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발에 대하여

살파랑 장경고윤

* 어떤 오타쿠는 140자짜리 캐해에 약간 살을 붙여다가 글이라고 우기곤 합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 본편 완독 스포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여러 번역본을 섞어 가져왔고, 인용구는 이탤릭체로 썼습니다. 사실 오이디푸스보다 엘렉트라에 가까운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요, 정치하게 모티프를 분석하는 문학 비평이 당연히 아니므로 아니 이게 왜 이렇게 연결돼??? 이 상징을 이렇게밖에 해석을 못 해??? 싶은 부분은 흐린 눈으로 넘겨주십사...


높은 옥대 앞에 주렴이 드리운다. 안쪽에는 제왕이 옥좌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주렴 바깥쪽, 낮은 곳에 세운 좌대에는 눈먼 예언자가 지팡이를 짚고 선다. 제왕과 예언자는 양쪽 끝에서 서로 대적하듯이 자리하고, 둘 사이로는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바닥에 켜켜이 눌어붙는다.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던 예언자는 저편에서 음성이 들려온 후에야 옥좌를 바라본다. 주렴 안쪽에서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분노로 떨린다. 도무지 석연치 않다,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예언자는 쓰게 웃으면서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 당신이 찾는 그 살인자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은 가장 가까운 핏줄과 부끄러운 인연을 맺고 사시면서도 그것을…….

네가 그따위 말을 하고도 무사할까?

옥좌를 박차고 일어난 남자가 손을 휘두른다. 붉은색 주렴이 흔들리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제왕은 이를 악물면서 일갈한다. 꺼져라,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추방령을 들은 예언자는 시동의 손을 잡고 빛이 비치는 길로 떠난다. 제왕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선다. 어두운 자리를 향해 홀로 걸어가는 남자의 발에는 오래된 상처가 남아 있다. 운명이 교차하는 순간. 군주를 지키는 보초처럼 늘어선 기둥들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구름이 걷히자 그늘이 사라지고, 궁전에서 뒤엉켰던 비밀도 드러난다. 무장한 부대처럼 종대로 선 먹빛 술병들. 흰 비단으로 목을 맨 미인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 제 눈을 찌른 제왕이 주저앉아 흘리는 시꺼먼 피. 알고자 했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죄목으로 뽑힌 왕의 검은색 눈. 부왕을 죽이고 모비를 맞았다는, 이 이상 어두울 수 없는 죄상……. 비극을 지켜본 군중이 마지막으로 읊조린다.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않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부르지 말아라.

그 대사를 마지막으로 극이 끝났다. 무대를 빙 둘러서 앉았던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무대라고 해봐야 시골 장터에 엉성한 나무 기둥을 세우고 좌판을 깔아 만든 것이 전부지만, 즉석에서 꾸린 자리치고는 봐줄 만했다. 매양 올리던 촌극 대신 이역만리에서 가져왔다는 비극을 공연한 덕분에 찾아온 사람도 제법 많았다. 관객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감상을 나누었다. 역시 이상한 얘기였어. 왜,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새로운 맛이 있잖아. 안정후가 비단길을 지키려니까 이런 촌구석까지 이국 문물이 다 넘어오네.

안정후라는 말을 듣고 얌전히 앉았던 서생 한 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서생 옆에는 공연하는 내내 견과를 간식 삼아 나눠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서생도 먹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지 대뜸 해바라기 씨를 한 움큼 건넸다. 순간 서생의 얼굴에 조심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경계하기도 잠시, 그는 얼른 표정을 고치며 정중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덕분에 해바라기 씨 주인은 넉살 좋게 말을 붙일 수 있었다.

“공자가 보기에는 어떠셨소?”

시선을 돌린 서생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흥미로웠습니다. 기이한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요.”

뒤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니까. 영 괴상해! 노래도 없지, 금도 안 타지. 제목도 그래, 발이 부은 왕이 뭐야?”

처음에 말을 건 사람이 껍데기를 깐 땅콩을 얹어주면서 다시 서생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답을 대신해주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기대가 무색하게도, 서생은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때 앞에 앉은 여자가 뒤로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다들 조용히 하고 손뼉이나 쳐요. 저기 인사하네.”

떠들던 이들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무대 중앙에 나란히 선 극단이 여기저기 인사하고 있었다. 서생은 건성으로 박수를 보내며 배우들의 면면을 살폈다. 원래는 어떤지 몰라도, 여기서는 모든 배우가 남성이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지만 자기 자신을 몰라서 파멸한 영웅, 눈멀고 늙은 예언자, 시종, 백성, 아들과 혼인했다는 진상을 견디지 못해 자결한 미인까지. 미인 역을 맡은 배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생은 살짝 머리를 숙였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장터를 오가는 인파에 섞여서 자리를 떠났다. 부산한 발걸음과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한 차례 지나가자, 준수한 외모도 낡은 장포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피어오른 수증기가 공중으로 흩어져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서생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더분하게 생긴 청년 한 명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미복을 입고 체구도 왜소했지만, 허리를 똑바로 곧추세운 자세가 남달랐다. 따로 무기를 들지 않았는데도 무예를 수련한 사람다운 기세가 느껴졌다. 아니면 군기가 바짝 든 장병이거나. 말에서 내린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터를 살폈다. 달리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청년을 보고 아는 척하는 이는 없었다. 거리를 한 바퀴 돌면서 늘어선 노점을 샅샅이 살펴본 청년은 이내 낭패를 당한 표정을 지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지 입을 두어 번 벙긋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끝내 흘러나온 소리는 없었다. 찾는 사람이 누군지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었으므로.

청년은 다시 말에 훌쩍 올라탔다. 몸집이 작아 그런지 동작이 가벼웠다. 잘 훈련받은 말은 규칙적인 걸음으로 장터를 벗어났다. 마을에서 빠져나온 말이 제대로 질주하기 시작하자, 펄럭대는 옷자락 아래로 새까만 현철 갑옷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청년은 묵묵히 노을 지는 지평선을 향해 말을 달렸다. 4전하를 간발의 차로 놓쳤다는 보고를 사령관님께 또 어떻게 올려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면서.

 

같은 시각, 장경은 산기슭의 나무에 기대 숨을 돌렸다. 아무래도 오늘 밤 근처 마을로 다시 내려가기는 어려울 듯했다. 장병 개개인에게 유감은 없으나 현철영 시위는 최대한 피하는 편이 나았다. 경성으로 잡아간다고 한들 다시 빠져나오면 그만이지만, 감정적인 문제는 아직 남은 까닭이다. 고윤이 저를 잊지 않고 마음을 쓴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까? 그는 저가 떠난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대장군에게 의붓아들이란 또 하나의 보호 대상밖에 되지 않으리라는 점에 좌절해야 할까. 갈림길에 선 장경은 여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후부를 탈출해 유랑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랬다.

집 나간 아들을 잡아 오라며 정예병을 몇 번씩 파견하는 일이 평범한 부정(父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장경은 살뜰한 감시를 당하면서도 정작 이 부분만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품은 마음도 딱히 평범한 효성은 아닌 관계로. 평범하지 않기로는 둘이 똑 닮았으니 친혈육보다 지극한 것 아닐까요, 의부? 장경은 씁쓸하게 자조하면서 흙바닥을 평평하게 골랐다.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곧 타닥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가 났다. 위풍당당한 대량제국의 고귀한 4황자 전하께서는 속이 깊고 총명했으며, 또한 노숙의 대가였다.

야트막해도 산은 산이었다. 해가 넘어가자 사위가 빠르게 어두워졌다. 색채라고는 밤이 내린 검은색, 불길이 비친 빨간색밖에 남지 않았다. 날이 포근하고 위험한 산짐승이 없으니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멍하니 불을 보거나. 아니면 자거나. 장포를 요 삼아서 바닥에 깔고 누우려던 장경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신발을 벗었다. 각반과 버선까지 내려놓자 따뜻한 모닥불 빛이 일렁거리면서 흉진 발을 감쌌다. 나름대로 튼튼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데도 발이 성하질 못했다. 고된 여정을 증명하듯 살이 여기저기 터 있었다.

이런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테니 중요하지 않다. 장경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오른발을 찬찬히 관찰했다. 수랑이 뼈를 부수고 억지로 굽힌 발가락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구부러진 모양새를 보자니 안회 마을에서 심역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다른 사람보다 약간 굽었으니 틀림없이 황제의 아들이 맞는다고.

낮에 본 비극도 동시에 떠올랐다. 버려진 아들을 알아보는 표식이 된 발의 상처. 발이 기이하게 부은 왕이 받고 태어난, 천륜을 거스른 저주.

장경은 다시 한번 자조했다. 대량 황손은 타고나길 발이 기형이라 했다. 어째, 이놈의 이 씨들은 인도에서 벗어나 금수가 될 운명인가. 그래서 수랑이 내 발을 으스러뜨렸을까. 그 사람은 독을 심고 저주도 하더니, 황가 족보를 꼬아버릴 씨앗까지 남겨주었구나. 비극에서 영웅은 부왕을 죽이고 모비를 범했더랬다. 그러면 나는 뭐지? 부왕 대신 황형을 죽이고, 모비 대신 황숙을 범하고 싶은 놈인가?

4전하께서는 과연 영민하셔서, 이런 생각이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연극과 황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도. 그런데도 일단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니 쉬이 잡을 수가 없었다. 뱃속이 확 들끓었다. 장경은 오른발을 감싼 채 모닥불 앞에서 잔뜩 웅크렸다. 몸은 시체처럼 가만히 있는데 정신이 천 리 밖까지 날뛰었다. 천 리를, 그래, 이대로 발이 붓고 핏줄이 터지도록 천 리를 달려 서북으로 가면 어떨까. 그곳에는 드넓은 대지가 있고, 메마른 땅을 피로 적시는 까마귀가 있고, 까마귀들 앞에는 그 사람이 서 있을 것이다. 부황 대신 황형을 죽음으로 몰아갈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가 알아보아야 하는 사람은…….

헉, 장경이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술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부지불식간에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어렵사리 팔을 움직여 모닥불을 끈 장경은 겨우겨우 눈을 감았다. 언제라고 편하게 잠든 날은 없다지만 오늘은 더 험난할 것 같았다.

 

“……경, 장경!”

장경은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가 몽롱하게 흐렸다. 한낮의 햇빛이 눈을 찌를 듯 환했던 통에, 장경은 무의식적으로 그늘을 찾았다. 그런 낌새를 눈치챘는지, 곧바로 머리 위에 손차양이 생겼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윤이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희?”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어디 아픈 것이냐?”

느릿하게 끔벅거리던 두 눈이 곧 초점을 되찾았다. 장경은 웃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방금 깨어나서 그런지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볕이 좋아서요. 잠시 잠들었습니다.”

“난 또……,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거라.”

“정신이 들었으니 괜찮습니다.”

장경이 손을 들어 찡그린 미간을 문질러주자, 그제야 고윤은 별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고 마음을 놓았다. 인제 장경도 악몽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고윤이 약의 힘을 빌지 않아도 조금 흐릿하게나마 보고 듣는 것처럼.

말 그대로 볕 좋은 초여름이었다. 어제 소나기가 한번 훑고 간 이후 고원(顧園)은 녹음이 짙어졌다. 연못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이 투명하게 비쳤다. 크고 작은 꽃까지 활짝 피었다. 바야흐로 다채로운 색채가 만연한 계절이었다. 그래서 풍경을 구경하며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나왔던 것이, 마당 의자에 앉아서 졸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설명하자 고윤은 손차양을 치우면서 짓궂게 놀렸다.

“너도 설늙은이가 다 되었구나?”

장경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허리가 약간 시큰거립니다.”

물론 몸이 찌뿌드드한 이유는 나이 때문이 아니라, 꿈에서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던 탓이겠지만. 고윤이 그게 내 앞에서 할 소리냐며 헛웃음을 치는 동안 장경은 구부렸던 사지를 쭉 폈다.

의자에서 다리를 내리자 발치에 걸린 신발이 바닥에서 굴렀다. 언제 벗어뒀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어쩐지 꿈에서 모닥불이 유독 따스하더라니, 실제로는 맨발에 닿은 햇빛이었나 보다. 제 발을 한 번 흘끔 본 장경이 물었다.

“자희, 안회 마을에서 지내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어찌 잊겠느냐. 왜, 그때 꿈이라도 꾸었어?”

“그런 건 아니지만요. 심 경……, 계평 형님이 그러신 적이 있습니다. 굽은 발가락을 보고 황손임을 알 수 있었다고요.”

장경은 퍽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두 분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된 날 들었던 얘기라고, 꿈에서 그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나 왠지 생각이 나더라고.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흔들거리는 발은 소년 시절처럼 가벼워 보였다. 고윤은 의자를 끌어와서 옆자리에 앉았다.

듣자 하니, 그래. 처음 장경을 찾아낸 후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았다. 물론 이쪽에서 아이의 정체를 확신한 이유는 발가락 때문만은 아니다. 수랑을, 그리고 수랑과 내통하는 북만인을 보았기 때문이라면 또 모를까. 다만 굳이 사실을 지적해가며 여름날의 밝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고윤은 자기도 신발을 벗어서 의자 옆에 내려두고는 씩 웃었다.

“계평이 그런 말을 대놓고 했단 말이지? 음, 역시 어릴 때부터 조심을 시켜야 했는데.”

“조심이요?”

장경이 의아하다는 눈치로 되물었다. 옆에서 건들거리던 발이 다가오더니 장경의 발가락 끝을 툭툭 쳤다.

“미인이 외간 남자한테 맨발을 함부로 보여서 되겠느냐.”

심역이 여기 있었다면 질색부터 했을 것이다. 고자희, 자네 수작에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라고! 얼굴이 벌게져서 외칠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반면, 정작 희롱당한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면……. 눈을 내리깔면서 소매를 들어 말없이 얼굴을 가렸다. 수줍음을 표현하듯 짙은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의자 다리 뒤로 얼른 발을 숨긴 것은 덤이다. 태평성대를 일궈낸 개혁 군주는 어디로 가고 교태 부리는 미인만 남았는지. 위풍당당한 대량제국의 고귀한 태상황 폐하께서는 옛적부터 변함없이 속이 깊고 총명했다. 그리고, 총비 노릇의 대가가 되셨다.

어찌 되었건, 제집 폐하의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시기는 적절했다. 고윤은 냉큼 여세를 몰아서 원래 물어보려던 얘길 꺼냈다.

“참, 이따가 장터에 극단이 온다더구나. 무슨 연극을 한다고 했는데, 구경이라도 갈까?”

오늘은 제법 늦은 시간까지 큰 장이 서는 날이었다. 전국에 철도가 놓이면서 물류까지 발전한 덕분에 삼일장이나 오일장을 고수할 필요는 없어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날짜에 맞춰 모이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먹거리 장사와 놀이판도 깔리기 마련이다. 이번 장날에 준비된 놀이는 바다 건너 서양에서 전해진 극이었다. 건네받은 전단에는 화려한 필치가 춤을 추듯 적혀 있었다. 익숙한 제목과 모르는 이름들을 훑어본 장경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럭저럭 예상한 반응이었다. 한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온갖 사고를 치며 이름을 날렸던 의부와 달리, 그의 의붓아들은 어려서부터 번잡한 곳을 꺼렸다. 그러면 혼자 나가기도 뭣하지, 다른 일은 없으니 나도 얌전히 있어 줄까. 고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전단을 다시 가져갔다.

그새 사뿐히 일어선 장경은 고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두 발을 제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따스한 손가락이 감싸 쥐는 감촉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길게 늘어뜨린 목소리는 따뜻한 정도를 넘어서 물기가 똑똑 떨어졌다.

“그보다는, 오늘 밤엔 의부께 발을 씻어드리는 시중을 들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아까 얼굴을 가리던 손짓을 아양이라 한다면, 지금 장경이 보내는 시선은 무어라 형용할 수도 없었다. 맨발을 보이는 것은 곁을 내어준다는 뜻이니 금기라 했던가? 고윤은 여태 피상적으로만 알던 상식을 진정으로, 아주 확실하게 이해했다. 앞에서 맨발을 빤히 보며 귀한 보물 대하듯 눈을 빛낸다면 누구든 겸연쩍다고 하지 않을까. 철혈이 흐른다는 대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곁을 내어주다 못해 일생을 준 지 이십 년이 되어가도 그랬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고 씨 사전은 비범했다. 멋쩍음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자리에는 태연자약, 적반하장 같은 말만 적혀 있었다. 고윤은 턱을 살짝 들면서 딱 떨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깨물지나 말거라.”

장경이 온화하게 대답했다.

“예, 바라신다면요.”

“……진심이냐?”

“언제 당신께 허튼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있지. 다른 곳에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런 방면에서는 없다고 못 하지. 그래도 고윤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꼬투리를 잡지 않기로 했다. 장경이 말을 한 번 헛씹을 동안 고윤이 지껄인 헛소리는 다섯 개가 족히 넘어갈 테니까. 그럴 때마다 당황했던 작은 미인이나 정인군자답게 잔소리하는 큰 미인은 귀여웠다. 잘 달랠 수도, 살살 꼬드겨 넘길 수도 있었다. 한데 그 미인이 웃으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면? 이 시점부터는 작전상 후퇴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했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경은 잡았던 발에 신발을 신겨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옷을 툭툭 터는 사이 고윤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성해진 정원수 사이를 걸어가려니 파릇한 풀냄새가 곁을 스쳤다. 담장 밖에서 불어온 산들바람이 흉터 남은 발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꿈을 타고 떠올랐던 기억도 바람결에 흘러갔다. 장경은 평온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소년 시절 보았던 비극에서, 운명은 발이 부은 서역의 왕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해서. 죄짓는 줄 모르면서도 죄를 지어서. 발가락이 굽은 대량의 태상황 역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면 죄업이 산처럼 쌓였으리라. 작게는 기만에서 크게는 살생까지. 그런데도 이 생의 귀착점이 비극이 아닌 이유가 있다면. 아직 삶의 저편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그 모든 괴로움을 당하고도 행복을 말하는 이유가 있다면. 장경은 앞서가는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읊조렸다.

정말로 그런 이유가 단 하나 있다면, 제가 제대로 알아봤기 때문이겠지요. 나의 장군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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