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타는 시간

마지중지 천오초윤

* 103화의 DIY 일주일+220화 언저리의 스포일러를 주의하세요!

* 사실 금에 다른 설정 있을까 봐 무섭지만요... 이러다 스승님이 음공 쓰시면 어떡하지? 만약 원작에서 금 얘기가 더 나온다면 저는 기쁨의 탭댄스를 추면서 이 대박 날조를 타클라마칸 사막 아래 묻겠습니다. 오늘(24년 3월 23일) 324화 기준으로 진짜 묻어야 하는 얘기가 됐네욬ㅋㅋㅋㅋㅋㅋ 아 그래도 고금이 다시 나와서 기쁩니다 작가님 만수무강하소서!

그리고 오늘(24년 3월 30일) 326화 기준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되었습니다. 추풍사가 뭐야 스승님 소상수운 풀로 연주하신다…… 그냥 금 얘기 상세하게 안 나오던 시절의 유물이라고 봐주십시오(기쁨의 탭댄스를 추며

* 그-뭔-십타쿠의-사족: 대사 인용한 영화는 장예모 감독의 영웅입니다. 아니 이게 벌써 20년도 더 됐다니!

* 그-뭔-십타쿠의-사족2: 추풍사에 관해서. 고문진보(古文眞寶)』에서는 이백의 삼오칠언(三五七言)」이라고만 했고, 수록된 구절도 첫 연("-정을 어찌 가눌까")까지입니다. 연 하나("그리움의 문을 열고-") 더 붙은 건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버전...이라고 바이두에서 그러네요.

연 단위로 운율이나 화법이 확 달라지다 보니, 뒷부분은 후대에 추가한 거다 <-> 아니다 이백이 다 썼다!로 의견이 나뉘는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대 추가가 맞는 것 같긴 한데요... 일단 추풍사를 가사 붙여 부를 땐 전당시 버전을 쓴다고 합니다.

삼오칠언 형식 맞춰서 옮겨 보자고 설치다가 시 원문의 의미를 좀 날리고 말았습니다. 프로 번역이 아니니 적당히 넘겨주십사......


단단한 흑단목 금탁(琴桌) 위로 약 향 깃든 기운이 맴돌았다. 나무문 밖으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으나, 조그만 촛불을 여러 개 피워 방안을 밝힌 덕분에 우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빗소리와 따스한 공기가 어우러지니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났다. 금탁 맞은편에는 제자가 단정히 앉아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강렬한 눈빛에 보답하기 위해서일까, 반질반질하게 닦인 칠현금을 앞에 둔 스승이 긴 소매를 살짝 걷었다. 밝은 연갈색 눈동자가 가지런히 놓인 현을 훑었다. 희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천오는 음악은 안중에도 없었다. 또한,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서……. 초윤은 제자의 상태가 살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심서에서 약재 서랍장 옆은 금을 두는 자리다. 이는 사영도, 사현도, 천오도 아는 사실이었다. 어릴 적부터 항상 봐왔으니까. 비록 방치된 상태긴 했지만, 어쨌든 스승의 물건이니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오는 방을 청소할 때마다 꼬박꼬박 금 위에 쌓인 먼지를 털었다. 그런 식으로 관리 아닌 관리를 맡기를 8년, 드디어 천오는 금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다지 바람직한 계기는 아니었으나.

계기가 된 섬서성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초윤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다친 제자 치료하랴, 악몽 꾸랴, 흉수가 침입한 흔적을 보며 심란해하랴……. 일반인이었다면 몸이 둘이라도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다행히 초윤은 애 셋을 키우면서도 몇 날 며칠 밤을 새울 수 있는 무인이었다. 덕분에 제자가 날려버린 울타리를 보고도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아침, 집수리는 스승이 할 테니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도 일러주었다. 수련이든 다른 무엇이든.

막상 천오는 울고 싶던 차에 뺨 맞은 표정을 지었다.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고개를 젓더니 부랴부랴 목재와 공구부터 챙겨왔다. 초윤은 내심 흐뭇하게 여겼다. 일을 시킬 생각은 아니었지만, 꼬박꼬박 돕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기특했다. 뉘 집 아이가 이렇게 착할까? 뉘 집이긴, 우리 집 애지! 기분이 좋아진 초윤은 제자와 나란히 앉아서 흙바닥을 고르고 말뚝을 세웠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이 분주히 움직이는 손을 감싸주었다. 산 너머에서는 간간이 습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에 휘감겼다. 온갖 소동 끝에 맞이하기 좋은, 평화롭고 잔잔한 날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쯤 지난 정오 무렵, 천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승님, 검을 금 안에 둔 연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어찌 묻는 것이냐?”

“다른 이가 쉬이 찾을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금을 고르신 이유가 그뿐인지 궁금하여…….”

글쎄, 초윤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초윤’이 무슨 생각으로 금 안에 검을 숨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하윤은 이럴 때 멋지게 인용할 수 있는 대사를 몇 가지 알았다. 무협에서 칠현금 하면 음공이요, 도(道) 아니겠는가. 초윤은 목을 고르면서 천오를 불렀다. 그러고는 카리스마 넘치는 영화 주인공처럼 살짝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공과 음악의 원리는 같다. 모두 대음희성(大音希聲)의 경지를 추구하기 때문이지.”

“‘큰 소리는 소리가 없다’군요.”

“그래. 속뜻도 아느냐?”

“드러나는 틀은 작위적으로 지은 한계이니, 내가 이룬 경지가 얼마나 크고 높은지 드러내려 애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잘 기억하는구나.”

“……스승님께서 일러주신 구절이니 그러합니다.”

모범생다운 대답을 하면서도 천오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동그란 머리통 속에서 어떤 생각이 돌아가는지 모르는 초윤은 여전히 뿌듯해하고 있었다. 뉘 집 아이가 이렇게 똑똑할까? 너희가 아니었다면 나야말로, 몸에 깃든 기억에서 꺼낼 필요도 없으니 한문 고전일랑 진작 잊었을 텐데.

“하여 악기 안에 두었다. 검을 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도록.”

좋아, 제법 멋졌어. 무협 세계관에도 맞고 교육철학에도 들어맞았다. ‘초윤’의 사고방식이야 어떨지 몰라도, 말이 그대로 나간 걸 보면 오답도 아닌 듯했다. 이쯤 마무리하면 아름답고 교육적인 담화로 끝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이의 호기심은 초윤을 봐주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천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무공은 이미 고강하시니……. 금을 타는 법도 아십니까?”

“금을?”

“아신다면 제자도 배우고 싶습니다.”

천오가 공손히 배움을 청하는 순간 초윤의 머릿속에 객관식 문항이 하나 떠올랐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평범한 교대 졸업생이 칠현금 연주법을 알고 있을 확률을 구하시오. 보기는 무려 세 가지나 됐다.

하나. 칠현금을 아는 것만으로 상식선은 다했다, 전혀 모른다.

둘. 당연히 알지, 사실 난 문묘제례악 광팬이었단다.

셋. 살려줘, 약선!

학구열을 불태우는 학생은 귀엽다. 동시에 선생님의 책임감도 막중하게 만든다. 천고 기재를 도맡았다는, 다시 없는 책임을 맡은 스승은 가히 전광석화에 가까운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고민은 순식간에 끝났다.

“수리는 이만하자꾸나. 정리하고 방으로 오렴, 가르쳐줄 테니.”

“예, 스승님!”

대답하는 목소리가 기운찼다. 그렇게 음악이 배우고 싶을까? 하긴 어릴 땐 세가에서 귀한 도련님으로 자랐으니 풍류도 접해봤겠지. 아이가 했을 법한 생각을 헤아린 초윤은 흰 무명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사뿐사뿐 가볍게 떠나가는 발걸음 뒤로 검은색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밖에서 천오가 공구를 치우는 동안, 방에 들어온 초윤은 반상을 금탁 삼아서 악기를 놓았다. 천만다행으로 ‘초윤’이 금을 은폐용 소품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기억을 뒤져보니 그럭저럭 쓸만한 지식이 튀어나왔다. 약학만큼 상세하지는 않으나 초급 수준의 연습곡까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연주법을 가르쳐본 적은 없지만, 이거야 항상 해결해온 일 아닌가. 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까 삼지선다 문제에서 세 번째 보기를 고르길 잘했지. 천오의 기척이 방문 밖에 섰을 무렵에는 수업 계획까지 무난히 세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손 모양부터 잡아야 하는데.

“육극(六極)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는데, 갑자기 왜 또 동양 철학의 이해를 찍냐고.

약선은 진짜 이렇게밖에 말이 안 나와? 금 타는 법을 떠올리며 느꼈던 감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 초윤은 머릿속 한편으로 비명을 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오에게 열심히 사과했다. 취미 레슨 시작하러 왔는데 냅다 정론부터 들이밀어서 미안하다, 아가. 재미없지! 재미없는 자리는 나갈 수라도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나갈 곳도 마땅치가 않구나! 소리 없이 엉엉 우는 초윤과 달리, 다소곳하게 앉은 천오는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여섯, 극점……. 방향을 이르는 말 같습니다.”

“맞다, 공간을 인지하는 방법이지. 상하, 좌우, 전후, 이 여섯 극을 합치면 천지사방이 된다. 금을 탈 때는 손안에 육극을 담아야 해. 음공을 익히지는 않더라도 마음가짐만은 그리하거라.”

쉽고 친절한 설명을 포기한 초윤은 시범부터 보여주기로 했다. 어깨는 반듯하게 펴고 손바닥을 오목하게 판다. 여기서 금 위에 얹은 손가락이 쭉 뻗어 나가도록 두면 손 전체가 원을 그린다. 구체를 잡은 것처럼. 언젠가 들었던 듯한 설명도 기억해내서 그대로 읊어주었다. 귀한 찻잔을 쥐었다고 상상해 보렴. 아니면, 네 손안에 참새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새가 도망치지 않게 잘 잡아야겠지? 그렇다고 힘껏 짓눌러 죽여서도 안 된다.

말을 이어가던 초윤은 무심코 천오를 보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천오는 분명 스승을 성심껏 따라 했다. 하지만 손에 힘을 과하게 주고 있었다. 물론 처음 해보는 손짓이니 틀린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찻잔과 새를 예시로 드는 이유도 직관적으로 알아듣고 힘을 빼라는 의미건만……. 초윤은 아이의 정서가 조금 독특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스승에게서 배울 열정은 가득해도, 그 열정이 기물이나 생명을 향한 사랑까지 닿지는 않았다. 손안에 들었을 상상의 동물을 배려해 자세를 고쳐본다는 생각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다.

인성 교육은 꾸준히 이어나가야 하는 일이니 일단 제쳐두자. 어떻게 알려주면 이해가 쉬우려나. 천오가 몸가짐을 삼갈 대상이 뭐가 있을까? 다시 한번 비상한 속도로 머리를 굴린 초윤은 금방 답을 하나 찾아냈다.

“천오야, 네 손안에 나를 넣었다고 생각해 보아라.”

“알겠습니다. 제 손안에, ……예?”

눈을 휘둥그레 뜬 천오가 홱 바라보았다. 참새 운운할 때보다 훨씬 반응이 빨랐다. 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나를 소재로 쓸 걸 그랬네. 적당한 설명법을 찾아냈다고 여긴 초윤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조금 뻔뻔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네 손에 들어가도 그리 힘주어 누를 것이냐?”

“아니요, 제가 어떻게……. 아니, 아닙니다!”

“아주 풀어도 안 되지. 놓치면 어찌하려고.”

“저, 저는, 스승님…….”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검을 잡을 때처럼 자연스레 하면 된다.”

과연 자기를 내세운 것이 정답이었나 보다. 눈에 띄게 허둥거리던 천오는 곧 완벽한 자세를 잡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아이를 보며 초윤은 속으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아이고 내 새끼, 음악도 천재구나!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복복 쓰다듬으며 활짝 웃어주고 싶었다. 당연히 이 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진솔한 칭찬을 건네는 정도도 어려운 마당에 뭘 더 바랄까. 대신 초윤은 천오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손바닥 중앙을 꾹 눌러주었다. 힘은 여기에만 주면 된다, 그렇게 일러주면서.

헛숨을 쉰 천오가 고개를 팍 숙였다. 검은색 앞머리가 앞으로 확 쏟아져서 아이가 어떤 표정인지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지, 잘하고 있었는데? 급히 안색을 살피려니 천오가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점심때 먹을 쌀을 미리 안쳐뒀는데 너무 오래 불린 것 같다고. 막 생각이 났으니 바로 가보겠다고. 초윤은 천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본디 감정 표현이 많은 아이가 아닌데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손을 찔러주니 기억났다는 건, 하얀 옷을 보고 쌀알을 연상하기라도 한 걸까…….

어차피 연습용 악기가 더 없어 진도를 나가기도 곤란한 참이었다. 초윤은 뜻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천오가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경첩 맞물리는 소리가 나고, 방문이 스르르 닫힐 때까지도 그랬다. 움직이는 기척을 보니 문을 닫고 나간 후에는 그대로 밥솥 앞까지 뛰어간 것 같았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초윤은 턱을 괴면서 눈을 찌푸렸다. 내가 천오를 너무 부려먹었나? 아무리 한국인은 밥심이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아니다, 여기서는 금강산이 아니라 두망산이구나. 아무튼 내가 은연중에 부담을 준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애가 저렇게 밥 생각에 쩔쩔맬 리가 없지 않나. 초윤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과거 행실을 되짚기 시작했다. 주방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던 시점까지 거슬러 오르며, 아이 시점에서 자기가 어떻게 보였을지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초윤은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오늘 아침은 내내 울타리를 고쳤고, 그러다 바로 들어와 금을 꺼냈다. 그 사이에 쌀을 건드릴 틈은 없었을 텐데?

뭐, 우리 애가 이런 문제로 거짓말할 성격도 아니고. 어련히 사정이 있겠지. 밥을 하러 갔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든, 불이 나지 않는 한 여기서 기다려주는 편이 좋겠다. 지극히 편파적인 결론을 내린 초윤은 천오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기로 했다.

한편, 겸손히 스승 앞에서 물러 나온 천오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있는 힘껏 주방으로 질주했다. 이런 식으로 이름값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건만, 날 듯이 달리는 모양새가 마치 꽁지깃 빠지도록 도망치는 새 같았다. 천오는 주방으로 뛰어 들어와 문을 급히 닫은 다음에야 숨을 쌕쌕 몰아쉴 수 있었다. 잠깐 달렸다고 숨이 찬 것은 아니다. 문제는 조금 전에 다른 곳에서 생겼다. 정확하게는 스승이 다가온 시점에.

스승이 움직이자 금탁 너머로 약초 향이 번졌다. 천오에게 무엇보다도 익숙한 냄새가 밀려와 온몸을, 온 핏줄을 훑었다. 그때부터 천오는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무아지경과는 다른, 외부 공간과 시간이 전부 녹아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 스승님께서 이 손안에 천지사방을 담으라고 하셨지. 세상이 오롯이 여기 있다면 바깥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스스럼없이 중심을 짚어주신 일도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계의 중심에 달리 누가 있겠는가? 스승을 위해 세상에 공간을 내기도, 억누르지 않고 모시는 것도 괜찮았다. 바라 마지않는 일이니까.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한 번 더 말씀하셨다. 내가, 서문천오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당신이 내 손안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반듯하게 앉은 스승은 늘 그랬듯 평온해 보였다. 쉽게 가르치느라 일러준 이야기가 듣는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흰 손을 뻗어 손바닥을 눌러줄 때도 더없이 담담했다. 아, 당신은 모르실 것이다. 영영 모르시겠지. 당신의 가르침이 어떻게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는지.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실 수 있는지.

스승은 현명하게도 항상 불을 조심하라며 주의를 시키셨건만, 결국 사고가 났다. 살갗 너머로 전해졌던 온기를 장작 삼아 불을 지르자 제정신이 활활 탔다. 불꽃의 색은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맸다. 동시에, 깨끗한 무명옷처럼 새하얗기도 했다. 천오는 손을 동그랗게 쥔 채로 오래도록 서서 뱃속을 휘젓는 불길을 느꼈다.

그러다 뒤늦게 핑계로 댄 밥이 생각났고, 정신없이 요리를 하다가 정말 솥을 태울 뻔한 바람에 스승이 득달같이 달려온 것은 살짝 나중의 일이다.

 

그날 이후로도 초윤은 이따금 금을 가르쳤다. 주로 검법이나 약학 진도가 너무 빠를 때였다. 마을로 내려가서 천오가 쓸 악기와 금탁도 새로 사 왔다. 금 두 개를 나란히 두고 시범을 보일 때마다 뻣뻣하게 굳는 모습이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건 천재는 천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오는 초윤이 얕은 기억에 의존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졸업했다. 마지막으로 알려준 연습곡인 추풍사(秋風詞)를 천오가 완벽하게 연주해낸 가을밤, 잔잔하게 퍼지는 빗소리와 함께 칠현금 수업은 끝이 났다.

 


 

고급스러운 객잔의 방. 금탁을 놓고 앉은 악사가 제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악사를 찾아온 남자는 대뜸 칠현금으로 곡을 하나 연주해달라고 했다. 뜬금도 없고 예정에도 없던 방문객을 맞게 되어 황당했지만, 이렇게 존재감 넘치는 사람이 부탁하는 노래가 무엇일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검은색이 짙은 무복, 마찬가지로 칠흑 같은 머리카락. 주변의 빛을 빨아들여 한없이 가라앉힌 듯한 그늘. 넘쳐 흐르는 어둠 덩어리를 두고 악사는 잠깐 넋을 놓았다. 해서 얼떨결에 수락했는데……. 정작 핏기없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기초적인 연습곡 제목이었다.

“그것이, 저……. 정말 그 곡으로 괜찮으십니까?”

“연주할 수 없습니까?”

“아뇨, 합니다! 해야죠, 암요.”

아무려면 어떠랴. 원래는 자잘한 방해꾼을 잡으려고 친 그물이지만, 알아서 대어가 낚여 들어왔으니 좋은 일이다. 악사는 동료들이 준비를 마칠 시간을 벌어주자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금을 탔다. 본분을 다할 겸 멋들어진 가사도 곁들였다. 이상할 정도로 사위가 고요한 덕분에 노랫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렸다. 남자는 냉담한 표정으로 오르내리는 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연주가 끝나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없는 가사를 붙였습니까?”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살벌했다. 악사는 과장스레 울상을 지었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소협. 이 곡에 붙이는 노랫말이 원래 이런 것을요.”

“그렇습니까, 몰랐군요. 가사까지는 배우지 못해서.”

“예에……. 뭐, 가르치는 분마다 다르긴 하니까요. 금만 연습시키는 분도 계시고, 금가까지 같이 가르치는 분도 계시고.”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몸을 돌렸다. 딱히 더 청하고 싶은 곡은 없는 눈치였다. 악사도 붙잡지 않았다. 신호는 이미 보내 두었다. 시간까지 충분히 끌었으니, 방문이 열리는 순간 만사가 정리될 것이다. 악사는 기쁜 마음으로 남자가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

다만, 상대는 쉬이 봐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쥐었던 문 손잡이를 놓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한데 말입니다.”

“예, 예?”

“그리움을 말하는 당신은, 그리움이 무엇인지 압니까?”

순식간에 남자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암흑 속에 든 것은 바닥없는 낭떠러지였다. 시커먼 시선이 뱀처럼 휘감긴 찰나, 악사는 직감했다. 빠져나갈 수 없겠다.

애초에 감당하지 못할 상대였다. 사람이 무슨 수로 저승사자 가는 길을 막겠는가. 바깥에 있어야 할 동료들은 벌써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악사는 금에서 손을 떼며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마교와 손잡은 자들이 반쯤은 조롱을, 반쯤은 공포를 담아서 부르는 별호를. 말이 끝나자마자 빛이 날아들었다. 흑무상이라는 이름답게 온통 검은색 일색이건만, 얄궂게도 검광만은 하얬다. 일곱 개의 현이 일제히 끊어졌다.

객잔에서 유일하게 소란했던 방이 조용해졌다. 동시에 건물 전체가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검날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똑, 똑, 똑 들려왔다. 묻은 피를 털어낸 남자는 객잔의 방마다 겹겹이 씌웠던 차음막을 거두었다. 이제는 어디서 누가 엿들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목 잘린 강시 무리와 내통자들이 널브러진 아비규환에서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검은 까마귀뿐이었으므로.

문득 창문 바깥을 바라보니 보름달 주변으로 달무리가 둘려 있었다. 흐리게 번지는 빛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노래를 마지막으로 배운 날도 가을비가 왔었지. 금을 탈 때 손에 무엇을 담으라고 하셨더라. 놓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천오는 백홍을 검집에 넣고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물론 비상한 머리는 무엇 하나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러나, 떠올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가르쳐준 이는 곁에 없고 새는 둥지를 잃었다. 회한도 추억도 지금은 사치다. 천지사방이 중심을 되찾거든, 그때는 들려드릴 수 있으리라.

천오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단단한 손으로 문을 열고 다시 세상으로 들어섰다. 붉은 낙엽처럼 깔린 피바다를 넘어, 달이 지는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희미한 곡조를 읊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秋風淸

秋月明

落葉聚還散

寒鴉棲復驚

相思相見知何日

此時此夜難爲情

 

入我相思門

知我相思苦

長相思兮長相憶

短相思兮無窮極

早知如此絆人心

還如當初不相識

 

가을 바람 소슬해

가을 달빛 환한데

낙엽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깃든 까마귀는 놀라 퍼덕이네

서로 그리운 우리는 언제 다시 보려나

오늘 이밤에 애달픈 마음 어찌 가눌까

 

그리움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리움의 고통 이제 알겠구나

그리움 길면 추억도 길게 이어지나니

그리움 짧다 하여도 끝은 없으려니와

이토록 마음 얽매일 줄을 알았더라면

애초에 알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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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민첩한 앵무새

    안녕하세요 선생님... 드넓은 사이버세상에서 따악 324가 나온 다음 날 한 줄기 빛과 같이 선생님의 천오초윤을 만날 가능성이란 어떤 크기일까요... 이런 것이 바로... 운명...? 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좋아서 먹던 고구마 다 내려놓고 데굴떼굴 구르고 있어요 아니 초윤과 와기천오가 나란히 앉아서 금 타는 모습과 초없천오가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를 알아버리게 된 모습을 이렇게 대치시키시다니ㅠㅠㅠㅠㅠㅠㅠ절경이구요 장관입니다 추풍사 생각하면서 다시는 이 손에서 초윤을 놓아주지 않겠다 곱씹는 흑무상 너무 좋아서 고구마 열 개 더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진짜 짱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널뛰는 춘분 건강히 나시고 하시는 일마다 복이 넘치길 기원합니다 선생님은 짱이에요...ㅠ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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