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에서 보내는 새해
20240205 연성교환작: 당근 라페 샌드위치 1만자(2천자 추가)
도로 위에서 보내는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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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네요⋯.”
“자정 넘었네.”
네무와 레온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언뜻 듣기에는 다른 내용이었지만 결국 같은 말이었다. 사토라 네무와 치나미 레온은 지금 막 2024년을 맞이한 참이었다.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집에서 편안한 옷을 입고 가족들과 새해를 기다리는 것은 기수 405에게는 사치라는 듯이. 토시코시를 제시간에 먹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정말 사치였다. 네무와 레온 둘 중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는 했어도 말이다.
네무와 레온은 예정보다는 이른 시간에 임무를 해결하고 도쿄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쿄 근처에서라도 새해를 맞이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레온은 헷갈렸다. 새해를 기다리는 카운트다운이 막 종료된 라디오에서는 폭죽 소리와 함께 축하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가 정신없을 정도로 시끄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핸들에 한 손을 얹은 레온이 다른 손으로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네무는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기댄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무가 창문에 비친 레온을 시선으로 좇을 거라는 건 레온도 알고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왜 의문문이에요?”
”많이 받든가 말든가.”
레온이 투덜거렸지만 네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도쿄로 돌아오는 꽉 막힌 도로에서의 장시간 운전이 레온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네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바꿔줄까요?” 네무가 네 번째로 운전대를 향해 고갯짓했고,
“형이? 됐어.” 레온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네 번째로 거절했다.
“얼마 안 남았어.”
레온이 두 손으로 매달리듯 핸들을 잡으며 내비게이션에 고갯짓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도로는 움직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쁨과 기대로 시끄러운 라디오와는 달리 레온과 네무는 조용하기만 했다.
레온에게 있어 이 기묘한 침묵은 둘이 막 405로서 재회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서로가 4기수에 배정되어 있음에 놀라고 서로에게 짜증을 내던 그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서로라고 비난하던 그때. 사건 현장의 불안함을 품고 있는 소란함이 들리기 전까지는 어색하고 조용했던 차 안에서의 시간을. 지금은 그때처럼 이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으나, 레온은 어째서인지 그때를 떠올렸다.
네무와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으면 불쾌한 두근거림이 자꾸만 생겨버려서 긴장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불쾌하고 묘한 두근거림은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지거나 진정되기는커녕 강도를 더해갔다.
“레온, 같이 토시코시 먹을래요?”
레온의 그런 상념을 깬 것은 네무의 제안이었다. 레온은 어깨가 약하게 튀어 오르려는 것을 가까스로 찍어 눌렀다.
“형 집에는 그 누나 있잖아? 지금 가면 깰 텐데?”
“그럼, 우리 집 말고 레온네 집에서 먹으면 되죠. 어차피 차 반납하려 경시청에 가야 되잖아요.”
“뭐어? 우리 집인데 누구 맘대로?”
“그래서, 올해는 토시코시 안 먹고 넘기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네무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노려보던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 또한 네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네무는 미소 짓고 있었다. 레온을 놀리는 듯한 미소는 아니었고, 오히려 피곤한 와중에도 편안하게 짓는 미소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가 좋은 해돋이 스팟을 아는데.”
레온은 그제서야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럼 소바는 형이 사.”
◆
“다녀왔습니다~”
“혼자 살면서 누구한테 인사하는 거예요?”
“아, 슬리퍼 내 것밖에 없으니까 그냥 들어와.”
레온은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인스턴트 컵 소바와 캔 커피가 각각 두 개씩 든 비닐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경시청에 차를 반납하고 레온의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산 것이었다. 토시코시 대용으로 원래 소바를 많이 먹기도 하고 우동은 기수대에서 질릴 정도로 먹지 않았냐는 레온의 말에 네무 또한 동의했다.
레온의 아파트는 혼자서 살기 딱 좋은 크기였다. 현관문에 들어가자마자 거실, 침실과 화장실의 문이 바로 보이는 구조의 아파트는 자정이 넘은 이 시간대가 아니라면 햇빛도 잘 들어올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깔끔하게 꾸민 따뜻한 집이었다. 네무는 스투키와 피쉬본이 진열된 우드 계열의 장식장을 보며 조용히 감탄했다. 연두색의 패브릭 소파는 레온의 집 분위기와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2인용인지 별로 넓지는 않았지만 혼자 사는 집에서는 이 정도 크기가 딱 적당해 보였다.
“화장실은 저기야. 손 씻고 앉아 있어. 차 끓여서 갖다줄게.”
부엌으로 쏙 사라진 레온의 뒤에 대고 네무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녹차로 부탁해요. 너무 뜨겁지 않게!”
“그냥 주는 대로 마셔!”
그러나 네무는 레온이 자기 요구대로 녹차를 끓여올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가볍게 미소 지은 네무가 레온의 말대로 손을 씻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네무의 발치의 원목 커피 테이블이 있었는데, 나뭇결이 살아 있는 제품이었고 그 특성상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 것이었다. 네무는 먼지가 살짝 쌓인 나무 구멍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너머, 식물 장식장 가장 아래쪽 칸에 하드커버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네무가 부엌을 살짝 곁눈질했다. 주전자에 물이 끓는 소리는 아직이었다. 네무는 무릎으로 조용히 걸어가 하드커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영어로 정직하게 “ALBUM”이라고 적힌 표지를 네무가 한 번 쓸어봤다. 벽지처럼 단단하고 오돌토돌한 질감의 베이지색 커버에 음각이었다. 제 몸 하나 아껴가지 않고 바쁘게 사는 레온이 본가가 아니라 이곳에 앨범을 보관한다는 사실이 네무에게는 의외였다. 앨범은 오래된 티는 났으나 소중히 아낀 티 또한 났다. 등이 크게 갈라져 있지 않았고 표지 색이 옅었는데도 햇볕에 누렇게 바래지 않았다. 아마 이 앨범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에 열어봤다는 뜻이겠지. 앨범을 열어보는 것은 이미 뒷전이었다. 그렇게 앨범 커버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추측을 더하던 네무가 문득 자기 행동을 알아차렸다. 마치 초동 수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냥 열어보면 될 텐데 쉽사리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네무가 마침내 90도 정도로만 앨범 커버를 넘겼다. 레온이 아끼는 것은 자기 또한 아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가장 첫 장에는 아직 눈도 못 뜨던 시절의 레온이 있었다. 사진 속 레온은 붉은 기는 가셨지만 아직도 쪼글쪼글했고 입을 헤 벌리고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손 싸개를 벗어던졌는지 한 손이 빼꼼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그 손은 무엇인가 움켜쥐려는 것처럼 활짝 펼쳐진 상태였다. 손바닥 또한 쭈글쭈글하고 통통했다. 네무는 그 사진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는 사진 속 아기 레온이 진짜인 것처럼 아기들에게 으레 하듯이 검지를 하나 펼쳐 레온의 작은 손바닥에 콕 가져다댔다.
“아, 형! 뭐해?”
“허억.”
언뜻 한심해하는 것처럼 들리는 물음이었다. 네무는 놀라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앨범을 닫았다. 그러고는 놀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앨범을 자기 등 뒤로 얼른 숨겼다.
“어, 언제 왔….”
“주전자 물 끓는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집중해서 봤어? 무슨 사진 봤는데? 아니, 대체 남의 앨범은 왜 막 펼쳐본 거야?”
사람은 세 가지 경우에서 말이 빨라진다. 부끄럽거나 민망하거나 숨겨야 할 사진이 있거나 또는 셋 다 해당하거나. 아무튼 말이 빨라진 레온이 앨범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어도 네무는 요지부동이었다. 레온이 앨범을 향해 양손을 뻗었지만, 네무는 양손으로 레온의 손을 잡아챔으로써 앨범을 지켜냈다. 그렇게 얼마 간 실랑이를 하고 네무는 봤던 사진을 콕 집어 설명하려다가 그저 한 줄 감상만을 남겼다. 맹세컨대 놀리려는 의도는 없었다.
“귀엽던데요.”
“대체 무슨 사진을 본 거야?”
레온이 살짝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차는요?”
네무가 말을 돌렸다. 소파 앞에 서 있는 레온의 손은 텅 비어있을 뿐 찻잔 하나 없었다.
“…물 끓이려고 보니까 어차피 소바에도 물 부어야 하잖아. 차랑 같이 먹으면 딱 좋겠다 싶어서 아예 소바에도 물 부어 놨어. 식탁으로 가자.”
레온이 부엌 쪽으로 네무를 이끌었다. 네무는 소파에서 일어났지만 양손으로 앨범을 단단히 들어 보임으로써 사력을 다해 앨범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아, 안 뺏을게!“
“그렇게 말하고 날 방심시키려는 속셈이죠?”
가벼운 실랑이를 하며 몇 걸음 옮기자 거실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시작되는 곳에 놓인 식탁이 보였다. 집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는 옅은 색의 나무 식탁이었다. 손님을 고려하지 않고 구입한 것인지 의자는 두 개였지만 하나에만 등받이가 있었다. 컵 소바 두 개와 수저받침 두 개, 젓가락 두 쌍, 찻잔 두 잔은 식탁 크기에 비해 살짝 버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사진 봤는데? 아, 안 뺏을게. 3분 될 때까지 같이 구경하자. 내 사진이잖아.”
레온이 식탁을 가볍게 탁탁 두드렸다. 레온의 사진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어서 네무가 계속 등 뒤에 숨겨뒀던 앨범을 식탁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레온이 식탁 한구석에서 거침없이 앨범을 넓게 펼쳤다. 오히려 네무가 더 아까워했다. 곧바로 펼쳐진 곳은 네무가 보고 있던 그 사진이 있는 첫 장이었다. 세상에 나온 레온의 가장 첫 사진이 있는 곳.
“사실, 아까 이 사진밖에 안 봤어요.”
“그래? 나도 이 사진은 오랜만에 보네. 쭈글쭈글. 못생겼지?”
말하며 레온이 검지를 하나 사진에 콕 가져다 댔다. 네무가 검지를 가져다 댔던 손바닥이었다. 네무는 자기도 그곳에 손가락을 대 봤다고는 평생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귀여웠어요.”
“음? 그럴 리가.”
“아니에요. 정말로 귀여웠다니까요.”
“신생아가 귀엽다면 얼마나 귀엽다고 그래?”
강하게 의견을 내세우는 네무에게 대꾸하던 그때, 레온의 핸드폰이 울렸다. 급한 연락인가 싶어 네무와 레온이 반사적으로 긴장했으나, 화면을 보니 3분짜리 알람이었다. 둘 모두 긴장을 풀고 웃었다.
“이제 먹어도 돼.”
네무가 끄덕이며 컵 소바 뚜껑을 완전히 분리해 냈다. 레온은 젓가락부터 뜯었다. 그러고 보니 레온만 편의점에서 가져온 일회용 젓가락이었다. 왜 자기에게 일회용을 주지 않았냐고 물으려던 네무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물어봐도 네무가 원하는 온도의 대답이 아니라 손님이기 때문이라는 미적지근한 대답만 들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티비가 없네요.”
“유치원생도 아니고. 밥 먹을 땐 밥이나 먹지?”
말을 끝내자마자 레온이 소바를 크게 한 입 후루룩 먹었다. 네무도 그런 레온을 보고는 젓가락으로 소바를 한 입 건졌다. 이제 보니 손잡이 끝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젓가락이었다.
“아니, 너무 적막한 것 같아서요.“
“이게 딱 좋아. 어차피 사건 현장 나가 있으면 시끌시끌하니까. 귀도 쉬어 줘야지.”
“뭐, 그렇긴 하지만요. 그래도 가뜩이나 혼자 사는데 이건 너무 조용하잖아요.”
“아, 또 잔소리. 형이 누굴 걱정해?”
그러나 레온도 크게 싫은 듯한 반응은 아니었다. 네무도 적당한 부분까지만 잔소리했다.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간에 토시코시를 먹는 네무와 레온 사이를 서로의 목소리가 가득 채웠다. 익숙해진 투닥거림이었으나 예전과 같이 상대를 비난하는 것 없이 순수하게 애정으로만 이루어진 투닥거림이었다.
◆
해돋이를 보러 가는 길도 도쿄로 돌아올 때처럼 레온이 운전석을 차지했다. 그 전에, 레온은 이미 많이 운전하지 않았냐는 네무와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핸들을 잡게 하고 싶지 않다는 레온의 실랑이가 있었다. 네무는 레온과 임무에 나가 있는 동안 담배는 입에도 못 댔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네무도 레온도 네무의 주머니에는 비워지는 적이 없는 담뱃갑과 라이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온이 차를 조금만 더 늦게 끌고 나왔다면 네무가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담뱃갑을 꺼내 들었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 결과 레온은 네무가 내비게이션에 띡 찍어준 주소로 운전하고 있었고 네무는 창문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 어두운 도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귀가 심심해서 버릇처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새로운 심야 프로그램이 시작하며 앵무새처럼 새해 인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밖은 아직 어두워서 네무의 얼굴이 또 고스란히 창문에 반사되었다. 해안가로 향하는 수도 고속 1번 도로에는 가로등을 제외하면 광원은 없었기 때문에 도쿄 시내에서보다 네무의 얼굴은 더 선명했다. 설탕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얼굴의 점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껍고 길쭉한 눈썹과 다크서클이 새겨진 반만 뜨인 눈동자 같은 것은 형태뿐일지언정 레온에게 선명하게 보였다.
레온은 그런 네무의 얼굴에 또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잠도 부족하고 피곤해서 짜증이 심장에 고여서 그대로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아까 있었던 실랑이 이후 가라앉아서 조용해진 차 안 분위기 또한 레온의 증상에 힘을 더하는 것 같다고 레온은 생각했다. 레온은 네무에게 짜증을 내려다가 멈추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또 왠지 네무에게 짜증을 내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이렇게 묘하게 두근거리는데도 짜증은 내고 싶지 않다니. 침착해지는 레온의 생각과는 별개로 심장은 아직도 거칠게 뛰고 있었다.
“졸리면 커피라도 마시지 그래?”
레온이 턱짓을 한 컵 홀더에는 커다란 보온병과 스틱 커피가 꽂혀 있었다. 아까 편의점에서 샀던 캔 커피는 보온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차라리 뜨거운 물을 담아 가져가기로 둘이 합의를 본 것이다.
“아, 괜찮아요. 담배 땡겨서 그랬어요.”
그렇게 답한 네무는 입 속으로 몇 시간 동안 금연을 했는지를 세었다. 레온은 어이없다는 듯 네무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타박하지는 않았다. 대신,
“잘했어, 형.”
다정하게 맞장구를 쳤을 뿐이다.
그 순간 네무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창문에서 팔꿈치를 내리며 표정을 풀었다. 눈썹이 더 유순해졌다. 그리고 레온은 표정이 변하는 그 부드러운 과정을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 오늘은 해가 6시 51분에 뜬대요.”
“지금 6시 넘었는데?”
그 말에 레온이 창문 밖을 내다봤다. 도로 우측으로 벌써 바다가 보였다. 일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는데도 아직 어두운 탓에 바다의 푸른색을 잘 인지할 수 없었으나 흰색 포말만은 선명했다. 그때 레온은 네무의 시선을 알아챘다. 조수석도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네무와 서로 바라보는 것처럼 고개를 마주하고 있던 것이다. 네무와 레온의 눈이 마주쳤고, 레온이 먼저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렸다. 네무가 작게 웃었다.
“운전할 땐 전방 주시, 모릅니까?”
“말 안 해도 알거든.”
레온이 가볍게 툴툴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은 어디인데?”
어차피 도착할 목적지를 꽁꽁 숨기고 싶기라도 한 듯 네무는 스마트폰으로 상세 주소를 검색해서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놓았다. 그러므로 레온이 알 수 있는 것은 목적지가 “도쿄도 오타구 조난지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음, 일단.”
“일단?”
대꾸하며 레온이 라디오의 음량을 낮췄다. 새해 첫 방송으로 들뜬 디제이의 목소리는 네무의 조용한 목소리를 묻고도 남았다. 레온은 그런 디제이의 목소리가 아니라 네무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싶었다.
“해변이에요. 음… 수영은 못 하는 곳이지만, 넓어요. 시야에 걸리는 건물도 없어서 좋고요. 그리고, 해가 느리게 뜨는 곳이에요.”
설명한 네무가 그곳의 풍경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래? 좋았나 보네.”
네무의 말처럼 전방을 주시하며 태연하게 반응하던 레온은 반응과는 다르게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네무가 누구와 갔는지를 궁금해 한 다음이었다. 네무가 지난 3년여 동안 누구와 새해를 맞았는지는 레온에게 상관이 없었음에도. 레온도 이런 생각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는데 시선이 움직이니 네무와 다시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신나게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혼자 잠깐 상상에 빠졌던 네무가 어느새 눈을 뜨고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묵직해졌다. 다시 심장의 두근거림이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레온은 그것을 불쾌함이라고 받아들였다. 불쾌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불쾌하기만 하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공기는 오래 고여 있던 것처럼 묵직했고 심장은 통제를 잃고 불쾌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지만, 네무와 입씨름할 때의 짜증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레온은 그 다른 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정의할 수 없었다. 네무에게서 시선 또한 뗄 수 없었다. 네무도 레온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둘 사이의 숨 막히는 적막을 깬 것은 우측으로 방향을 전환하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음이었다. 레온은 그제야 네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네무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네무치고는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레온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차 안의 공기는 더 묵직해지기만 했다. 레온은 땀으로 미끌거리기 시작하는 것만 같은 운전대를 양손으로 고쳐 잡아야 했다.
“목적지까지 1km 남았습니다.”
네무와 레온의 속도 모르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이 조용한 차 안에 울려 퍼졌다.
◆
네무가 그렇게 꽁꽁 숨기던 해돋이 스팟은 조난지마 해변 공원이었다. 공원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고 있었지만 네무는 레온을 입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살짝 지대가 높아 해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모래사장과 이어지는 숲 쪽에는 텐트가 몇 개 쳐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들도 해돋이를 보기 위해 공원을 찾은 것 같았다. 도로를 따라 새겨진 누런 잔디의 흔적은 봄이 시작된다면 다시 푸르게 돋아날 것이고, 아직 새카맣기만 한 바다는 해가 뜨면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새벽의 해무를 제외하면 황금빛을 예고하는 바다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야가 깔끔하고 넓었다. 넓고 시야에 걸리는 건물이 없어서 느리게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던 네무의 말이 사실처럼 보였다.
“이런 곳을 혼자만 왔다고?”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레온이 작게 감탄했다. 네무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레온은 뒷좌석으로 상체를 구겨 넣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네무가 몸을 뒤로 살짝 뺐을 때, 네무의 무릎 위로 도톰한 극세사 담요가 하나 얹혀졌다.
“뭐 해?”
그 말에 네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나가자고요? 이 날씨에?”
“창문엔 선팅이 되어 있잖아. 차 안에서 보면 무슨 재미인데?”
그리고 컵 홀더의 보온병과 스틱 커피를 덥석 쥐고는 문을 열고 먼저 나가는 것이다. 네무가 히터를 켜놓고 혼자 차에서 농땡이를 피우지 못하게 차키까지 챙겨가는 주도면밀함까지 보였다. 네무는 담요를 펼쳐 두른 다음 차에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추울 것이라면 레온 옆에서 추운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레온은 이미 보닛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커피를 타고 있었다. 보온병 뚜껑만 열었는데도 벌써부터 김이 새벽 공기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네무의 엄살이 완전히 엄살이기만 할 정도로 따뜻한 날씨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해도 안 떠서 캄캄하고 추운데… 요.”
네무가 커피를 탄 보온병 뚜껑을 사이에 두고 레온 옆에 앉았고,
“십 분만 기다리면 해 뜬대. 추워도 조금만 참아 봐.”
보온병 뚜껑을 네무에게로 밀어주며 레온이 말했다.
네무는 보온병 뚜껑을 들고 몇 번 후후 불더니 마시지는 않고 엉덩이를 움직여 레온의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두르고 있던 담요를 넓게 펼쳐 레온의 어깨에도 덮어주었다.
“…고마워.”
“뭘요. 어차피 레온 거였는데요.”
네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자 다시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차 안이 아니고 뻥 뚫린 해변이라서 그런지 침묵은 이전만큼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무가 뚜껑을 기울여 커피를 홀짝이면 굽은 팔꿈치가 때때로 레온을 건드렸다. 담요를 나눠 덮고 있었기 때문에 네무와 레온의 거리는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보다 가까운 상태였다. 네무의 왼쪽 어깨는 레온의 오른쪽 어깨에 살짝 기대어 있었으며 네무의 왼쪽 무릎은 레온의 오른쪽 무릎에 거의 닿고 있었다. 담요 때문에라도 붙어 앉아야 했으므로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했다. 적어도 레온은 그렇다고 느꼈다. 이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에 레온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해변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아직 과거의 일로 네무와 온전히 화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네무와 단둘이, 가까이 있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레온의 시선을 바다로 향해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네무와 닿은 어깨와 네무가 커피를 마시는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레온은 네무가 커피를 마시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네무 또한 온 신경을 레온에게 집중하느라 커피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만 알고 있던 해돋이 스팟에 레온과 단둘이 가자고 제안한 것은 네무에게도 꽤나 모험이었다.
그래서 레온은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채 매듭짓지 못한 이야기가 레온 자신에게도 그리고 네무에게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오로지 직감에 의지해서 뗀 운이었다. 그리고 레온은 자신의 직감이 대체로 옳아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무가 고개를 들어 레온을 바라보았다. 네무도 레온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아는 것 같았다. 레온의 시선 한 구속에서 네무는 긴장한 듯 허리를 곧게 폈고 평소보다 눈을 크게 뜨고 레온을 바라보았다. ‘여기서요? 지금요?’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레온은 네무의 시선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형이 나를 오해한다고 했잖아.”
“잠깐. 잠깐만요, 레온.”
네무가 급하게 레온의 말을 가로막았다. 보닛 위에 다 마신 보온병 뚜껑을 올려놓으며 네무는 한 팔을 짚어 기대었다.
“정말요? 해돋이를 기다리면서 ‘그때’ 이야기를 한다고요?”
네무는 장난스럽게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보려고 시도했으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우리 다 푼 거 아니었어요? 첫 사건 때요, 무전도 양보했고, 녹차랑 빵도 사 갔고.”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레온이 잠시 말을 멈추고 보온병을 열었다. 톡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보온병에서는 다시 하얀 김이 새었고 레온의 안경에 옅은 안개가 꼈다. 뚜껑에 담긴 물이 커피의 갈색으로 변하고 나서도 안경에 낀 안개는 꽤 오래 남아있었다.
“기수 405로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 형이 보고 싶었던 것 같아.”
“…….”
“잘 지냈는지, 경찰 일은 괜찮은지, 형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는지, 뭐… 그런 것들.”
“…….”
네무는 이제 보닛에 짚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레온은 네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형은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죠, 물론.”
네무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네무의 눈 밑이 평소보다 더 거뭇해 보여서 레온은 네무가 정말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떡해요, 그렇게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는데. 왜 연락 안 했냐고 말할 건 아니죠? 하하.”
“아니야.”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네무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시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침착했다.
“형 말이 맞았을지도 몰라. 수1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무리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대체 왜 바쁘게 살았다는 걸 인정을 안 하려고 드는 거예요?”
“몰라. 묻지 마.”
레온이 가볍게 답하고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냥 지금 듣고 잊어버려.”
“그럼, 나도 지금 듣고 잊어버릴 얘기를 하나 해줄게요, 레온.”
“…….”
“다시 같이 일하게 돼서 기뻤어요.”
“응. 잊어버릴게.”
잠시 침묵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상대의 옆얼굴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느리게 고개를 돌려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변에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 들렸다. 바닷물은 여전히 묵직하고 깊은 푸른색이었지만, 황금색의 동그란 태양이 떠오르며 군데군데가 금빛으로 물든 것이 보였다. 만 너머 고토구의 건물이 작게 보이기는 했지만 시야에 걸릴 정도는 아니었다. 허전할 정도로 뻥 뚫린 시야에는 오로지 푸른 바다와 떠오르는 금빛 태양과 황금빛으로 물든 네무와 레온의 얼굴뿐이었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해돋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서로의 옆얼굴을 구경했다. 상대가 자기 옆얼굴을 구경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해가 떠올라 온전히 둥글어졌을 때, 레온이 보닛에 놓인 뚜껑을 들어 남은 커피를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네무에게 건넸다. 그곳에는 네무를 위한 커피가 조금 식은 채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네무는 커피를 조금씩 나눠 마시며 담요를 끌어당겨 돌돌 말아 품에 안았다. 레온은 벌써 보온병을 챙겨 등을 보인 채 운전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일부러 느리게 조수석에 타자 차 안에는 벌써 훈기가 돌고 있었다. 네무는 커피를 마저 마신 다음 뚜껑을 들고 있던 손을 히터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했다. 당연하게도. 네무는 이것이 레온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추울까 봐 틀었어.”
“레온이 추웠던 건 아니고요?”
“…살짝?”
네무가 먼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를 따라 레온도 웃음을 터뜨렸다.
“아, 배고파. 근처에 맛있는 가게 없어, 형?”
“있긴 한데, 지금 열었을지 모르겠네요. 새해 첫날이기도 하고, 시간도 시간이고.”
“그렇네.”
레온이 낭패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레온을 달래듯 네무가 답했다.
“그래도 경시청 근처로 돌아가면 아침에만 여는 식당들이 열 시간이 될 거예요.“
“아, 거기?”
“오늘은 1월 1일이니까 소바가 메뉴려나요…. 소바는 싫은데.”
“그럼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레온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젖혔다. 목적지는 명확했고 새해의 해돋이까지 제대로 지켜봤다. 오랜 시간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있었지만, 이 두근거림은 수면부족의 증상과는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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