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안함

[첼시엘] Love is like the wild rose-briar,

2021.12.26. 첼시엘 교류회 회지 웹발행

린스네 by 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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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12월 26일 개최된 첼시엘 온라인 교류회 <은반 위의 장밋빛 미뉴에트>에 제출한 글 <Love is like the wild rose-briar,>를 웹발행합니다.

  • 포스타입에 발행한 것과 완벽히 같은 구성이며, 단지 백업용으로 발행하였습니다.


첼레스테스는 조급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문을 열었다. 희게 물들어가는 세상에 우뚝 선 이시엘의 머리칼이 눈앞에 아른거렸던 탓이다. 눈 내리는 날의 이시엘을 하루 이틀 보는 것은 아니지만, 흰 배경에 서 있는 이시엘은 비명 사이에서도 우뚝 서 있는 것이 유독 아슬아슬해 보였다. 아마도 장미가 다 진 겨울날, 그 어여쁜 것들이 자리했던 곳을 차지한 눈송이들에 전 주인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붉은색을 먹어 치워버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붉은 머리를 한 기사는 굳건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파고들 틈조차 없는 등을 내보이고는 했다. 첼레스테스는 그가 등을 내보인 것이 신뢰의 표현이며, 파고들 틈 없는 대신 옆에 설 자리를 만들어 내어주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급히 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듯 이시엘은 벽난로 앞 소파에 곧게 앉아 느긋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첼레스테스는 그 붉은 머리칼을 마주하자마자 간단하게 안심해버리는 심장을 매도하며 묻을 닫고 들어갔다.

오늘따라 이시엘이 조금 작아 보인다면 이상한 일일까? 물론 그가 첼레스테스에 비해 작은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벽난로의 평온한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유독 작아 보이는 것이다. 살랑대는 불꽃이 똑같이 붉은빛을 띤 것을 잡아먹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 물론. 이 전쟁터 한가운데에선 집채만 한 거인도 작아 보이겠지.

벽난로에서는 맵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날이 아직 밝은데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피곤할 만도 했다. 그도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때 이른 잠이 찾아온다고 해서 두 사람의 시간이 깊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첼레스테스는 이런 날과 이런 시간을 위해 구비해 둔 머그잔을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맛을 내기 위해 계피 가루를 살짝 뿌린 밀크티에 틴케이스에 담긴 생강 쿠키까지 트레이에 올리고는 티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느슨하게 펴진 이시엘의 손안에 따끈한 머그잔을 올려놓으니 깜짝 놀라 커지는 초록이 있다.

- 옆에 자리 비었니, 엘?

- 네 자리라면 늘.

- 네가 그럴 때마다 가슴이 저릿한 거 알아?

이시엘이 피식 웃었다. 작고 굳은 입술이 끝에서부터 말려갈 때면 첼레스테스는 이 알비온 땅에 자리를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명제를 확인받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첼레스테스는 감사하게도 건강한 신체를 가졌으며 운 좋게도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원한다면 언제나-물론 고상하신 그의 어머님께서 반대하실 때를 제외한다면- 두 발로 직접 설 수 있었고, 그를 방해하는 자들을 처치할 재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당연한 명제가 얼마나 쉽게 불살라질 수 있는지도 똑똑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삼왕자의 옆에 서서 그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여 그의 부인-또는 미망인-이 되어 파티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 혼자의 이름으로 자신의 선택과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기에.

때문에 그는 자기 가치를 위한 길에서 만난 친애하는 하우스메이트가 주는 기분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늘 곱씹고는 했다. 아, 땅에 발을 딛고 선 기분은 얼마나 소름 끼치게 완벽한가! 그는 심지어 이 기분을 따스한 벽난로 앞에 앉아 딱딱한 쿠션에 몸을 묻은 채 느끼고 있다.

이 황홀한 기분을 더욱 만끽하기 위해, 첼레스테스는 추위를 핑계 삼아 이시엘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붙기로 했다. 끝이 말린 단발머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일 때까지.

"첼."

- 불렀어?

이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갈라진 목소리를 분명히 들은 것 같은데…. 첼레스테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목을 꺾어가며 이시엘의 어깨 위에 억지로 머리를 뉘었다. 텅 빈 머그잔에서 올라오는 계피 향이 달았다.

"일어나라."

이번에도 분명 이시엘의 목소리였다. 움찔 튕기듯이 일어나 바라보자 은은한 웃음이 걸린 입에서 어울리지 않게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다.

울렸다?

이시엘은 바로 앞에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고 있었다.

첼레스테스는 스스로가 답지 않게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이시엘이 그에게 무너지듯 안겨 웃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들려오다니? 환각인지 마법인지는 몰라도 그가 혼란스러워 하기를 바라는 거였다면 제대로 짚었다.

"걱정시키지 말고."

이시엘의 얼굴이 아귀가 맞지 않는 가구처럼 뚝딱거리고 있었다. 눈은 다시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게 휜 상태로 입가를 일그러트리고, 이를 악물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짓씹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는 그 흔한 잔떨림 하나 없이 첼레스테스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성은 제 품의 붉은 머리칼이 이시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본성은 그것이 그의 이시엘이 가진 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보통 이런 상황에는 이성과 본성의 역할이 반대가 아니던가?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의 몸을 떨쳐낼 수 없었다. 친애하는 하우스메이트의 팔을 차마 건들 수 없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였다. 아니면 쓰러졌기 때문일지도.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간편한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여태 손에 들려 있던 빈 머그잔을 제 머리 근처에 가져다 대고,

꽝!

아, 이시엘이다.


이시엘은 혼수상태의 첼레스테스가 벌인 일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정신도 들지 않은 사람이 손에 쥐고 있던 고글을 들어 머리에 깬단 말인가?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이의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다리가 풀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란 살아남으면 살아남을수록 사람을 강인하게 만드는 법이다. 기억된 세계와도 같으나 그 잔재의 처리가 기억보다 훨씬 더 사무치게 아프다는 점만이 다르다. 이시엘은 꼿꼿하게 선 채로 첼레스테스의 손에서 깨진 고글을 빼냈다. 막사로 화약 냄새가 섞인 겨울의 칼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첼레스테스의 남색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피가 흐르는 긁힌 상처를 가렸다. 재인지 눈인지도 모를 흰 것이 내려앉은 머리에 손이 닿으려는 찰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다 열렸다.

아, 이른 새벽 쌓인 첫눈 같은 저 눈동자. 이시엘은 늘 생각한다. 그가 굳게 믿는 이 자는 마치 바람을 타고 나르는 눈 같아서, 그 이명과도 같이 하늘 높이 날아가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영원히 떠돌고, 방랑하고, 이시엘 키시온이 이 땅에 뿌리 박은 채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마다 그리움에 사무칠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두 시선이 맞닿았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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