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록에 대하여

살파랑 장경고윤

* 어떤 오타쿠는 친구의 명언에 약간 살을 붙여다가 글이라고 또 우기곤 합니다. 그 명언이 뭐냐면...

저: (캐해 시트 얘기하다가) 우리 온화하고 정숙한 얀데레는 표로 분류하면 어디로 들어갈까

친구: 장경이는 그런 남이 붙인 표에 들어가지 않아

저: ???

친구: 장경은 의부 품에 들어갈 거야

저: ......명언이다 우문현답 당신이 오늘의 금메달

* 본편 완독 스포 있습니다! 반고의 한서는 직접 인용 없고, 모티프로만 가져와서 대충대충 변형했습니다.


태시 10년 3월, 경성의 한 서사(書肆). 넓지 않은 공간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짙게 풍겼다. 정갈하게 꾸민 실내에서 구획을 짓는 것도 서가요, 가게 입구를 가리키는 표지 역시 겹겹이 쌓인 책더미였다. 발걸음에 닳아 반질반질해진 문지방이 가게의 역사를 증명했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서사에는 설문해자 같은 고전부터 심심풀이용 지괴소설, 언정소설까지 온갖 책이 꽂혀 있었다. 책이 놓이지 않은 곳은 창문가밖에 없었는데, 춘삼월 봄바람이 불면 창문턱에서 얇은 비단이 너울거렸다. 책 위로 햇빛이 곧바로 들지 않도록 쳐둔 휘장이었다.

국난과 전쟁이 끝나고 평온한 시기가 찾아오자 백성들도 삶에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 글을 배우는 이들이 알음알음 늘었고, 서사를 찾는 손님도 많아졌다. 원화제 시절 조모가 문을 연 이래 삼대째 가게를 이어왔다는 서사 주인은 지금처럼 책이 잘 팔리는 때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어서 새 손님이 들어오는 일도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사람에 익숙한 가게 주인도 자기 눈을 의심했다. 책도 사람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지만, 방금 문턱을 넘어 들어온 남자가 지나치게 미인이었다. 얇은 남색 장포 아래로 보랏빛 받침옷을 겹쳐 은은하게 색이 비치도록 쌓아 올린 옷매무새만 봐도 아주 멋스러웠다. 요란한 장식 없이, 오롯이 미감만으로 살린 태였다. 설령 거적때기를 걸치더라도 저 도화안이 빛을 잃지는 않았으리라. 홀린 듯이 바라보던 주인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대인, 찾는 서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손끝으로 서가를 훑던 남자가 웃으면서 손짓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둘러보러 왔소.”

아, 주인은 숨을 짧게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이런 손님들은 말을 붙이면 부담스러워한다. 살 책도 사지 않고 도망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필요할 때 불러 달라고 말한 다음 재깍 물러나야 한다. 성향을 노련하게 파악한 주인은 가게 구석에 놓인 탁자에 앉아 증기 화로에 찻물을 올렸다. 나는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편하게 구경하라는 뜻으로.

배려가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솜씨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뛰어난 미감만큼 음감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준이 심각했다. 주인은 애써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들어주기 힘든 노래는 금방 멈추었다.

“이 책은 많이들 찾는 모양입니다. 권수가 이토록 많으니.”

“아, 그거요? 우리 역사 이백 년을 전부 다루다 보니 자연히 권수가 많아질 밖에요. 요사이 서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고들 합니다.”

“호오, 역사서였군요. 제목부터 『양서(梁書)』라고 붙었더라니.”

혼잣말을 중얼거린 남자가 품에서 유리경을 꺼내더니 책장을 팔락팔락 넘겼다. 역대 황제들의 공적을 다룬 본기는 관심사가 아닌지 곧바로 건너뛰었다. 본기 뒤에는 역사서 체제에 맞게 연표가 여럿 나열되어 있었다. 제후왕표, 공신표……. 무심히 몇 권을 살펴보던 시선은 복잡한 표에 이르러서 멈추었다. 유명인사들을 등급별로 정리했다는 「고금인표(古今人表)」였다. 표에는 고대의 영웅부터 당대 학자까지 온갖 인물이 천 명도 넘게 기록되어 있었다. 등급은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 아홉 가지로 나뉘었다. 과연 거창한 제목을 붙일 법도 했다.

그러나 사람의 인품을 어찌 판단하며 무슨 기준으로 등급을 매긴다는 말인가. 단적인 예시로, 보라. 안정후 고윤은 중상(中上)급을 받았다. 아직 생존하는 인물이므로 추후 평가가 바뀔 수 있다는 주석이 작게 달렸지만, 어쨌든 중상은 중상이다.

아니, 잠깐만. 중상? 남자가 팍 미간을 구겼다.

“안정후가 상(上) 자도 못 받는단 말이야?”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주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질린다는 듯한 안색을 보니 한두 번 들은 소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서생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표 때문이랍니다. 하루가 멀다고 갑론을박들을 하고 있지요.”

“보자, 누가 쓴 책이지? 무관을 홀대하는 것을 보니, 분명 문인이겠지요?”

“학자 집안에서 매달려 쓴 건 맞습니다. 다만 내용 대부분을 적은 첫째 아들은 종군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요.”

영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을 흘기던 남자가 주인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현철영이나 북대영 출신이랍니까?”

“그렇진 않겠지요. 그랬다면야 어디 안정후를 중상에 뒀겠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구려.”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자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눈빛으로 본기 쪽을 다시 펼쳤다. 몇 권씩 두껍게 쌓인 본기는 융안제까지만 쓰였을 뿐, 태시제는 없었다. 살아 있는 군주의 기록은 주석 한 줄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일까? 아무리 대쪽같은 문인이라도 전성기를 달리는 현 황제를 평가하기는 두려웠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자는 천천히 융안제기의 마지막 대목을 훑었다. ‘황제는 세상을 떠났고, 어린 태자를 대신하여 안왕 이민이 제위를 잇게 했다.’ 건조하게 쓰인 문장을 읽어내리는 눈길이 의미심장했다.

그때 서사 주인이 말을 걸었다.

“대인, 예서 차 한 잔 드시지요. 올해 용정차가 꽤 괜찮아서요.”

망설이는 손님에게 눈치껏 차를 권하는 것은 주인의 영업 비결이었다.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은 금방 흘러가고, 그만큼 대접을 받았다는 느낌에 뭐라도 하나 사곤 하니까. 한데 이번에는 비법이 영 효과를 내지 못했다. 찻잔을 내민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는지, 순간 남자가 날카로운 눈길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대번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시선이 어찌나 냉랭한지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눈에 칼을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주인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했다. 책을 들고 있는 남자는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칼은 무슨, 손에 피리나 쥐고 다니면 딱 어울릴 인상이었다. 평생 사람을 만나는 장사꾼으로 살며 쌓은 안목이 알려주었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릴 까닭은 더더욱 없노라고. 지금 이렇게, 찻잔을 쥔 손을 떨 이유도…….

주인이 말을 잃은 새 남자가 느긋하게 유리경을 벗었다. 동시에 눈가와 귓불에 있는 점이 따스한 빛으로 반짝였고, 차가웠던 표정이 봄날에 눈 녹듯 사라졌다.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던 주인은 이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붙였다. 아무래도 아까는 유리경에 반사된 빛을 잘못 본 것 같았다. 유들유들해 보이는 손님이 사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장군감이라는 억측보다야, 그편이 훨씬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가.

주인이 알아서 상황을 이해하는 동안, 남자는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문제의 책을 한 질 챙겨달라고 했다. 주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음에 드신 모양이지요?”

남자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러니 남이 못 읽게 내가 사야지요.”

주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책값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철학이다, 이런 사람들이 ‘술은 몸에 나쁘니 내가 다 마셔 없애겠다’ 같은 소릴 하는구나, 그런 속마음은 주판 아래로 묻고.

남자는 주판알이 탁탁 오르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허리에 찬 두루주머니를 열었다. 드러나지 않게 멋을 부린 옷차림과 달리 주머니는 퍽 소박했다. 흔히 붙이는 길상 장식 하나 없었다. 든 것이 없어 가벼운 주머니를 톡톡 쳐본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용돈을 다 쓴 걸 깜빡했군. 주인장, 수고스럽겠지만 며칠만 이대로 둬주시오. 내 꼭 다시 올 테니.”

남자가 눈꼬리를 휘면서 웃어 보이는 순간, 주인은 확신했다. 과연 한량이 맞았다! 이런 사람은 사서에 올라갈 일도 없겠군. 물론 이번에도 속마음은 친절한 말투 아래로 잘 묻었다.

“아이고, 번거롭게 그러실 것 있나요. 외상으로 달아드릴 테니 어디로 찾아가면 되는지만 적어 주십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되고 말고요. 그야, 원래는 이리 해드리지 않습니다마는…….” 목소리를 낮춘 주인이 소곤거렸다. “저도 저희 안사람한테 용돈 타면서 사는지라 어떤 기분인지 압니다. 댁으로 찾아가더라도 들키는 일은 없게 해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 물론 제가 가기 전에 먼저 와주시면 더 좋지만요.”

이제는 남자가 말을 잃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남자는 이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안, 안사람 말이지요, 그래, 그렇지……. 혼자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한참 웃던 남자는 붓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필기구를 내어주자마자 익숙하게 잡는 손놀림이나 고아한 서체를 보니 집에서 놀고먹으면서도 서예는 배운 것 같았다. 그만한 가문이라면 외상값을 떼일 걱정은 없겠다. 주인은 나름대로 치열하게 머릿속 주판을 마저 튕겼다. 그동안 종이를 후후 불어 먹물을 말린 남자는 일필휘지로 적은 외상 증서를 접어 건넸다.

“사흘이 지나도 내가 나타나지 않거든 여기 쓰인 집으로 오시오.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 값을 셈해줄 겝니다.”

주인은 대충 대답하면서 증서를 받은 다음 책더미를 끈으로 묶어주었다. 권수가 꽤 많은데도 남자는 가뿐하게 꾸러미를 들었다. 붓보다 무거운 짐은 들어본 적도 없어 보이건만 의외였다. 곧 또 보자며 인사한 남자는 들어올 때처럼 팔랑팔랑 가벼운 걸음걸이로 서사를 떠났다. 주인은 공손하게 남자를 배웅했다.

가게에서 빠져나온 남자는 노점이 줄지어 선 거리를 기분 좋게 걸어갔다.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꼭 한 번씩 살펴보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길을 비켜주기도 했다. 먹거리를 파는 가판대에서 씁쓰름한 풀냄새가 풍길 때는 가만히 서서 향을 맡기도 했다. 태시제가 막 등극했을 때보다야 한풀 수그러졌지만, 약선 요리는 꾸준히 인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연호가 바뀌기 전까지 저 집 장사가 망할 일은 없겠군.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발길을 돌렸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새까만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을 알아본 말이 푸르릉 소리를 내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마부도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를 뒤로하고 휙 올라탄 남자는 증기난로 옆에 책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불을 피우지 않은 난로 뒤로는 깔끔하게 갠 조복이 보였다. 비단 조복에 수놓인 구름무늬를 흘끗 바라본 마부가 문을 닫으면서 조용히 물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그림자가 기우는 방향을 보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슬슬 관료들이 퇴청할 때였다.

그러면 나도 ‘안사람’을 마중하러 가야지.

평복을 벗자 매끄러운 경갑이 드러났다. 그 위로 다시 조복을 걸치는 손놀림이 퍽 민첩했다. 흘러내리는 대로 두었던 머리카락도 단정히 틀어 올리고 관을 썼다. 옷차림과 자세를 바꿨을 뿐인데 순식간에 영걸한 위풍이 풍기기 시작했다. 문 너머로 담담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황궁으로 가자. 입궐할 것이다.”

마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예, 후야.”

 

고윤이 정전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장경도 나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태감들은 안정후가 들었다고 아뢰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장경은 놀란 눈치로 고윤을 맞이했다.

“어쩌다 오셨습니까, 오늘은 후부에서 쉴 예정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고윤이 냉큼 대답했다.

“데리러 왔지. 귀갓길에 누가 우리 미인을 업어가면 큰일이니.”

그야 황제가 피랍되면 나라가 발칵 뒤집힐 사안이긴 했다. 옥좌에 앉은 지 10년이 되어도 여전히 가장 무거운 활을 당긴다는 태시제를 누가 어떻게 납치할 수 있는가는 논외로 치고. 고윤은 옅게 밴 약초 냄새를 맡으면서 눈을 찡긋했다.

장경은 가볍게 문을 열어 앞장섰다. 예법을 따르자면 장경이 어가를 타고 고윤은 걸어서 뒤따라야 옳겠으나, 태감들은 일찌감치 가마를 물려두었다. 달리 일이 없어 조회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안정후가 이런 시각에 입궐했다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황제가 퇴청한 후 후부로 간다는 사실은 눈치 빠른 궁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제 명대로 살고 싶거든 아무것도 못 본 척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진리도. 덕분에 궁의 정문을 지나서 마차에 이르기까지 둘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고윤은 경성 거리를 둘러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온갖 화제가 규칙 없이 흘러갔다. 너를 본받아 풀떼기만 뜯으려는 이들이 여태 많더라는 푸념부터, 기술서 번역은 좋은 일이나 요즈음 속도가 유난히 빨라졌으니 유의하는 편이 좋겠다는 간언까지. 장경은 잠자코 맞은편에 앉아서 자유자재로 튀어 다니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 기분 좋게 듣기도 잠시, 역사서가 주제로 나왔을 때는 머리를 퍼뜩 들었다.

“그래서, 나는 중상밖에 안 된다지 뭐냐? 그래도 아홉 등급 중 네 번째는 되니 반타작은 했지.”

“당신이 대량의 강산을 어떻게 지켰는데, 누가 감히……. 서책을 샀다고 하셨지요? 이리 주십시오.”

고윤이 마차 구석에 놓인 꾸러미를 툭툭 쳤다.

“이거?”

“예, 제가 봐야겠습니다.”

“아서라, 학자가 입바른 소리를 한다고 억누르면 못 쓴다.”

“……어찌 처분할지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폐하, 진황(秦皇)의 거울이 멀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걸주(桀紂)의 전철을 밟으시면 소신은 어찌 기록되겠습니까. 서북의 한 떨기 꽃으로 모자라 말희, 달기와 나란히 설 경국지색으로 만들고 싶으신 겝니까?”

능청스레 말을 이어가던 고윤이 팔을 뻗더니 장경의 허리를 쿡 찔렀다.

“후대 사람들이 이러지 않겠어? ‘안정후 고윤, 대량제국의 대장군이자 타고난 미색으로 황제를 호린…….’”

“자희, 당신 정말!”

급하게 말허리를 자른 장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사이로 한숨 쉬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결국은 고 씨 어르신이 조금 더 진지하게 대답해야 했다.

“무얼 그리 깊이 생각해, 좋은 일 아니냐.”

장경이 얼굴에서 손을 떼며 되물었다.

“좋은 건가요?”

“진정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뜻이니 좋은 일이지. 사해가 평안하면 검은 검집으로 들어가는 법이고.”

이 이상 친절하게 풀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라의 이기이자 흉기로 불린 고 사령관을 반평생 넘게 모시고 산 장경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위난에 처했을 때 검을 뽑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다. 전쟁이 끝난 후 검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하면 평온한 시기에 검이 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예기를 간직하되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녹슬지 않고, 박한 평가에 아쉬워하지 않고.

다만, 만사가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에서는 어려운 얘기였다. 황실과 고씨 가문 사이에 켜켜이 쌓인 애증도 이를 실현하기 어려워 생긴 것 아닌가. 이치는 새로운 시대에 와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대량 역사를 총망라했다는 사서가 인제야 나올 수 있던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새 시대를 열어젖힌 군주는 바로 앞에 있었다. 고윤은 나지막하게 장경을 불렀다.

“……너는 어디로 들어가려나. 그래도 상 정도는 받겠지?”

“그런 표에 이름을 남겨 무엇하겠습니까,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닐 텐데. 설령 분서갱유를 하더라도 사관들이 부득부득 기록을 남길 텐데? 슬쩍 안색을 살피려니 장경이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런. 고윤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런 얼굴을 보았으면 말을 맞춰줘야지 도리가 없다.

“하긴 폐하께서는 전부터 신선 같은 풍모로 유명하셨지요. 사서는 싫다 하시니 어디, 우화등선하여 신선전에라도 들어가시렵니까?”

“그건 선계에서 받아주질 않을 텐데요. 속세에 둔 그리움이 깊으니 탈속은 어려울 듯합니다.”

“허, 이도 싫고 저도 싫다? 뉘 집 아들이 이리 까다로운지.”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장경은 찌푸린 미간을 살살 눌러 펴는 손길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까다롭게 구는 게 아니라 그저 상관이 없을 뿐이라고.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기록하든, 어떤 공적을 쌓고 무슨 평가를 받든 하등 관계가 없었다. 지키고 싶던 강산이 달리 있을까. 온 천하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서 만인지상이 되었나? 전부 아니다. 그러니 굳이 들어갈 구석을 따지자면 나의 사해, 나의 대량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 알지도 못하는 새 남이 휘갈겨 쓴 책장이 아니라.

순간 돌부리라도 걸렸는지 밖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차가 흔들리자 옥안을 찌를까 저어됐는지 문질러주던 손길이 확 떨어졌다. 그 틈을 탄 장경은 고윤의 옆으로 냉큼 자리를 옮기고 품에 어깨를 기댔다. 장경의 키가 더 커진 지도 한참 되었건만, 열심히 고개를 수그리면 그럭저럭 파고드는 모양새를 낼 수 있었다. 그래, 들어감이란 이런 것을 이르는 말이었지.

장경은 내심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영명하신 폐하께서는 문무백관 앞에서 국정을 논할 때처럼, 아주 신중하고도 현명한 답을 내놓았다.

“저는 의부 품에 들어가지요.”

 


 

“한데 외상을 달아두셨다고요?”

“사흘 후에도 내가 안 가면 후부로 받으러 오라고 증서를 써줬다.”

“그 서사가 어딥니까?”

“응? 지금 가려고?”

“필적을 남기고 오셨다면서요. 찾아와야지요.”

“외상값을 늦지 않게 치르는 건 좋지. 좋은데, 외상 증서까지 수집할 셈이야?”

“그대로 두었다간 그 종이 한 장이 은자 수백 냥에 팔릴 텐데요.”

“호들갑은, 무슨 명문을 적은 서첩도 아닌데.”

“그러니 더욱 희귀하지 않습니까. 음, 수천 냥도 되겠습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알……, 아니, 됐다. 가자!”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