿔야 하니까. 나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으니까.”

“응.”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대답은 꼬박꼬박 잘하네.”

 

아서는 웃었다. 그 놀랍도록 천진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보면서, 클레이오는 마음속에 응어리진 불안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너는 영영 그렇게 웃기를. 몰라도 되는 것들은 모른 채 살 수 있기를. 그러면서도 이런 두서없는 말들이 계속 쌓여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를.

 

“넌 내가 없어도 살 수 있을 거야.”

 

클레이오가 툭, 진심을 뱉었다. 그리고 마치 금기된 말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가렸다. 아서는 여전히 클레이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내가, 그래. 난 널 왕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이니까. 그리고 여기는 신의 뜻에 따라 역할을 배분받고, 소모되는 세계고. 언젠가 이런 대화도 못 나누게 되는 날이 올 거야.”

“응.”

“그래도 넌 괜찮을 거야.”

 

아서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클레이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심해로 간다면 나도 거기로 가라앉을게. 너만 잠기게 두진 않을 거야.”

 

답은 없었다. 없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곧 느릿하게 뒤따르는 한 음절에 아서는 클레이오와 시선을 또렷이 맞추었다.

“……그래.”

그리고 다음날, 어떤 예고도 없이 클레이오는 캔튼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또박또박 바른 알비온 어로. 머잖아 일파만파 퍼졌던 소문도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대마법사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는 꽃다발과 선물들이 잔뜩 쌓이고, 기자들이 그의 상태를 채취해 활자로 박음질하는 동안 클레이오는 길게 침대 위로 나자빠졌다. 베헤못이 ‘이 못난 놈. 말을 바로 한다고 네가 한 달 동안 꿍얼거린 게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니다. 뱉은 말은 사라지지 않아.’라고 타박하는 데에 답하는 대신 배에 고개를 파묻으면서.

“그래, 그래. 영묘님. 나도 너 좋아해.”

“흥.”

그건 그렇고 아서 이 놈은 무슨 말을 했을까. 클레이오는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지난 한 달간 쌓인 기억을 뒤적거렸다. 다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이제 걔 기다린다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있을 필요도 없겠네. 하루가 멀다 하고 제 방에 들어와 카드보드지를 넘겨주는 일은 하지 않겠지. 평범하게 낮에 만나서 자기 전에 헤어지고 각자 잠자리에 들 거야. 그렇게 뜻모를, 두루뭉술한 대화도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조금, 조금은 그리울지 모르겠다고.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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