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으로 향하는 여정

홀로 길을 돌아가는 발자국 (上)

열 살의 겨울

BGM


한 달 간의 일탈을 즐기고 가문으로 돌아와 보니 분위기는 이전보다 더욱 살벌하고 냉랭하게 얼어 있었다. 구성원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저조하게 가라앉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 저조한 기분을 좀처럼 숨기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운은 썩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저를 응시하고 지나치는 가문의 제자를 오늘만 세 명째 보면서 이러한 집단적 우울의 원인을 다소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드래곤 조련사의 총본산으로 비무 원정을 나갔다더니 기대 이하의 성적을 안고 온 모양이다. 그러니 유일의 후계자가 본가로 복귀하자마자 앞으로 보내게 될 일상에 훈련이며 대련의 일정이 꽉 들어찼던 것일 테다. 일주일 중 첫 나흘은 개인 교습을 통해 훈련을 받고, 닷새째 되는 날에는 가문의 제자들과 대련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일정이었는데, 하운은 이를 논하는 자리에서 가주와 부가주가 딴에는 목소리를 줄이고 나눈 대화를 엿들으며 ‘그나마 숨을 쉴 구멍은 생기겠구나’하고 여겼다.

“여가를 받은 아이가 한 달 내내 방종하게 바깥을 나돌았는데, 이렇게 풀어 기른다면 저 아이는 얼마 못 가서 각오가 심히 가벼워질 우려가 있습니다.”

“예전에 진영이를 다뤘던 방식대로 저 아이를 대한다면 이전과 같은 사태가 반복될수도 있소. 자기자신의 입으로 최고가 되겠다 공언하였다고 하니 이번에는 적당한 여유를 주고 지켜봄이 어떠할지?”

‘여기서 갑자기 엄마 이야기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데.’ 남몰래 귀를 기울이던 하운은 조부모의 시선과 마주치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딴청을 부렸다. 외조모가 헛기침을 뱉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조련사를 초청하여 네 스승으로 두기로 내정하였으니, 하운이 너는 내일부터 그 조련사 밑에서 수업과 훈련을 받게 될 것이란다. 이듬해 봄에 열릴 비무에 너도 참가할 수 있도록 성실히 실력을 쌓기를 바라마. 대신 매 주말마다는 가문의 사람과 함께 행동한다는 조건 하에 어디든 갈 수 있게 허락해 주겠다.”

자유 시간을 주겠다는 말에 놀란 척, 감동을 받은 척 착실하게 연기를 하던 하운은 순진무구를 가장하며 질문이 있다는 의미로 손을 번쩍 들었다. 가주는 부가주가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지 못한 체 부드럽게 물었다.

“무엇이냐?”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바로 질문하라고 캠프에서 배워서요. 저는 내년이 되어도 고작 열 한살인데, 그 비무에는 나이 제한이 없는 건가요?”

가문의 실적에 눈이 먼 나머지 용의 기술이 난무하는 전장에 어린이를 밀어넣는 것이 아니냐는 내용을 에둘러 물어본 것인데, 청자는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한 듯 하였다. 그이는 염려하지 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너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조련사가 상대로 나올 것이다. 기준이 되는 네 실력을 기르고 측정하기 위하여 앞으로 이어질 대련과 더불어 쌍둥이섬에서 겨우내 훈련을 진행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훗날의 비무에서 강자와 마주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런가요…. 그럼, 제 스승이 될 조련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네 직전 세대에서 활약했던 수제자들 중 한 명이다. 비록 지금은 다른 마을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실력만큼은 출중한 인물인 만큼 네 실력 또한 훌륭하게 키워줄 수 있을 거야.”

하운은 여전히 음침한 낯빛을 내고 있는 조부를 외면하며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불만 뿐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야.’ 아직은 가주에게 물어보고 싶은 사항이 산더미와 같았지만 하운은 이쯤에서 잠시 물러나기로 하였다. 욕심을 내더라도 딱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이다음의 수를 계획할 여유를 얻을 수 있으므로. 가주는 이만 물러나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고, 하운은 공손히 고개를 꾸벅이고는 본당을 후다닥 빠져나왔다.

본당에서 자기 방이 있는 별채까지 가려면 저택의 긴 복도를 걸어가야 했기에, 그 길을 지나는 도중에는 원치 않았더라도 가문의 제자들과 사용인들을 몇몇 마주쳐야 했다. 하운은 제 앞에서 예의를 차리고 인사를 해 오던 이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는 것들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이 저택 내에서 자신의 입지는 가주의 뒤를 이을 정당한 혈통을 가진 후계, 즉 나름대로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 후계자라는 인물이 ‘멋대로 가문을 나가서 철없이 뛰놀고 싶어 하는 천둥벌거숭이같은 꼬마’였기에 뒷공론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뒷담화로 흔히 나오는 레파토리인즉슨 ‘저런 꼬마가 장차 가문을 이을 것이라는 사실이 걱정스럽다’느니 ‘저 애 때문에 일이 두 배는 더 힘들어졌다’는 둥의 내용이었다.

‘뭐, 머잖아서 내 발로 나가줄 테니 그때까지 마음대로 씹고 뜯어 보라지. 엄마가 여길 나가고 싶어했다는 게 이해가 될 만한 분위기네.’

가문 사람들이 기대하는 후계자의 상이란 ‘위치에 감사할 줄 알고 가문의 규율에 앞장서서 고분고분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하운은 그들의 기준에 맞춰 줄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을지언정 자신이 이 가문에서 큰 탈을 겪지 않고 잘 살아남으려면 최소한 그들에게 맞춰 주는 시늉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운은 무작정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몰지각한 인물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수제자라는 아이가 신경 쓰이긴 하지…. 쳇, 내가 왜 그런 도둑 녀석과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야 하는 거냐고.’

자신의 방에 도착한 하운은 불을 밝히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윽, 매트리스가 너무 단단하다. 그는 뒤통수를 잠깐 문지른 다음 옆으로 돌아누워서 멍하니 눈을 꿈벅거렸다. 이름이 현우였던가. 하운의 포켓몬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짓을 저지르고도 섬마을을 대표하는 드래곤 조련사 가문의 제자라는 인맥을 이용해서 경찰로부터 훈방 조치만 받고 돌아온 그 아이, 저택 안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고요한 얼굴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나 하운은 그가 은밀히 뿜어내는 적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텅, 그 차분하고도 의뭉스러운 낯을 떠올리다가 분에 못 이겨 침대 위에서 다리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진짜 싫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와서 뭘 하는 거야…….”

작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 한탄과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하운은 화풀이삼아 베개를 퍽퍽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씨이, 몰라. 나중에 웃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 두고 보라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 풀이 죽어버리기엔 아직 너무나도 일렀다.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자세가 제법 앙증맞았지만, 소녀는 오늘 자신이 겪었던 수모들을 떠올리고 의지를 열렬히 태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운을 가르칠 스승이라는 조련사는 ‘온새’라는 이름을 가진 이였다. 그는 삼십 대 중후반 정도 되는 나이의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성이었는데, 첫인상이 쾌활하고 유들유들한 인물이었는지라 제 외조부처럼 딱딱하고 엄격한 인물상을 예상하고 있었던 하운으로서는 꽤나 의외라고 여겼다. 상록시티의 근교지에서 아내와 함께 목공방을 운영 중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는 하운의 소개문을 듣자마자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아, 너로구나! 올해 초에 상록시티까지 와서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는 가주님의 손녀딸이. 당돌한 면이 진영 누님을 닮았네~… 흠흠, 네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시냐?”

하운은 이 거침없고 산만한 문장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엄마…는 못 본지 5년 정도는 된 것 같아요. 아빠랑 같이 해외에 나가셨거든요. 그런데 엄마랑은 아는 사이세요? 저…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나요?”

온새는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대답에 잠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헝클어진 백발을 벅벅 긁어서 더욱 엉망진창으로 헝클어뜨린 다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보인다.

“그럼, 알다마다. 진영 누님과는 동기였거든. 이 가문 내에서도 상당한 강자여서 대련하는 데 늘 애를 먹었었지. 그리고 너에 대해서는… 으음, 사실은 내가 더욱 일찍이 네 스승으로 왔어야 했는데 말이야. 가주님께서 널 데리고 나를 만나러 상록시티로 오신 날에 웬걸, 네가 어딘가로 튀었… 아니, 도망쳤다고 하시지 뭐냐. 그 덕분인지 날짜가 미뤄지고 미뤄져서 오늘에야 널 만나게 된 거야. 나한테 말썽꾸러기 제자를 맡기겠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잠을 설쳤지 뭐야.”

험담인지 비아냥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하운은 왠지 스승의 스스럼없는 태도가 싫지 않았다. 온새는 제자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부스스하게 만들어 놓고는 손뼉을 짝 울렸다.

“자아, 첫날부터 바로 수업에 들어가는 건 재미가 없으니 느슨하게 시작해 보자고. 우선 네 포켓몬들부터 꺼내 볼래? 상태를 체크해 둬야 네가 어떤 길을 가야 할 지 가늠할 수 있을 테니까.”

스승이 저택과 거리가 떨어진 공터로 자신을 데리고 나온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운은 가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어서 가벼워진 마음으로 몬스터볼 세 개를 치뜨렸다. 이윽고 특유의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세 마리 포켓몬들이 저마다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깥으로 나온 물짱이는 커다란 하품을 흘려놓고는 눈을 무해하게 꿈벅거리고, 쥬레곤은 화산 인근 지대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곧바로 발라당 드러누운 가운데, 오로지 쏘드라만이 낯선 인간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바짝 달라붙어서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하운이 파트너 포켓몬을 살살 달래는 동안 그들을 찬찬히 살펴 보던 온새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넌지시 물어온다.

“조합이 독특하구나. 물타입 전문가를 노리고 있니?”

쏘드라가 의아한 시선으로 두 인간을 번갈아 쳐다보는 동안 하운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얼음타입 전문가가 되려고요.”

온새는 눈을 깜빡이더니 수염이 돋아난 턱을 가만 쓰다듬었다.

“어째서지?”

“드래곤을 얼음으로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셋 뿐이지만 나중에 여행을 가게 되면 다른 포켓몬들도 영입할 거예요.”

드래곤 조련사 스승을 앞에 두고 자신의 비전을 또박또박 밝히는 제자라니. 하운은 과연 제 앞의 인물이 벌컥 화를 낼지 어떨지 묵묵히 반응을 기다렸다. 온새는 팔짱을 턱 끼고는 자기만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짱이는 꾸벅꾸벅 졸고, 쥬레곤은 태평하게 뒹굴거리고, 쏘드라는 사위를 감돌고 있는 수상쩍은 기류에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었다. 스승은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 침묵을 깼다.

“그렇다면…….”

의미 모를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뺨을 긁적이던 손가락으로 쏘드라를 척 가리켰다. 움찔 놀란 쏘드라가 눈을 댕그랗게 뜨자, 온새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활기차게 말을 잇는다.

“그 쏘드라, 얼마 안 있으면 진화를 하게 될 거다. 우선은 그 아이가 시드라로 진화하는 것을 단기 목표로 잡고, 네 배틀 전술을 구체화 시키는 건 그 다음으로 하자꾸나. 포켓몬들에게 붙여준 이름은 따로 있니?”

다시 한 번,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이 들어온 까닭에 얼이 빠진 하운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서대로 그믐, 초승, 너테라고 해요. 그보다… 저한테 화나지 않으셨어요, …스승님?”

하운이 가리키는 포켓몬들에게 차례대로 시끌벅적 자기소개를 하던 온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화를 내? 내가? 너한테? 왜? …아니,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낯부끄러우니까 우리끼리 있을 땐 그냥 선생님 아니면 아저씨라고 부르고.”

하운은 그만 말문이 턱 막혀 버려서 입을 벙긋거리기만 하였다. ‘나를 드래곤 조련사로 키우려고 초청한 스승 아니었나…?’

“…그, 드래곤 조련사의 후계인 제가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트레이너가 될 거라고 해서… …선생님은 조련사 수업을 가르치러 여기까지 오신 거잖아요.”

하운이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자, 그때까지 초승의 턱을 쓰다듬어 주고 너테의 뱃살을 만져 주며 제자의 포켓몬들과 넉살 좋게 친화를 쌓고 있던 온새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제자를 응시하는 은백색 눈동자에는 짓궂으면서도 따스한 빛이 서려 있었다.

“아아, 그거? 하운이 네가 진로를 그렇게 잡았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리겠니. 자고로 아이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커야 하는 법이지. 내가 네게 화를 내야 할 이유는 전혀 없고, 오히려 어른으로서 널 응원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란다. 조련사 수업은… 으음, 가주님이 날더러 ‘손녀딸을 강하게 키워라’고 하셨으니… 그 조건에 그대로 따를 뿐이지. 네가 배틀 강자로 거듭나도록 가르치는 게 가주님이 제시하신 조건을 딱히 거스를 일은 아니지 않겠니?”

온새는 제 논리에 입을 딱 벌리는 제자를 보며 유쾌하게 킬킬거리고는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려 보였다. 여기 앉아 보라는 의미렷다. 하운은 그 자리로 터벅터벅 다가가서 털썩 주저앉고는 초승과 그믐을 나란히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두 포켓몬들은 안락한 분위기에 나긋나긋해진 표정으로 주인의 품속에서 늘어진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던 온새는 고개를 뒤로 젖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네가 상록시티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부터 알았단다. 너는 라씨 가문 밖에서 살아갈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처럼 반골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가문을 떠나서 각자의 길을 찾아가곤 했지. 내 세대에서는 네 어머니가 그러했고, 이번 세대에는 네가 그러하듯. 특히나 하운이 넌 똑부러지는 아이니까 네 목적지를 포기하지도 않겠지. 그렇지 않니?”

‘반골이 무슨 뜻이지?’ 하운은 스승의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잠깐 기울이지만 물음이 이어지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린다. 온새는 그런 제자를 보고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는 짐짓 기지개를 키며 흘러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그럼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세워 둔 계획은 있니?”

“‘용의 결투’로 승부를 보기로 했어요. 상대는 부가주님이요.”

온새는 비장한 목소리를 듣고 골똘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하운은 낮고도 느릿하게 깔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스승의 입에서 ‘그건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나오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인데, 조금 전과 같이 가벼운 침묵을 남기고 있던 스승은 그런 제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머리꼭지만 긁적거렸다.

“용의 결투라…. 확실하긴 하지만 대단히 위험하기도 한 방식을 택하려고 하는구나. 이거 참 힘든 수업이 되겠는걸….”

그이는 애매모호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저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는 하운을 곁눈질하고 피식 새는 웃음을 지었다. 잔뜩 긴장해서 굳은 하운의 어깨에 부드러운 토닥임이 얹혔다.

“…좋아, 내 최선을 다해서 널 열심히 가르쳐 주도록 하지. 너도 최선을 다해서 나를 따라와 주렴. 이래 봬도 수제자였을 시절에는 누님 다음으로 가문에서 가장 강한 조련사였다. 다른 녀석들이 네 길을 방해할 수 없도록, 네가 너만의 삶을 당당히 찾아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마.”

“……진짜요?” 너무나도 들뜬 나머지 탄성을 지르는 목소리가 새되게 울렸다. 온새는 단잠에서 깨어난 포켓몬들을 부랴부랴 달래 주면서도 제게 초롱한 시선을 보내오는 아이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는 비밀 이야기를 꾸미는 책략가처럼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대화는 우리 사이에 비밀로 하는 거다. 가주님께는 네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만 보고하면 되고, 수업의 성과는 매주 대련의 날에 네가 직접 보여주면 될 테니까.”

다른 아이가 들었다면 부담감에 몸을 떨었을 텐데, 눈앞의 아이는 외려 당연히 해낼 수 있다는 각오를 두 눈에 새기면서 씩씩하게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용의 새끼를 품기에 라씨 가문의 그릇이 지나치게 작다.’ 스승은 그리 생각하며 제자에게 약속을 의미하는 악수를 청했다. 크고 투박한 손에 작지만 다부진 손이 냉큼 겹쳐져 굵직한 신뢰감을 전달하였다.


그믐의 진화 시기가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하운 역시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정말로 코앞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펼쳐 놓고 다 같이 식사를 하는 도중, 제 몫의 푸드를 열심히 먹어치우고 있던 그믐이 갑자기 몸에서 빛을 내는가 싶더니 진화를 한 것이다. 하운은 입안에 들었던 것들을 급히 삼키느라 사레가 걸리고, 온새도 뜬금없이 벌어진 소동에 놀라서 목이 막히기 직전인 하운의 등을 두드려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승과 너테는 친우가 변화한 모습에 감탄을 표하며 연신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있는 동안 시드라가 된 그믐은 소동의 중심에서 넋이 쏙 빠져나간 채로 지느러미를 흐느적대고 있었다.

“그, 그믐아! 선생님, 그믐이 진화했어요!”

“그래, 나도 보고 있다. 함부로 만지지 말아라, 시드라에게는 독가시가 있거든.”

온새는 평소처럼 파트너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하운을 제지하고는 주머니 속에서 목장갑 한쌍을 꺼내 건넸다. 하운은 제 손바닥보다 큰 목장갑을 헐렁하게 착용하고 그믐의 몸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면서 온새에게 물었다.

“그믐은 언제쯤 다음 단계로 진화할까요?”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라고 해야겠지. 보자, 내가 그걸 어디에 뒀더라….”

온새는 자기 가방을 구석구석 한참을 뒤지고 나서야 찾아낸 작은 상자를 하운에게 보여 주었다. 굵직한 손가락들이 그 뚜껑을 열어젖히자, 푸르스름하고 영롱한 빛을 내는 비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진화의 영향으로 지금껏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시드라가 그에 반응하여 고개를 틀었다. 하운은 자신의 파트너가 갑작스레 난동을 부릴까 슬그머니 그믐의 몸체를 부여안았다. 스승은 그의 표정에 담긴 궁금증을 읽어내고 빙그레 웃는다.

“이건 ‘용의 비늘’이라는 특별한 도구란다. 용의 비늘을 지닌 시드라만이 킹드라로 진화할 수 있는데, 단순히 몸에 닿는 대로 진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특수한 방법이 따로 요구되지.”

꿀꺽. 탐욕스럽게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운은 약간 불안한 시선으로 제 파트너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힘을 갈구하는 드래곤 포켓몬의 눈을 장갑 낀 손으로 가리고 재차 물었다.

“그 방법이라는 건 뭔데요?”

“흠……. 그건 나중에 알려주는 편이 낫겠네. 지금은 일단 그믐이 자신의 힘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게 급선무겠구나. 그믐아, 네 조바심은 충분히 이해한다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인내를 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도 네가 네 주인에게 힘을 수월하게 빌려줄 수 있어. 알았지?”

온새도 제자의 포켓몬이 진화도구를 탐내는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시드라를 조용히 타일렀다. 이에 그믐은 불만을 품었지만 다행히도 참을성이 많은 성격이었고, 나름대로 이성적인 판단도 할 줄 알았기에 얌전히 물러나는 행동으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딴에는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서 주인을 억누르고 있는 자들을 눌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았지만,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힘에 대한 섣부른 추구가 폭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시간은 아직 많아, 그믐아. 내가 옆에서 쭉 도와줄게.”

그믐은 제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끼고 마음을 조금 더 놓아 보기로 하였다. 당분간은 예전처럼 하운의 온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자신이 이 작은 주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만 한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그믐은 주인의 거대한 각오를 지탱해줄 수 있을 때까지 힘을 기르고자 굳게 다짐하였다.



온새에게는 드래곤 조련사라는 직함이 다소 어색해 보이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이는 훈련 도중에 어떠한 포켓몬도 내보내지 않았거니와, 드래곤 조련사들이라면 흔히 갖추었을 날카로움은커녕 어떠한 호령이나 꾸짖음도 내지 않고 제자를 가르쳤다. 드래곤 포켓몬에 치중한 육성을 고집하지 않고 하운이 데리고 있는 모든 포켓몬들이 공평하게 경험치를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하였다. 매주의 대련에 대비하여서는 가문에서 내세우는 방침인 위력 중심 배틀 이외에도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이용한 배틀 방식을 가르쳤다.

“드래곤의 파괴적인 본능을 끌어내겠다면, 조련사는 그 힘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져야 한다. 혹여나 드래곤들이 날뛰는 전장에서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휘말린 이들에게는 재앙이 들이닥친 것과 마찬가지가 되니까 말야. 이를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는 건 비단 조련사뿐만이 아닌 모든 트레이너들의 의무이기도 하지. 그 의무를 제대로 지킬 줄 알아야 진정한 강자라고 말할 수 있단다. 혹자는 포켓몬이 공격 기술 말고도 온갖 변화기를 구사하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되었다고 말하기도 해.”

단순한 면에서 바라보자면 오로지 한 전술만을 고집할 경우 적에게 쉽게 파훼당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에, 여러가지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배틀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논지 역시 존재하였다. 하운은 포켓몬의 기술 효과와 지속 시간, 타이밍, 부가 효과 등을 심도 있게 익히면서 머리를 부여잡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럭저럭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었다. 온새는 제자에게 대련에서 무조건 승리할 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대련에서 져도 괜찮아, 너와 그믐의 약점만 잘 파악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초승과 너테가 그믐의 좋은 훈련 상대가 되어주고 있으니까 크게 걱정할 건 없겠다만….”

하루치의 훈련을 끝낸 목요일 오후, 나흘간의 배움을 총점검하는 시간에 온새가 꺼낸 말은 노곤하게 지쳐 있던 하운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데 충분한 작용을 하였다. 하운은 제 포켓몬들의 몸에 생긴 상처에 약을 골고루 뿌려 주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스승은 팔짱을 낀 자세로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어 얼굴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하운은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서 씁쓸한 맛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치료를 마친 초승이 스스로 주인의 품에 치대는 행동을 가만히 받아주며 물음을 던졌다.

“선생님은 왜 가문에 남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셨어요? 엄마만큼 실력이 뛰어나셨다면 엄마가 가문을 나간 뒤에도 선생님이 후계자 자리를 이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다음 가문의 문제점들을 손수 뜯어고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어질 문장은 그냥 삼켜 버렸다. 해를 등지고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퍽 알쏭달쏭하였다. 온새는 제자의 질문에 돌려 줄 대답을 가다듬느라 시간을 들이는 눈치였고, 하운은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며 눈길을 약간 내리깔고 물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화의 시기가 느릴 뿐 경험치는 착실히 쌓고 있다는 진단을 들은 이후로 초승은 더욱 태평스레 구는 중이었으며, 그런 분위기 덕분에 하운은 마음속에 떠오르려는 초조함을 일찍이 제치고 평온함을 챙길 수 있었다. 이번의 침묵은 꽤 긴 편이었지만 결국에는 대답이 돌아온다.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여서 지금은 제대로 된 답을 들려줄 수는 없겠어. 어떻게든 압축해서 말해 보자면, 내가 가문을 나갔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내가 가문에 남아서 후계를 잇는다는 선택지도 불가능했고, 당시의 나는 가문에 남을 마음이 전혀 없었단다. 네 수업 시간 때 나의 포켓몬을 꺼내지 않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고 말이다…….”

온새는 속이 답답하거나 심란할 때마다 으레 그랬듯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고는 제자와 마주보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하운은 여전히 온화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픈 빛을 머금고 있는 은백색 눈을 발견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질문을 잘못 꺼냈나 하는 후회가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힐 무렵, 온새는 빙그레 미소를 그리며 비딱한 자세로 턱을 괴고 하운에게 물어왔다.

“하운이 너,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면 공방에 놀러 올래? 바깥 공기도 쐴 겸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할 겸 해서 말야. 아예 우리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되고.”

부정적인 반응이 올까 남몰래 마음을 졸이고 있던 하운으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하운은 커다랗게 뜬 눈 그대로 스승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홍련섬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둘째치고, 타인의 보금자리에 한 번도 초청을 받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돼요?” 제자의 얼떨떨한 음성에 스승은 평소처럼 유순히 눈썹을 휘어 보였다.

“안 될 일은 아니지. 주말마다 가문의 사람이 동행한다는 조건 하에 네 마음대로 외부를 돌아다녀도 된다면서? 내가 네 스승인 이상 엄연히 가문의 사람 행세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 아내가 널 무척이나 보고 싶어하거든.”

“아내 분께서 저를요…?”

기분이 얼얼하다 못해 완전히 어리둥절해지는 대목이었다. 온새는 제자와 세 포켓몬들의 고개가 일제히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 퇴근하고 나서 네 이야기를 해 줬더니 말이다. 너한테 안주인님 자랑도 할… 아니, 이게 아니라.”

그는 서둘러 헛기침을 내뱉고는 윙크를 하듯 눈을 깜빡였다.

“토요일 아침에 홍련마을 선착장으로 마중을 갈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나오렴. 내일 대련도 힘내고.”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보던 하운은 상대가 손을 들고 내밀어 오자 저도 얼떨결에 손을 들었다.

“다른 녀석들이 못살게 굴면 나한테 말해라. 내 제자 괴롭히는 녀석이 있으면 혼구녕을 내줄 테니.”

짝, 소리와 함께 각자의 손이 공중에서 맞부딪혔고, 하운은 그제야 온새를 따라서 히죽이는 웃음을 짓는다.


그로부터 이틀 후의 아침, 홍련마을 선착장의 대합실에 한 소녀가 앉아서 제 몸통만한 배낭을 끌어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른 아침 시각이어서 그런지 주변을 오가는 사람의 수는 현저히 적었고, 간혹 누군가가 앞을 지나칠 때면 그는 퍼뜩 눈을 뜨고 뒷모습을 확인했다가 금세 또 눈을 감고는 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감시의 눈빛도 가물가물한 것이 졸리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는데, 감시를 받고 있는 장본인은 이를 성가시게 여기는 대신 차라리 안쓰럽게 생각했다. 가문에서 도주를 시도한 전적이 두 번이나 있는 후계자를 그냥 내보내기에는 불안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가문의 제자를 따로 불러다 감시원으로 붙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전날에 늦은 저녁까지 대련이 이어지는 바람에 참여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피로한 상태였지만 가주와 부가주는 이를 딱히 신경쓰지 않는 듯 했더랬다.

하운은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비비며 억지로 잠을 쫓아낸 뒤 대합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힐끗 올려다봤다. 조금 있으면 태초마을과 홍련마을을 오가는 첫 배가 들어올 시각이었는데, 자신의 스승은 매일 아침 얼마나 일찍 일어나길래 이른 시각의 교통편을 그 동안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는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하운이 그러한 상념을 흘리며 나른하게 하품할 무렵이다. 대합실 바깥에서 무언가가 요란하게 퍼덕이는 소리와 함께 낯선 울음소리가 들려와, 하운은 눈가에 그렁이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구석 자리에서 밑으로 천천히 기울어지던 고개가 동시에 번쩍 들렸으나 하운은 이를 돌아보는 일 없이 부산한 동작으로 배낭을 매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당장 그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좀 늦었나?”

하운은 온새의 옆에 있는 포켓몬을 보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커다랗고 둥그런 귀와 날렵하고 길쭉한 몸매, 그리고 성인 세 명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널찍하고 거대한 날개를 가진 포켓몬이었는데, 하운은 제가 가문에 머무르는 동안 다양한 드래곤들을 보았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었어도 제 스승이 데리고 온 포켓몬의 종류는 본 적이 없었다.

“그… 포켓몬, 선생님의 파트너인가요?”

“어어, 그래. 음번이라고 하는 녀석이지. 이번이 서로 초면이지? 음번, 내 제자에게 인사하렴.”

일견 사나운 낯으로 하운을 굽어보던 음번은 주인의 말에 유순히 몸을 낮추어 어린 손길을 허락해 주었다. 하운은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서 음번의 북실한 털을 조심조심 매만져 보다가 문득 시선을 맞추었다. 멀찍이서는 눈매가 날카롭고 몸집도 커서 위험해 보였던 드래곤이 가까이서는 온후한 인상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제 주인을 닮아서 낯선 인간에게 상냥하게 굴어 주고 있었다. 소녀의 머리맡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본 음번은 이윽고 장난스레 작은 얼굴을 큼직한 혀로 핥았다. 졸지에 안면이 축축해진 하운은 냅다 음번을 끌어안고 목털에 얼굴을 파묻는다.

“드래곤 포켓몬은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잘만 어울리는구나? 친해진 김에 이것도 음번한테 줘라.”

감시인 역할을 무사히 끝마친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온 온새는 거리낌없이 교감을 나누고 있는 둘의 모습을 보고 나직이 감탄하더니, 얼굴이 온통 침과 털오라기 투성이가 된 하운에게 잘 익은 복슝열매를 건네 주었다. 하운은 냉큼 열매를 받아먹고 기쁘게 그릉대는 음번에게서 시선을 떼고 새초롬히 대꾸했다.

“선생님네 음번이 저한테 잘해주니까 괜히 가시를 세울 필요도 없는 걸요. 음번을 타고 여기까지 오신 거면 섬 밖으로 갈 때도 날아가실 건가요?”

“음, 아니. 날아가는 도중에 자칫하다 떨어질 수 있어서 태초마을까지는 배를 타고 갈 거야. 어지간히 숙련된 상태여야 음번의 비행 속도를 견딜 수 있거든.”

온새는 기대에 차올랐던 눈빛이 실망하는 것을 보고 킬킬거린 뒤, 열매를 꿀떡 삼키고 입맛을 다시고 있던 음번을 볼 속으로 회수했다. 때마침 태초마을 방향에서 온 배가 선착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태초마을에 도착한 뒤에는 차를 타고 이동할 거야. 그리고 참, 내가 널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가문에다 얘기해 둘 테니까 다음부터는 너 혼자서 나오렴. 감시를 받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번거로운 일이잖니.”

“‘다음부터’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리 되물으니 스승은 조금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어… 매 주말마다 나오는 건 좀 피곤하려나…? 네가 본가에 남아 있기 갑갑해 할까 봐서, 으음, 네가 쉬고 싶다면야…”

“전 완전 좋아요!”

사실 먼저 이야기하려고 타이밍을 노릴까 하고 있었는데, 스승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다니! 하운은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뻐하다가 뒤늦게나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하였다. 온새는 그만 껄껄 웃고 말았다. 

“정말 어지간히도 거기 머물기를 싫어하는구나. 오냐, 관동지방 내라면 네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함께 가 주마. 네 친구들을 만나러 가도 좋고, 그런 날이면 나는 다른 데서 기다리고 있지 뭐.”

태초마을로 향하는 작은 배가 천천히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는 동안 그 갑판 위에서는 한 아이의 환호성이 조그맣게 터져 나온다. 바닷바람은 장난꾸러기처럼 음성을 낚아채고는 반대편으로 널리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스승의 집은 상록시티 시내와는 거리가 떨어진 교외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숲과 인접한 땅에 야트막하게 지어진 단독주택 앞에서 온새의 미니밴이 멈춰 섰고, 처음 보는 경치에 눈이 동그래진 하운은 곧바로 차에서 뛰어내린 뒤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화산재 냄새가 섞인 섬의 공기보다 확연히 맑고 녹음까지 가득 찬 까닭으로 아이는 그만 감회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유배’를 당한 지 한 달이 될 까 말까 했는데도 이렇게나 그립게 느껴지다니. 스승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 봐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는 구경 삼매경에 빠진 제자를 두고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어릴 적 살았던 갈색시티의 집은 친오빠와 단 둘이, 가끔은 하운 혼자서 남아 있어야 했기에 쓸쓸한 분위기가 곧잘 흘렀다. 홍련섬에 있는 외가의 저택은 제자를 여럿 들인 드래곤 조련사 가문답게 규모가 무척 컸지만, 전투와 단련으로 이루어진 일상은 척박한 환경과 어우러져 더욱 삭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색채의 세상에서 살다가 잠시 빠져나와 색채를 맛보다 다시 무색채 속으로 끌려 들어갔던 아이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정경 속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뛰어놀기 딱 좋은 넓이의 마당 한 켠에는 텃밭이 가꾸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 장독대가 늘어서 있었다. 은근하게 흐르는 구수한 내음을 맡으며 걸음을 옮기던 하운은 본채의 뒷편에 세워진 가건물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들어 그 안을 살짝 들여다 보니, 목재와 나무판이 차곡차곡 보관된 창고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장비가 즐비한 작업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부를 자세히 구경하고 싶은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곤란할 것 같아서 입구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거기가 우리 공방이야. 들어가 보고 싶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하운은 제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구태여 짚어보노라면 온새는 수업 시간 때 개인사를 잘 꺼내지 않는, 이른바 은근히 비밀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하운은 스승의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그가 상록시티에서 가족과 함께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몇 번인가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흘려 넘기기 일쑤였는지라 먼저 물어본 사람의 호기심만 점점 왕성하게 커질 뿐이었다. 하운이 내심 외박일을 기다렸던 이유는 이러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물론 하운은 타인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취미는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이가 가질 법한 궁금증은 어떤 면에서는 진부한 법이다.

다시 돌아와서, 하운은 제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거구의 여성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발랄하게 반짝이며 방문객을 바라보는 백금색 눈이 아이가 느낄 위압감 따위를 멀리 쫓아내 준 덕분이다. 

“아차, 내 소개부터 해야지. 내 이름은 안다란다.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르렴. 네가 하운이지? 네 이야기는 온새한테 많이 들었는데, 직접 이렇게 만나 보니 너무 반갑네.”

안주인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 하운은 생각지도 못했던 친밀함이 돌아오자 다소 당황하여 뺨을 발그레 붉혔다. 그이는 스승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한층 더 강렬한 느낌이 드는 쾌활함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만일 태양이 인간으로 변한다면 이런 인간상을 가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떠오를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 아이한테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대해 주시다니,’ 절대 싫지는 않았고, 오히려 기쁠 정도였는데도 기분은 이상하더랬다. 

스승의 부부와 함께 보내는 하루는 놀라울 정도로 편안했다. 안다와 함께 공방 체험을 하다가 ‘점심 먹으러 들어오라’는 온새의 부름을 듣고 집에 들어가서 배를 두둑하게 불린 뒤–가사일은 부부가 돌아가며 맡고, 특히 요리는 스승이 전담한다고 했는데, 그의 솜씨가 훌륭해서 하운은 그릇을 싹싹 비워 먹었다–뒷마당과 이어진 숲속에서 식후 운동 삼아 포켓몬들과 한참 뛰놀다 들어가면 텃밭에서 거둬 들인 과일을 간식으로 먹었다. 안다의 파트너 포켓몬 야도킹과 마주 앉아서 장기를 두고–야도킹이 인간 아이에게 장기를 가르친 것에 가깝다–대청마루에 앉아서 느긋하게 햇빛을 쬐다 어느새 낮잠까지 자게 되었다. 너무나 편안함을 만끽한 나머지, 해가 뉘엿하게 질 무렵에야 부스스 눈을 뜬 하운은 어리둥절 담요를 끌어쥐며 ‘이래도 되나’싶은 생각을 흘렸다. 

늦오후를 가로지르는 적막 속에서 한데 뒤엉켜 잠든 물짱이와 쥬레곤의 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그는 시드라까지 꺼내어 놓고는 마루에 걸터 앉았다. 볼 속에서 마찬가지로 선잠에 들었던 모양인지, 그믐은 석양빛에 눈을 연신 끔벅거리며 등지느러미를 흐느적 휘저었다. 하운은 잠들어 있는 두 포켓몬들을 눈짓하고는 조용히 하자는 의미로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운 뒤, 그믐을 양팔로 안아들고 탐색을 다니듯 집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진화했다고 무게가 이만치 늘어났네,’ 하운은 파트너의 ‘귀’에 해당될 지느러미에 속닥거리며 숨죽여 키득거렸다. 전날의 대련 때문에 다소 힘이 빠져 있었던 시드라는 잠깐 사이 휴식을 취했다고 원기를 회복한 모양인지 힘차게 주둥이바람을 뿜었다. 집주인 내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탐색을 끝낼 요량으로 정신을 말짱하게 깨우친 하운의 시야 속으로 작고 거뭇한 덩어리가 허공을 휙 가로지르는 광경이 들어왔다. 시드라의 동그래진 눈망울이 주인의 시선 궤적을 뒤따랐다. 찰팍, 가느다랗지만 불길한 소리가 정적을 끊었다. 

“헉.”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장식장 선반에 나열된 액자들 중에서 가장 큼직한 액자가 시드라의 먹물을 뒤집어 쓴 모습이 보였다. 그 액자만이 엉망이고 주변 자리는 무사한 것이 불행 중 천만다행이었다. 하운은 기겁인지 안도인지 모를 감정에서 우러난 한숨을 힘겹게 삼키고 액자에 묻은 먹물을 닦아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미끌거리는 점성을 가진 먹물은 닦으면 닦을수록 지워지긴커녕 더욱 번져갈 뿐이었으며, 결국 하운과 그믐은 까맣게 칠해진 액자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식은땀을 흘리기에 이르렀다. 이걸 어쩐담.

“어라, 일어나 있었냐? 둘이서 사진 구경…. 음?”

“아, 그, 죄송해요…”

시드라의 난처한 표정과 제자의 얼굴에 떠오른 어색한 웃음기, 엉망으로 더럽혀진 액자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던 온새는 ‘아아~’하는 의미 모를 탄성을 흘렸다. 질책이나 꾸지람이 날아오기를 침착하게 기다리던 하운은 이 모호한 반응에 의아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떨어뜨려서 깨지는 것보다야 낫지. 액자야 씻어내면 되고, 이 안의 사진은 원본이 따로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단다.” 

온새는 하운의 정수리를 쓱쓱 쓰다듬고는 액자에서 사진을 빼낸 뒤 닦아내고 오겠다며 부엌으로 저벅저벅 가 버렸다. 하운은 마저 구경하고 있으랍시고 제 손에 덜렁 쥐어진 사진을 그믐과 함께 멀건히 내려다보았다. 먹물이 액자 안쪽까지 스며드는 바람에 사진의 일부분까지 검게 물들어 있어서 인물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십 수명의 인물들이 낯선 배경에 모여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을 보아하니 단체사진 같았다. 

“어라, 그믐아. 이거… 이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 내가 입는 수련복이랑 비슷하지 않아?”

빛을 사방으로 뿌리며 산란하는 자연광에 사진을 이리저리 비추어 가며 불분명한 형상을 확인해 보는 도중에 어느 샌가 온새가 다가와 불쑥 말을 받는다.

“그거 내가 수제자 시절에 가문 차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검은먹시티에서 대전을 모두 끝낸 다음에 찍었었지, 아마?”

“그럼 이 중에 우리 엄마도 있었어요?”

하운이 단체사진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그리 물었지만, 먹물 자국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으므로 스승은 책장에서 두툼한 사진첩 한 권을 뽑아 왔다. 테이블 위에 널찍하게 펼쳐진 사진첩의 페이지를 온새가 한 장씩 거꾸로 넘기는 동안 하운은 사진 속 스승의 낯빛이 역순으로 차츰 어두워져 가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한편 스승의 옆자리에는 시종일관 그의 부인이 함께하고 있어서일까, 사진 속에 기록된 추억의 분위기는 늘상 밝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부부의 연대기 흐름을 언뜻 부러운 심정으로 지켜보던 하운은 마침내 드러난 단체사진의 원본을 보고 사고를 잠시 멈추었다. 어딘가 빛이 바래고 우중충한 분위기는 앞선 사진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인상을 주고 있었다. 수 많은 얼굴들 중에서 그나마 익숙한 모습을 찾아 보려고 열심히 사진을 훑어 보는 제자의 노력이 무색하게, 굵직한 손가락이 대뜸 사진 하단의 정가운데 위치를 짚어 주었다.

“여깄네. 보이지? 맨 앞줄 가운데.”

하운은 온새가 가리킨 얼굴을 한참 빤히 들여다 보다가 모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음… 우리 엄마… 인 것 같기도 하고?”

‘엄마의 인상이 이렇게 무기력했나? 머리도 꽤 많이 기르셨었고, 음…’

낯설다. …가물가물하다고 해야 할까. 하운은 제가 마지막으로 친모를 보았던 시기가 6년 전쯤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하고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제자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지켜 보던 온새는 별 다른 말 없이 손가락을 왼쪽 방향으로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진영 누님 바로 옆에, 이렇게 거무죽죽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이 나야. 되게 낯설지?”

하운은 또 다시 사진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숱을 바짝 깎아낸 머리의 험상궂은 인상을 가진 청년이 정면을 올곧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운은 이번에는 현실 속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길러서 가볍게 질끈 묶은, 쾌활한 인상의 인물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 무슨 일… 있었나요?”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인물이 180도 달라질 리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에 무심코 질문을 던지니, 온새는 그저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대전 성적이 무척 좋지 않았거든. 뭐, 그런 이유도 있고… 이 시기에 내가 마음고생을 꽤 심하게 했었지, 아마? 이 사진을 찍고 나서 얼마 뒤에 네 엄마와 나란히 가문을 벗어났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말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깃든 문장이었다. 하운은 절반 정도 알쏭달쏭해졌지만 다소 이해가 가는 듯해서–여러모로 강압적인 부분이 산재한 가문 환경을 떠올렸다–스승의 말꼬리를 무는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운은 자신의 스승이 가문을 벗어나기 직전 모종의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짐작했지만 캐묻지 않기로 하였다. 당장은 다른 부분이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기억이 있지 않았는데도, 왜 가문으로 돌아오셨어요?”

이 질문에 온새는 부들부들한 털이 돋아난 턱 언저리를 매만졌다. 

“전에 얘기했던 것 같지만, 이번엔 빙 돌려서 말하진 않으마. 만일 너 말고 다른 제자들의 스승이 되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면 나도 거절할 생각이 만만이었지. 다른 녀석들이야 각자 스스로가 원해서 가문의 일부가 되기를 자원한 것이지만, 넌 아니잖니. 그래서 난 네가 그 가문 속에서 상처를 입지 않기를 원하고 생존법을 함께 모색해 주는 거야.”

감동한 모습을 보여야 할 시점에서 말문이 막히는 통에 하운의 얼굴표정이 한순간 멍해진다. 스승은 언제나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화제를 전환하듯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 물어왔다. 

“내가 안다랑 어떻게 만났는지는 안 궁금해?”

…물론 그 주제도 궁금했다. 하운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온새는 헤벌쭉 미소를 짓고는 사진첩을 다시 차례로 넘겨 가면서 열심히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요약하자면, ‘가문에서 갓 벗어나 방황하던 나를 안다가 초면부터 데려다가 밥을 열심히 먹이고 푹 재우고 공방 일을 시키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다 보니, 나는 어느 새 그이에게 반해 있었고 낯부끄러운 청혼을 했는데 그대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어 하루하루 보람차고 행복하다…’라는 흐름이었다. 묘하게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사진들을 열심히 지켜보던 하운은 문득 고개를 들어 이야기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두 분, 정말 행복해 보여요.”

‘운명’같다든지, ‘부럽다’든지, 타인의 사랑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을 내놓는 데 망설인 결과 나온 말이었다. 지극히 사실이고 객관적인 감상. 상대방의 웃음기가 한층 깊어지는 걸 보아하니 이는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사람 간의 사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본질이 무엇이고 어떠한 길로써 깊어져 가는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채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데 탁월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첩의 표지가 닫히고서야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까지 황혼이 지던 하늘은 어느 새 컴컴하게 물들어 있었다. 부엌 방향에서 달큰하고 짭조름한 음식 냄새가 풍겨 와 침을 고이게 만들었다. 그새 꾸벅꾸벅 졸던 그믐까지 깨어나서 허기진 눈 깜박임을 보일 정도로 맛있는 냄새였다. 바야흐로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유이에게,


유이, 안녕! 네게 편지를 써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 잘 지냈어? 지금 쯤이면 이미 신오 지방에 가 있으려나? …먼저,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서,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우리 그때 헤어지고 나서 그간 소식 오간 게 없었잖아. 내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지나치게 엄격해서 편지도 마음대로 못 보냈거든. 

하지만, 이렇게 네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나름 좋은 소식…이라고나 할까? 외갓댁에 들어온 뒤로 나한테 스승이 생겼는데, 그 분이 이것저것 편의를 봐 주셔서 편지도 마음대로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주말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게 되었어! (관동지방에 한해서지만…) 그러니까 주말에라도 네가 시간이 된다면 우리 같이 놀러 다닐 수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써 둘게.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수업을 받고, 금요일에는 여기 조련사들끼리 승부를 해. 주말이 되면 외출을 할 수 있는데, 이때 난 스승님 댁에서 머무르거든. 스승님이 나더러 이것저것 하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된다지 뭐야. 응, 그렇게 된 거야. 나름대로 버틸 만한 생활이지만 계속 외갓댁에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잔뜩 강해져서 나중에 꼭 여길 나갈 거야. 트레이너 캠프 때랑 유이와 함께 여행을 하던 때가 너무 그리운 거 있잖아. 유이랑 배틀하기로 약속까지 했으니까, 약속도 지켜야지. 

참, 초승이랑 그믐이랑 너테 셋 다 잘 지내고 있어. 그믐이는 얼마 전에 시드라로 진화까지 했어. 초승이랑 너테는 여기 생활을 조금 따분해 하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지만… 음,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유이는 어떻게 지내? 건강해? 동생들은 잘 지내? 뭔가 즐기고 있는 건 있을까? 유이네 포켓몬들은 건강해? 새로 들어온 포켓몬 식구는 있어? 으음, 유이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네. 우리, 언제 만나서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아까도 써 놨지만, 너랑 여행을 했을 때가 좋았어. 

만일 유이가 나한테 답장을 보낼 거라면 이 편지가 보내진 주소를 쓰면 돼. 스승님 댁 주소인데 얼마든지 여기로 편지를 주고받아도 된다고 하셨거든.


그럼 유이, 다음에 편지 또 쓸게, 항상 건강하게 지내야 해!


마음을 전부 담아,

하운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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