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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멜키 섹못방

좆됐구나. 욕조 물에 담가진 채 빠져나오지도 않고 클레이오는 판단을 내렸다. 이번에는 진짜 좆됐다. 완전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좆됐다.

[기억□□□된 세계: 섹스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므네모시네 여신□□□□□□□□□□□□□□□□□□□□□.

주의: □□□□□□□□□□□□□□□□□□□□□□□□□.

주의: 제한 시간이 다하면 모든 요소가 시작 상태로 리셋됩니다.

[―남은 시간 / 제한 시간:

05:50:48 / 06:00:00]

"…왜 도시가 아니라 방이지?"

극도로 말이 안 되는 상황에 떨어지자 머리는 차라리 현실도피를 하려 들었다. 정원도 있었는데 방이라고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방을 왜 기억, 아니 애초에, 이 조건은 왜, 메시지의 깨짐은 어째서, 누구와 어떻게 뭘,

"못 나가는 도시인 쪽이 더 나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뒤돌아본 자들의 말로를 아무리 숱하게 알지라도 앎과 행함의 합치는 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차라리 소금 기둥이 되지 않음을 원망했다.

어쩐지 머리칼이 젖은 멜키오르가 욕실 문을 반쯤 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얼른 아래를 확인하고, 엉망으로 젖었을망정 자신이 옷을 입고 있음에 일단 안도했다.

"뭐야?" 예?

"할 말과 속마음이 바뀐 것 같네."

"예?" 뭐야?

"그런 정도는 성흔 없이도 읽을 수 있거든."

멜키오르가 문을 열었다. 그대로 들어올 줄 알고 긴장했는데 오히려 한 발을 뒤로 물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돌아 사라졌다. 따라 나오라는 뜻임을 뒤늦게 알고 클레이오는 허둥지둥 욕조를 나서면서 옷을 말렸다. 욕실은 넓었고 당연하다는 듯 21세기적이었다. 호텔인가? 고급 호텔? 키가 훌쩍 큰 성인 남자가 욕조에 통째로 처박히는 경험이 가능할 정도의 크기라니.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여주인공이 장미꽃잎을 띄우고 목욕할 것 같은 대리석 욕조였다.

욕실 바깥으로 나오자 이 공간의 인테리어가 보였다. 그러니까 호텔 스위트룸 객실이 맞는 것 같았다… 같았다고만 추측하는 것은 이전 세계에서 밟아본 적이 없는 값비싼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놓여 있는 소품과 가구 하나하나의 디테일까지 맞춤 제작이었다. 더블침대를 애써 무시하고 거실로 나오니 샹들리에는 크리스털이고 곳곳에 크기와 재질과 형태와 종류를 맞추어 알맞게 놓인 미술품들에서도 정성스러운 선별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옛 시절이라면 이런 것들을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 새 세계의 생활은 그의 눈을 바꾸어 놓았다.

멜키오르는 소파에 느슨하게 앉아 있었다. 제집인 듯 태연한 기색이었다. 어디에서든 그럴 수 있는 인간이지 않은가. 그가 가운 따위가 아니라 실내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클레이오는 어쩐지 안심하고 말았다.

"앉게. 기억된 세계도 두 번째가 되니 익숙해지려 하는군."

"…저는 이곳에 들어오고자 한 기억이 없는데 저하께서는 혹 정황을 아십니까?"

"글쎄? 이 판면 바깥 어느 고약한 존재의 농간이겠지. 그리 생각하면 놀랄 것도 없잖은가."

"그… 그 문구를 보셨습니까?"

멜키오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봤네. 섹스하지 않으면 못 " "아니오 됐습니다!"

"의외로 부끄럼을 타는군."

"그런 문제가 아닐 텐데요…."

"그리도 싫은가?"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멜키오르가 대상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애당초 성애라는 것과 연결이 될 수가 있는 인간인가. 멜키오르가 가진 육신이 실재하여 만질 수 있는 무엇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역시, 아니 왜 변명하고 있지? 정말로 그 조건이 싫은가 가늠해보려다가 클레이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지경에 놓이게 되었는지 짚이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이전 원고에는 당연히 이런 이야기가 없었고 당연히 이런 곳에 들어오려 한 적도 없었으며 최근에 멜키오르를 만난 적은 더더욱이나 전혀 없었다. 잠깐, 멜키오르라고? 클레이오는 퍼뜩 눈을 들어 상대를 보았다. 너무 오랜만의, 체감으로는 족히 천 년은 보낸 것 같은 시일 만의 대면이었다.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한 인간의 영혼을 바닥에서부터 부수어 완전히 새로 재구축할 만큼.

그리고 그런 일은 멜키오르에게도 내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긴 머리칼은 희어지고 있었고 눈동자는 금빛에 가까웠으며 완연한 병색이, 병색이라는 말로 미처 다 이를 수 없는 불길함이 그러나 덧없음이 꺼져가는 촛불 같은 빛이 아름다운 이목구비 위에서 일렁거리는 듯했다. 서사가 이만큼 달려 나가는 동안 만들어진, 훈장처럼 명징한 시련의 흔적이 거기에 있었다. 그를 본다면 인간은 진정으로 거듭 극복되고 새로 쌓아올려지는 존재가 맞는지도 모른다. 그 끝의 형태가 어떠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지라도.

클레이오는 무엇보다 상대의 표정이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다는 데에 놀랐다. 고통은 육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도 기색으로 떠오르지 않아,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멜키오르의 맞은편에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소가 이렇게 되었지만."

"그대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을 내게 가져다주는군. 반갑게 생각하네."

"이런 식으로 새로울 일은 저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마는…."

멜키오르는 그대로 눈동자만을 움직여 클레이오의 겉을 훑었다. 가히 물질적인 시선이었다. 서사에 갉아먹혀 파리하고 초췌하고 얼마간은 나이들기까지 한 마법사의 상이 금빛 눈에 비쳤다. 턱없이 옭아매이거나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다. 이 자의 앞에서는 낯선 감각이 아니다. 그러나 이 괴이한 공간 안에서 그 감각은 일순 이전과 다른 갈래의 감상을 일으켰다. 그것은 엷은 잔향만을 남긴 채 빠르게 날아갔다. 클레이오는 그것이 지나갔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어쨌든, 조건이 터무니없는 것이 가장 문제지만 제한시간도 너무 짧아서 문제입니다. 파훼하려면 마스터클락을…."

"마스터클락 이야기는 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이곳은 보통의 기억된 세계와는 다른 곳인 듯싶네. 나의 경험이 한 번뿐이니 속단할 수 없지만."

멜키오르가 가볍게 눈짓했다. 벽 한 면이 온통 창이어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바깥 풍경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지대가 높은지 근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트인 풍경이 발밑으로 펼쳐졌다. 그제야 배경이 선명히 인식되었다.

밖은 폐허였다.

익히 알았던, 알게 된 공간이었다. 한때 고향이었고 한 번도 고향이 아니었던 곳이었다. 영혼이 유래한 풍경을 보며 클레이오는 마음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는데 폐허를 바라볼수록 빈자리가 시리고 시큰거렸다. 풍경이 공허를 채우는 것인지 더욱 넓게 파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단지 이곳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다는 기분만 명확했다. 손이 잘게 떨렸다.

"이곳은 재와 강의 도시입니다."

"과연, 그랬나."

"이미 닫힌 기억된 세계가 다시 열리다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 조속히 탈출을,"

"왜?"

클레이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앞에서 멜키오르가 한가로운 얼굴로 발치의 영락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곳에서 애써 나가고 싶어 하리라 여기나?"

그건, 클레이오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보통의 인간은 누구나 그러니까, 자신은 나가고 싶으니까,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고 이루어야 할 것이 있으니까, 기억된 세계 안에서 리셋당하는 건 일반적으로 끔찍한 일이니까….

그러나 물론 멜키오르는 일반적인 인물이 아니다.

"전에 진주의 도시에서 그대가 말한 적이 있지. 이 안에서 제때 나가지 않으면 영혼째 소멸한다고. 내 감상을 기억하나?"

"…어쩌면 축복이라고 하셨지요."

"나는 이 세계의 서술에 관하여 경의 말을 상당히 신뢰하고, 그때의 견해 역시 여전히 유지하고 있네."

이 한심하기까지 한 재난 상황에서 클레이오는 지금이 차라리 웃음이 나와야 할 타이밍인지를 고민한다. 새 삶의 마지막이 그리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는 각오는 오래전부터 다지고 있었지만, 이따위로 닫혀버릴 수도 있다는 예상을 누구인들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못 지켜서 고작 여섯 시간 만에.

"뭐 경과의 성교가 대단히 싫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니, 그 면으로는 마음 상하지 말도록 하게."

그렇게 말하며 멜키오르는 몸을 굽혀 낮은 테이블에서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테이블에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보았다.

"그럴 일은 물론 당연히 없습니다만……."

"이런 상황이 차라리 더 일찍 벌어졌더라면 그대가 서고 출입 권한을 얻기는 훨씬 덜 번거로웠을 텐데 말이야. 서사의 앞뒤가 썩 정연하지 않군."

예술품 같은 조형 위로 흉성의 가호가 얽은 손이 두 찻잔에다 차를 따르더니 그에게로 가볍게 밀어주었다. 클레이오는 무심코 잔을 잡았다. 흰색에 간결한 무늬가 돋을새김 된 잔이었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고 적절히 따뜻한 온도가 비현실 가운데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법사는 자기를 다그쳐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는 할 일들이 있었으므로.

"저는 지금 저하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로군요."

멜키오르가 고개를 까딱였다.

"자진이 죄라고 하지는 말게. 일반적으로 그르지는 않은 주장이지만, 나는 이제껏 성공해보지 못한 죄악을 자행하는 데에 지대한 흥미가 있으니까."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제한시간의 존재가 없는 할 말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내키고말고를 떠나 대화가 가능한 주제도 아니었다. 멜키오르 리오그난을 청자로 두고 생육과 삶에 대해 논하느니 아네모네 구근에다 말을 거는 편이 더 실용적일 것이다. 멜키오르 본인도 차라리 아네모네의 생육에 훨씬 더 지대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 틀림없다.

아예 여기서 멜키오르를 죽인다면, 두 번 실패한 일을 마침내 이룬다면?

나가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그들은 함께 소멸하고 서사는 이전처럼 여신의 눈 가린 백성들만으로 운영되리라. 어쩌면 세계를 위해서는 그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클레이오는 아직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는, 이렇게는. 적어도 여기 이 도시에서는.

"저하께서도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으실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진주의 도시에서도 기꺼이 저희를 도우셨을 테지요."

"그게 좋은 설득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게다가 모르기는 몰라도 내가 뜻하는 바를 방해하는 일이야말로 경의 목표일 테고."

"어쨌든 지금 여기서 생을 포기하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내 심장을 멈추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내 영혼이 소멸할지도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된다? 흐음."

멜키오르가 형식적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는 감흥 없이 한 모금을 마시고 마저 감흥 없다는 얼굴을 했다. 국왕 대리 집무실의 비품보다 그 찻잔의 값어치가 차라리 더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물론 중요치 않으리라.

"그때 이후 우리의 운명이 이토록 명시적으로 한데 묶인 것은 처음이로군. 방식이 재미있어."

"별로 불쾌해하거나 의아해하지 않으시는군요."

"정원일을 하다 보면 한해살이 식물의 생식에 신경을 쓰게 되지. 삶과 번식이 바로 연결되는 것이 경에게도 직관적으로 의아한 일은 아닐걸."

멜키오르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깍지 낀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지금 나와 그대의 사이에서는 별반 결실이 나기가 어렵겠지만."

"이를 말이겠습니까……."

자신이 상대에게 무엇에 대해 애원하고 있는지를 새삼 자각하자 클레이오는 자기 자신이 우스워지고 이 상황이 우스워졌다. 삼류 로맨틱코미디 영화 같은 배경이었다. 그런 장르에서 원래 그렇게 상대 등장인물을 간절하게 설득해야 하는지는 도통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그런 장면이 아마도 있기는 할지도 모른다. 우스운 배경음악과 함께 얼렁뚱땅 지나갈지언정. 로맨틱코미디 배경에 블랙코미디 등장인물을 가져다 놓다니, 대체 얼마나 고약한 취미인가.

그는 뒤늦게 차를 마셨다. 그새 약간 식어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무슨 맛인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과자에는 손가락을 댈 기분조차 아니었다. 눈 둘 바를 모르다가 괜히 시선을 돌리자 고상한 실내 장식을 지나 바깥의 폐허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은 온 도시를 한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꾸며진 방이었다. 일전에 관광했던 몰락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갇히면 자신의 존재는 저 멸망의 일부로서 영원히 사라진다. 올바른 기억을 보장하지 않고.

어쩌면 이 공간의 취지 자체는 기억된 세계라는 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클레이오는 기억을 남기는 일과 자손을 남기는 일이 기능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로써 인간은 존재를 연장한다. 나를 알거나 나를 닮은 너를 통하여. 그것은 존속의 원리이다.

"저는 이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마음일 겁니다."

"스스로 인간임을 단언할 수 있다니 그것 참으로 복된 자격이네."

복되다, 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멜키오르의 표정은 몹시 평안하지만 클레이오는 그 이면의 고회를 안다. 인간이기를 단언할 수 있는 입장이기에 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살피지 말고 물리기로 했던 통고와 곤액.

존속하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

"그러나 이 세계의 사물들에게는 인간이기 위하여 우선 자기를 재해석해내야 할 의무가 있어."

기억되기를 거부하고 사라짐으로써 판면에 영원한 공백을 만드는 것도 그 한 방법일 수 있겠지. 아니 그런가? 그렇게 말하는 멜키오르는 마치 삶의 복락을 아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한다. 존속에 저항하고 은총을 거역하는, 인간의 얼굴이다.

이 세상을 이루는 근본텍스트는 독자의 다른 읽기와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자가 아니라 인물이라면. 인물이 인간으로 자기를 격상해냈다면. 그가 끝내 자기 자신을 읽어냈다면.

멜키오르는 읽음으로써 쓰임에 국한되기를 거부했다. 읽기는 인물이 아닌 인간의 일이다. 판면을 조감하는 인간.

내게는 언제나 이 세상 전체가 시차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만 하는 텍스트였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은 처절한 이해의 기억이었다. 그렇다. 클레이오는 이제 저자가 한 일을 안다. 재차 읽어야 했던 원고와 청람색 잉크로 적셨던 손과 놓쳐버렸던 펜을 기억한다. 바닷물 같은 에테르가 무감하고 무참하게 육신을 통과하던 순간. 신이고 인간이고 인물이면서 그 무엇으로도 온전하지 않던 그때 뇌리를 관통한 음성.

읽기의 권능은 이 세계에서 둘에게 있다. 그러므로 클레이오는 아직 혼자가 아니며 인간이다.

신의 대리자여서 클레이오라고 호명되는 남자는, 이 세계에 자신이 쓸모 있도록 만드는 자를 바라본다. 그의 근거 되는 자를, 가장 고독한 순간에 유일하게 떠올렸던 전임자를, 둘도 없는 원수를. 이 공간을 벗어나자마자 맞서 죽여야 할, 아니 어쩌면 죽이지는 않아도 될지 모를…….

"삶을, 세계를 한 번만 다시 읽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가 괴롭게 물었다.

상대는 대답 없이 일어서더니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멸망한 도시 위로 낙조가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의 난만한 석양처럼.

멜키오르가 나른히 손을 뻗어 손바닥을 유리에 대었다. 맑은 유리에 희끄무레하게 손자국이 났다. 저 손이 도자기나 상아가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클레이오는 새삼스럽게 느낀다. 고통을 감각할 수밖에 없는 물질로서의 몸. 온도와 감촉이 있는 살갗. 그렇기에 저 손등에는 성흔보다 영구한 상흔이 새겨져 있다.

"이곳이 그대의 고향이었다는 것을 알아, □□."

멜키오르가 그를 돌아보았다. 두 시선이 마주치는 듯 엇갈렸다. 금빛에 가까워진 눈동자는 대상을 바라보는 듯하면서 바라보지 않았다. 그제야 클레이오는 그의 시력이 손상을 입었음을 깨달았다. 신의 사자에게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이름이 눈먼 예언자의 입술에서 결락된 채 흘러나왔다.

그러나 결락되었다고 해서 불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읽었다고 해 둘까. 그 이상은 이곳에서 혹시 그대가 나가게 되거든 알 일이 있겠지."

지는 해를 앞에 둔 채 고개를 돌린 멜키오르의 얼굴에 역광으로 그늘이 졌다. 폐허 위로 햇빛이 황금을 덧씌우듯 내렸다. 빛은 화재처럼 붉고 무너진 건물들의 그림자는 쓸쓸히 파르랬다. 풍경은 평안했다. 멸망이 완수되었기에 아무도 해칠 수 없었다. 단지 심장 언저리로, 무너진 그늘의 온도가 느껴졌다.

"그래, 고향이 이렇게 되었군. 한 번쯤 궁금했어. 그런 무너짐을 그토록 샅샅이 목격한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기분일까. 그대의 존재를 반긴 적 없는 세계의 멸망을 목도하니 어떻던가? 비통했나? 기뻤나? 안심되었나?"

이방인은 뒤따라 몸을 일으켜 멜키오르에게로 몇 걸음 다가갔다. 창가 쪽 바닥이 햇빛에 데워져 따끈했다. 유리는 얼음처럼 맑게 닦여서 창밖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희부옇게 남은 손자국을 통할 때야 형상이 흐려지고 빛만이 느껴졌다.

"그중 무엇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니면 그 전부였던 듯도 합니다."

"이제 이 세계는 진정한 의미로 그대의 고향이 되었군. 기억의 권세로써 이곳을 영영 소유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 세계에는 타향도 정 붙이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하하."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다. 그는 멜키오르가 낸 자국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겹쳐 보았다. 온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메마른 손끝이 투명한 다홍색으로 물들어 빛났다.

"그대가 내게 세계의 재해석을 요구하려거든, 우선 대답을 해야 해. 나에게 삶의 어떤 기쁨을 제공할 텐가?"

차마 상대를 붙들지는 못하고서, 남자는 그저 원인을 모르게 간절해진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자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경감을… 여기서 나가면 제 모든 에테르를 걸어서라도 경감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우실 것을 압니다. 덜어 드리겠습니다."

"고작?"

멜키오르의 어조는 한가롭고, 표정에서는 여전히 고통의 기미를 찾을 수 없다. 그가 고통에 포함되었기 때문인지 그가 고통을 포함했기 때문인지 저자의 대리인은 알지 못한다.

"내가 영구한 평화를 두고 구태여 일시의 경감을 구해야 하겠는가? 그건 기쁨이 아니지. 골짜기를 메우면 평지가 되지, 언덕이 되지는 않아."

"그렇더라도 언덕을 올리기 전에 평지가 되어야 합니다. 구렁에서 바로 구릉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경감을 시도하지 말게, '클레이오'. 그런 침해를 저지르려면 에테르 따위로는 안 돼."

첫 번째의 경감을 기억한다. 그때 멜키오르는 절박했는데. 너무 절실해서 무언가가 어긋났다고, 잘못되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멜키오르는 오히려 잘못된 것 같지 않다. 야위고 소모되고 눈멀었는데도. 더 이상 손상된 사람의 양식을 수행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그를 채웠다 혹은, 채워질 필요도 없어진 것인가.

그렇기에 마법사는 아득해졌다. 그는 자신을 에테르 저장고이자 통로라고 정의했었다. 그것이 그의 기능이고 이 세계에서 클레이오 아세르의 존재 이유였다. 그런데 기능을 배제한다면 그는 무엇이며, 무엇으로 상대를 설득한단 말인가?

"그대는 지금 나에게, 그대를 위하여 살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네. 알고는 있나? 내게 삶을 요구하려거든 그대의 삶을 내놓아야 해, □□."

멜키오르의 선언은 확고했다. 어쩐지 그것은 마음을 내어놓으라는 말과 같게 들린다. 이름 잃은 남자는 기운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무 벅찬 일이다. 목숨도 기능도 아니고 삶이라니, 그런 것을 저울에 올려놓으라니.

그러나 타인에게 살아 있기를 요구할 때는 자기의 삶을 내어주는 것 말고 진정 다른 도리가 없다.

"제가 그리 요청하면 들어주시겠습니까?"

"공간과 조건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요구가 실질적으로 구애와 다름없이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군."

그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형상이 몹시 통절한 낯을 한 데에 놀랐다. 아니 사실은 놀랍지 않다. 사실은, 언제나 절박했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만큼이나 간절히 들키기를 원했다. 누군가,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한 사람이 있어 나의 전문을 읽어주기를.

나의 이름과 맥락을 올바르게 알아주기를.

그리고 멜키오르가 거기에 있었다. 모든 것을 읽어 알고자 하는 한 사람이.

"경감보다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은 정확히 무엇이 삶을 구성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생애와 교환되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짐작한다. 쓰임에 선행하는 이름. 저자가 틀어쥐지 못하기에 판면에서 누락시키는 이름.

"저하께서… 듣지 못하신 이름이,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겠다고 언약하겠나?"

그는 멜키오르가 모든 이름을 되찾은 후를 두렵게 예상한다. 누구보다 인간 된 자는 결락 없는 삶을 읽고 자기를 온전히 명명한 채 생을 써 내려갈 것이다. 살아서 세계를 읽을 것이나 더는 저자가 바라는 뜻을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클레이오 아세르는 홀로 쓰이리라.

"신의를 담아 말합니다. 제가 고한 바를 지키고, 감히 지금의 이름에서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거기에 에테르는 필요하지 않았다. 은총 없는 서약이었다. 멜키오르가 흰 낯에 찬찬한 시선으로 그를 오래 읽었다. 어느새 일몰이 마무리되고 노을이 잔광으로 남아 먼 서쪽 능선을 밝혔다. 밖이 어두워지자 전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실내와 실외가 사람이 건설한 빛으로 구별되었다.

"허락한다."

정진은 손을 뻗어 멜키오르의 소매를 붙들었다. 접촉은 불에 데는 것처럼 모질고 열렬했다.

그로써 삶과 쓰임이 교환되었다.


하편

카테고리
#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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