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황혼부터 새벽까지

그리고 여기 당신이 있다

유적 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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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본래 실제로 있었던 일이므로, 아주 오래전에 한 사건이 있었다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탐욕스러운 용이 있었고, 용을 죽인 한 영웅이 있었다. 그는 불살의 몸으로 사랑을 쟁취했으나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죽은 영웅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차츰 흐려졌다. 실제로 있었던 일에서 이야기가, 이야기에서 전설이, 그리고 전설에서 영웅의 이름에 얽힌 설화에 불과해질 때까지……

그리고 여기 먼 북쪽, 사철 안개가 걷히지 않는 숲이 있다.

당신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 묻힐 것이다.

 


아티야는 좁고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작은 창문으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티야는 레인저였기 때문에 자주 낯선 곳에서 눈을 붙여야 했고, 특히나 최근 몇 년 동안은 그렇게 눈을 뜬 아침마다 조금씩 죽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방은 낯설지 않았다. 세 걸음 만에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방이었고, 짚을 너무 많이 채워 딱딱한 침대와 작은 서랍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기엔 지나치게 삭막했고, 최소한의 온기도 없어 보였다. 방보다는 감옥에 가까울 정도로.

이곳에 머무르는 한 아티야에게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았고, 주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티야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묵직하고 서늘한 공기 탓에 용기가 필요했다. 몸을 기울여 창문 밖을 바라본 그는 지금이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이라고 판단했다. 창밖의 풍경은 안개로 가득했고, 그래서 어스름한 빛과 그 너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자다 깼다는 말을 얹기엔 일렀고, 아직 잠들지 않았다고 하기엔 늦었다. 주저앉듯이, 아티야는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티야 베르게르트가 떠도는 것을 멈추고 안개숲에 머무르게 된 것은 그렇게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아티야의 조국은 북부의 제국 라르티스의 정복 전쟁 대상이었다. 애국심이나 사명감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참전했고, 그것을 살면서 내린 선택 중 최악으로 꼽았다. 일련의 사건이 완료되었을 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패전국의 전쟁 영웅이 되어 있었고, 죽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안개숲의 레인저가 될 것. 삶이 형벌이 될 것. 황제는 그를 한번 마주하지 않고도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철저히 필요에 의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더 기만적인 종신형이었다.

하지만 아티야는 그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또는 기억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안개숲을 뒤덮은 음울함처럼, 시간은 희미했고, 감각은 둔했다. 오랫동안, 그는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고, 종래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희미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피에 젖어 눅눅한 회상에 잠기지도 않았다.

아티야는 침대맡의 서랍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단검의 손잡이가 손끝에 닿았다. 가죽으로 된 칼집에서 단검을 꺼내든 그는 무릎 위로 그것을 가져왔다. 이가 빠진 곳 없이 잘 벼려진 날과 핏자국 하나 없이 깔끔한 면이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에 어둑하게 반짝였다. 아티야는 단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단검은 그 단검이 아니다.

이 단검은 남편의 숨을 끊은 단검이 아니다.

이 단검은 전쟁터에서 길어진 머리칼을 대충 끊어내던 단검이 아니다.

이 단검은 오래된 이름을 가진 단검이 아니다.

실수로라도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아티야는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전과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었다. 지금껏 해본 적 없었던 단 하나의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크고 푸른 눈을 가진, 키가 작고 밀짚 같은 금발이 부드러웠던 아이의 이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포로 생활에서 오는 불편함을 둔하게 만들었고, 현실을 흐리게 지웠다.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해 생각하는 한 아티야는 결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말을 배우는 것이 빨랐다. 아빠보다도 엄마를 먼저 말했고, 그다음으로는 ‘예쁘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랑했고, 흉터와 굳은살 배긴 아티야의 손을 향해서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아이답게도 좀처럼 팔다리를 가만히 두지 못했고 그래서 아이의 소매나 웃옷 앞섶, 바지의 무릎 자리는 자주 더러워졌다. 아티야는 그마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소매가 까만 아이와 함께 오랫동안 시간 위에 박제되고 싶었다. 최전선으로 향하기 위해 아이를 남편의 가족에게 맡기던 날, 아이는 아티야를 평소보다 오래 안아주었고 의젓하게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아티야는 아이의 푸른 시선이 오랫동안 자신의 뒷모습에 머물렀다고 생각했다.

아실.

아이의 이름을 정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이름의 뜻은 고통이었다. 아티야가 떨칠 수 없었던 생각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고통. 이름의 뜻이 달랐다면 아이의 삶은 나아졌을까. 더 아름다운 뜻을 가진 이름을 주었다면, 아이의 삶은 짧지 않았을까. 오만하게도 핏덩이를 두고 저를 떠날 어미를 두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선물이라는 뜻인, 자신의 이름을 아이가 갖고, 고통이라는 뜻인 아이의 이름을 자신이 가져갔다면 나았을까. 그런 생각은 손톱 아래 박힌 가시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위가 조용했다. 이 북서부의 안개 낀 땅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리가 모자랐다. 아티야는 흐린 윤곽만 군데군데 자리한 어둠 속에서 단검을 손에 쥔 채 눈을 감았고, 생각했다.

안개숲의 주인이자 친족 살해자. 빌헬름 지크프리트 실베스터에 대해.

 


죄인 아티야 베르게르트가 친족 살해자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안개숲의 초입에서였다. 으스스하구만. 사람 잡아먹는 숲이라지? 조용히 하쇼. 숲 주인이 허락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죄다 헤매다 죽었을 테니까. 포로를 호송하는 병사들이 저들끼리 대화하고 있었다.

아티야는 그들의 옆에 있었지만, 그들은 마치 아티야를 없는 사람 대하듯이 굴었다. 움직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무기물처럼 대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를 것 없었기 때문이다. 옅은 안개가 차츰 무거워졌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조차 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자 병사들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자식뻘의 동생을 죽인 친족 살해자, 작은 소년의 찾지 못한 시체, 안개숲에 들어가지 않는 그 주인…… 그리고 영웅의 이름. 아티야는 사위 짙은 안개 속에서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의 이름, 자신의 이름, 그리고 영웅의 이름에 대해. 그것들은 무거운 안개처럼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고, 손이 묶인 채 말 위에서 끌려가는 도중에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각이었다.

영지 중앙의 저택은 오래되고 묵직한 곳이었다. 화려함 없이 투박했고, 우울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에 익숙해 있던 아티야에게 갑자기 주어진 숲의 고요는 한층 현실을 흐리게 만들었다. 기억은 뭉개져 있었고, 군데군데 날카로울 정도로 선명한 것들만 남았다. 그곳에서 아티야는 처음으로 당신을 보았다.

큰 키에, 가라앉은 녹회색 눈동자나 체형을 가릴 만큼 길고 묵직한 망토보다도, 아티야는 다른 것을 먼저 느꼈다. 전쟁터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그런 눈은 처음이었다. 권태나 무감각함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종류의 반쯤 차지도 못한 채였다. 아티야는 당신을 보았을 때 그토록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아티야를 휩쌌다. 아티야는 희미한 생각의 끄트머리를 밟고 서 있었다. 안개숲에서 죽었다는 소년, 그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잠깐 스쳤고, 아티야는 동시에 어떤 의무감을 느꼈다. 그는 당신이 한 일에 분노해야 했다. 자식 잃은 어미로서, 영원히 그리고 죽어서도 어느 곳에는 가 닿을 수 없을 사람으로서.

그 순간부터 증오는 당위였고, 복수는 속죄였다.

속죄에는 죄가 선행한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아티야는 당신에게 죄가 있는지를 판단해야 했다. 아티야는 요구했다. 소년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당신은 말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자신을 죽이러 오라고. 그래서 아티야는 그렇게 했다.

당신을 죽이는 일은 아티야가 그에 대해 느끼는 무게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당신이 죽고 싶었고, 그가 당신을 죽이고 싶었다면 반드시 밤이 아니어도 그럴 수 있었을 테다.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찾아갈 필요도 없었을 테고, 꼭 그 단검을 들고 갈 필요도 없었을 테다.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고 당신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방 안에 뻔뻔하게 걸어 들어가 당신이 문을 닫게 둘 필요도 없을 테였다. 그 모든 일련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티야는 알았다. 당신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고, 그래서 당신 자신의 죽음을 갈망하고 있었고, 그래서 아티야를 이용해 당신을 기만하고 있었다. 아티야는 그것이 가여워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정했다. 당신이 죽음을 갈망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아티야는 더는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티야는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아이와 다르게 말이 적고 느렸다. 생각은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좀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표정과 눈을 보면 조금쯤 알만도 했다. 당신은 이 북부의 인간치고는 유순했고, 가끔은 레냐프의 억양이 섞인 아티야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한참 동안 칼끝을 피하고 막아내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도 지치지 않았고, 아티야가 카펫에 아무렇게나 누워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다. 아티야가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 당신은 조금쯤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같았다. 당신은 인간이었고, 그뿐이었다. 한순간도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아티야는 좁은 방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박피된 마음을 손에 들고, 당신이 아직 잠들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찾아갔을 때,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티야는 눈을 떴다. 속으로 파고들던 생각을 자신의 안에서 주변으로 천천히 퍼뜨렸다. 뭉치고 멍울진 제 속으로 피부에 와 닿는 모든 것을 끌어들였다. 좁은 방은 그대로였다. 아티야는 눈을 뜨고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서늘하고 묵직하게 얼굴을 감싸오는 안개숲의 공기를 생각했다. 좁은 방과 작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생각했다. 짚을 너무 많이 채워 딱딱한 침대를 생각했다. 그 위에서 뜬 눈으로 흘려보낸 밤에 대해 생각했다. 둔탁하게 빛을 반사하는 단검을, 그것을 손에 쥔 채, 죽은 아이의 부드러운 정수리를 생각하는 자신의 새벽에 대해 생각했다.

아티야는 달빛이 밝은 방 안에서 뜬 눈으로 흘린 밤을 모아다가, 아주 긴 새벽을 만들고 싶었다. 그 새벽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에서, 이제는 고향에 없는 푸른 눈의 아이를 찾고 싶었다. 아이의 죽은 몸이 썩고 부스러질 땅을 찾고 싶었다. 그 땅 위에 작은 무덤을 만들어 발치에 원추리를 심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단 하나만 찾아야 한다면, 이 안개숲에서 찾고 싶었다.

이 북쪽, 사철 안개가 걷히지 않는 숲. 안개숲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당신의 모든 황혼과 새벽은 이곳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당신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 묻힐 것이다.

여기에 당신이 있기에 아티야는 그럴 수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아티야는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행동은 생각보다도 빨랐다. 무릎 위에 놓아둔 단검을 침대 위에 느리게 내려놓은 그는 걸터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좁은 방의 문을 열고 저택의 복도로 나갔다. 익숙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조급하지 않지만 느긋하지도 않게, 그는 당신의 방까지 걸어갔다. 모범적인 레인저답게, 발소리는 내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아 당신의 방문 앞에 선 아티야는 느린 박자로 문을 두드렸다. 당신이 문을 열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동안에는 생각을 차분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새벽의 저택은 조용했고 그래서인지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큰 키와 묵직해 보이는 체구에 비해 당신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숨을 들이쉬는 기척이 한 차례 있었고, 문이 느리게 열렸다. 당신이 등진 촛불 빛이 아티야의 얼굴에 반쯤 드리워졌다. 비스듬하게 잘린 어둠 속에서 그의 붉은 눈이 빛난다.

 

그리고 여기 당신이 있다.

아티야는 잠시 당신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아무 말 없이 한 발을 내디뎌 당신의 방 안으로 들어간다. 당신을 등진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몸을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말을 꺼낼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당신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선다. 당신의 목께로 올리는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지 않다. 그것을 보고 당신은 조금 아연한 얼굴을 한다. 아티야는 당신의 멱살을 잡아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내린다. 활을 다루는 팔의 힘은 그보다 훨씬 덩치가 큰 당신을 잠시나마 휘청이게 한다. 당신의 눈을 들여다볼 겨를도 없이 입을 맞춘다. 여전히 확신은 없었지만, 행동은 생각보다 빠르다. 진득한 입맞춤이 잠시 맞붙고, 이내 입술을 떼고 올려다본 당신의 표정은 형편없다.

그리고 뒤늦게, 당신의 그 눈을 보고, 아티야는 깨닫는다. 희미한 동정과, 지독한 슬픔과,

어떤, 사랑을.

 

이 짓도 이제 그만할까. 밤이 지나갈 때까지 일없이 이야기를 미루는 것 말이야.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변덕스럽고, 또 성질도 급해. 이런 짓은 하룻밤으로 족하거든. 당신 얘기를 들으려고 덤비는 일 같은 건 그만하겠단 뜻이야. 그러니까 그건……

……아니야, 제기랄. 잊어버려!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까, 그냥 나한테 키스해. 그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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