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底森林

해저삼림

C by 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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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빈은 영화를 사랑한다.

 

영화가 흘러가는 순간은 언제나 찰나였고 영원이었다. 낭만에서 살고 싶다는 건 누군가든 한 번쯤은 생각했던 일일 테고, 강수빈에게는 영화가 곧 낭만이었으므로, 유치원을 그만두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후회할 결정은 아니었다.

 

해저 기지 영화관 직원 채용

 

어느 날 구직 사이트에 그런 글이 올라왔다. 해저 기지, 영화관, 직원, 채용. 음절로 부스러지는 단어들의 모음.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저는 누군가의 고향이고 또 우주였다. 인간은 우주보다도 심해를 모르고 있대, 하지만 모든 생물은 다 바다에서 온 거야. 우리의 고향은 곧 바다야. 언젠가 티비에서 나왔던 말을 곱씹으며 강수빈은 결정했다. 해저로 가야지. 며칠 후 온 합격 서류와 함께 해저로 향하는 걸음마다 도르륵, 캐리어 바퀴가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강수빈은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과거 회상 씬은 이만 여기까지 하자. 강수빈의 입사 이야기도 좋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이야기 또한 중요하니 말이다.

 

신해량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하기엔 모호했다. 다만 강수빈이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신해량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일이라면 아마 심장마저 빼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에 적어도 한 번은 영화관으로 왔다. 해저 기지에 딱 하나밖에 없는 씨네마로. 팝콘 향이 나고, 포스터가 그럴듯하게 펼쳐져 있는 그 씨네마에서 신해량은 언제나처럼 물었다.

 

영화, 추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만남부터 유구하게 하던 말이었고, 두 사람만의 신호이기도 했으며, 강수빈의 취향 리스트를 적어내리는 행위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건 사랑의 부작용이었으니, 신해량 얼굴이 조각상을 뺨친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피해갈 수 없는 부작용인 것이다.

 

오늘은 중경삼림이요! 아, 이건 신해량 씨도 봤으려나? 왜, 양조위랑 임청하 나오는 영화 있잖아요! 그 홍콩 영화.

 

아뇨, 안 봤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걸로 봐요. 아, 오늘 손님 없으니까 같이 봐도 좋겠다! 기다려봐요, 티켓 두 장부터 끊고….

 

강수빈은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흥얼거렸다. if I didn`t tell her I could leave today…. 포크 록 특유의 음이 가득하게 섞인 노래, 티켓은 유독 비행기 탑승 티켓과 비슷했다. 신해량은 그 티켓이 강수빈의 격한 주장으로 인해 생겼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느리게 시선을 내리자 코 옆으로 그림자가 비스듬하게 졌다.

 

안녕하세요, 손님. 이번 비행기는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입니다.

 

장난스러운 어투로 신해량에게 티켓을 건넨 강수빈은 어두운 영화관 안으로 향한다. 해저 기지라고 리클라이너 좌석인 게 사람들 허리는 아주 제대로 생각해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영화관 중간쯤에 나란히 앉아,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강수빈은 눈을 잠깐 감았다. 비디오테이프가 삽입되는 소리가 날 리 없지만, 이러고 있으면 꼭 소리가 날 것 같아서.

 

영화가 시작되자, 분명 영화를 보러 온 건 신해량일텐데 강수빈의 시선이 그 큰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팝콘을 씹는 소리 하나 없이, 하지무가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어치우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장면이 다시고 흐른다.

 

-만약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는 통조림이었으면 한다. 만약 날짜를 써넣어야만 한다면, 일만 년으로 하고 싶다.

 

이미 수없이 보고 되새긴 글자, 목소리, 금성무의 표정. 하지만 강수빈의 시선은 그 화면에서 떼질 생각이 없었다. 일만년이 지나도 이 영화는 이 그대로인 탓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해량은 그런 강수빈을 바라본다. 좋아하는 것을 볼 때 빛나는 그 눈을, 표정을, 응시했다. 강수빈의 두 눈동자에 영화 장면이 스크린처럼 비칠 때 신해량을 그런 강수빈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신해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수빈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화를 즐길 시간은 존재해야 했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시끄럽게 깔리고, 663은 커피를 마시고, 페이가 몰래 663의 집으로 들어가 어항을 치우고…. 그래, 거기엔 금붕어가 있었다. 유속이 빠른 걸 싫어하는 금붕어가.

 

 

항공권을 흉내 낸 편지가 스크린에 비친다. 1년 후, 어디로 도착할 것인가? 빗물에 번진 잉크는 야속하게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강수빈은 신해량의 두꺼운 손을 잡았다. 이제 거의 끝나가요, 라는 말 같은 건 붙이지 않는다. 맥박의 소리가 일정하다. 신해량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보다 죽어가는 과정에 익숙했으나, 언제고 이 맥박이 뛰길 바랐다. 그래, 기억이 담긴 통조림처럼.

 

-이걸로도 비행기를 탈 수 있어요?

 

신해량의 고개가 화면으로 돌아간다. 비에 젖어버린 편지, 그리고 냅킨과 펜. 페이는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항상 진실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어디로 가고 싶어요?

 

페이가 냅킨에 선을 죽죽 그어나간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몽중인이 흘러나온다. 신해량은 강수빈의 턱을 느리게 끌어당겼다. 가까워지는 시선, 그리고 눈을 감는 건 오래된 인간의 약속이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피부 점막 중에서 가장 얇다는 입술, 그래서 붉다는 입술이 맞닿고, 고개가 천천히 틀린다. 몸이 더욱 가까워지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의 심장 소리였는지는 둘 다 알지 못한다.

 

혀가 엮이면 크레딧에 흘러나오던 몽중인은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입을 맞춘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누가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자각하게 될 정도로, 서로가 현재 이 낮은 해저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로.

 

강수빈의 숨이 언제나 먼저 가빠졌다. 신해량은 천천히 혀를 떼어낸다. 은색 실이, 그래. 키스했다는 증거가 늘어졌다가, 뚜욱. 끊기고 만다. 신해량의 엄지 손가락이 강수빈의 입술을 천천히 쓸다,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사실, 한 번 본 적 있습니다. 중경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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