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하는 시간

마지중지 천오초윤

* 사실 메타적으로는 팬들이 생일 셈하기 쉽게 양력이겠지만요() 어쨌든 고금 얘기 덕분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원작이 실직시키기 전에 일단 동인 날조를 해야 한다! 나중에 또 탭댄스 추면서 사막에 묻더라도!!

* 진지한 스포일러는 없지만, 대신 중간에서 해피 엔딩 이후로 냅다 점프하기 신공을 선보입니다. 이런저런 cp적 암시도 합니다.

* 그-뭔-십타쿠의-사족: 후반에 인용된 시구는 당나라 때 시인 유희이(劉希夷)의 「대비백발옹(代悲白髮翁)」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원문은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손종섭 선생님 번역을 인용했습니다.

* 그-뭔-십타쿠의-사족2: 계화의 꽃말은 나라마다 다르긴 한데 한국에서는 유혹, 첫사랑이랍니다. 중국에선 永伴佳人(미인과 영원히 함께함), 仙客(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동식물)…쯤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빗은 한국 중국 불문하고 애정의 증표로 쓰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33화에 머리 빗질용으로 쓰인 계화유는 참 로맨틱한 소품이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면 코 끝에 감도는 냄새부터 달라진다. 사시사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두망산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나뭇잎에서는 평소보다 짙은 풀내음이 나고, 무성해진 수풀 사이로는 살짝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산을 내려갔던 사영과 사현이 전해주기를 마을에서는 논매기가 한창이라고 했다. 바야흐로 계절은 여름이었다.

산 아래에서 돌아온 남매를 맞이한 초윤은 소리 없이 눈짓을 보냈다. 아이들도 장터 이야기를 조잘조잘 떠드는 동시에 조용히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스승과 함께 비밀 작전을 꾸미기가 퍽 재미있다는 눈치였다. 키득거리던 둘은 무심서 뒤편에서 새까만 머리카락이 보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소리를 죽이고 손에 쥔 물건을 숨겼다. 초윤도 의미심장한 시선을 거두었다. 뒷마당에 약초 널어두기를 마친 천오가 초윤 곁으로 다가왔을 때쯤에는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싹 사라지고 없었다. 초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서 아이들에게 할 일을 새로이 나누어주었다. 조그만 발들이 가볍게 움직이자 꿀처럼 고인 햇빛과 옅은 그늘이 춤추듯 살랑거렸다. 고개를 들어보면 해가 길어진 하늘이 산마루 너머까지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 바야흐로 계절은 여름이며 절기는 소서(小暑)를 막 지났다. 천오가 무심서에서 맞이하는 열 살 생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초윤으로서는 절대 허투루 넘어갈 수 없는 날이었다. 정확하게는 정하윤의 현대인 자아가 넘길 수 없었다. 미역국을 끓이거나 폭신한 케이크에 양초를 꽂을 순 없더라도 기념은 해야지. 처음 생일을 묻고 조촐하게나마 챙겼을 때, 사영은 눈을 휘둥그레 떴더랬다. 사현 차례가 되었을 때는 아이가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초윤’은 본디 남매의 머리도 빗겨주지 않고 지냈던 사람이다. 그런 인사가 애들 생일을 기억이나 했을까.

하지만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쉽다. 이제 아이들은 돕겠다고 나설 정도로 생일 축하라는 개념에 익숙해졌다. 사영과 사현은 생일상을 어떻게 꾸미면 좋을지 의견을 냈다. 만사에 무덤덤한 천오도 초윤이 떡을 찌느라 바쁘다 싶으면 이번에는 어떤 약초를 넣으실 거냐고 묻곤 했다. 초윤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진지하게 대답해 주고, 밤 동안 건의 사항을 착착 정리했다. 잠들지 않아도 쌩쌩한 무림 고수의 몸에 몇 번째인지 모를 찬사를 보내면서.

그렇게 소서 전부터 궁리한 끝에 떠올린 것이 서프라이즈 파티였다. 도무지 무협지식 어휘로 요약할 수 없어서 장황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다행히 사영과 사현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직 천오에게 경계심을 약간 남겨둔 사영조차도 바로 그 막냇동생을 속여서 놀라게 한다는 발상이 마음에 드는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남매가 적절하게 천오의 주의를 끌어준 덕분에 부엌에서 보글보글 끓이는 탕국의 존재도 저녁 직전까지 숨길 수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서프라이즈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결론부터 말해서, 큰 수확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음식이 저녁상에 올라와도, 날짜를 모르는 척 굴던 사형제가 선물을 건넬 때도 천오는 담담했다. 고맙다는 인사만 예의 바르게 올릴 뿐이었다. 장에서 사온 두루주머니를 건네준 사영이 피식 웃더니 손사래를 쳤다.

“천아가 이럴 줄 알았어요, 스승님. 현아라면 감동받아서 울었을 텐데.”

“안 울어……,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어언제에? 세본다?”

“하, 하, 하지 마!”

아이들은 가볍게 티격태격하며 떡을 잘랐다. 진지하게 시작한 다툼도 아니지만, 과열될 기미가 보이거든 바로 중재해 줄 스승이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웃음소리와 기분 좋은 온기가 몽실몽실 떠다녔다. 극적인 반전은 사라졌어도 식사 시간은 화기애애하게 지나갔다.

밥을 먹고 그릇을 정리하니 슬슬 어둑한 시간이었다. 남은 글공부를 끝낸 사영과 사현 남매는 자러 들어갔고, 방안에는 초윤과 천오만 남았다. 천오는 항상 그랬듯 침착한 표정으로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지나치다 싶도록 무던했다. 양육자로서도, 서프라이즈 파티 기획자로서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이런 행사에 별로 감흥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전부터 눈치를 챘나? 이불에서 야무지게 먼지를 털어내는 손길을 관찰하던 초윤이 넌지시 물었다.

“음, 천오야. 이번 생일상은 마음에 들지 않더냐?”

“아니요, 아닙니다. 매번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천오가 속사포처럼 대답했다. 아니, 여기서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말이야…….

“인사를 받자고 묻는 말이 아니다. 타이르자는 것도 아니고. 다음 방향을 잡는 데 참조하려는 것뿐이니 긴장할 필요 없다.”

“그러시다면, 저…….”

천오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짧게 끝날 이야기가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마냥 세워둘 수도 없지. 초윤은 이불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선 천오더러 가까이 앉으라고 손짓해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천오가 침상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는 동안 초윤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려니, 생각에 빠졌던 천오가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전부터 궁금했습니다만, 생일을 축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윤이 조금 놀라서 천오를 바라보았다. 무심서로 오기 전에는 챙긴 적이 없나? 무심서에 달력이 없는 거야 그렇다 치자. 깊은 산에 틀어박힌 약초 오타쿠가 날을 모를 수도 있고, 집에 일상용품이 모자랄 수도 있지. 하지만 서문세가가 무너지기 전만 해도 천오는 가문의 적자였다. 지역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던 세가에서 설마 달력 사는 돈이나 식구들 대접을 아꼈을까?

“어렸을 때는 이런 인사를 나누지 않았느냐?”

“가문이나 주변 어른의 환갑연 같은 것은 성대히 치렀습니다. 저도 날이 돌아오면 인사를 받았지요.”

천장을 응시하면서 과거를 되짚던 천오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털어놓았다. 어차피 매해 돌아오는 날짜고, 글자 그대로 살아있는 날을 따지자면 숨 쉬는 하루하루가 다 생일일 텐데 똑같지 않으냐고. 실은 세가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가문 어른들께선 무어라 하셨고?”

“세상 빛을 본 것 자체가 기쁜 일이니 축하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네가 납득하지는 못한 모양이다만.”

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무엇을 바라서 성취했다면 축하할 일입니다. 그만한 예법은 어른들도, 스승님께서도 가르쳐 주셨으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탄생은……. 태어난 이가 바란 일도, 노력해서 이룬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초윤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오, 중학생 때 할 법한 사고방식이 벌써 나오다니. 천재는 사춘기도 빨리 오나?

마땅한 도리라고 호소하기에는 천오가 타고난 공감 능력이 특출났다. 그렇다고 존재를 무조건 긍정하라는 식의 감상을 밀어붙이기도 곤란했다. 자기 존재가 멸문의 구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 줄 알고. 그간 천오가 악몽에 시달리는 빈도가 줄기는 했으나, 예민한 주제를 두고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명색이 교육자인데 말도 안 되지. 그러면 어떻게 가르쳐야 좋으려나? 초윤은, 정확하게는 정하윤은 해답을 찾아서 21세기 고등교육이 알려준 지식을 뒤지기 시작했다.

길 가던 현대인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고 하자. 생일은 특별한 날인가요? 당연히 그렇다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챙기는 방식이 각자 다를 순 있다. 특별하다고 해서 꼭 좋은 날이라는 법은 없다. 그렇더라도 생일이 무언가 다른 날이라는 전제 자체는 상식으로 통한다. 다만, 엄밀히 따져서 이런 상식이 자리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족이나 왕족, 귀족은 논외로 친다. 높으신 분들이 축제를 여는 기념일은 의미가 또 다르니까.

어쨌든, 기득권층을 제외하고 평범한 개개인이 생일을 축하하는 전통은 빨라야 19세기부터 생겨났다. 그전에는 왜 챙기지 않았을까? 책력 같은 지식과 물자가 널리 유통되지 않아서? 독립된 개인이라는 정체성부터가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서? 근본적인 원인은 훨씬 단순하다. 사람들이 대개 단명했던 탓이다. 신생아가 1년도 안 되어 죽는 일 역시 예사였다. 중세 때만 해도 아기 셋이 태어나면 그중 하나는 첫돌을 넘기지 못했다. 현대에 통하는 생일 축하 관습은 산업화 이후에 증가한 평균수명, 겸사겸사 만연해진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의 합작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고.

초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시대상이 어긋났다는 문제를 제치더라도, 교육과정부터가 안 맞잖아! 범위를 좁게 잡아도 세계사랑 사회학, 문화인류학이 들어가는 얘기다. 딱 봐도 초등학교에서 가르칠 수준이 아니었다. 가볍게 다뤄도 고등학교며, 깊이 들어가면 대학원 아냐? 아무리 애가 명석해도 초등학생을 냅다 석박 코스로 보내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심지어 이러는 나도 알음알음 아는 정도지, 정치하게 말하라면 자신이 없는데! 초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불꽃 튀는 내적 토론을 벌였다. 언제나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는 몸만 아니면 벌써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었을 것이다.

마침내 머릿속 토론장에서 극적인 협상안을 끌어낸 초윤은 어름어름 입을 열었다. 찰나를 조각조각 나누어 관조할 수 있는 현경의 경지를 총동원한 덕분에 침묵한 순간이 길지는 않았다.

“정 모르겠거든 사람들에게 핑계를 준다고 생각하려무나.”

“예?”

천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윤은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당장은 주위에 사람이 적어 실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나 앞으로 네가 강호에 나가거든 친밀한 이가 생길 게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이, 적대하는 이……. 가까웠다가 소원해지는 이도 생길 테지. 그럴 때 생일은 유용한 구실이 된다. 멀어진 사람이 관계를 개선하고자 할 때 자연스레 인사를 전할 핑계로 좋지 않겠느냐? 친지라면 애정을 표하기에 적절한 기회가 되고. 생일뿐만 아니라 다른 기념일도 원리는 비슷하다. 날짜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부여한 의미가 중요하지. 이런 식으로 의미를 둔 시간, 켜켜이 쌓은 인정, 가깝거나 먼 관계들이 너를 사람으로 만들어 준단다.”

이쯤 하면 적당히 대답한 것 같았다. 실리주의와 인문주의를 반반 섞은 모양새가 됐으나 아무려면 어떤가. 천오야, 원래 밥집에서도 잘 모르겠으면 반씩 섞어 주문하는 거야. 오죽하면 반반 무 많이란 말이 있겠어. 물론 네가 한국식 치킨을 알 리는 없지만……. 초윤은 눈을 내리깔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열심히 주워섬겼다. 왠지 엄숙해진 분위기가 멋쩍어서 손도 다시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그때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가 초윤을 불렀다.

“그러면, 스승님.”

새까만 눈 한 쌍이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침상 곁을 밝히는 주홍색 등잔불이 비쳐서 그런지, 무표정한 얼굴에도 옅게나마 따스한 빛이 돌았다.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분은 스승님이시군요.”

초윤은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그, 그게 그렇게 되나? 나만 꼽기엔, 저기 건너편 방에 네 사형제도 있지 않니?

점잖게 타이를까 고민하던 초윤은 금방 마음을 접었다. 아직 시야가 좁은 어린아이 아닌가. 나중에 다 자라면 보는 세상도 더 넓어지고 챙기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초윤은 어른답게, 까마귀가 하늘을 자유로이 누비도록 날려 보내야 할 터다. 기껏 키웠더니 거리를 두어서 섭섭하다고 투덜거릴 날이 오겠지. 스승님 스승님 하고 종종 따라다니는 지금이 귀여운 시절인지도 모른다.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힘껏 누려야겠다. 초윤이 한쪽 팔을 뻗자 뜻을 알아들은 천오가 냉큼 몸을 가까이 붙였다. 마음 같아서야 둥개둥개 얼러 안으며 생일 축하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지만, 이 몸으로 그만한 표현이 가능할 리는 없었다. 무뚝뚝한 육신과 타협하는 데 익숙해진 초윤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조용조용 쓰다듬었다. 말 없는 스승을 대신해 귀뚜라미가 창밖에서 찌르르 울며 다정한 마음을 전했다. 손길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은은한 약과 꽃의 향기가 났다. 천오는 마음에 쏙 드는 생일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살짝 웃었다.


해마다 해마다 꽃은 같아도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달라……. 과연 옛 시인이 노래한 시구에 틀린 곳이 하나 없었다. 매년 절기는 똑같이 돌아오건만 무림 사람들은 완전히 바뀌었다. 천오와 초윤도 달라졌다. 단적으로, 작은 몸집이 품에 쏙 들어오던 천오는 스승을 다 가릴 정도로 커버렸다. 초윤은 침상 옆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제자 앞에서 표정을 숨기지 않게 되었다. 미미하게나마 못마땅한 티를 내가면서 물어볼 수도 있었다.

“천오야, 처음부터 제대로 알려주었다면 좋지 않았겠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문하신 일에 거짓으로 알려드린 적은 없습니다.”

“네 생일 말이다. 소서 나흘 후가 아니라 복월(伏月) 언제로 기억하라고 짚어주지 그랬느냐. 절기는 태양의 위치가 기준이라, 여태 내가 매해 날짜를 바꾼 셈이 되었구나.”

깜빡했다. 무협지 속 세계는 음력을 쓰지만, 24절기는 양력으로 계산한다는 걸. 제자들이 어렸을 때는 달력에 아쉬울 일이 없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산속에서 애들 키우랴, 낯선 세상에 적응하랴 정신이 없던 탓에 무심코 넘어간 면도 있다. 한자어니까 대충 괜찮겠거니 하고. 그러나 산 아래 세상에 개입하고 온갖 위기와 난리 통을 거친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니겠으나, 현대의 바깥세상으로 치환하자면 사회는 양력으로 돌아가는데 애들 생일을 꼬박꼬박 음력으로 치는 느낌 아닐까. 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일인가? 물론 ‘약선’은 고리타분한 어르신이 맞다. 그냥 어르신도 아니고 세기 단위로 케케묵은 골동품이다. 하산한 지 오래인 제자들도 그래서 별말 없이 넘어가 주었으리라.

다만, 요즘 초윤은 나이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정확하게는 ‘내 연배의 절반도 안 되는 애랑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같은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재깍 머리를 비웠다. 예전 같으면 알맹이는 나이가 다르다고 변명했을 텐데, 온전히 동화된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연배의 반이 다 뭔가? 반의반도 안 됐지. 그리고 바로 이런 사고가 더 이어지기 전에 제동을 걸어야 했다. 초윤이 무의식중에 찌푸린 미간을 살살 문질러 펴던 천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날짜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정하는 의미가 중하다 하셨지요.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분은 스승님이십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 의미를 두신 날이면 언제라 한들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매해가 아니라 매달 바꾸셔도 됩니다.”

“과하다.”

“과장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하다는 것 아니냐…….”

“하면 스승님께서도 알려 주십시오.”

“……내 일이라면 네가 더 잘 알 텐데, 무엇이 더 궁금해서?”

“탄신일을 알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저희 생일만 챙기시지 않았습니까.”

어릴 때는 못 했지만 인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생일상을 준비할 수 있다, 전부터 아쉬워하시던 마른미역도 찾아오겠다, 거창한 기념이 싫으시거든 소박하게 해도 좋다, 달리 원하시는 방향이 있다면 부디 말해달라……. 말릴 새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천오가 커다란 몸을 옹송그리더니 초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가슴팍에 기대 살짝 볼을 비볐다.

“제게도 핑계는 주셔야지요.”

이건 최근 들어 천오가 스스로 터득한 비기였다. 무척 간단한 동작이지만 초윤에게 발휘하는 효과는 발군이었다. 얼마나 뛰어난가 하면, 어지간한 어리광은 죄다 들어주게 됐다. 미무검의 미무(瀰霧)를 미무(媚嫵)로 바꾼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천오가 안에서는 새장 속 꾀꼬리인지 몰라도, 밖으로 나가면 시커먼 저승사자로 통한다는 진상은 잠깐 외면하고. 얘는 어쩌다 너른 물에 아득히 흐르는 안개를 아리땁게 아양 부리기로 바꿨을까. 처음 무공을 가르칠 때 어떻게 변형하든 상관없다고 풀어줘서 그런가. 역시 내가 원인인가? 여지를 준 내 탓이겠지? 사제 사이에 색다른 수식어가 몇 가지 덧붙은 이래 초윤이 매일 자문하는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넘어가 줘야겠다. 초윤이 손끝으로 귓불을 톡톡 치자 뜻을 알아들은 천오가 냉큼 시선을 맞추었다. 마음 같아서는 예전처럼 얼러 안고 싶지만, 힘껏 웅크린 채로도 품에 넘치는 성인이 되었으니 가능할 리 없었다. 침상에서 이래저래 굴러다니는 상황과 타협하는 데 익숙해진 초윤은 천오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용조용 일러주었다. 과거에 파묻혔던 육신과 바깥을 부유하던 정신이 언제부터 온전한 현재를 보기 시작했는지. 초탈한 선인으로 불리던 이조차 속세로 끌어오고, 땅에 발 디딘 사람으로 살게 하는 인정과 관계가 무엇인지. 초여름 밤 소슬바람은 귀뚜라미 소리를 빌리지 않고도 서정을 속삭였다. 너울이 일듯 쏟아지는 흰색 머리카락에서는 익숙한 계화 향기가 났다. 천오는 예상하지도 못한 생일 선물을 한아름 받은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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