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배세] 새 인턴은 전남친 -낮편-

KIS company 자컨 기반 날조 촵촵

*전편밖에 없음 주의

직장인의 출근은 언제나 괴롭다. 그것은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해 과장직까지 단 배세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익숙한 알람 소리에 배세진은 몸을 뒤척이며 생각했다. 딱 5분만 더 잘까…?

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침대 맡에 바싹 붙어 밥을 달라며 하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뭉게의 재촉에 배세진은 오늘도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다.

좋아. 오늘도 힘내자……!

 

“아, 배 과장님~”

 

출근하자마자 그를 반겨주는 것은 이세진 대리였다. 젊어서 체력이 넘치는 건지 아침부터 씩씩한 그는 사무실에도 일찍 도착한 모양인지 벌써부터 한 손에 아메리카노가 들려있었다.

한 잔 타드릴까요? 제 시선을 느끼고 장난스럽게 묻는 그에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며 배세진은 자리를 찾아갔다. 이세진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배 과장님, 이번에 새로 뽑은 인턴 봤어요?”

 

인턴?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던가? 배세진은 책상 달력에 표시된 일정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아뇨, 면접에는 부장님만 참여하셔서….”

“아 그래요?”

 

쓸만한 사람이 왔으면 좋겠는데~ 아 그렇지만 무려 우리 팀에 오는 인턴인데. 걱정하는 게 시간 낭비려나. 혼잣말에 가까운 이세진의 중얼거림에 배세진은 속으로 동의했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이 팀은 유별날 정도로 인재가 많았다. 팀 전원이 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있는 것부터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물론 인재라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냐고 하면 또 그렇지는 않지만….

어쨌든 정식직원도 아닌 이상, 과장인 배세진이 신경 쓸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럴 줄 알았는데…….

 

“이, 이쪽은 당분간 우리 팀에서 일하게 된 김래빈 인턴이랑, 류청우 인턴이에요…. 모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선아현 부장의 소개에 사무실은 환영의 박수로 가득 찼다. 특히 차유진 주임은 드디어 부하 직원이 들어왔다며 무척 신이 나 보였다. 하지만 배세진은 차유진에게 진정하라고 주의를 줄 수도, 그렇다고 모두와 함께 환영의 박수를 칠 수도 없었다.

배세진의 뒷통수로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류청우라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부정이었다. 세상에 청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류씨 성 역시 매우 흔하다고는 못해도 반에 둘셋 정도는 꼭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류청우가 널려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훤칠한 체격은? 팀 최장신인 이세진 대리와도 견줄 만큼 큰 키가 어디 흔한가?

딱 벌어진 어깨. 단단한 가슴팍. 일개 회사원이라기엔 흉흉하게 느껴질 정도로 근육질인 몸매에 비해 호감상인 얼굴은 또 어떻고?

 

“이번에 이렇게 훌륭한 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눈에 사람이 보일 때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바닥에 박을 듯이 숙이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김래빈의 말을 받듯 류청우는 깍듯하게 목인사를 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류청우와 배세진의 시선이 얽혔다. 훤칠한 얼굴 위로 마치 환상처럼 앳됐던 기억 속 소년이 스쳐 지나간다. 배세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뜯었다.

아무래도 이번 신입 인턴 류청우, 그는… 10년 전에 사귀었던 그의 전남친인 모양이다.

 

 


-헤어지자고…? 이렇게?

-세진이 네가 원한다면.

“과장님, 점심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 어? 뭐라고?”

“점심이요. 차유진 주임이 오늘은 나가서 먹자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점심시간에 맞춰 수요조사를 하고 있던 건지 그에게 다가온 박문대 대리는 그렇게 물었다. 배세진은 인턴들이 있을 사무실 끝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이, 인턴들도 데리고 가나요?”

“네. 아마.”

“그, 저는 오늘 따로 싸온 게 있어서….”

 

안 될 것 같네요…. 말끝에 숨겨진 거절의 표시에 박문대는 그러세요? 라며 사무적으로 체크 표시를 하면서도 머릿속에 가벼운 의문이 스쳤다.

 

‘배세진이 지금까지 도시락을 싸온 적이 있던가?’

 

그의 책상에도 탕비실에도 식사로 보이는 건 없었기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좀 주의가 산만했던 것도 같고…. 박문대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다 그 중 하나를 골라 물었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시죠?”

“아니! 그런 건 전혀 아니니까!”

 

마치 불에 댄 것처럼 파드득 놀라며 돌아오는 상사의 대답에 박문대 무표정으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아니라면 딴 게 뭐가 있는 모양이네.

하지만 박문대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애초에 직장 상사의 사생활에 파고들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도 한 마디 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면 상담하세요.”

“어, 음…. 고마워요.”

“선아현 부장한테.”

“…!!!”

 

야! 감동받은 얼굴이 욹그락붉그락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니, 저 일단은 대리니까요. 과장님이 저한테 상담받는 건 모양새가 좀…. 세 치 혀 박문대는 상사를 놀려놓고 배세진의 진노를 요리조리 피했다.

문대리형, 12시 됐어요. 저희 밥 먹으러 나가야해요! 미국인답게(?) 노동시간에 철저한 차유진은 벌써 사무실 문 밖까지 뛰쳐나가 박문대를 재촉했다. 갑니다, 가. 적당히 대꾸하면서 박문대는 배세진에게 식사 잘 하시라는 안부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배세진은 그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차유진 뒤로 인턴들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친해진 건지 티격태격하는 김래빈과 차유진 옆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류청우는 다가오는 박문대를 향해 고개를 돌리다 자연스럽게 배세진 쪽에도 시선을 주었다. …이걸로 오늘 두 번째 눈 맞춤.

 

“…!!”

 

배세진은 펄쩍 뛰며 티나게 몸을 홱 돌렸다. 아까부터 류청우만 보면 몸이 제어가 안 됐다. 제발 가라. 빨리 가라. 제발…. 그의 바람이 통한 건지 떠드는 소리는 금세 멀어졌다. 힐끗 주변을 돌아보니 사무실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그제야 어깨에 긴장을 푼 배세진은 책상에 엎드리며 한숨을 푹 내셨다.

 

“하… 정말 어쩌지….”

배세진과 류청우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친구 없고, 반 구석에서 책이나 읽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던 배세진과 달리 류청우는 반 아이들 모두의 동경이자 인기인이었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Wow~ 류 인턴, 완전 멋져요.”

“역시 우리 회사의 기둥!”

 

입사한지 며칠 만에 팀에 완전히 녹아든 류청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팀원들의 기대를 등에 업었다. 배세진은 ‘…인턴이?’라고 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필사의 노력으로 참았다. 어떤 이유로서든 류청우와 얽힐 가능성을 원천차단하고 싶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배세진이 보기에도 뭘 시켜도 척척 해내는 류청우는 정말 대단했으니까….

원체도 화기애애한 팀이었는데 새 인턴들이 들어온 뒤로 한 층 더 활기를 띠는 사무실 분위기에 배세진은 왠지 모르게 홀로 동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장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이세진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주 회식 전원 참가하는 거 맞죠~?”

“뭐, 회식…? 회식이 있었어?”

“아니 과장님…? 신입 오면 환영회를 열자고 먼저 말했던 건 과장님이면서.”

“…아.”

…그랬다. 그리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배세진도 이 사무실에서는 꽤나 적극적으로 일을 주도하곤 했다. 일단 과장이기도 하고. 

신입 환영회도 그 일환이었다. 워낙 팀 분위기가 좋은 탓에 오히려 새로 들어온 팀원이 적응을 못할까봐 자리를 마련하는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했었다. 류청우에 정신이 팔려 본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먼저 제안해놓고 내뺄 수 없었던 배세진은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짜냈다.

“그, 그치만 생각해보니 신입분들은 불편할 수도 있고… 이제 막 일에 적응하느라 바쁠텐데 회식까지해서 힘들게 할 수는….”

“아닙니다! 모두 친절하게 배려해주셔서 정말 편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회식이 다른 분들과 더 돈독해질 수 있는 기회라면 꼭 참가하고 싶습니다.”

요즘 세대 신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김래빈의 대답에 배세진은 말문이 막혔다. 한 명이 이렇게 확실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해버리니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은 남은 인턴에게 향했다. 류청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길 바라보는 시선들을 바라보다 살풋 웃었다.

“저도 좋습니다.”

모범적일 정도로 깔끔한 대답. 김래빈처럼 회식이 기대된다는 흥분도, 그렇다고 억지로 분위기에 떠밀려 승낙한다는 느낌도 그에게선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별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본인 감정을 숨기고 있는 건지 배세진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오로지 류청우의 미소뿐.

……그때도. 그랬는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아 배세진은 모니터에 얼굴을 박았다. 다행히 화제는 회식장소로 넘어가 아무도 그가 대화에서 빠졌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모니터에 머리통만 빼꼼 내민 자신을 바라보는 한 쌍의 푸른 눈이 있다는 것을, 배세진 역시 알지 못했다.


“자, 자 부장님! 한 말씀 해주시죠?”

“아, 저, 그, 그럼…. 우리 팀원 항상 잘해줘서 고맙고… 새로온 인턴분들도 힘들텐데 잘 적응해줘서 고맙고요…. 우리 팀 모두 화이팅…! 합시다!”

와아아 건배! 잔을 부딪히자마자 배세진은 시원하게 소주를 원샷했다.

 

“아으윽….”

 

장난 아니게 쓰다. 원체 술을 안 마시기도 하고, 술이 세지도 않은 그는 평소에 소주 대신 음료를 마셨었다. 오랜만에 몸에 도는 알코올에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배세진은 잔을 내려놓는 대신 다시 한번 소주잔이 찰랑거릴 정도로 술을 채웠다. 왜냐고?

 

‘류청우가 내 옆에 앉아있잖아…!’

 

그렇다. 이놈의 팀원들은 가족같은 분위기를 넘어서 사내 직급을 씹어 먹고 마치 막역한 친구처럼 술자리에서 아무 구분 없이 털썩털썩 주저앉았던 것이다! 평소 그의 지정석인 선아현 부장의 옆자리를 대리 두 명에게 빼앗겨버리고 남은 자리를 확인했을 때, 류청우 옆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얼마나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었을지 상상이 가는가?

배세진은 <전남친 옆에서 제정신으로 버티기> VS <그냥 취해버리기>를 사이에 두고 심사숙고 끝에 후자를 고르기로 했다.

그래도 팔이 닿을까봐 신경 쓰이는 걸 빼면, 고개를 직각으로 돌리지 않는 이상 얼굴을 안 봐도 되니 오히려 좋은 걸지도 몰라…. 남은 이성으로 최대한의 합리화를 하며 배세진이 두 번째 잔을 비웠을 때였다.

 

“어? 류 인턴 잔이 비어있네? 한잔 채워드려요?”

“아…. 하하. 부탁드리겠습니다.”

 

평소처럼 붙임성 좋은 이세진이 귀신같이 류청우의 잔이 빈 걸 알고 말을 걸어왔다. 배세진은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무색하게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목이 돌아갔다.

류청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얼마만이지? 마지막 기억과 비교해 눈썹이 더 짙어진 거 같기도 하고….

잘난 얼굴을 찡그리며 웃는 류청우는 나무랄 데 없는 각 잡힌 자세로 이세진으로부터 술을 받는다. …저건 좀 곤란할 때 짓는 웃음인데. 왜 저렇게 웃지? 술을 안 좋아하나?

그나저나 류청우가 술에 강했던가? …모른다. 둘은 성인이 되기 전에 헤어졌으니까. 처음 마시는 술은 너하고였음 좋겠다. 세진아. 그런 약속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와서는 다 의미 없는 것뿐이지만.

근데 아까부터 나 왜 류청우 생각만 하고 있지? 취한 건가?

이세진은 알아서 잘 하는 녀석이니 내버려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류청우의 미묘한 웃음이 마음에 걸려서… 혹은 술기운에 입이 느슨해져서 배세진은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너…! 상사가 인턴한테 막 술 강요하고 그럼 안 돼!”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들 줄 몰랐던 건지 류청우는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이세진은 매우 익숙하다는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에이, 과장님. 저 아시면서. 그런 건 딱! 눈치 좋게 알아서 조절합니다~”

“그, 그치만 너도 술 마셨고… 네가 그럴 생각이 없어도 상대한테는 강압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저기,”

본인이 어느새 반말하고 있다는 것 모른 채 나오는 대로 지껄이던 배세진은 류청우의 부름에 말을 멈췄다. 곤란하다는 듯 웃는 류청우의 눈빛이 온전히 저를 향하고 있었다. 뜨끔. 배세진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탓에 류청우의 웃음이 조금 쓰게 변했다는 걸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과장님. 술 싫어하지도 않고, 잘 마시는 편이라서요.”

“오오, 역시 류 인턴!”

이세진은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류청우의 잔을 채웠다. 도와주려 나선 건데… 독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아 배세진의 기분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그리고 우울은 곧 오기로 바뀌었다.

“나도… 한 잔 더 따라봐.”

이세진을 향해 잔을 쭉 뻗자 이세진은 류청우 때와는 달리 “엥? 과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미 얼굴이 빨간데?” 하고 한 번 브레이크를 건다. 뭐래. 멀쩡하니까 빨리 따라. 명령조로 말하자 이세진은 아이고, 과장님이 인턴은 아끼면서 직속 부하는 갈구네. 흑흑. 입으로 우는 소리를 내며 잔을 채워줬다. 배세진은 류청우로부터 완전히 고개를 돌린 뒤 그것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여전히 술은 지독하게 썼다.


-세진아.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다정한 부름에 배세진은 깨닫는다. 아, 이거 꿈이구나.

 

-세진아.

 

류청우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반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그조차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퉁명스럽게 구는 배세진을 오해하지 않고 본질을 봐주던 사람. 반장도 아니면서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류청우를 관찰하기 시작하고 그는 깨달았다. 류청우, 그는 원래부터가 ‘좋은’ 사람이란 걸.

그러니 배세진이 류청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배세진은 자기감정을 숨기는 게 서툴렀다. 자신을 속이고 류청우 옆에서 친구인 척 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백했다. 하굣길. 단둘이 남는 시간을 노려서.

류청우라면, 같은 남자의 고백이라도 바보 취급하지 않고 정중히 대해줄 거란 얄팍한 계산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배세진은 그날 류청우의 표정이 저렇게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세진아, 좀 당황스러운데….


한껏 놀란 것처럼 보이는 얼굴과 달리 류청우의 말투는 여전히 지독할 정도로 다정했다. 그 다정이 오히려 배세진을 괴롭게 했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이기적으로 느껴져서. 배세진은 울고 싶은 기분을 겨우 참아내며 말했다.


-그, 그렇지? 미안해. 그냥 못 들은 걸로… 아니, 앞으로 친한 척 안 할 테니까….


내가 왜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실제로도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는 걸 류청우한테 손목이 잡히고 나서야 알았다. 세차게 손을 내치려 하자 류청우가 다급하게 말한다.


-세진아, 잠깐만! 그런 게 아냐.

-뭐…?


당장이라도 내뺄 것처럼 한껏 뒤로 물렸던 몸을 굳히니 류청우는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배세진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류청우를 올려다보니 그는 조금 볼을 붉히며 말했다.


-세진아. 내가 당황스러웠던 건 맞아. 맞는데… 싫지는 않았어.

-…어?

-그러니까 내 말은… 세진이 너만 좋다면 우리가 사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전혀 예상도 못 한 파격적인 제안에 배세진은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배세진이 류청우를 좋아하게 된 건 당연하게 수렴하는 결과였다. 그야 류청우는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류청우는? 류청우가 배세진을 좋아하게 될 이유가 있긴 했나? 

그와 친구가 된 뒤, 류청우가 고백받는 장면을 여러 번 봐왔다. 그때마다 류청우의 답은 언제나 같았다. ‘마음은 고맙지만 친구로 지내자.’ 다정한 사람이니까. 류청우는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짓은 안 한다.

배세진은 그 역시 같은 답을 들을 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애초에 친구도 없었던 배세진이 연애 같은 걸 고려해봤을 리가 없다.


-응…? 어때?


배세진이 한참 답이 없자 류청우가 다시 물어온다. 고백한 건 그인데 왠지 모르게 상황이 역전되어 있었다. 배세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거절해야 맞는 건가? ‘널 좋아하는 건 맞는데 사귀는 것까진 생각해보지 않았어. 미안해.’라고? 그런 말을 했다가 류청우가 실망하기라도 하면…?

아니. 류청우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배세진이 어떤 억지를 부려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가 류청우의 마음이 바뀐다면? 그가 사귀자고 한 게 그저 지금 상황에 휩쓸려서 한 결정이라면? 오늘 헤어지고 내일 학교에서 만났을 때, 역시 아닌 것 같다는 답이 돌아온다면…?


-…좋아. 사귀자.


그래서 배세진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심사숙고가 기본인 그답지 않은 빠른 결정이었다. 그만큼 류청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그때 사귀기로 하지 않고 친구로 남았다면, 우리는 계속 함께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은 1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다.




“으윽….”


배세진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왜 이렇게 아프지? 악몽까지 꾸고….

더듬더듬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으려던 그는 이윽고 위화감을 느낀다. 시트와 이불의 감촉이 평소와 다르다. 감촉뿐만인가? 향도…. 하지만 낯설진 않다. 꽤 오래 전에 자주 맡았던…. 아닌가? 분명 어제도 맡은

류청우의 체향.


“…!!”


순식간에 잠기운이 가시면서 배세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새벽인지 주변이 어슴푸레했으나 조명등 덕분에 방 안을 살피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생활감이 느껴지는 낯선 원룸. 모텔이 아니다. 누군가의 자취방이 분명했다.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샤워 소리는 분명 이 집 주인이 내는 것이리라.


‘나가야 해!’


배세진은 빠르게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건지 몸을 휘청거렸다. 그래도 의지로 버티며 의자에 걸린 그의 겉옷을 챙겼다. 그리고 휴대폰… 휴대폰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한참을 발을 동동거린 끝에 그는 TV아래 장식장에 놓여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허겁지겁 이를 챙긴 배세진은 방을 뛰쳐나가려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집주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류, 류청우…?”

“응. 세진아.”


뭐야 이거. 또 꿈인가? 머리칼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류청우는 아래를 가린 수건 한 장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걸친 게 없었다. 다시 말해, 배세진은 류청우의 잘 짜인 상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아, 아….”


시선을 둘 데가 없다. 가슴? 밑? 얼굴? 어디든 그의 허용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서 그만 배세진은 발을 헛디뎠다.


“앗, 조심해야지. 세진아.”


류청우는 그런 그를 아무렇지 않게 붙잡아주었다. 자연스레 류청우의 품 안에 안착한 그는 자기 손이 류청우의 탄탄한 맨 가슴에 닿아있다는 걸 깨닫고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 펄쩍 뛰었다.


“아. 미안해. 옷을 안 가지고 들어가서….”


마치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류청우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제 옷을 챙겨 입었다. 그마저도 완전히 물기가 가시지 않아 젖어버린 하얀 천이 비치면서 그의 근육에 달라붙었지만 배세진은 차마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저기… 나는 그럼 이만….”

“돌아가게?”


그럼. 당연히 돌아가야지. 제정신인 인간이라면 새벽에 전남친의 집에 머문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알 것이다. 비록 이곳에 그를 데려온 인물은 류청우인 모양이지만…. 아마 술 마시고 뻗어버린 자신을 미처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것이다.

류청우는… 좋은 애니까. 그러니 지금 돌아가려는 자신을 류청우가 막는 것도 분명 그런 이유일 것이다.


“대중교통은 다 끊겼을 텐데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 괜찮아.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면 너무 정 없어 보일까 배세진은 입을 딱 다물었다. 류청우는 이미 반쯤 현관으로 발을 뻗은 그를 보며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서지도 않았다.


“세진아, 너 아직 얼굴이 빨개. 첫차 시간까지만이라도 여기 있어. 내가 걱정돼서 그래.”


얼굴이 빨간 게 누구 탓인데…. 배세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까부터 류청우가 너무 다정했다. 회사에서 류청우는 배세진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어쩌다 업무 때문에 대화하게 돼도 언제나 정중한 경어에 호칭은 과장님이었고.

그를 ‘세진아’라고 부르는 류청우는 이제 그의 꿈속에서나 등장하는 거였는데.


“응? 세진아….”


정말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배 과장님… 무, 무슨 일 있으세요…?”

점심 후 커피 타임. 비록 현재 모인 세 명 중 둘은 각각 커피가 아닌 차와 아이스 초코였으나 아무튼 선선한 공기와 함께 짧은 휴식을 즐기는 직장인들 가운데, 홀로 심각한 얼굴인 배세진의 존재에 선아현 부장은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배세진은 식은땀을 삐질 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아무것도….”

사실은 저번 주 회식 때 술에 취했다 깨어나니 전남친의 자취방이었고, 전남친의 반라를 본 것도 모자라 그와 단둘이 동틀 때까지 같이 있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인턴 류청우라는 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제가 겪고도 어이가 없어서 배세진은 집에 돌아와 이틀 밤을 설쳤다. 그런데 정작 그를 번뇌에 빠지게 한 류청우는 오늘도 멀쩡하게 출근했다. 누구는 그 때문에 다크서클까지 생겼는데!

한숨을 푹 내쉬며 당이라도 쭉 들이키려는데 툭툭 누군가 옆에서 그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때까지 별 말없이 커피나 빨아들이던 박문대가 눈짓으로 선아현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상담.’

“아.”

상담? 대체 뭘 상담하라는 거지? 그렇지만 확실히. 이 건은 배세진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그는 현재 매우 절실히 타인의 조언이 필요했다.

그래서 배세진은 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해보기로 했다.

“이건 제 아는 사람 이야기인데요….”

그가 입을 엶과 동시에 선아현과 박문대는 나란히 눈을 굴리다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본인 이야기인 것 같은데…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까?’ ‘그러죠.’ 눈짓만으로 의견을 합치시킨 둘은 얌전히 배세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만약에 헤어졌다가 최근에 우연히 다시 만난 전 애인이 평소엔 아는 척도 안 하다가, 둘만 남으니까 갑자기 다정하게 군다면… 이유가 뭘까요.”

설마 연애 상담일 줄은 몰랐던 선아현이 “와아-” 소리를 내며 볼을 발갛게 물들일 동안 박문대는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즉답했다.

“뭐긴 뭐예요. 꼬시는 거죠.”

“그, 그럴 리가!”

배세진은 펄쩍 튀어 오르며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걔는… 아니, 그 사람 말로는 전 애인은 헤어질 당시에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고…! 그, 그랬는걸. 근데 왜 인제 와서…….”

간신히 ‘아는 사람 이야기’ 컨셉은 지켜냈지만, 배세진의 목소리는 사방으로 떨리고 있었다. 배세진이 현재 상대에게 상당히 휘둘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박문대는 조금 더 진지해져서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그의 가정은 언제나 극단적인 편이었다.

“그럼 어장을 치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윽….”

류청우는 그런 짓 안 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던 배세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던 선아현은 작게 손을 들고 말했다. 아, 아니면요….

“사실은 뭔가 오해가 있던 건 아닐까요…?”

“뭐…?”

“그… 아시는 분은 헤어진 이후로 전 애인분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거죠? 그러면 헤어질 당시에 서로 뭔가 오해를 했던 게 아닐지….”

“그건….”

배세진은 종종 악몽처럼 그날 일을 꿈꾸곤 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헤어졌던 그날, 그 순간만큼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거기에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하지만 만의 하나 배세진이 무언가를 오해했다면 대체 무엇을?


“엇, 류 인턴은 유학파셨어? 엘리트네~”

“네. 대학 시절에는 계속 해외에 있었습니다.”

“Oh! 그거 저랑 같아요. 저도 유학 출신이에요.”

“무슨 소리십니까. 차유진 주임은 미국인으로서 미국 대학을 나온 거 아니셨습니까? 그걸 유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적절한 단어선정이라고….”

“우우~ 인턴이 주임님 말에 꼬투리 잡아요.”

“…!!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는 차유진 주임의 오류를 고쳐주기 위해…!”

짧은 상담을 끝내고 복귀하니 사무실에 남은 팀원들이 서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려오는 단어에 배세진은 아까부터 반복 재생되던 기억의 한 페이지가 다시 펼쳐진다.


-유학…?

-응. 스카우트 제안받았어.

-그래? 잘 됐다…! 너 계속 그쪽으로 가고 싶어 했잖아.

무르익어가는 고3의 가을, 류청우는 해외 유명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받았다. 배세진은 수시 준비로 하루하루 피 말라 가는 와중에도 진심으로 류청우를 축하해주었다. 그의 재능과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비록 류청우가 해외로 가게 된다면 장거리 연애가 되겠지만, 옛날에는 펜팔로도 연애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걸. 영상통화도 되는 시대에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배세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자고…? 이렇게?

류청우의 해외 유학이 정식으로 결정되고 배세진이 서울 모 대학 수시에 합격하던 겨울 날, 그를 불러낸 류청우는 배세진에게 결별을 제안했다. 한껏 당황해 동공을 떠는 배세진을 보고도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건조했다.


-세진이 네가 원한다면.

마치 결정권은 자신에게 없다는 것처럼. 류청우는 그렇게 말했다. 배세진은 류청우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어째서? 겨우 해외 유학일 뿐인데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해? 그리고 그걸 왜 내가 정해야 해?

우리는 연인 아니었나. 연인의 문제는 항상 둘이서 함께 조율해야 맞지 않던가. 고백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다 배세진 혼자 맘대로 정해버리면….

‘그게 연인이 맞기는 해?’

정말로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근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한 마디라도 내뱉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만약 울어버린다면 류청우는 배세진을 달래주겠지. 왜냐하면 류청우는 좋은 사람이니까. 어쩌면 헤어지자는 말도 없었던 걸로 해줄지도 몰라. 그러면 배세진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배세진은 우는 대신 류청우를 노려봐줬다. 류청우는 배세진의 적의를 정통으로 받으면서도 그저 담담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배세진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저 별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본인 감정을 숨기고 있는 건지. 류청우과 사귄 뒤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의 류청우만큼은 정말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류청우에겐 배세진과 연인관계를 이어 나갈 의지가 없다.』

배세진은 그대로 뒤돌아 집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뒤 류청우에게 문자로 헤어지자는 말을 전했다. 답장은 금세 왔다.

[그동안 고마웠어. 세진아.]

배세진은 문자메시지를 꾹 눌렀다. 

하지만 결국 삭제 버튼을 누르진 못했다.

“모르겠어….”

몇 번이고 그날의 기억을 되풀이해봐도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류청우는 해외 유학을 가면서까지 굳이 배세진과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는 자명한 이야기. 

확실히 그날 류청우의 태도가 평소와 좀 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뭔 상관이냔 말이다. 일주일이나 지나서 보낸 헤어지자는 문자에 단숨에 그러겠노라고 답장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전화도 아닌 문자로. 그 뒤로 단 한 번의 연락조차 없었다.

‘그런데 왜 인제 와서….’

어장이에요. 어장.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박문대의 목소리에 배세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아무리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해도 그 류청우가? 차라리 우리 집 뭉게가 말을 한다는 게 더 신빙성 있겠다.

아무리 고민해도 시름만 깊어질 뿐 아무런 진전이 없었기에 배세진은 차라리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대한 잡념은 버리고, 류청우 생각도 하지 말고…. 부지런히 손과 머리를 쓰다 보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배세진은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탓에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도 모른 채 말이다.

“배 과장님,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고마… 으헉?!”

자신을 챙겨주는 팀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배세진은 류청우를 발견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빠르게 주위를 훑으니 이미 다른 팀원들은 다 퇴근하고 사무실에는 류청우와 배세진, 단 둘뿐이었다.

류청우는 배세진의 과잉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오늘 일이 많으신가 봐요.”

“그… 그렇죠.”

“퇴근은 안 하시나요?”

“그… 아무래도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일은 평소와 똑같은 수준이었고 야근할 필요도 없었지만, 배세진인 얼떨결에 거짓말을 쳤다. 이대로 같이 퇴근이라도 하자고 류청우가 제안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류청우는 뛰는 배세진 위에서 날고 있던 모양이다.

“저도 사실 할 일이 남아있어서 같이 하면 되겠네요.”

“뭐? 무슨 인턴이 야근을 해?”

그것도 직속 상사가 다 퇴근한 사무실에서…?! 황당하다는 듯 배세진은 류청우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쟤가 원래 저렇게 뻔뻔했었나…? 또다시 머릿속에 <어장>이 떠오를 것 같아 그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류 인턴은 돌아가셔도 돼요. 할 일은 제게 넘겨주시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아뇨. 가뜩이나 바쁘신 과장님께 어떻게 제 일을 떠넘기겠어요.”

“아니… 혼자 야근할 정도면 이미 인턴의 영역을 뛰어넘은 거니까 윗사람이 맡는 게 맞는….”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그냥 일이나 하자! 가 되어 둘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를 두드렸다. 솔직히, 할 일도 없는데 일하는 척하기가 쉽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최신 기사나 죽죽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휴대폰에 불이 들어왔다. 모르는 번호. 이 시간에 누가?

“…여보세요?”

“네. XX병원인데요. 배ㅇㅇ씨 보호자 되시죠?”

쿵. 갑자기 심장이 떨어졌다. 배세진은 겨우 숨을 가다듬었다.

“…저희… 어머닌데요….”

응급실. 입원. 병원 장소. 띄엄띄엄 들리는 정보 속에서 배세진은 쉽사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으니 이상함을 느낀 건지 류청우가 다가왔다.

“과장님?”

“나… 나 가야 해. 엄마가….”

배세진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29살이나 먹어놓고.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서…. 눈에 보이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고 있으니 류청우는 배세진의 손목을 잡았다.

“세진아, 일단 짐은 여기에다 두고 가자. 어머니 계신 위치 나한테 알려줘.”

류청우의 침착한 말투와 손목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배세진은 약간 정신이 들었다. 그가 병원 주소를 읊으니 류청우는 배세진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가 있었구나….’

멀거니 그런 생각을 하니 표정을 굳힌 채 조수석 문을 열어젖힌 류청우가 말했다.

“어서 타. 세진아.”


“식, 식중독?!”

“그렇다니까~ 유통기한이 좀 지나긴 했는데 설마 이렇게 아플 줄이야.”

근데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라서. 하루이틀만 입원하면 된대. 입원복을 입은 엄마는 밝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배세진은 입원실 침대 앞에서 무너졌다.

“엄마아… 제발…….”

“미안해. 우리 아들. 많이 놀랐어?”

아니.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통화 내용을 못 들은 게 잘못이니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뒤늦게 수치심이 쏟아졌다. 엄마가 무사한 건 좋긴 한데. 나 이런 걸로 류청우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거야? 걔가 날 얼마나 바보같이 볼까? 게다가 병원에 데려다주는 수고까지 끼치고….

“어머, 너 청우 아니니?”

“…아.”

그렇다. 배세진은 류청우를 병원까지 데려와 버렸다. 그리고 엄마는 학창 시절 류청우를 알고 있고. 그야 배세진의 유일무이한 친구였으니 당연했다. 비록 사귀는 사이였다는 건 비밀이었지만.

류청우는 반의 중심이자 회사의 기둥답게 능숙하게 엄마의 말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오랜만입니다.”

“어머 어머! 진짜 청우 맞구나?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완전 애가 훤칠해졌네. 외국 갔다더니 세진이랑 계속 연락하고 있었구나?”

“아뇨. 사실 세진이랑은 최근에 다시 만났어요. 우연히 같은 회사에 다니게 돼서….”

“어쩜~ 그런 우연이 다 있네! 얘 세진아. 왜 말 안 했어?”

“그게… 깜빡…….”

배세진은 매우 어색한 티를 숨길 수 없었으나 엄마는 류청우를 만난 반가움에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 세진이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니? 미안해서 어째.”

“아니에요. 오랜만에 아주머니 뵈어서 좋은걸요.”

“그래, 그래. 나도 오랜만에 청우 너 보니까 너무 좋다. 그거 아니? 너 유학 가고 나서 세진이가 엄청 우울해했어.”

“어, 엄마!”

배세진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말을 막으려 들자 엄마는 빙글빙글 웃으며 이를 피했다. 티격태격하는 닮은 모자를 류청우는 웃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배세진은 조금 더 오래 입원실에 남아있고 싶어 했지만, 엄마는 빨리 뭉게 밥이나 주러 가라며 그를 내쫓았다. 그러면서 청우에게 고생시켰으니 나중에 답례하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세진은 표정을 굳혔지만, 결국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뭉게?”

병원을 나선 류청우는 배세진에게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배세진은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으나 의외로 류청우가 강경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조수석에 몸을 맡겼다. 정말 왜 이렇게 된 거지?

“…우리 집 강아지.”

“강아지 키우는구나.”

“응…. 꽤 최근에 입양했어.”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쓸데없는 사족까지 붙여버린 그는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배세진은 뭐라도 하는 척하고자 휴대폰 화면에 전원을 넣었다. 배경 화면의 숫자는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알렸다. 하긴 야근에 병원까지 왔다 갔다 했으니까…. 이를 깨닫자 뒤늦은 허기가 찾아왔다.

‘류청우는… 배 안 고프려나….’

저번에 봤을 때 자취하는 것 같던데…. 야근 뒤에 그를 병원에,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당연한 의무라는 듯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그에게 배세진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저만 아니었어도 벌써 집에 돌아갔을 텐데. 

“오늘 고생했어. 세진아.”

“너도…. 고생 많았어. 그리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뭘. 이 정도로.”

그를 집앞에서 내려준 류청우는 어깨를 으쓱하곤 웃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시원시원하지? 그가 류청우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 눈앞에서 확인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여기서 후다닥 집으로 뛰어 들어갔을 텐데 왠지 모르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배세진은 발을 지분대다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 혹시 배고프면…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갈래? 아, 아니다. 역시 이건 못 들은 걸로….”

“갈래.”

“…….”

“세진아. 나 너네 집에 들어가도 돼?”

정면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짙푸른 눈동자에 배세진은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배세진은 제집에서 뭉게와 놀아주고 있는 류청우를 보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와 거리를 두기는커녕 이렇게 집까지 데려와 버리고…. 하지만 그렇다고 저 때문에 고생한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차라리 이 기회에 10년 전 일을 캐물어 봐? 선아현 부장이 말했듯 정말로 둘 사이에 오해가 있던 거라면…. 솔직히 너무 희망적인 관측이라 배세진으로서는 ‘있을 수 없다’고 확언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지르지 않으면 평행선이었다.

배세진은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지자 잠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일단은 밥부터 차리자.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냉장고를 열었을 때 그는 다시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세진아, 이건….”

“미안….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가 이것뿐이라….”

식탁 위에 있는 것은 각각 계란찜에 계란프라이, 계란국이었다. 평소라면 충분히 훌륭한 저녁 식사겠으나, 손님(그것도 무려 전 남친이다)에게 차려주기엔 민망하기 짝이 없는 구성이었다. 배세진은 부끄러움에 귀까지 벌게졌다. 류청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식탁을 바라봤다. 

“이게 다… 세진이 네가 한 거야?”

“…? 응.”

왠지 모르게 들뜬 것 같은 류청우의 목소리에 배세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류청우가… 정말 기뻐보이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어서.

‘류청우 계란… 좋아하나?’

예전엔 그냥 평범하게 먹었던 것 같은데…. 유학 시절에 선호도가 달라진 걸지도 몰랐다. 아무튼 마음에는 들어 보이니 다행이었다.

식사는 별 대화 없이 이루어졌다. 의외인 것은 그리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잠시 의문을 가지던 배세진은 곧 그들이 학창 시절 항상 이렇게 같이 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살짝 기분이 가라앉았다.

“잘 먹었어. 세진아. 정말 맛있더라.”

“그래…? 간이 덜 돼서 싱겁지 않았어?”

“아니. 난 좋던데?”

배세진을 거짓말을 가늠하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류청우를 바라봤지만, 그는 쾌남다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게 배세진의 기분을 더 이상하게 했다. 대화만 보면 둘 사이에 정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까. 마치 예전의 그 시절인 양….

류청우는 마치… 그래. 둘이 사귀고 헤어졌던 일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배세진은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류청우. 너는 나랑 다시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내가?”

“그래. 네가.”

감정으로 몰아붙일 게 아니라 차분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10년 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들은 한번 바늘로 푹 찌르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난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우리 헤어졌잖아. 류청우 네가… 헤어지자고 했잖아.”

“…세진,”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다정하게 굴어? 내가 10년동안 너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그런데 너는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내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놀아. 거의 절규하듯 말들을 쏟아낸 배세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류청우가 유학 간 뒤로 몇 번이고 스스로 물었다. 류청우는 정말로 배세진을 좋아했는가?

사실은… 어쩌면 사실은 류청우는 그저 그 외에는 친구 한 명 없는 배세진을 위해서, 그와의 연결고리까지 잃어버리고 다시 혼자 반 구석에 숨어있을 불쌍한 자기 친구를 위해서 고백을 받아준 거라면?

류청우는 배세진의 급발진에 놀란 것인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배세진을 바라보던 류청우는 배세진이 어느 정도 호흡을 가라앉혔을 즈음, 매우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어왔다.

“세진아, 너 나를… 지금도 좋아해…?”

“…!!”

배세진의 얼굴은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는 현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나가.”

“세진아, 잠깐만….”

“지금은 너랑 대화하기 싫어. 나가줘.”

제발. 이 이상 류청우에게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맘 같아서는 그를 직접 일으켜 현관까지 내쫓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류청우 역시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였기에. 그 원인 제공자가 배세진 자신이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류청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현관이 아니라 배세진이었다.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류청우가 말했다.

“세진아. 나 지금부터 너한테 키스할 거야.”

“…뭣,”

갑자기 뇌가 단어의 의미를 잊어버린 것마냥 류청우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얘가 지금 대체 뭐라는 거지?

류청우는 배세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돼. 아니면 밀어내거나.”

“…….”

“근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난 그냥 할 거야, 세진아.

배세진은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류청우의 푸른 눈이 마그마처럼 끓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온전히 그의 착각일까?

이윽고 류청우의 입술이 배세진에게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단 한 번만.

그 뒤로 이어지는 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욕정의 산출였다. 거칠게 배세진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류청우의 혀는 배세진을 숨도 못 쉬게 몰아붙이며 그의 안쪽을 유린했다. 배세진이 본인의 혀를 물리려고 하면 억지로 잡아서, 다시 자신과 섞었다. 어느새 배세진의 뒤통수는 류청우의 손에 의해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류청우는 더욱 깊숙이, 마치 본인의 숨결을 배세진의 폐부까지 넣을 수 있다는 듯 입을 맞물렸다.

그것은 사람이라기엔 짐승과도 같은 입맞춤이리라.

“허억… 잠깐…!”

숨이 부족해 정신이 아찔해진 배세진이 류청우를 밀어내자 그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둘 사이를 이어주던 은실이 툭 끊겼다.

류청우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셔츠의 윗단추를 풀면서 쌕쌕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는 배세진에게 물었다.

“세진아, 어때…? 더 하고 싶어?”

그의 말에 배세진은 저도 모르게 류청우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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