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으로 향하는 여정

홀로 길을 돌아가는 발자국 (中)

열 살에서 열한 살로 넘어가는 겨울

BGM


하운이 라씨 가문에 돌아와서 후계자 수업을 받은 지 수 개월이 흘러, 바야흐로 가을에 들어서는 시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시간은 꾸준히 흐른다고 그 긴 여름을 어떻게든 보낸 끝에 맞이한 선선한 공기가 새삼 머릿속을 차게 만들었다. 그런대로 꽤 버틸 만했다, 하운은 지나간 계절을 짤막한 감상으로 송별하고는 허리께 근처까지 내려오는 잿빛 머리칼을 질끈 동여맸다.  

“준비는 됐니?”

한차례 심호흡을 내뱉는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온새가 조용히 물어 왔다. 하운은 발치에 내려앉은 서리를 부러 꾹 밟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승이 건넨 몬스터볼을 손바닥 안에서 가만히 굴려 보고는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상록수가 우거진 숲 한복판의 공터에서 스승과 제자가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두 사람의 손에서 거의 동시에 벗어난 몬스터볼들이 잎새 사이로 파고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이다. 

“승부의 마무리는 내가 임의로 짓겠다. 이건 내가 내는 일종의 시험이니, 다들 진지하게 임하도록. 알았지?”

하운과 음번은 잠깐 시선을 교환하다가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대편으로 넘어간 시드라도 긴장감 가득 서린 눈빛으로 살짝 기우뚱거렸다. 시드라의 옆구리에 붙은 용의 비늘이 불규칙적으로 반짝였다. 온새는 평상시에 잘만 지어 보이던 웃음기를 전혀 내보이지 않은 채로 손을 치켜들었다. 어린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보낸 기원은 이윽고 무수한 물방울이 되어 일대의 대지를 적시기 시작하였다. 음번은 어린 소녀의 명이 내려지자마자 빗방울 사이를 쏜살같이 날아서 날카로운 이빨이 한가득 박힌 입을 쩍 벌렸다. 

“여태 가문에서는 ‘드래곤의 본질’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가르침을 전달해 왔지만, 결국은 간단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단다.” 배틀이 이루어지기 하루 전, 온새는 다가오는 일정을 되짚어 주며 짤막한 강의를 곁들였다.

“드래곤의 본질이란 곧 ‘분노’를 의미하고, 그 분노를 잘 제어하고 다루는 조련사가 실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을 수 있지. 여기서 깜짝 퀴즈. 드래곤의 분노는 어떨 때 가장 격렬해질까?” 

“역린이 건드려지면요?”

답안이 빠르게 나왔다. 드래곤 조련사 가문에서 지내게 되면 자연히 터득하게 되는 기초 지식이기 때문이다. 온새는 가벼이 고개를 주억였다. 

“일반적인 포켓몬인 경우에 역린이 물리적으로 건드려지면 금방 쓰러지기 일쑤겠지만, 수백년 묵은 용은 문자 그대로 천지가 불탈 때까지 날뛰거든. 그런데 이 내용은 지금 당장 중요하진 않고,” 온새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아이와 시드라를 향해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질문을 조금 바꿔볼게. 감정을 지닌 지성체가 가장 분노할 때는 언제일 것 같니?”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쉬이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하운은 잠자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답을 모색해 보았고, 시간이 조금 소요된 다음에야 목소리를 내었다.

“누군가가 예민한 부분을 함부로 건드렸을 때… 요?”

“그렇지!” 하운은 스승이 호탕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는 행동을 가만히 받아들이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이거랑 드래곤의 본질이라는 거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어요?”

“어, 얘기가 좀 새긴 했다. 요점은 대강 이래. 인간이든 용이든 다른 포켓몬들이든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성을 잃기 쉬운 상태가 되지. 평소 현명하고 주의깊은 판단을 할 줄 아는 이들도 실수를 저지르기 쉬워진다는 얘기야. 적은 이걸 노리고 약점을 마구 공략하는데, 이걸 견디려면 꽤 힘들겠지.”

하운은 문제의 ‘적’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몇 떠올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도 결국은 견뎌야 한다는 얘기네요. 마구 휘둘리지 말고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뭐 이런 거요.”

역시 드래곤 조련사는 저한테 안 맞아요, 하운은 볼을 있는대로 부풀리고 스승은 하하 웃었다. 

“드래곤 조련사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 전부가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가짐이야. 이게 쉬웠으면 갈등이니 싸움이니 하는 건 진작에 무색한 개념이 되었을 거다.”

“이야기가 또 다른 데로 새어 나가려고 해요.”

제자의 잇따른 푸념에 스승은 두손 드는 시늉을 했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음, 그럼 이렇게 풀이해 볼까?”

어색한 헛기침. 하운은 그믐의 참을성 어린 시선을 힐끗 쳐다보고는 온새의 말을 기다렸다. 

“정통성을 따지는 부류에게는 마이페이스로 맞받아치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는 의미야.”

음번이 포효성을 터뜨렸다. 하운은 눈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물방울을 재빨리 걷어내고 목청을 높였다. 

“음번, ‘달의 불빛’으로 체력을 회복해!”

비가 내리는 탓에 치유의 빛이 약하게 들어왔다. 음번은 초반보다 약간 힘겨운 기색으로 날갯짓을 이어가며 목구멍 너머로 자그마한 그르륵 소리를 내었다. 반대편 자리에 선 스승은 팔짱만 굳게 낀 자세로 짤막히 명했다.

“한번 더 시도해 보아라, 그믐아.”

하운은 시드라가 숨을 깊이 들이쉬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술이 날아올 방향과 궤적을 계산했다. 시드라가 쏘려는 ‘하이드로펌프’는 매우 강력한 파워를 갖춘 대신 긴 준비 과정이 필수불가결했다. 오랜 파트너의 공격 태세나 버릇 등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은 다름아닌 자기자신이었기에, 하운은 눈을 버젓이 뜨고 기술을 맞아 줄 심산이 아닌 이상 너무나도 손쉽게 그믐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직전에 음번의 급소에 기술이 명중당했던 이유는 명실상부했다. 최초의 ‘분노의 앞니’가 시드라에게 적중하는 광경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던 나머지, 저도 모르는 사이 머릿속이 복잡해졌기 때문일 테다. 변명 거리도 되지 않는 사유였다. 

‘배틀 초반부터 크게 페이스를 잃은 그믐이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적대는 그 트레이너나,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는 의미겠지.’ 그렇게 배틀은 서로 공격하고 회피하는 구도로 흘러가며 지리하게 이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힘을 비효율적으로 소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하운은 남몰래 쓴웃음을 짓고 나서 음번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지시를 남겼다.

“오른쪽으로 선회해서 피해, 음번!”

다행히도 음번은 미숙한 조련사의 지시를 잘 따라 주었다.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가 공기의 흐름을 급격하게 타고 곡예에 가까운 비행을 가능케 하여, 음번은 세차게 쇄도하는 물줄기를 여유로이 피해 다니며 상대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드래곤의 날카로운 앞니가 다시금 번뜩이며 시드라의 옆구리를 향해 잽싸게 접근하였으나, 노련한 조련사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온새는 허공만 아쉽게 물어뜯고 멀리 물러나는 음번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하운이 그 미소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스승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어느 정도 파악이 된 것 같으니, 슬슬 마무리를 지어보자꾸나. 그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도 좋아.”

하운은 스승의 배려를 냉큼 받아들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 편에서 초조한 낯빛으로 다음 공격 지시를 기다리던 시드라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움직였다. 어린 주인이 힘차게 손짓하며 외쳤다.

“나도 널 진심으로 대할 테니, 너도 최선을 다해 줘. 우리 같이 강해지기로 약속했으니까 이런 시험 쯤은 가볍게 통과해야지!”

파트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장애물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과 갑작스런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단을 갖추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시드라의 눈빛에 호승심이 깃드는 모습을 지켜 본 온새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갯짓을 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시드라의 주둥이가 공격을 위해 수축하는 순간이었다. 하운은 청보랏빛 기운이 시드라의 주변으로 모이는 광경을 보고 머릿속에 떠올렸던 지시를 곧장 바꾸었다. 

“‘용의 파동’!”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파동과, 거칠면서도 고요하게 다듬어진 파동이 서로에게 끌어당겨지듯이 뻗어나가 중간지에서 충돌했다. 굉음과 파형이 사방으로 퍼지는 한가운데 음번이 쏘아 낸 파동이 중심을 꿰뚫고 들어가 근원의 적을 덮쳤다. 

비가 그친 전장 위에 물안개가 희미하게 서렸다. 

고생했다는 말로 다독여 주려던 온새는 하운이 자신을 그대로 지나쳐서 기절한 시드라를 허겁지겁 안아드는 모습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제아무리 냉정하고 의젓한 성격을 지닌 제자라지만 그는 고작 열 살짜리 어린 아이였고, 제 의지로 소중한 포켓몬을 쓰러뜨린다는 상황은 아무래도 벅차고 가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믐에게 미안하다며 목놓아 엉엉 우는 목소리와 이를 달래며 사과와 격려를 번갈아 거듭하는 목소리만이 숲 속 공터에 쟁쟁했다.  

 

어느 덧 상록숲 자락의 집으로 돌아온 스승과 제자가 안다에게서 ‘둘 다 아침 산책을 나간답시고 쫄딱 젖어서 왔다’며 꾸지람을 듣고, 온새는 이에 더해 ‘애를 울렸다’며 배로 혼쭐이 난 후였다. 온새는 시드라가 들어가 쉬고 있는 몬스터볼을 하운에게 돌려주면서 은근스런 어조로 물었다.

“아직 화났니?”

하운은 제 소유의 몬스터볼을 받아들고 음번의 몬스터볼을 스승의 큼직한 손바닥 위에 올려 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동작에 따라 머리 위에 얹어 둔 수건이 가볍게 흔들렸다. 

“화난 적 없어요. 어차피 예전에 미리 합의해 둔 일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전 괜찮아요. 오히려 선생님한테 감사하기도 하고요…”

잿빛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온새는 쩝 입맛을 다시고 관자놀이 부근을 문질렀다. 멋쩍음을 느낄 때 버릇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감사는 나중으로 미뤄라. 네가 감기에 걸리면 안다가 날 가만 안 둘거야.”

울음을 멎고 떼꾼한 눈빛으로 온새의 얼굴을 올려다 본 하운은 잠자코 제 손아귀에 쥔 몬스터볼로 시선을 옮겼다. 작게 다물린 입술이 조금씩 달싹였다.

“제가 그믐을 꺼내면…”

“그믐은 바로 진화할 거란다.”

제자의 말을 받아 준 온새는 이윽고 제게 돌아오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무기는 시련을 거쳐 용이 된다지. 이번의 배틀은 그러한 시련의 취지로 이루어졌고… 너희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하운이 네 생각은 어떤지 묻고 싶네.”

공간을 가득 채운 진화의 빛이 망막에 진한 잔상을 남기고, 하운은 눈을 깜빡이면서 제 앞에 나타난 포켓몬을 까마득히 우러러보았다. 묵은 수련의 결실을 얻어 강건하게 맺힌 눈동자가 주인을 향해 서서히 내려와 같은 선상에 머무른다.

“저는… …”

하운은 천천히 킹드라의 거대한 몸체를 끌어안고 매끄러운 비늘 위에 뺨을 기댔다.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촉감이었다. 옛날에는 팔뚝이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니던 조그마한 포켓몬이, 이제는 양팔을 크게 벌려서 안아야 품에 겨우 들어올 만큼 거대해졌다. 하운은 가슴 속에 낯선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최고라고 생각해요.”

시련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하운은 발돋움을 하고 파트너의 목덜미에 매달리면서 웃었다.  



얇은 편지지 위를 연필심이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때면 퍽 마음이 가라앉는 듯 했다.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지우개 가루가 이따금 손의 움직임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하운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데 깊이 몰두하느라 이에 신경을 두지 않고 있었다. 이제 하운은 캠프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를 모두 쓰고 나서 마지막 인물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안녕 오빠, 

내 편지가 학교 생활에 위안이 된다니 그거 다행인데, 오빠 주변에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없기를 바라. 오빠가 내 편지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다고 하니까 누가 통째로 가져가서 읽어볼까 봐 괜히 걱정이 된단 말야. 서론이 조금 이상했으려나? 

하운은 글을 쓰던 손동작을 잠시 멈추고 문장을 빤히 노려보았다. 서론이 이상해서 이유를 덧붙이려니 제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서술하기에는 편지를 받아 볼 사람이 몹시 신경 쓰여 할 것 같았다. 아무렴, 주말에 본가 저택을 떠난 사이 누군가가 제 방에 들어와서 한바탕 들어 엎고 갔다는 이야기를 써서 보내면 다음에는 수신인 본인이 답장 대신 나타날 것이다. 흠, 그것도 꽤 끌리긴 하는데… 아니, 아냐. 조금 있으면 시험 기간이라니까 괜한 곳에 신경 쓰지 않게 해 줘야지. 하운은 턱을 괴었던 손을 내려 서론을 대충 갈음했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왔으니까 그러려니 생각하라’고. (훗날 이 구절을 읽은 은엽은 다소 당황했다고 한다. 딴에는 어린애가 어려운 표현을 써서 놀란 모양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표현도 알아?” “내가 읽던 책에 잘만 쓰이던데? 선생님한테 여쭤보니까 ‘마음이 뒤숭숭하니 폭풍이 부는 것 같다’는 뜻이랬어.” “...그렇구나. 책 많이 읽는 건 좋지.”)   

 

오빠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의외로 가문에서도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외할아버지랑 현우 빼고는 대부분 나한테 잘 대해 주던데, 아무래도 내가 무척 강해졌으니까 그렇겠지? 주마다 열리는 대련에서도 성적이 꽤 좋아서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다들 나한테 거는 기대가 많다나 봐. 현우라는 애랑은, 음, 솔직히 난 그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은근슬쩍 나랑 걔를 라이벌 관계로 굳히려는 낌새도 있더라니까. 

수제자가 지난 봄에 자신에게 저질렀던 짓–신분을 도용해 포켓몬들을 중간에서 가로챘던 일–까지는 은엽에게 이르지 않았었다. 그저 제 또래가 수제자로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와, 지난 몇 달 내리 서로를 열심히 견제해 왔다는 이야기만 언급해 놓은 당상이다. 초반에는 그토록 오만하게 굴던 수제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미묘한 심경 변화를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하운은 그 속내까지 알아차릴 수 없어서 그저 답답한 심정이 들었다. “여하튼 마음에 안 들어.” 하운은 입속으로 툴툴거리며 연필을 고쳐 쥐었다. 이 주제는 이쯤에서 맺기로 하였다.

기타는 잘 배우고 있어? 오빠의 실력이 어떤지도 궁금한데, 다음 휴가 때 연주 들려주라. 못 해도 괜찮으니까 말야, 나도 아직 오카리나 잘 못 불거든. 선생님이 오빠네 다음 휴가가 언제인지도 알려 달라셔. 저번처럼 바베큐 파티를 준비하실 거라나 본데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준비하고 싶으시대. 알았지? 우리 고기 먹어야 하니까 꼭 미리 알려 줘!

지나간 여름철에 방학을 맞이하여 은엽이 상록숲의 공방에 찾아와서 며칠 묵었다 간 적이 있었다. 자기 행적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버릇이 어디 안 가서, 그 간 오고갔던 편지에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방문했기에 하운은 물론이거니와 스승 내외까지 펄쩍 뛰듯이 놀랐었다. 평소 하운이 스승 내외와 친오빠에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재잘 말해 두었던 덕분에 직접적으로 얼굴을 대한 적이 없었는데도 친밀감이 꽤나 상당히 형성되어 있었던지라, 그날 밤에 이르러서는 이미 잘 알고 지내 온 사이인 양 서로를 대했다. 그건 마치 ‘죽이 아주 잘 맞다’는 느낌이었더랬다. ‘사이가 나쁜 것보다야 훨씬 나은 상황이라 다행이다.’ 사각사각 연필로 글씨를 적는 하운의 무릎으로 초승이 훌쩍 뛰어올라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하운은 멍하니 물짱이의 맨들거리는 피부를 어루만져 주며 의식의 흐름 식으로 편지 내용을 채웠다.

오빠네 포켓몬들은 잘 지내고 있어?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다들 엄청나게 기운이 팔팔해 보여서, 또 오빠라면 애들을 골고루 잘 돌봐주겠지만. 초승네들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초승은 최강의 물짱이가 되어가는 중이고, 그믐도 착실하게 최강의 킹드라가 되어가는 중, 너테는 최고의 수영선수가 되려고 해. 네번째 포켓몬부터는 아직 엔트리에 들일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 느낌이 팍 하고 오는 녀석과 만날 수 있겠지? 어제 뽑은 따끈따끈한 사진을 보내줄 테니까 오빠도 식구들이랑 다같이 찍은 사진 한 장 보내도록!

하운은 느낌표를 찍은 다음 편지지 뒷장에 겹쳐 두었던 사진 한 장을 꺼낼 때 히죽이는 웃음을 지었다. 주인의 쓰다듬는 손길이 거두어지자 물짱이가 책상 위로 고개를 슥 내밀었다. 하운은 의아한 울음소리를 내는 물짱이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자, 검사해 봐. 네가 봐도 잘 나왔지?”

계절의 끝자락까지 남은 낙엽을 쓸어모아서 그 안에 감자와 고구마 등을 넣고 굽는 식구들의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짱이는 그 날 먹었던 군고구마의 맛을 떠올리는지 입맛 다시는 소리를 냈다.

달에 한 번 편지를 쓸 때면 동일한 그림이 담긴 사진을 여러 장 뽑아서 자신의 친오빠를 포함해 다른 친구들–주로 트레이너 캠프 친구들–에게도 보내곤 하였는데, 훗날 답장에 붙어 오는 사진이 있으면 하운은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일상을 지낼 수 있었다. ‘외조부모님 밑에서만 지냈다면 이렇게 오빠나 친구들이랑 소식을 주고 받는 건 꿈도 못 꿨을 일이지.’ 하운은 콧바람을 가볍게 뿜고는 물짱이를 한 팔로 안아든 자세로 연필을 고쳐 쥐었다. 슬슬 편지를 마무리지어야 할 때였다. 

지난 번에 보내줬던 톱치 열쇠고리는 잘 가지고 있겠지? 리오르나, 이어롤같은 모형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아직 내 실력 밖이라서, 아쉽더라도 당분간 그걸로 만족해. 나도 열심히 안다 아주머니한테 배우면서 정진할테니까! 참, 그리고 다음달부터는 쌍둥이섬에서 훈련을 한다나 봐. 그 추운 곳에서 혹한 훈련이라니, 하여간 사서 고생을 시킨다니까… 어쨌든 훈련에 들어가고 나면 얼마간은 편지 못 보낼 거야. 선생님도 그 때는 휴직하신다고 했고. 나중에 한동안 편지 못 보낼 거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니까… 오빠도 속상하겠다. 내 사진이랑 톱치 보면서 견디고 있어 봐, 나도 거기서 겨울 내내 시달릴 생각은 없으니까!

주말마다 공방에 놀러 오면서부터 하운은 공방 주인인 안다에게서 소소하게 목공예를 배워 왔으며, 어느덧 간단한 형상을 가진 나무 모형 정도는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편지에는 ‘더 정진하겠다’고 써 놓긴 하였는데, 과연 쌍둥이섬 훈련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럴 듯한 모형을 만들 수 있을 지는 불명한 것이 마음에 조금 걸렸다. 하운은 마음이 약간 허해지는 것을 느끼며 초승을 좀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말랑한 피부가 납작하게 눌리며 물짱이가 맹한 울음소리를 짧게 뱉고는 얼굴을 부비적댔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할아버지한테 결투를 신청하고 싶은데….”

스승이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친 덕분에 실력이 부쩍 올랐다더라도 외조부의 실력을 뛰어넘는 수준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목표의식을 은연 중에 억누르고 있었다. ‘애당초 내가 왜 가문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걸.’ 하운은 못마땅한 심정으로 미간을 구겼다가 별안간 한숨을 폭 쉬었다. 

“아, 몰라. 한참 나이 먹은 사람들 상대로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해. 우린 우리 갈 길만 잘 찾아가면 되는 걸. 그렇지, 초승아?”

“멩.”

하운은 맞장구를 쳐 주는 자신의 포켓몬을 기특하게 여겼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놀아 줄게. 알았지?” 물짱이는 ‘놀아준다’는 말에 헤벌쭉 웃음을 짓고는 기다리겠다는 양 주인의 무릎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하운은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끝인사말을 대강 휘갈겨 놓고서 편지와 사진을 함께 봉투에 넣었다. 편지를 든 피카츄 그림의 우표까지 붙임으로써 마무리를 끝낸 하운은 밀봉된 봉투를 가지고 대문 앞 우체통으로 총총 향했다. 우체통에는 갓 배달된 석간 신문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하운은 그것을 자신의 편지와 맞바꾸어 들고 실내로 돌아오면서 일면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쌍둥이섬 인근 지역에서 전설의 포켓몬 목격담 이어져>

“훈련이 방해받겠다고 가주님이 싫어하시겠구나.”

하운에게서 신문을 받은 온새가 그 기사를 읽자마자 꺼낸 한마디였다. 하운은 소망을 한가득 담아 물었다. 

“훈련이 취소될까요?”

“안타깝게도 라씨 가문은 비무에 사활을 걸다시피 하니까 아마도 훈련이 취소되거나 하진 않을 거야. 그렇다고 장소를 옮기자니 쌍둥이섬 외에는 마땅한 곳이 딱히 없을 거고… 가주님이 여러모로 골치 앓으시겠네.” 

온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제자를 보고 킬킬거렸다.

“호기심과 꿈에 부풀어 섬에 찾아오는 민간 트레이너들을 의식해서 훈련 강도를 낮출 가능성이 꽤 높아. 그러잖아도 가문의 싸움 방식은 상당히 과격한 편이니 자중하라 이르시겠지.”

“선생님도 쌍둥이섬에서 훈련해보셨어요?”

스승은 태평한 기색으로 신문지를 다음장으로 넘기며 대꾸했다.

“매해 했다마다. 제아무리 합숙 훈련이라지만 추위 때문에 다들 쉽게 지치지. 그렇게 컨디션이 저하된 상태에서 비무를 치르러 가니 성적이 항상 기대 이하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을…”

‘너도 가서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하운은 문득 또 다른 궁금증을 꺼냈다. 

“선생님의 음번 있잖아요, 홍련섬에서는 잘 안 보이던데 그건 어째서예요?”

주중의 기간에 홍련섬에서 드래곤 조련사 수업을 받는 동안은 음번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까닭에 킹드라는 물짱이나 쥬레곤 또는 홍련섬에 서식하는 야생 포켓몬들을 상대로 실전 훈련을 진행해야 했고, 주말이 되어서야 상록숲의 공터에서 온새의 음번을 대할 수 있었다. 하운은 제 의문을 듣고 백색 홍채가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네가 가문에 좋지 못한 감정을 지녔듯이 음번도 그렇기 때문이지. 구태여 비유해 보자면… 천적의 서식지를 피하려는 본능이라고나 할까.”

그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듯한 어조가 분명하였다. 하운은 그제서야 오래 전에 비슷한 주제의 대화가 한차례 있었음을 떠올렸고, 그때도 스승은 자세하게 털어놓기를 꺼렸었다. 

“그런가요…”

결국 하운은 이번에도 들은대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의 다소곳해진 눈빛을 보던 온새는 별안간 웃더니 신문을 차곡차곡 접었다. 

“남은 한 달간의 수업 주제는 ‘야생에서 지낼 때 지켜야 할 안전수칙’으로 하자. 너도 여행 경험이 있다지만 날 것 그대로의 야생은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간 위험해지기 쉽거든. 나는 훈련에 동참하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널 대비시켜 줘야 마음이 놓일 것 같네.”

온새는 심심하면 읽고 있으라며 하운에게 신문을 넘겨주고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하운은 전설의 포켓몬에 대한 기사를 골똘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전설이 정말로 나타나서 누구도 쌍둥이섬에 얼씬 못할 만큼 눈을 잔뜩 뿌려준다면 좋겠는걸…”



하운이 제 시린 손에 대고 날숨을 후 불자 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솟았다. 차가운 뺨에 손바닥을 붙이면 그나마 온기가 남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렀다. 홍련섬의 드래곤 조련사들이 작금의 겨울철 날씨를 견디고 있는 장소는 쌍둥이섬 정상의 얼어붙은 동굴. 배급받은 손난로는 고릿적에 차게 식어 쓸모가 없어졌고, 모포 같은 방한용품으로도 간단히 막을 수 없는 추위에 코를 훌쩍이며 고난한 나날을 보낸 지가 이제 일주일 째였다. 

그들은 본고장에서 열릴 비무를 대비해 혹한기 훈련을 진행하는 중이었는데, 어느 때보다도 악조건이 늘어난 상태였는지라 사기는 진작에 바닥을 기고 있었다. 드래곤 타입 포켓몬들에게 불리한 환경 속에서 대련을 거듭하여 순위를 정립하는 방식부터가 힘겨운 마당에, 훈련일 이전에 전설의 포켓몬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각지에서 몰려든 트레이너들이 진을 쳐둔 바람에 조련사들은 아무도 오지 않을 장소를 찾아 정상까지 이르렀고, 예년보다 더욱 심한 추위가 기승을 부려서 감기 환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생겨났다. 무쇠같은 체질의 소유자라고 여겨지던 가주마저 훈련 날짜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감기에 걸려 버려서 먼저 본가로 귀환하였고, 결국에는 본디 한 달짜리 기간이 이주일로 대폭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가주를 대신해 남은 부가주가 불편한 기색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어서 훈련 기간이 단축된 것을 두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도 무리가 없잖아 있었다. 몰아치는 대련의 흐름 속에서 휴식 시간을 길게 가져본 적이 없는 포켓몬들은 체력을 회복했음에도 쉽게 지쳤다. 하운은 빈 상처약 스프레이의 무더기를 질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래서 체력은 늘긴 해요? 오히려 컨디션이 바닥 쳐서 비무를 망치고 말지.”

“윗분들이 아랫것들의 사정을 헤아려 줄 리가 있나. 가문의 전통이라고 하니 군말없이 따라야지…”

“우리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고생을 사서 해요. 수료비 내기에도 빠듯한데 병원비로 통장 구멍 나겠구만… 내 한바이트 불쌍해 죽겠어요.”

“쉿, 목소리가 너무 커. 그건 안타깝지만 추위에 강해지지 않으면 여길 뜨는 것 외에 달리 나아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엔 일주일만 버티면 되니까 힘내라고.”

“이 짓을 한 달을 하려고 했다고? 신고 안 들어간 게 용하다, 용해.”

제자들은 구석에서 저마다 푸념을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총감독으로 군림하고 있는 부가주의 신경을 더 거스르지 않으려면 입을 조심해야 했지만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만을 감추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굴의 외진 장소까지 들어와서 기웃거리던 트레이너들이 더러는 드래곤 조련사들에게 배틀을 신청하기도 했다. 트레이너들, 특히 드래곤 조련사들 사이에서는 누군가가 배틀을 신청하면 받아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어울려 주고는 하였는데, 제자들의 얼굴 위에는 낡고 지친 표정이 항상 들러붙어 있었다. 때문에 외부인에게는 드래곤 조련사란 감기에 걸리기 쉬운 체질을 가졌다거나 추위에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부가주는 이러한 분위기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얼마 안 있으면 가문의 평판을 결정지을 수 있는 비무가 열릴 텐데 이렇게나 해이한 태도로 훈련에 임하다니, 그에게는 여간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운 그림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쌍둥이섬의 얼음 동굴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작달막한 눈뭉치는 머잖아서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하운에게 성큼 다가오고 말았다.

하운은 킹드라의 비늘을 닦아주다 말고 얼이 빠진 낯으로 상대방을 바라봤다.

“……뭐?”

“배틀하자고요.”

현우는 답지않게 초조해 하는 기색으로 채근했다. 하운은 입을 헤벌린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금쪽같은 휴식 시간에 찾아와서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봉창을 두드리다 못해 부술 지경이다. 하운은 파트너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을 교환하고는 어렵사리 대답했다.

“대련은 어제 했잖아. 그제도 했고.”

‘나랑 싸워서 한 번 지고 한 번 이겼으면 그걸로 족하지 않냐’고 덧붙여 물으려던 하운은 중간에서 끊어 들어온 문장에 인상을 구겼다.

“후계자가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다른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판에.”

“아니, 휴식 시간이라서 휴식 좀 취하고 있는 건데. 말을 왜 그렇게 하는 거야…”

현우의 불안한 눈이 저만치에 앉아있는 부가주를 휙 향했다가 다시 하운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는 무엇을 말할 듯 한참을 우물거린다.   

“…해 주세요. 결투.”

하운과 그믐의 눈이 동시에 둥그레졌다. 

“…결투? ‘용의 결투’말야? 왜?”

‘이거, 특별히 누군가에게 신청하거나 하는 절차같은 건 없나보지? 이렇게 통보만으로도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건가?’ 하운은 쩍 벌렸던 입을 힘겹게 다문 후 고집스런 태도로 버티고 선 현우에게 더듬더듬 물었다.

“아니, 대체 왜… …그걸 해서 내가 얻는 건 뭐고, 네가 얻고 싶은 건 뭔데?”

“…당신, 우리 가문에서 나가고 싶잖아요. 내가 그거 도와줄게요.”

이번에는 대답이 빠르게 돌아왔는데,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한 낌새였다. 하운이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도 떠올리지 않을 만큼 재빠른 응답에 부가적인 설명이 따박따박 붙어 왔다.

“아주 쉬운 일이에요. 당신은 힘을 빼요. 당신이 부가주님을 상대로 결투를 벌일 거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승산이 없을 게 뻔하니까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드래곤 조련사에 가장 목을 매다는 수제자가 불명예를 자처하면서까지 이렇게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운은 이를 알 만했지만 속단하고 단정짓지 않았다. 그저 ‘내가 외할아버지를 상대로 결투를 신청하겠다는 것까지 짚고 있었다니, 그렇게나 티가 났나?’ 놀란 가슴을 조용히 진정시키면서 상대방의 불안스럽게 굳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아주 예전에 스승에게 ‘부가주에게 용의 결투를 신청하고 승부를 보겠다’는 포부를 밝혀 두기는 하였지만, 정작 하운 자신조차 외조부를 상대로 승기를 쉽게 거머쥘 수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다름아닌 자신의 형제를 손쉽게 찍어누른 인물을 초심자의 능력으로 뛰어넘겠다니, 제삼자인 현우가 직접 언급해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운 또한 내심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던 것이다. 언제쯤이면 부가주에게 정면으로 대들까, 위와 같은 심리 때문에 계획이 지지부진 늘어지려는 찰나 ‘라이벌’이라는 인물이 다짜고짜 길을 터 주겠다며 다가왔다. 

‘얘도 내 입장을 생각하고 결투를 신청하는 건 아니겠지. 파란을 손수 불러일으키겠다면 나야 확실히 손해를 볼 입장이 아니긴 한데…’ 

하운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구 일렁대는 하늘색 눈동자를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좋아. 받아줄게, 그 결투.”

어쩐지 그믐이 조금 불만스러운 툴툴거림을 내뱉는 듯 했지만, 하운은 이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만 나도 최선을 다 할거야. 내가 힘을 빼면 그건 결투가 아니라 짜고치는 사기극이지. 가문의 실력자들 앞에서 금방 탄로날 거란 말야. 그러니까 네가 결투에서 정당성을 얻고 싶다면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자신의 결투 신청이 승낙되자 낯빛이 대번에 바뀌던 수제자는 거듭 긴장의 빛을 떠올리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 그런지 이런 급격한 표정 변화가 꽤나 새롭네.’ 하운은 쓸데없는 생각을 흘리며 고심하는 체 입을 가렸다.

“그럼 내가 이겼을 경우도 상정해야지. 최근에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가 내 방을 뒤졌거든? 만일 내가 이기면 범인이 누구인지 진실을 알려줘.”

“정말 그것 뿐인가요?”

현우의 눈이 연신 깜박거렸다. 후계자가 무언가 크나큰 요구를 해 올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운은 팔짱을 턱하니 끼고 엄격하게 말했다.

“별 게 아니라 아주 중요하다고. 내 소중한 사생활이 침해를 받았단 말야.”

“그거 범인 접니다.”

“……야!”

기껏 목소리까지 깔고 분위기를 잡았건만, 수제자는 매우 간단하게 사실을 털어 놓아서 상대방의 복장을 들추다시피 하였다. 되돌아온 뻔뻔함과 양심의 비가책 중 어느 부분에 대해 화를 내야 할 지 하운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수제자는 진실만을 말하는 약이라도 복용한 것처럼 숨은 사실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주문은 부가주님이 내리셨습니다. ‘당신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잡아라’고요. 저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 당신의 사적 공간에 들어간 게 맞지만, 단지 수색하는 시늉만 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아무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부담감 심한 주제가 무사히 넘어가자 평상시의 페이스를 되찾은 듯 수제자의 말투가 다시 공손해졌다. 뒷목을 잡아 볼까 고민에 빠져 있던 하운은 이윽고 생각하기를 포기하며 가까스로 물었다.

“…그걸 나 보고 믿으라는 거야?”

“제 목숨을 걸고서 말씀드리죠.”

그야말로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얘는 무슨 경을 치려고 이런 대답을 스스럼없이 내놓는담?!’ 하운은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앓는 소리를 삼켰다.

“아, 아니, 그것까지 걸지는 말고… … 하아, 좋아. 시늉만 했다고 쳐. 어째서 그랬어?”

현우는 그 특유의 속내를 감추는 눈빛을 떠올렸다. 약간의 침묵 후 그가 고요한 음색으로 답하였다.

“약점이 잡히기까지 하면서 당신이 가문에 남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방을 뒤진 흔적을 남긴 의도가 따로 있었는지, 아니면 방을 뒤엎고 나서 귀찮은 나머지 정리를 건너뛰었는지, 애초부터 방을 뒤질 생각이 없었지만 심술을 부려서 일부러 방을 뒤엎은 것인지…’ 난장판이 되었던 방에 대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던 하운은 이제 와서 꼬치꼬치 따져 봤자 건질 것은 더 없겠다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도 할아버지가 싫은 거야?”

‘그 가문에 할아버지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지 의문이긴 한데.’ 융통성의 유무 여부를 따지자면 고지식하면서 지나치게 엄격한 외조부보다는 한결 유연하게 가내 정치를 돌보는 외조모 쪽의 평판이 훨씬 나은 형국이다. 그 외조모마저도 손주를 가문에 묶어 놓고 싶어 하셔서, 그 손주인 하운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 모두 거기서 거기라지만. 현우는 그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낯빛을 유지하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건 아닙니다. 가주님과 부가주님은 갈 곳 없던 저를 데려와 주신, 제게 있어서 크나 큰 은인들이시니까요. 단지… 의문스러울 뿐이죠.”

“…뭐가 의문스러운데?”

이해가 갈 듯 하면서 제 입장과는 차이가 큰 문장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질문이 튀어나갔다. 그러나 현우는 이쯤 하여 다시 신중한 태도를 되찾고는 건조한 어조로 대화문을 끝맺었다.

“…거기까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결투에는 다른 것을 거십시오.”

후계자와 수제자가 용의 결투를 벌인다는 소식이 다른 제자들에게 알려지면서 훈련장의 분위기는 곧장 뒤바뀌었다. 구경꾼 겸 결투의 공증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는 기대의 열감이 싸늘한 기온을 서서히 데우기 시작한 가운데, 결투장으로 사용될 동굴내 공터로 걸어들어오는 이들을 향해 시선이 모여들었다. 하운은 동굴 가장자리에 위치한 바위–딴에는 상석으로 쓰이는 모양이다–에 올라 앉은 외조부를 힐끔 쳐다봤다. ‘지켜보겠다’는 심산이 만만한 얼굴이 훤히 보였다.

“…….”

속이 복잡하게 부글거렸다. 하운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외조부를 외면하며 결투 장소에 올라섰다. 킹드라가 들어간 몬스터볼이 손아귀에서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그것이 제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파트너가 볼 속에서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하운은 반대편 배틀석에 오르는 수제자를 최대한 의연한 자세로 맞이했다. 심판을 자처한 제자 하나가 중간에서 중재를 두었다. 

“양자는 승리에 무엇을 걸 것인가?”

“수제자는 후계자의 정당성을 바랍니다.”

“지난번 내 포켓몬들을 도난한 건에 대한 진솔한 사과를 원해. 육하원칙에 따라서, 이 자리에서 나한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

하운이 말을 끝내자마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다소 당황스러워 하는 웅성거림이 일면서, 티없이 말끔하게 정제되어 있던 수제자의 표정이 한차례 일그러졌다. 하운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외조부를 향해 심술궂게 웃었다. 제자들 앞에서 언제까지고 뻔뻔하게 권력을 휘두를 것인지 두고 보자는 심보가 담긴 웃음이었다. 심판은 헛기침을 뱉어 결투 참여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에 엄숙한 목소리로 승부의 시작을 알렸다. 

두 드래곤의 포효가 동굴내의 너른 천장을 타고 회오리쳤다.



 

얼어붙은 날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육중한 몸체를 땅으로 추락시켰다. 쿵. 지면에 거구의 드래곤이 무너져 내리면서 돌멩이나 자갈 따위가 이리저리 튀었다. 패자를 내려다보는 해룡(海龍)의 시선은 그저 차디찼다. 멀찍이서 마주보고 선 두 조련사의 낯빛은 상반되어 주위에 흐르는 쥐죽은 분위기를 단단히 굳혀두었다. 충격을 받아 무표정에 금이 가는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던 상록색 눈동자가 빙글 돌아가 심판을 채근하였다.

“…보, 보만다 전투불능. 승리는 후계자가 가져갑니다.”

허무할 정도로 빠르고 일방적으로 끝난 결투였다. ‘왜지?’ 평소의 페이스를 내려두면서까지 걸었던 승부였을 텐데. 하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현우를 건너다 보지만, 그 수제자는 그러한 시선을 신경 쓸 계제가 아닌 듯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포켓몬을 회수하는 폼이 딱 그랬다. 사위를 내리누르는 침묵은 공증인 내지 구경꾼으로 참여 중이던 다른 조련사들이 잠자코 깨트려 주었다. 

“…보만다가 약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운 님께서 비바라기를…”

“킹드라가 확실히 속도 면에서…”

“…냉동빔이 평소보다 효과가 더 강하게 나왔던 것 같다.”

여러모로 패자를 배려해 주지 않는 대화였다. 하운은 가히 착잡해진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래가지고서는 내가 악당이 된 것 같잖아.’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을 전력으로 가리는 수제자의 모습에서 하운은 어째선지 그날 밤 연분홍시티에서의 제 모습을 떠올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현우는 승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등을 돌려 전장을 이탈했다. 결투의 대가로 걸었던 공식적인 사과의 말은 내지 않은 채였으나, 어떤 말을 꺼낸들 어수선해진 마음에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뱉는지조차 모를 것이므로 하운은 이대로 그를 보내주었다. 수제자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다른 제자들의 수근거리는 말소리가 한층 커지는 순간이었다. 킹드라에게 상처약을 발라주고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나무열매 주머니를 뒤적이는 사이 둔중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잔머리를 굴리기는 했지만 힘은 봐줄 만하더구나. 잘했다. 그래야 내 손녀지.”

하운은 주머니의 입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문을 나가겠어요.”

낭랑히 퍼지는 목소리가 수런하던 공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말소리들이 일제히 뚝 그치고 수십의 눈들이 하운에게, 혹은 부가주에게 쏠렸다. 

“……뭐야?”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는 가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하운에게는 몇 달을 내리 벼르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아이는 당당하다 못해 당돌한 자세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이다.

“예전에 말씀하셨죠? 제가 저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 가문 밖으로 보내주겠다고요. 저는 이제 그만큼 강해졌으니, 이제 약속대로 가문을 나가게 ‘허락’해주세요.”

‘당신 입으로 하신 말씀을 물리시겠느냐’는 도발적인 의미까지 함축된 문장이었다. 노인의 노회한 사고는 이를 능히 잡아낼 수 있었으나 불과도 같은 성질은 어휘를 우아하게 고르는 데 실패하였다.

“버릇이 고약해졌군… 온새 놈이 널 그렇게 가르치더냐?”

허, 하고 짤막한 숨을 뱉으며 하운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하운은 순식간에 매섭게 벼른 눈매로 자신의 외조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외조부가 자신의 스승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제 앞에서 스승의 욕을 들먹이는 것까지는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마주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사납게 갈라졌다. 

“뜬금없이 선생님을 왜 끌어들이세요? 애초에 가문이랑 아무 상관 없는 아이를 억지로 데려와서 가두려고 했던 것부터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지금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계신 거잖아요! 저한테, 가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어디선가에서 킥 하는 소리가 터졌다가 황급히 사그러들었다. 이제 외조부는 서슬퍼런 눈빛으로 하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 무엇이라도 쏟아부을 것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으나 음성은 없이 묵음만 곱씹고 있을 뿐이다. 부가주와 후계자 사이를 어지러이 오가던 눈길들이 불안스레 떨리며 이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네가 정녕, 어찌 감히…”

부정의 의미를 담은 어절이 뚝뚝 끊어져 나왔다. 부가주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분노를 표하기만 했다. 하운은 짐짓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순순히 보내줄 리는 없을 거라고, 애진작에 기대는 버려 두었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라는 뜻의 문장이 하운의 입속에서 응결되었다.

“‘허락’하시기 싫다면… 제가 직접 허락을 얻어내죠. 부가주님께 용의 결투를 신청합니다.”

자신에 대한 취급을 가문을 잇는 도구 쯤으로 여기는데 웃어른에 대한 공경을 바라다니 욕심이 과했다. 용의 결투라는 무자비한 전통을 굳이 따라주는 것만으로도 가주와 부가주는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이라고, 하운은 그리 단정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은 내가 여기서 바로 결투를 질러 버리는 것도 모르시겠지… 근데 저도 제가 이럴 줄 몰랐는 걸요.’

만일 온새가 이 상황을 보았다면 크게 놀라서 펄펄 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참을 만큼 참았고, 이제는 내가 온전히 누려야 마땅한 것을 찾을 시간이 왔다. 하운은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아이의 이성은 한창 얼어붙어 있었고, 이를 증명하듯 하얀 숨결이 덧없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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