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으로 향하는 여정

달음박질 중 쉬어가는 시기로부터

열 살의 봄

BGM


"우아, 하운! 불이 너무 강해요!"

"어? 이러면 안 되는 건가?"

"하운! 하운! 너무 한 방향으로만 젓고 있어요! 반대 방향으로 저어야 해요!"

"어? 이, 이렇게…? 헉, 탄다!"

무지개시티의 한 디저트가게 체험방에서는 아이들의 탄성과 탄식이 번갈아가며 터져나오고 있었다. 원래라면 달큰한 열매향이 모락모락 피어나왔어야 할 냄비에서는 불길한 색깔의 연기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중이었고, 이에 하운은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새카맣게 물든 반죽 덩어리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운은 자신의 실패작을 쓰레기통에 긁어 넣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아~ 역시 어렵네, 포핀 만들기. 감잡을 수만 있으면 잘 만들어 볼 만한데."

"더 시도해 볼래요? 유이가 도와줄 테니까요. 원래 포핀을 처음 만들 땐 다들 곧잘 태워먹거든요."

유이는 고운 빛깔이 나는 자신의 포핀을 완성품을 모아두는 쟁반에 굴려넣으며 재잘재잘 말했다. '역시 디저트가게 집안의 저력이구나….' 동글동글 잘 빚어진 포핀을 살피며 나지막이 감탄하던 하운이 눈을 반짝 뜬다.

"정말? 그럼 한 번만 더 해 봐도 될까? 포켓몬들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 주겠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 왔거든…."

"그런 자신감 가득한 태도가 중요한 거예요~."

두 소녀는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새로운 반죽으로 포핀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운은 이따금 반죽을 휘젓는 방향이나 불의 강도를 조절하는 타이밍을 귀띔받기도 하면서 소꿉친구와의 수다에 매진했다.

"유이네 쥬쥬하고 하운네 쥬쥬 같이 붙여두면 잘 지낼 것 같지 않아요? 보니까 둘이서 나란히 느긋한 성격이던데요."

"왠지 둘이서 낮잠 친구가 되겠지 싶던걸…. 너테 몬스터볼, 네가 준 프렌드볼이잖아? 그러니까 엄청 친한 친구가 될 거야."

"응?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아하하, 두고 봐야겠는걸요. 하운, 거기서 불을 좀 더 줄이는 거지요."

"아, 고마워. …그럼 유이네 엔트리에는 이제 네 마리가 있는 거지? 그 중 두 마리가 전기타입이고… 나중에 데려오기로 계획해둔 포켓몬은 있어?"

"응, 그리고 이쯤에서 반대로 저어요. 으음… 전기타입은 다 반짝반짝하니까 막상 만나면 볼부터 던질 것 같지요. 그 외라면 파비코라든지 스콜피라든지 눈꼬마라든지… 아! 꼬링크랑 이브이도요. 이왕이면 발바닥 젤리 말랑말랑한 아이들이 만나고 싶은거지요. 하운은요?"

"헤에. 꽤 다양하구나. 나는 콕 집어서 포획하고 싶은 포켓몬은 딱히 없었는데, 네 말을 듣고 보니 이브이… 혹하는 것 같아. 반죽이 조금 뻑뻑해지는데 이제 다시 반대로 저을까? …참, 유이의 위시리스트 포켓몬들은 관동에 서식하는 포켓몬들이 아닌걸. 다른 지방으로 여행 갈 계획도 있는 거야?"

"맞아요, 거의 다 된 것 같아요! 반죽이 완전히 굳을 때까지 그대로 계속 저어주면 될 것 같지요. 그리고~ 딩동댕! 대부분 신오지방에 서식하는 친구들이에요. 신오지방은 유이의 고향이기도 하고, 유이의 할머니께서 선단시티에 살고 계시거든요. 관동에서의 여행이 끝나고 조만간 할머니 뵈러 신오지방에 갈 거지요."

"그렇구나…."

하운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냄비를 휘젓던 국자를 빙글빙글 돌리자, 걸쭉하게 굳은 반죽이 동글동글 말려서 국자 안쪽으로 하나둘씩 굴러들어온다. 하운은 발랄한 박수 소리를 들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번에 완성한 포핀의 모양은 조금 찌그러져 있었지만 적어도 탄 부분 하나 없이 깔끔한 색을 선보이고 있었다.

"잘 하는데요, 하운! 역시 포핀 만들기에 소질이 있는 게 맞았지요."

"뭘, 다 유이가 코치해준 덕분인걸. 정말 고마워, 하마터면 빈손으로 포켓몬들한테 돌아갈 뻔했다니까."

즉석에서 열린 요리 강습은 웃음소리로 마무리되고, 아이들은 반죽으로 뒤범벅된 조리기구들을 정리하면서 관동지방의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이는 체육관이랑 콘테스트 둘다 돌아 볼 생각이지요. 하운은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나요?"

"나는 아무래도 체육관. 콘테스트 관람은 좋아하는데 참여는 안 할 것 같네."

"에, 어째서지요? 포핀도 이렇게 잘 만들 수 있는데!"

하운은 소꿉친구의 아쉬워하는 어조에 '콘테스트에 소질이 없어서….'라는 논지로 둘러대며 은근슬쩍 웃어넘겼다. 포켓몬 기술의 힘조절을 실패해서 무대를 부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꺼내기엔 역시나 낯부끄러웠으므로.

"대신 유이가 콘테스트에 출전하면 꼭 응원하러 갈게. 그리고, 음… 여행길 혼자 다니면 심심할 텐데, 우리 그냥 쭉 같이 다닐까…?"

'혼자 여행하면 외로우니까…,' 딴에는 상당히 머뭇거리면서 물어본 말에 유이는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는 것이다. "그러려고 무지개시티에 온 것 아니었나요?" 하운은 하려던 말을 싹 잊어먹고 색색깔의 홍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완전히 얼빠진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래도 돼?"

유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하운은 사람이 지어보이는 함박웃음이 이렇게나 눈부실 수 있다는 사실을 난생처음으로 깨달으며 저도 모르게 활짝 웃어버렸다.

"고마워, 유이."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유이도 심심한 건 사양인 거지요."

아마도, 가시 울타리를 벗어난 이후부터는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굳건해진 것 같았다. 그것이 본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꿈이었음에도, 한차례 망각한 다음 되찾게 되니 이제는 한계를 모르고 부풀어오르기만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좋아. 내가 마땅히 차지했어야 할 일상이니 이제부터라도 원없이 즐길 것이다.' 하운은 순식간에 드높은 하늘을 걷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20xx년 x월 x주차

관동지방의 여행길을 유이와 함께하기로 하면서 리포트를 일주일에 한 번씩 쓰기로 했다. 이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 주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는 데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다!―본가에서 온갖 책을 읽고 나왔더니 단어를 쓰는 게 애늙은이같다는 감상을 들었다… ―이번 주의 처음 며칠간은 무지개시티에 머무르면서 체육관전을 준비했다. 풀타입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체육관이라길래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너테가 얼음타입 기술을 잘 써준 덕분에 어떻게든 체육관 관장을 이길 수 있었다. 첫 번째 배지를 얻는 도전자라서 관장이 많이 봐줬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는데… 풀타입을 상대하기 위해 얼음타입을 내세우는 초보 도전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칭찬 비슷한 말을 들었으니 내 실력을 인정받은 셈치기로 했다.
-추가: 유이는 이미 체육관 배지를 두 개나 얻은 상태였고 무지개체육관은 나중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내 친구는 강하다!
-추가2: 초승이 슬슬 진화할 때가 된 것 같은데도 반응이 없다. 진화 타이밍이 조금 늦은 편인가?

이후 우리는 보라타운으로 이동했다. 캠프에서 알게 된 친구―이름은 시혁이라고 했다―집에 모여서 파자마파티를 연다는 단체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잠옷을 입고 베개싸움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또래 여럿이서 밤늦게까지 과자를 수북하게 사다놓고 수다를 떤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재밌었다(재밌다는 표현만으로 충분한지 모를 정도로 재밌었다!). 누군가가 무서운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해서 각자 여행 일상은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각자의 포켓몬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기타등등의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가 버리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모임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 그리고 정말로 베개싸움도 했다. 베개가 터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20xx년 x월 x주차

12번 도로를 따라 연분홍시티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렸던 나머지 유이와 나는 결국 길거리 야영을 하게 되었다. 트레이너란 자고로 노숙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을 왕왕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길가에 텐트를 치는 작업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들어서 결국 어떤 친절한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겨우 텐트를 설치할 수 있었다. 센터의 숙소에서 지낼 때와는 달리 야외에서 노숙할 때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서 잠들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가족에 대한 주제가 나와서 서로 한참을 떠들었던 것 같다. 유이는 자신의 부모님과 쌍둥이 동생에 관해, 그리고 나는 내 오빠에 관해서 자랑을 주고받았는데 이게 바로 가족애란 거구나 싶었다. (정말 어쩌다가 내 외조부모에 대한 얘기도 흘려버리고 다소 꽁기해졌던 기분을 유이가 북돋워주었다. "하운이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여행했으면 좋겠어요. 하운의 인생은 누구의 것도 아닌 하운만의 것이니까 말이지요!" 정말로 고마운 말이었다. 리포트에 적어두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추가: 보라타운에서 연분홍시티까지 도로가 연달아 세 구간씩이나 있는데도 중간에 포켓몬 센터가 없다는 사실이 가히 충격적이다….

다음날부터는 꾸준하게 도로를 걷고 걸으면서 포켓몬 훈련도 병행했다. 유이는 콘테스트용 기술을, 나는 배틀용 기술을 위주로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연습을 했는데 기술의 효과 확인이라든지, 강도 조절이라든지, 여러 방면에서 혼자 훈련하는 쪽에 비해 효과가 좋았다. 무엇보다 훈련의 성과로 쥬쥬 둘이서 연달아 쥬레곤으로 진화했다! 유이의 피카츄 레몬은 콘테스트와 체육관전 모두 출전한다고 했는데 무척이나 듬직해보인다…. 그렇지만 라이츄로 진화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레몬의 그 자신만만한 모습이 강인하게 보였는데 유이는 그보다는 귀여움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것도 맞다. 둘다 귀엽다. (…유이가 내 리포트를 훔쳐보지 않기를 바라야겠다!) 연분홍시티로 오는 길 중간에 잠시 13번 도로를 통해서 갈색시티에 들렀는데, 여기서 유이의 체육관 배틀을 실시간으로 관전할 수 있었다. 마티스 관장님… 배지를 두 개 이상 가진 도전자만 받겠다고 하더니 정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배틀을 진행하는구나 싶었지만, 유이와 레몬은 라이츄를 상대로 밀리는 일 없이 말그대로 반짝거리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구호에 맞추어서 공격을 연속으로 피하는 모습에서 나마저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트레이너와 포켓몬 사이의 유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이 났다. 오렌지배지를 당당하게 들고 뛰어오는 친구가 문득 눈부셨다.

20xx년 x월 x주차

트레이너 캠프에서 지원해 주는 여행 기간만 딱 한 달인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여행에 푹 빠져있다 보니 벌써 3주차에 접어들고 있다. 지금쯤이면 본가 사람들이 원정 수련을 마치고 돌아올 시기일 텐데, 이런 불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가 날짜를 확인해보니 잠시간 잊었던 불안감이 확 몰려와 버렸다. 이 여행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내 마음과 반대로 언젠가 뚝 끊겨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날마다 눈을 뜨면 바로 유이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는 게 그야말로 일상이 되었는데…… 으음, 아무래도 이번 주 들어서 날씨가 흐리다보니 부정적인 생각이 마구 떠오르는 모양이다. 이번 주의 목표는 다음 체육관 도전을 대비하는 데 집중하는 것으로 정해야겠다.

연분홍시티에 도착한 다음의 이틀간은 유이의 콘테스트 연습 돕기에 매진했다. (원래 콘테스트는 호연지방과 신오지방에서만 열린다고 하는데, 타 지방에서 트레이너 캠프가 개최되면 심사위원들이 파견되어 대회가 약소하게나마 열린다고 들었다. 전세계 초보 트레이너들의 재능을 발굴하기 위해서라나.) 유이는 트레이너와 포켓몬의 코디를 중점으로 퍼포먼스를 덧입혀서 승부를 볼 요량인 듯했다. 콘테스트 문외한인 내가 볼 땐 이미 리본은 따 놓은 당상인데―귀여움 더하기 귀여움은 세계 최강 귀여움이니까―유이는 좀더 완벽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모처럼 열리는 콘테스트인지라 다른 친구들도 참여한다고 했으니 긴장이 될 만하기도 했다. 아! 리우도 근사함 콘테스트에 도전할 것이라는 소식을 받았었다. 리우가 연습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뜻밖의 방청객 앞에서도 흔들림없이 공연을 이어가던 친구였으니 무대 위에서도 잘 해내리라는 믿음이 새록새록 솟는다.

드디어 대회 당일이 되었다! …결과부터 적어두자면, 유이와 리우 모두 콘테스트 리본을 얻었다. 솔직히 모두의 무대가 반짝거려서 공연이 어떤 흐름으로 지나갔는지 자세하게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유이는 너무 많은 관객 수에 긴장해서 실수했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모르겠고 레몬과 호흡을 맞춘 퍼포먼스에 푹 빠졌다는 것만 분명히 기억했다. 그토록 연습을 해간 보람이 넘치도록 충분했다는 느낌이었다. 리우의 근사함 콘테스트는 녹턴이라는 이름의 니로우가 주인공이었는데, 리우가 부르는 노래에 새 포켓몬의 춤이 어우러져 근사함의 극치를 볼 수 있었다. 녹턴의 춤도 대단했지만… 리우, 악기 다루는 것 말고도 노래를 정말 잘했다. 듣다보면 흠뻑 빠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콘테스트가 끝났으니 내일부터는 내 체육관전 준비에 더욱 열중해야 할 것이다. 연분홍체육관에서는 독타입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던데, 상태이상에 대비를 철저히 해 둬야겠다. 아무튼, 캠프 친구들끼리 축하파티가 열린다고 하니 이번주 리포트는 이쯤 마쳐야겠다.


"질퍽이 행동불능! 3 대 2로 도전자가 승리를 가져갑니다."

심판관이 시합종료 선언을 내리자마자 하운은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고 배틀필드 위의 쏘드라에게로 달려갔다. 쏘드라는 지친 기색이 다분했지만 주인이 다가오자 얼른 튀어올라서 품속에 안착했다.

"그믐아, 정말 고생했어. 고마워… 끝까지 버텨 줘서."

한참을 파트너 포켓몬과 함께 감회에 젖어 있다가, 체육관 관장으로부터 조언과 격려를 듣고, 배지와 상금까지 수여받고 체육관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온 하운에게로 관전자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하운은 자신의 앞에서 콩콩 뛰는 소녀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운! 하운! 유이는 분명히 봤다는 거지요! 그믐이 스스로 독을 이겨낸 거 말예요! 그믐, 완전 멋졌어요! 하운도 두 번째 배지 얻은 거 축하해요!”

쏘드라는 쏟아지는 축하세례 속에서 흐물흐물 웃다 말고 주인의 팔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것은 완전히 지쳤다는 의미였고, 이에 두 트레이너는 포켓몬센터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기절한 포켓몬들의 볼을 맡기기에 이른다. 하운은 럭키가 치료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로비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승이랑 너테는 해독까지 해야 해서 치료가 좀 오래 걸린다네… 솔직히 배틀 중간에 눈앞이 살짝 캄캄해졌거든.”

‘자신의 포켓몬을 한계까지 몰아가는 건 좋지 않다’는 관장의 조언을 떠올리며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유이가 어느새 자판기에서 후르츠밀크를 뽑아와 한 병을 건네며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도 하운이가 포기하지 않아서 다들 그 마음을 알아준 걸지도요. 여기 체육관, 관동지방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곳이잖아요.”

“그런가…? 유이가 응원을 열심히 해 줘서 힘을 낸 건 사실이야.”

하운은 꺄르륵 하는 웃음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음료수의 달짝지근한 맛을 음미했다. 배틀 내내 고전에 시달리던 두뇌가 당분을 보충받아 겨우 한숨을 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얻게 된 여유로 체육관전의 복기를 해 보려니… 

“…우와, 머리가 잘 안 돌아가. 유이, 우리 바람 쐴 겸 프렌들리숍에 갔다 올까?”

제 곁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고 있던 유이는 그 말을 듣고서 폴짝 일어섰다. 

“응, 좋아요. 겸사겸사 식당에도 들렀다 오면 어때요?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 포켓몬들 식사도 챙겨주면 좋겠다는 거지요.”

간호순은 치료에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고 했으니, 이를 기다리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유이의 제안을 따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두 소녀는 서로에게 질세라 후르츠밀크가 든 병을 비우고 조금 전보다 힘찬 걸음걸이로 센터를 나섰다. 봄의 따끈한 기운이 남은 거리 위로 땅거미가 내려앉을락 말락 하는 가운데, 그들은 센터 건물과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프렌들리숍까지 느긋하게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여행한 지 슬슬 한 달이 되어가는 거지요. 하운은 여행 기간이 끝나면 무얼 할 건가요?”

“나? 음… 글쎄, 기간이 끝나더라도 체육관은 계속 운영할 거라고 하니까, 도장깨기를 시도해볼까 해. 유이는 신오지방에 간다고 했던가?”

“응응, 그랬지요. 포켓몬도 많이 데려올 거고, 할머니도 뵙고… 으음, 그 동안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겠네요.”

“어쩔 수 없나~. 그렇지만 우리 아예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 다시 너랑 여행을 가면 좋겠는데.”

"유이는 대환영이에요! 칼로스지방에도 가고, 가보지 않았던 다른 지방에도 가 보는 거지요. 헤헤,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딸랑, 숍의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한 음을 내고, 어린 트레이너들은 자신들을 반겨주는 점원에게 나란히 인사를 건넸다. 유이가 몬스터볼 코너로 뽀르르 달려가 모습을 감춘 동안 하운은 매대를 가득 채운 상처약의 종류를 눈으로 훑어보면서 고민했다. ‘상처약과 만병통치약은 많이 사야겠고… 당장 다른 포켓몬을 포획할 것도 아니니 몬스터볼은 나중에 사기로 할까.’ 자신이 소지한 배지가 두 개가 되어서 갈색시티 체육관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지만 이대로 도전하기에는 여전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포켓몬들을 추가로 데려오기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았을뿐더러 늘어난 포켓몬들에게 동등한 애정을 줄 자신이 없었다. ‘지금 데리고 있는 세 마리에게 집중해서 배틀에 무리를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훈련을 시켜주면 괜찮을지도… 까다로운 체육관은 초반에 제패해 두는 게 유리하다고 들었는데, 그럼 초승이 진화할 때까지 기다려 볼까?’ 그렇게 바구니 속에는 포켓몬용 약만 한가득 들어갔고, 계산대 앞에서 이를 본 유이가 나직하게 감탄하자 하운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당분간 길거리 트레이너가 되어 볼 생각이야.” 

“하운, 유이가 할머니댁에 다녀오고 나면 엄청 강한 트레이너가 되어 있을 것 같지요.”

“그럼 그때 한번 우리끼리 배틀해 볼까?”

“어라, 도전장인 건가요? 후후, 유이는 사양하지 않아요~.”

프렌들리숍에서 산 물건으로 가방을 가득 채웠어도 용돈은 나름대로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둘은 마지막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근처 도시락 상점으로 달려갔고, 메뉴판 앞에서 저마다 고심하고는 금세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은 유이가 쏠 거지요! 하운이 배지를 땄으니 축하 기념으로 사는 거라고요!”

“에, 아냐, 내가 다 낼 거야. 왜냐면 내가 배지를 땄으니까!”

장난삼아 말씨름을 벌이던 아이들은 시간이 늘어지자 결국 서로가 서로의 도시락을 사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렇게 전리품을 모두 마련한 뒤 포켓몬 센터로 되돌아가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했다. ‘앞날이 캄캄해지더라도 어떻게든 틈을 들여다 볼 구멍을 찾아내서 차분히 계획을 세우면, 그 다음부터는 고민할 걱정도 없어지는 법!’ 인생의 진리를 찾아냈다는 어린이의 고취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늘 높이 승천했던 기분이 나락으로 뚝 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료가 끝난 포켓몬들을 찾기 위해 포켓몬 센터의 접수처로 찾아갔을 때, 접수원은 포켓몬들을 돌려받고 싶다는 하운의 말을 듣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아까 20분 전쯤에 찾아가시지 않았어요?"

하운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똑같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에? 말도 안 돼요, 저 방금 돌아왔는데요? 그, 그믐이랑 초승이랑 너테 전부 다 없나요?"

"예… 분명 본인 이름을 대고, 트레이너 카드까지 제시했는걸요. 인상착의도… 어?!"

그제야 하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접수원이 놀라는 소리를 냈고, 하운도 제자리에서 펄쩍 뛰다시피 하며 대경실색한다.

"진짜로 말도 안 돼요! 분명 누가 저인 척 하고 제 포켓몬들을 데려간 게 틀림없어요. 트레이너 카드도 분명… 그… 그! 위조! 위조한 걸 거라고요! 이게 진짜 제 카드인 걸요?!"

"하운? 무슨 일이에요?"

로비에 얌전히 앉아있다가 접수대에서 소란이 일자 뽀르르 달려온 유이가 상황을 물어왔고, 하운은 파래진 낯빛으로 소꿉친구를 돌아보고 앞뒤 잘라낸 설명을 토로했다.

"내 포켓몬들을 도둑맞았어!"

"네에?!"

하운은 발을 동동 구르는 유이 옆에서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내 모습으로 변장하고 카드까지 위조해서… 그럼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벌인 짓인가? 나를 잘 알 만한 사람이 누가… 누구… 아니, 그보다 어째서 이런 짓을?"

서둘러 경찰을 부르는 접수원의 모습을 절박하게 바라보던 하운은 자신의 옷자락을 마구 잡아당기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유이가 다급하게 어딘가를 가리키며 하운에게 말했다.

"하운! 저기 보세요! 하운이랑 닮은 사람이 창 밖에서…."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홱 틀자, 잿빛 머리 소녀가 건물 안쪽을 엿보고 있던 눈길을 황급히 거두고 몸을 숨기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운은 이것저것 생각할 틈 없이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뒤에서 유이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운! 포켓몬도 없이 혼자서 위험해요! 같이 쫓아가자는 거지요!"

하운은 잠시 주춤 멈춰서서 제게 염려 가득한 눈빛을 마구 쏘아보내는 소꿉친구를 돌아보았다. 분노와 절박함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는 미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겨우 떠올려 보인다.

"…고마워, 유이. 그래도 넌 경찰이랑 같이 와 줬으면 해. 내가 어떻게든 꼼짝 못하게 붙잡아 두고 있을 테니까. 응? 부탁할게."

핀치에 몰린 열 살짜리 아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안이었다. 유이는 망설이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조심해야 해요, 하운. 유이가 경찰관 데리고 최대한 빨리 달려갈게요."

하운은 접수원의 황망한 시선과 소꿉친구의 걱정 가득한 시선을 뒷통수로 느끼며 포켓몬 센터의 정문을 뛰쳐나갔다. 거리는 어두컴컴하게 물들어 있었지만 밝은 빛을 뿌리는 가로등 덕분에 앞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하운은 먼 발치에서 앞서 뛰어가는 인영을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감히 내 포켓몬들을 훔쳐? 내 손에 붙잡혔다간 봐라, 있는 힘껏 혼쭐을 내줄 테니까!' 길가의 잔디밭에서 양손에 한가득 움켜 올린 흙을 길바닥에 조금씩 흘리면서, 하운은 숨이 차오르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로 포켓몬 도둑을 뒤쫓아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로 들어선다. 멀지 않은 곳에 막다른 길이 보여,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외쳤다.

"너! 당장 거기 서! 내 포켓몬들 가지고 어디로 가려는 거야?"

한바탕 이어지던 추격전은 갑작스레 일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마무리되었다. 길목을 가로막은 담벼락을 올려다보던 도둑은 하운의 외침 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낸 하운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파란 눈빛을 마주 쏘아보았다. 도둑이 가발을 벗어내자 검은 머리카락이 드러났고, 마침내 하운은 그 얼굴을 알아보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그럼 그렇지, 생판 남이 내 흉내를 마음껏 낼 순 없겠지. 야, 너. 잔말 말고 내 포켓몬들이나 냉큼 돌려 줘. 목적이 어떻든 남의 포켓몬을 중간에 가로채면 그거 범죄라고, 알아?"

위협하듯 꺼낸 문장에도 움츠러들기는커녕 미묘한 웃음기만을 지어 보이는 아이는 가문의 수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예쁨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품에서 몬스터볼 세 개를 꺼내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드래곤 조련사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신 분이 이런 이상한 것들을 가지고 다니시다니, 부끄러운 줄 아셔야지요. 하물며 이 쏘드라마저도 가주께서 친히 하사하신 포켓몬인데, 이게 온전히 아가씨의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에 하운은 상대가 어떤 말을 뱉고 있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 제 앞에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도 부족할 판에 무엇이 잘나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뭐가 어째?" 이에 하운이 기막혀 하며 발끈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이었다. 서늘하고 거대한 기척이 자신의 바로 뒤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등골이 오싹하게 굳고, 이윽고 들려온 탁한 음성이 하운의 사기를 순식간에 앗아가 버렸다.

"그만 하거라. 네가 드래곤 조련사로 거듭나기 위한 수행을 하겠다고 하여 허락한 여행이었는데, 수행은커녕 흥청망청 놀고만 다닌 주제에 말이 많구나."

하운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외조부가 삼삼드래를 거느린 채 골목을 가로막고 서서 제 손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형형한 눈초리로 하운을 내려다보던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잘 했다, 현우야. 가문에 돌아가면 내가 친히 상을 내려주겠다."

현우라는 이름의 아이는 눈매를 얇게 휘어접고는 부가주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가운데에 몰려서 속만 절절 끓이던 하운이 치를 떠는 소리를 내었다.

"진짜… 진짜 비겁해요. 드래곤 조련사의 긍지 어쩌고 하면서 가문의 이름을 잔뜩 추켜올릴 때는 언제고, 절 데려가려고 이런 짓까지 벌인단 말예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는 모멸감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으나, 하운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면서 바락바락 대들었다. 부가주에게 버릇없이 구는 소녀가 못마땅한 듯 수제자는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부가주는 손주의 항의를 쓸모없는 투정을 듣는 듯한 자세를 고수할 뿐이다.

"어린 아이처럼 굴지 말아라.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바로 너니까 말이다. 네가 정 드래곤 조련사의 긍지를 입에 올리고 싶다면… 훗날에 네가 원하는 바를 걸고 '용의 결투'에 임하면 되는 것이다."

신경이 한계치까지 늘어지던 하운은 낯선 단어를 듣고 눈을 잠시 깜박거렸다. 저쪽에서 수제자가 약간 난처하다는 눈빛을 띄워올렸으나, 하운은 이를 곧장 무시한 채 외조부에게 대뜸 물었다.

"용의 결투라는 건 뭔데요?"

'어째 드래곤 조련사란 작자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사는 것 같단 말이야.' 하운은 언뜻 자부심 섞인 손길로 삼삼드래의 머리를 쓰다듬는 외조부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외조부는 구태여 드래곤 조련사들의 전통을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외손녀의 의문에 순순히 답해준다.

"결투에 참여하는 자들이 각자 원하는 바를 걸고 드래곤으로 일대일 배틀을 벌이는 것이지. 승리한 자가 모든 권리를 가지며 패배한 자는 권리를 빼앗기고 물러나야 하는 싸움이 바로 용의 결투다."

…요약하자면, 힘으로써 상대방의 권리를 빼앗겠다는 논지로 이루어지는 배틀인 셈이다. 하운은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나가듯이 의문을 던진다.

"제 오빠의 플라이곤이 홍련섬에서 배틀하던 중에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도 그 용의 결투라는 것 때문인가요?"

바야흐로 마음 한구석에 굳혀 놓았던 심증을 확립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운은 입을 다문 외조부를 올곧게 노려보다, 별안간 제 뒤에서 비웃는 듯한 콧소리가 들린 까닭에 눈을 세모꼴로 세웠다. 곧이어 제 앞에서도 콧방귀가 날아왔다.

"그 약해 빠진 것이 우리 가문을 욕보이려고 하길래 내가 친히 눌러주었을 뿐이다. 패자 따위에게 신경을 쓸 바에 네 실력부터 쌓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느냐?"

하운은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저 삼삼드래와 그 조련사의 짓이었구나. 이글이글 속을 태우는 증오심을 은밀히 감추고 내뱉는 목소리는 마찬가지로 차디차다.

"좋아요. 갈게요. 가문으로 돌아간다고요. 가서 최고의 조련사로 거듭나겠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잘난 대문짝을 부숴줄 것이다. 하운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만한 눈길을 묵묵히 되돌려 쳐내면서 침묵을 지켰다. '이제 슬슬 유이가 올 때가 됐는데.' 길바닥에 흘리고 온 흙이 지표 역할을 하기엔 너무 미약했나, 하운은 여전히 수제자의 손아귀에 들려 있는 몬스터볼들을 흘깃대며 타는 목구멍 너머로 연신 마른침을 넘겨 댔다. 삼삼드래의 낮은 으르렁거림과 더불어 외조부의 중얼거림이 귀청을 거슬렀다.

"본가에 돌아가거든 예절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겠구나. 자, 이제 가자꾸나."

"하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소꿉친구가 그야말로 구세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하운은 유이가 건장한 체구의 경찰관과 윈디를 대동하고 골목길 안으로 급히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반색했다. 뒤를 돌아보는 외조부의 낯이 살짝 일그러졌다. 쉴 새없이 길을 달려온 까닭에 헥헥대는 소꿉친구의 앞으로 경찰관이 나섰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그 아이의 신분을 도용해서 포켓몬들을 가로채 간 사람이 있다고요. 여러분께는 포켓몬 절도 혐의가 있으니 서까지 따라와 주셔야겠는데요. 거기 그쪽 분, 갖고 계신 몬스터볼들은 주인분께 어서 돌려주시죠."

가문 사람들의 찡그린 낯을 발견한 하운은 공권력의 위엄을 실감하며 잽싸게 행동했다. 수제자의 손에 들린 자신의 볼들을 가로채다시피 돌려받고는, 외조부와 삼삼드래의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서 유이의 곁으로 달려나간 것이다. 윈디가 나서서 삼삼드래를 견제하는 동안 유이는 곁에 돌아온 친구를 와락 끌어안았다.

"별 일 없었나요, 하운? 다친 덴 없고요?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인 거지요…."

그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되니 목소리를 내기에 앞서서 그간 참고 있었던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당장이라도 하소연을 쏟고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지금 서 있는 장소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삭막할 따름이었다. 그 사이 외조부가 경찰관에게 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 아이는 내 외손녀고, 나는 외손녀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소. 아이가 철이 없어 가출을 해서 집안 사람과 함께 직접 데리러 온 것인데 무언가 오해가 생겼나 보군."

그 말에 경찰관은 잠깐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지만 사무적인 태도를 굽히지는 않았다.

"그렇더라도 주인이 있는 포켓몬들을 가로챈 것은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행위 당사자만이라도 따라오셔야겠습니다."

하운은 부가주의 뒷쪽으로 슬그머니 숨어드는 수제자를 말없이 째려보았다. 일순 곤란하다는 기색을 떠올리던 외조부는 헛기침을 뱉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긴밀한 대화를 나눌 필요성이 있겠구료." 그리고는 하운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예의 권위적인 어투로 말을 건네는 것이다.

"하운아, 네게 여행을 마무리지을 시간을 주겠다. 이분과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널 찾을 것이니 멀리 가지는 말거라."

어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정신없이 듣고 있던 유이는 이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더니 하운을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말이냐는 무언의 질문에 하운은 당장 답변을 꺼내지 않고 가로등이 밝게 비추는 곳으로 유이를 이끌었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장소에 다다르자마자 하운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유이와 경찰관이 도착하기 전까지 오간 대화를 어떻게 정리해서 전해줘야 할지 막막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들이는 뜸이 길어지려나 싶을 때 유이가 툭 뱉듯이 물어왔다.

"가는 거예요?"

가로등의 빛에 반사되는 눈이 미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려던 하운은 그 반짝임을 보고는 속에서 울컥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눈물을 쏟아버렸다. 어째서 내 여행은 항상 타인의 의지에 의해 끊겨야 하는 것인지, 모멸, 증오, 분노, 격한 아쉬움, 격한 슬픔, 격한 억울함 따위의 감정은 열 살짜리가 능히 버텨내기에는 지극히도 버거운 것들이었고, 때문에 하운은 머릿속에서 정리하던 문장들을 모조리 망각하고 말았다.

"가, 갑자기 그렇게 되, 되어버렸어. 나, 나도 이렇게 갑자기 여행을 끄, 끝내고 싶지 않았는데…. 저, 정말 미안해. 유이, 정말정말, 미안해."

저와 비슷하게 눈물을 그렁그렁 일으키던 유이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흐느낌 소리를 별안간 단호하게 끊고 들어왔다.

"뚝! 하운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유이에게 자꾸 미안하다는 소리 하지 말아요. 하운이 정 미안함을 느낀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꼭,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때 유이와 함께 여행을 가요. 우리, 약속했잖아요?"

울음을 그치라는 소리가 단박에 눈물을 멈춰주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속절없이 이어지려는 울음 소리를 막아낼 수는 있었다. 하운은 한차례 크게 훌쩍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속했으니까, 꼭 돌아나갈게. 누구도 우리 여행을 방해하지 못하게, 얼른 강해질 거야. 유이가 많이 기다리지 않도록, 열심히 할 테니까…."

소꿉친구의 따스한 포옹이 다시금 다가왔고, 하운은 하릴없이 그에 빠져들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앞으로 다가올 혹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려면 이 온기를 오래도록 기억해 두어야 했다. 지금으로써는 부당한 압제에 무력하게 당할 뿐인 처지이지만, 강제로 빼앗긴 봄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서는 방향을 제대로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하운은 유이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으며 조용히 온기를 곱씹었다.

용의 새끼는 성체를 물어뜯고 부수기 위하여 이무기가 될 꿈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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