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으로 향하는 여정

올곧은 발걸음 아래로 눈밭이 녹아내리고

열 살, 봄

BGM




20xx년 x월 xx일 날씨 구름조금

오늘은 캠프 이튿날이었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갈 것 같다.

여러 명이 함께 어울리는 단체 생활은 난생처음이라 뭐가 많을 줄 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어린 애들끼리 모여서 그런지 대화주제가 이리저리 튀었다. 나도 개중 한 명이지만…! 아무튼 또래들끼리 모여서 떠는 수다가 이 정도로 재밌는 줄은 처음 알았다! 홍련마을에서 온 사람은 아무래도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하기야 그 작은 동네에서 나만 한 나이대를 본 적은 없었지. 유이는 무지개시티에서 왔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반짝반짝! …사실 옛날에 가본 기억은 있었지만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까지는 기억이 안 나. 그러니 옛날 기억도 되살려 볼 겸, 유이네 포핀 가게에도 방문해볼 겸, 나중의 여행 중간에 들러야 할 곳으로 미리 정해두었다!

20xx년 x월 xx일 날씨 맑음

캠프 사흘째!

각자 자기 포켓몬들과 친해져 보려고 하는데, 포켓몬들도 성격이 제각각이라, 음,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초승이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친구, 정말정말 맹하다. 내가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별 귀찮다는 반응 하나 보이지 않으니 노력하는 성격이 맞나 싶기도 한데… 으음,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 별개로 볼마사지를 좋아하는 듯하다. 볼 만지는 느낌이 좋아서 괜히 더 만지게 되는 데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믐과도 나름 잘 지낸다! 성향이 서로 비슷비슷한 데다 같은 물타입이라 통하는 면이 많은가 보다. 그믐은 캠프에서 활약할 기회가 별로 없지만, 물가에 나오면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는 모습이 정말 신나 보인다. 내 방의 작은 수조는 너무 작았지… 관동의 제일간다는 드래곤 조련사 가문이 물타입 포켓몬을 배려한 환경도 제공해주지 않는 걸 보면 역시 능력이 변변찮은 게 맞나 보다.

아무튼, 여기 캠프에 모인 친구들은 좋아하는 타입이 제각각이라 재밌다. 보라타운에서 온 애는 엄청 멋진 용이 좋다고 그랬고, 유이는 파직파직한 전기타입을 좋아한다고! 타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른 다른 포켓몬들도 들이고 싶다. 태초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사는 얼음타입 포켓몬은 누가 있었더라? 캠프 끝나는 날 바로 만나러 가야겠다. 그건 그렇고 내 포켓몬들 이러다 대부분 얼음타입으로 채워질 것 같은데… 만약 오빠랑 배틀하게 된다면 이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랬으니 한번 싸움을 걸어봐야겠는데~ …만날 수 있다면 말이다. 오빠는 내가 트레이너 캠프에 와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P

20xx년 x월 xx일 날씨 맑음

오늘은 캠프 나흘째.

저택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캠프의 일정은 엄청 느슨했다. 기상이랑 취침 시각도 널널하고, 밥도 엄청 맛있다. 트레이너 캠프에서 배운 내용은 앞으로의 생활에 무척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포켓몬의 타입이나 특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라든지, 여행 수칙이라거나, 포켓몬 종마다 다른 진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켓몬과 유대를 쌓는 방법 같은 거 말이다. 본가의 저택에 갇혀 있을 때 익힌 것들은 하나같이 따분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교양뿐이었는 데다, 용들은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자란다면서 다짜고짜 무리한 싸움이나 걸어오고, 아무래도 나 같은 애들이 건강하게 자랄 만한 곳은 아니다. 빠져나오길 백만 번 잘했다! 가문의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어떻게 땡땡이를 칠 지 머리굴리기 바빴는데 여긴 그럴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제대로 배우고 오라는 할머니 말씀은 모르겠고, 그냥 나 스스로 힘을 기르려고 여기 있는 거다. 나중에 길가다 운 나쁘게 가문 사람들이랑 마주치더라도 가뿐히 따돌릴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지. 그 못된 삼삼드래도 언젠가 반드시 꽁꽁 얼려주고 말 테다!

덧붙임: 유이가 퀴즈 보상에서 얻은 프렌드볼을 선물로 주었다! 프렌드볼이라, 친구의 증표라는 걸까… …. 선물로 받은 물건이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잘 써줘야겠다!

20xx년 x월 xx일 날씨 구름 많음

캠프 닷새째~.

애들이랑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잘 모르고 있던 사실도 새로 알게 된다. 여덟 개 체육관의 배지를 얻으면 관동의 챔피언을 선별하는 토너먼트 리그에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지방의 최강자들만이 모인 자리라 뭔가 엄청난 배틀이 펼쳐진다고 하는데… 이왕 여행을 떠날 거 나도 배지를 모아서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생각만 해 보는 건 죄가 아니니까! 드래곤 조련사 따위 되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목표를 세워두는 쪽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쪽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흐지부지해지는 게 싫다. 다른 애들은 벌써 여행 계획을 세운다고 야단이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다닌다면…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20xx년 x월 xx일 날씨 구름 조금

캠프에 온 지 엿새가 지났지만 실질적으로는 마지막 날이었다. 일주일이 이렇게 금방 가는구나.

캠프 인원들끼리 모여서 모의 배틀과 모의 콘테스트도 치렀다. 안타깝게도 나는 참가를 하지 못했다…. 절대로! 하기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다! 여행 계획을 짠다고 밤늦게 잠들었더니 참가 신청도 까먹고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하긴, 배틀이야 도로에 나가면 원 없이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헤매지나 말자는 마음에 열심히 관찰 겸 구경만 했다. 배틀이나 콘테스트 토너먼트에 참가하면 보람이 남다르겠지만 지켜보는 것도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 캠프가 끝나면 가문에서 불쑥 찾아와 날 답싹하고 데려가려 하진 않겠지…? 은근히 불안한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뜩이나 첫 포획 포켓몬으로 목표를 잡은 쥬쥬가 홍련섬의 바로 옆 동네에 서식하고 있다는데 거기까지 갔다가 마주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오래 고민하기도 귀찮다. 그냥 내 여행길에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자!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캠프 마지막 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의 정오, 아이들은 연구소 앞뜰에 모여 박사가 캠프 해산을 선언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앞둔 얼굴들은 가지각색이다. 당연한 업적을 코앞에 둔 담담한 표정이나 기대에 휩싸여 두근두근한 표정, 설렘과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까지, 그리고 평온함을 가장한 채로 긴장이 바짝 올라서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눈동자가 우뚝 멎었다. 이레 동안 캠프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 외에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어, 하운은 박사의 쾌활한 목소리가 얼른 종용되기를 기다리는 한편으로 머릿속에 경로를 바삐 구상해 보았다. 배를 타고 21번 수로를 건너서 그대로 쌍둥이섬까지 가는 길에 홍련섬은 어쩔 수 없이 경유해야 했다. '거기서 가문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야 하는데.' 하운은 캠프가 해산되자마자 연구소의 정문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가는 아이들의 무리에 섞여서 잽싸게 발을 놀렸다.

“쥬쥬 잡으러 쌍둥이섬에 잠깐 다녀올게!” 여행길을 동행하기로 한 유이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니, ‘응, 조심해서 다녀와요!’ 그는 씩씩한 목소리로 화답하고 1번 도로 방향으로 뽀르르 뛰어가 버렸다. 하운은 그 뒷모습을 보며 콧김을 힘차게 뿜고는 곧 있을 출항을 알리는 선원을 따라 쾌속정에 냉큼 올라탄다. 얼마 있지 않아서 작은 배는 수로를 흐르는 파도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남쪽을 향했다. 하운은 타운맵을 펼치고 계획 루트를 재점검하면서 제 품에 엉겨있는 물짱이와 볼 속의 쏘드라에게 동시에 말을 걸었다.

"우리가 가려는 쌍둥이섬 말야, 홍련섬에서 날이 맑을 때면 무척 잘 보이는 곳이거든. 모양이 비슷한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어서 쌍둥이섬이라고 불리는데, 얼음타입 포켓몬들이 많이 서식하는 장소면 보기보다 꽤 추운 곳인가 봐."

어린 포켓몬들은 그저 멀뚱멀뚱한 눈빛만 보내오고, 하운 역시 별다르게 떠올리는 생각도 없이 태연스레 맵을 거둬들였다. 자신의 최종 목적지가 가문의 제자들이 수련 장소로 애용하는 섬이라고는 해도 서로 마주칠 염려는 없었다. 라씨 가문은 봄철이 되면 겨우내 갈고닦은 실력을 증명하기 위하여 드래곤 조련사의 본고장인 검은먹시티에 원정을 나가기 때문이다. 하운은 일찍이 제자들과 사용인들 사이의 잡담에서 얻은 정보를 고찰해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그래서 나더러 트레이너 캠프에 참여해도 된다는 허락을 한 건가? 본가는 거의 텅 비어 있겠고, 성도지방까지 날 데려가서 감시하기엔 까다로울 거란 생각을 했을지도… 흠, 그럼 홍련마을에서 가문 사람을 마주칠 일도 없으려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얄궂게 헤집는 바닷바람이 머릿속에 눌러붙은 고민들마저 말끔히 걷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운은 불현듯 입이 찢어져라 씩 웃는다. '이거 잘하면 영구 탈출을 노릴 수도 있겠는걸? 원래도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곧장 영악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주인의 모습을 그믐은 항상 그랬듯이 불안하게 바라보고, 초승은 맹하니 따라웃기만 한다. 하운 딴의 근사한 여행 계획이 순조롭게 세워지는 동안에 소녀와 포켓몬들을 태운 배는 화산섬에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운은 경유지에서 우르르 하선하는 승객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온 김에 체육관에 도전하고 갈까…? 타입 상성으로는 도전해 볼 만한데."

하운은 몇 년전 자신의 오빠가 체육관의 배틀 필드에서 회오리불꽃을 격파해내던 모습을 추억했다. '그런 뒷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해서 꼭 닮고 싶었는데.' 자기도 쏘드라와 함께 도전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는 어린 아이를, 그의 오빠는 능숙하게 달래주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하운이가 나중에 나처럼 강해지면 그 때 도전하자. 오빠가 꼭 지켜보면서 응원해 줄게. 오늘 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하운은 찬바람이 만들어놓고 간 콧물을 훌쩍 삼키고는 품속의 초승을 쓰다듬었다. 물짱이는 그새 잠이 오는지 눈을 연신 꿈벅거리며 큰 하품을 남겼고, 하운은 이에 작게 키득거리며 물짱이의 몬스터볼을 꺼내들었다.

"다음에 도전하자. 아직은 이르다. 그치?"

초승을 볼 속에 넣어준 뒤 그믐의 볼에 대고 속삭이자, 몬스터볼은 맞장구를 치듯 앞뒤로 한차례 까딱였다. 하운은 그 모양을 보며 잠깐 웃다가 시선을 올리고 먼 배경 속 화산을 바라보았다. 화산은 여느 때처럼 하얀 연기를 구름처럼 피워올리며 섬마을의 일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영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저 모습이 일주일 쯤 못 봤다고 반갑게 여겨지는 것을 보아하니, 몇 개월에 이르는 본가의 생활을 몇 년만치 길게 느끼긴 했나보구나. 하운은 곧 출항을 재개할 것이라는 안내 방송을 귓등으로 흘리며 천천히 상념에 빠져들었다. 반가움을 느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는데도, 만날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 새삼스레 답답하였다.

쾌속정의 선장은 쌍둥이섬의 유일한 방문객에게 다음 배편이 도착할 시각을 알려준 뒤 섬을 떠났다. 하운은 수평선 너머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지켜보다가 기지개를 한바탕 켰다. 긴 수로를 꾸준히 건너 온 여파로 이제는 파도가 몸속에서 출렁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운은 휑뎅그레한 섬의 풍경을 돌아보고는 물짱이와 쏘드라를 볼에서 꺼내주었다.

"자, 도착했어. 여기 어딘가에 쥬쥬가 서식한다고 했는데, 으음… 역시 뭐가 많이 없지…?"

'얼마나 걸어야 하려나.' 바위투성이 지형은 작은 포켓몬들이 움직이기에는 많이 버거울 듯해, 하운은 자신의 포켓몬들을 양팔에 하나씩 안아올리고 오솔길을 따라 총총 움직였다. 본가에서 단련을 한 기간이 좀 있었다고 체력이 은근히 붙은 모양인지 이런 움직임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다. 하운은 자신의 발걸음이 가벼운 까닭을 기분이 좋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바위가 산으로 솟아오르는 부근까지 열심히 걸었다. 바위 해안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가끔씩 튀어나오는 야생 포켓몬들의 울음소리 외에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위섬에서 헤매기를 삼십 분쯤 되었을 때, 하운은 널찍한 바위 위에 드러눕다시피 앉으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어딘가에 동굴이 있다고 들었는데 입구를 찾지 못하겠어……. 아니면 내가 길치인가? 그럴 리는 없는데?!"

'하지만 들어봐, 그믐아. 그때 상록숲에서 헤맨 건 어쩔 수 없었다고. 미로라고 하잖아, 미로!'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는 쏘드라에게 하운이 열심히 해명을 하고 있을 무렵, 오도카니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물짱이가 짤막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돌연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 초승아?"

하운은 쏘드라를 자신의 팔에 재빨리 끌어안고 허둥지둥 물짱이의 뒤를 따라나섰다. 물짱이는 앞길에 불쑥 튀어나오는 바위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더욱 깊은 골짜기 안쪽으로 향했고, 하운은 돌에 발이 걸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뒤를 바짝 쫓았다.

"어디로 가는 거람… 뭐라도 봤나?"

영문을 모르고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주인을 따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쏘드라가 주둥이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하얗고 길쭉한 무언가가 바위 틈새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모습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방향으로 쪼르르 달려가던 물짱이가 우뚝 멈춰서서는 주인을 돌아보며 길게 울었다. 헤실헤실 웃는 모양이 마치 '나 잘했어?'라고 묻는 듯해, 하운은 냉큼 초승을 안아 올리고 마구 칭찬을 남긴다.

"이런 곳에 숨겨진 동굴이 있었구나. 아까 그건 쥬쥬였지? 우리더러 따라오라고 했던 걸까?"

그러나 야생 포켓몬의 속내까지는 알지 못했으므로, 하운은 섣부른 추측은 그만두기로 하고 자신의 포켓몬들과 함께 비밀스러운 동굴 안쪽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몇걸음 더 걸어들어가자마자 당장 서늘해지는 온도와 희게 응결되는 숨이 이 장소의 환경을 일깨워 주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뾰족한 물체가 실은 종유석이 아니라 고드름이고,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무언가는 모래나 자갈 따위가 아니라 얼음덩어리였다. 하운은 바위산을 오르느라 팔뚝까지 걷어붙였던 소매를 끝까지 내리면서 숨을 깊이 들이마셔 보았다. 멀지 않은 위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물 특유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인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천연의 동굴길은 낯선 방문객을 거대한 공동으로 안내해 주었다. 절벽 앞길을 조심조심 걷고 있던 하운은 공동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물짱이와 팔에 매달려 있던 쏘드라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천장이 움푹 무너진 곳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공동 안을 은은히 밝히는 가운데, 바닥의 삼분지 이를 채우는 호수의 표면 위에 윤슬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발을 디딜 수 있는 바닥 공간에는 이름 모를 풀꽃 군락이 소복이 쌓인 서리꽃 사이로 어지러이 피어나 있었다. 호수의 한 구석에는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수면에 부딪혀 잘게 부서진 물방울들이 햇빛을 반사하여 눈송이처럼 반짝이는 모습이 잘 보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숫가에서 쥬쥬 한 마리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은 채 방문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짱이가 얼른 주인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쥬쥬와 대치했다. 하운은 그 모습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가, 쏘드라가 꼬리로 채근하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기술 지시를 위해 입을 벌렸다.

"초승아, 돌떨구기!"

그렇게 크게 외치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메아리를 덧입고 공동 전체에 울려 퍼진다. 풍덩! 물짱이가 힘껏 들이박아 날려보낸 돌덩이는 표적을 한참 빗나가 호숫물에 빠지면서 마찬가지로 커다란 소음을 남겨놓았고, 쥬쥬는 두 앞발로 박수를 치며 즐겁게 웃기 시작했다. 물짱이가 두 번째로 날린 돌덩이마저 첫 번째 것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풍덩 빠지자, 이번에 쥬쥬는 눈을 반짝거리는가 싶더니 냅다 차가운 숨결을 뿜어 호숫물을 일직선으로 얼려버렸다. "응? 뭐야?" 그리고선 즉석으로 만들어 낸 얼음길 위를 슝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물짱이는 쥬쥬를 놓칠세라 호수 속으로 퐁당 입수해서는 강치 포켓몬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초승이가 저렇게 열의를 보이는 건 처음이야…. 어째, 둘이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하운은 저와 마찬가지로 흐린눈을 하고 있는 그믐에게 속삭이고는, 긍정의 빛을 보내오는 파트너에게 히죽 웃어보였다.

"너도 같이 놀래? 마침 물도 맑겠다, 수영이 하고 싶지 않아?"

초반에 조금 망설이는가 싶던 그믐은 결국 물타입 포켓몬의 본능을 뿌리치지 못하고 꼬리를 스프링 삼아서 주인의 품을 빠져나간다. 퐁당. 작게 튄 물방울이 피부에 닿았다. 그 온도가 의외로 미지근해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는 세 마리 포켓몬들을 지켜보던 하운은 은근슬쩍 호수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손을 담가보았다. '어라, 얼음동굴을 흐르는 물 치고 꽤 미지근하잖아?' 그러나 하운은 포켓몬들만큼 힘차게 물놀이를 즐길 기량이 부족했으므로, 쥬쥬와 물짱이가 가까이 다가올 때를 가만히 기다린 다음 물 속에 담가두었던 손을 움직여 물총을 쏘아보내는 것으로 놀이에 가세했다.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서로의 몸통을 마구 적셔댔다. 하운은 여분으로 챙겨 온 옷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흘리며 물타입들과의 물놀이를 실컷 즐기기 시작했다. 인간 아이와 세 포켓몬들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사이, 눈송이가 아무도 모르게 그 모습을 구경하려는 듯이 안쪽으로 흘러들어왔다.

공동에 내리쬐는 햇빛이 반대쪽으로 움직였을 때쯤에야 물놀이 시간은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아~ 잘 놀았다. 한 시간 정도 후에 배가 오는데 슬슬 갈 준비 해야지."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한참을 놀다 겨우 숨을 돌릴 무렵이었다. 하운은 뽀송하게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 기분 좋은 낯으로 수면 위를 둥둥 떠 다니는 자신의 포켓몬들을 불러들였다. 뭍으로 기어 올라온 물짱이가 가볍게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는 동안, 하운은 쏘드라의 몸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간단히 닦아주는 한편으로 쥬쥬를 곁눈질했다. 쥬쥬는 놀이가 파하자마자 뭍에 나와서는 배가 보이도록 몸을 뒤집고 느긋하게 이리저리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야생 포켓몬답지 않은 느긋함이 상당히 인상 깊었는데, 만일 이대로 쥬쥬를 두고 쌍둥이섬을 떠나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이 돌아올 지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운은 제 궁금증을 구태여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얘. 너, 우리랑 같이 갈래? 네 집도 꽤 근사한 곳이지만… 우리랑 같이 가면 매일처럼 놀 수 있을거야."

쥬쥬는 특유의 동그란 시선으로 인간 아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곁에서 쏘드라와 물짱이가 울음소리로 주인의 말을 거들어준다. 하운은 강치 포켓몬의 눈이 먼젓번보다도 더욱 반짝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실은 이 섬에 오는 동안 네 이름까지 생각해 두고 있었어. 같이 가자, 너테야."

'물이 얼고 얼어서 겹쳐진 얼음의 형태.' 드래곤은 얼음을 경계해야 한다며 주어진 서적에서 건진 단어였다. 겉보기상 느긋하고 유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굳건한 뿔의 힘과 지구력을 자랑하는 포켓몬에게 어울릴 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이 주인을 잘 찾아간 모양인지 쥬쥬는 하운이 내밀어 보이는 프렌드볼에 그대로 달려와 콧잔등을 콩 부딪친다. 볼은 단 한번의 저항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쥬쥬를 받아들였다.

첨벙!

“너테야, 노는 건 좋은데 이쪽까지 물 튀기지 않게 조심해 줘.”

상록시티의 광장에 자리한 연못에서 물보라를 일으켜가며 수영을 즐기던 쥬쥬는 주인의 말에 몸을 뒤집고 배를 앞발로 태연히 통통 두드렸다. 하운은 쏘드라와 물짱이가 동그랗고 하얀 배 위에 냅다 드러눕는 모습을 보며 속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기어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트레이너 캠프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다들 여행에 한창 빠져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다들 인생 첫 여행인지라 포켓기어 속 메신저에서는 캠프 친구들의 근황이 앞다투어 올라오고 있었다.

‘상록숲에서 피카츄를 만났는데 진짜 귀엽다!’

‘상록체육관은 초보자들이 도전할 수 있는 곳이 아녔어?! 태초마을 바로 다음에 있으면서 이건 사기야!’

‘회색체육관에 도전해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고~. 바위에는 물, 다들 참고해 둬….’

벌써 배지를 획득했다는 소식도 눈에 띄었다. 케이스에 끼워 넣어진 그레이 배지를 뿌듯하게 가리키는 리우의 누리공이 즐거워 보여서 하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다. 본가에서 지낼 때와는 달리,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소식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흡족했다. 이유도 모르고 한 공간에 갇혀선, 실존하는지도 모를 라이벌을 상정하고 형식과 틀에 박힌 훈련에 매진해야 했던 일상은 이제 저와 상관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행복이 배가되었다.

‘다들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나라고 즐기지 못할 리가 없지,’ 하운은 불끈 의지를 다지며 연못가에 세워 둔 자전거―'서른에 가까운 수의 참가자들에게 무려 자전거까지 제공해 주다니, 포켓몬 연구 최고 권위자는 부자임이 틀림없어!'―의 기어를 살폈다. 주인이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모습을 본 포켓몬들은 물놀이를 마치는 게 아쉬웠는지 수면을 동동 떠다니기 시작한다. 하운이 마주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쏘드라와 쥬쥬를 몬스터볼 안에 냉큼 돌려넣자, 물짱이만 멀뚱히 남아서 뭍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너는 이 앞자리에 타.”

물짱이가 자전거 앞바구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초승은 헤벌쭉 입이 벌어지는 표정을 지으며 바구니 가장자리에 턱을 빼꼼 올려놓았다. 페달을 힘껏 밟아가며 길 따라 죽죽 달리는 동안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부딪쳐 오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하운은 설레는 감정을 마음에 가득 싣고 상록시티를 벗어났다. 바람결에 따라 흩어지는 목소리가 밝다.

'좋은 오후, 유이! 난 방금 상록시티를 벗어났거든, 내일쯤이면 무지개시티에 도착할 것 같아서 미리 전화했는데~. 어, 맞아! 피카츄 잡은 거 나도 봤어. 너 닮아서 진짜로 귀엽던데! 서로 한 마리씩 엔트리에 들였네, 으응, 네가 저번에 준 프렌드볼 써서 쥬쥬 잡았는데 얘 되게 순하다니까. 쥬쥬들은 원래 배북도 잘 치나 봐. 나중에 만나면 소개해 줄 테니까…! 체육관 도전? 글쎄… 아직 어디부터 도전해볼 지도 못 정해서 배지 따는 게 느려질 것 같네. 아무튼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줘~.'

계획은 간단히 세우고 길 따라가는 건 마음대로, 원래 여행은 계획성과 즉흥성이 알맞게 섞여야 재밌는 법이라고 들었는데, 비록 출처는 알 수 없다지만 그 말이 나한테는 딱 들어맞는다며, 생각을 떠올린 하운의 입가에서는 흡족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항구에 길게 울려 퍼지는 상트앙느호의 기적 소리가 저녁 공기 속으로 차츰 사그라들고, 갈모매들의 끼룩거리는 울음소리가 슬그머니 윤곽을 되찾아갔다.

저녁놀이 수평선에 가까이 내리며 하늘과 바다, 그리고 도시 전체를 오렌지 빛깔로 물들이는 풍경이 일품이라 이명도 석양을 의미할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항구 도시의 해 질 녘 거리는 먼 지방에서 온 관광객들과 일과를 끝낸 주민들로 가득 차서 혼잡한 가운데 한 아이가 좁은 틈을 비집고 복잡한 길을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태초마을을 떠난 지 단 하루 만에 갈색시티까지 도달했을 무렵에도 에너지가 남아돈 김에, 그대로 갈색체육관에 가서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가 불과 삼십 분 전.

“What! 오, 꼬맹이. 미안하지만 me는 배지가 제로인 챌린저는 받아줄 수가 없어요. 최소 둘 정도는 있어야 배틀을 받아줄 수 있다고요! You가 아무리 나의 팬이어도 말이지요, me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무인이라서 kid 같은 챌린저에게는 무리입니다.”

회색시티 체육관은 뭔가 시시할 것 같고, 블루시티 체육관은 지루할 것 같아서 과감히 건너뛰었다는 말까지는 잘 참아냈지만, 특유의 호승심마저 억누를 수 없었던 탓에 보기 좋게 퇴짜를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갈색 체육관의 관장은 이 어린 도전자의 당찬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조언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You의 주먹이 아무리 스파이시해봤자 상성까지 무시할 순 없답니다. Kid네 그 조그만 물타입들, 많이 다칠 수 있어요. 마이 파워를 뛰어넘고 싶다면 포켓몬들을 강하게 트레이닝해야 합니다. Kid가 나와 견줄 만한 강자가 되어서 다시 찾아오면 매우 기쁠 것 같군요!”

인파 속을 헤매는 하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까닭은 약자 취급을 받았기 때문도, 꼬맹이라는 호칭을 들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Kid. 낯이 익다 싶었는데, 그 격투 소년과 me 사이의 배틀을 구경하러 왔던 꼬마가 아닙니까? 와우, 그땐 완전 콩알만 했는데 아직도 작습니다! 자고로 어린 나이에는 많이 먹고 많이 뛰어다녀야 쑥쑥 자랄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 꼬마 얼굴을 3년씩이나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 동안 쑥쑥 자라서 큰 게 이 정도라고 항의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해서 어영부영 웃어 넘기고 있으려니 그다음으로 귀에 들어온 말이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한데, 그 소년은 요즘 뭘 하고 지내나요? 올해 초쯤인가, 그 친구가 홍련마을행 배에 타는 걸 본 이후론 통 못 봤지 말인데요.”

올해 초라면, 자신이 외조부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외가댁으로 보내져서 한창 수련을 받고 있을 시기였는데. 하운은 금시초문인 혈육의 소식을 의외의 인물에게서 듣고 넋이 쏙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마티스는 격식을 따질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고, 체육관 관장답게 일정이 바빠서 새파란 도전자가 경황을 잃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어도 별 말없이 웃는 낯으로 그를 보내줄 뿐이었다.  

하운이 체육관을 빠져나오자 마자 전력질주를 하여 도착한 장소는 갈색시티의 포켓몬 센터였으며, 자신이 갈색시티에 살았을 적 친하게 지냈던 간호사와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이는 하운이 어렸을 시절부터 제 오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센터에 함께 들어갈 때면 자신에게 아이스캔디를 하나씩 쥐여주고 귀여워해 주던 사람이라 쌓은 정이 많은 편이었는데, 홀연히 소식이 끊겼다가 오랜만에 만나니 그는 훌쩍 자라난 아이를 과히 반겨주었다. 지난 날과 다름없이 아이스캔디를 날름 쥐여주는 동작부터 그러했다. 하운은 혀끝부터 찰싹 달라붙는 소다맛이 유독 달게 느껴져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길래 얼굴이 홀쭉이가 다 됐니? 너희 남매가 한동안 보이질 않으니 난 또 다른 곳으로 말없이 이사를 갔나 했지.”

“…최근에 오빠가 여기 온 적은 있었어요?”

하운은 씩씩한 태도를 가장해서 대뜸 물었다. 홍련섬에 방문했으면서 동생을 만나보지도 않고 훌쩍 떠버린 행동에 대해 섭섭해하거나 배신감을 느끼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으음… 내가 마지막으로 은엽이를 본 건 1월쯤이었지, 아마? 어디서 그렇게 격렬한 배틀을 하고 왔는지 글쎄, 높새가 중상을 입고 여기까지 실려 왔다니까.”

익숙한 플라이곤의 이름이 들리자 하운은 눈을 크게 뜨고 대들듯이 묻는다.

“높새가요? 많이 다쳤어요? 얼마나요?”

손에 들린 것이 흐물흐물하게 녹아가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친숙하게 여기던 포켓몬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마음을 불안정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간호사는 아이스크림이 녹는다며 진정하라는 의미의 눈치를 주었다.

“여기서 며칠 보내게 하고 말끔히 치료해주었으니 전부 괜찮아, 안심해. 아무튼….”

하운은 힘없이 캔디를 입에 물고 한덩이 크게 베어먹었다. 이가 시렸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간호사는 어린 친구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펴 가며 그가 원하던 가족의 안부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때 은엽이가 정말 상심해 있길래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고… 높새의 치료를 끝내고 난 후부터는 모습을 영 보이지 않더라. 헤어지기 전에 나한테는 다른 지방에 간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머, 하운아?”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운은 잔뜩 굳은 얼굴을 어쩌지 못한 채로 어색한 인사말을 남겼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바쁘실 텐데 일부러 시간 내주신 점도요.”

간호사는 어쩐지 아쉽다는 표정으로 조그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제 얼굴 자주 볼 수 있는 거지? 시간이 남으면 언제든 놀러 와. 은엽이 소식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네.”

하운은 뻣뻣하게 고개를 꾸벅여 보인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저 좋은 일만 일어나리라 믿은 여행길에 감정의 급격한 하락세가 찾아든 것도 순식간이라,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땅거미가 지는 대로 위로 성난 발걸음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갈색시티의 집으로 되돌아온 지 일 년하고도 수개월이 지났는데도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몸이 기억하는 대로 눌러보았다가 문이 간단히 열렸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거실의 가구 배치는 물론이고 늦은 밤 시각인데도 집에 아무도 없다는 점까지, 하운이 아는 그대로의 광경이었다. 그는 휑한 집안 분위기에 불만을 느껴 인상을 썼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리쉬고는 터벅터벅 복도를 걸었다. 그 끝에 있는 문을 열면 제 오빠가 쓰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은 텅 비었다. 가구의 면적을 따라 앉은 먼지의 띠만이 흔적을 보여줄 뿐이었다. 하운은 방의 주인이 이 집을 완전히 떠났음을 실감하고는 온 힘을 다해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 굉음마저 복잡한 머릿속을 일깨울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정말로 멀리 떠나 버렸구나, 지긋한 짜증과 설움이 한겹 더해지기만 했다.

바로 옆방은 자신이 쓰던 공간이었고,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가구를 치워내거나 하지는 않고 원래부터 있던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하운은 바로 눈앞에 있는 침대를 지나쳐 손때가 군데군데 묻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하운은 방바닥에 자신의 포켓몬들을 모두 풀어놓고는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처음 와보는 장소에 어리둥절한 낯을 한 물짱이와 쥬쥬는 철없이 바닥을 뒹굴며 서늘한 온도를 즐겼으나, 오로지 쏘드라만이 익숙한 풍경을 알아보고 기쁘게 주인의 팔 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그러나 하운이 우울한 얼굴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자, 그믐은 고개를 갸우뚱 굴려 아이와 시선을 맞추려 하였다.

“정리가… 필요해.”

고요한 집 안에서 처음으로 꺼낸 목소리는 엉망진창으로 쉬어 있었다. 하운은 제 음성에 흠칫 놀라서 무심코 목을 가다듬었다. 머릿속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내려면 갈색시티에 도래한 이후로 얻은 단서를 짜 맞출 필요성이 있었다. '진정하고, 제대로 생각해 보는 거야. 흥분하면 안 돼….' 입속으로 되뇌는 말이 부질없이 느껴지기를 잠시, 하운은 심호흡을 한차례 뱉는다. 이러한 시도로 애써 평정을 찾으려는 목적도 소용이 없는 듯이,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떨려 나왔다.

“내가 외가댁으로 끌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엽 오빠가 홍련섬으로 찾아갔다고 했어. 거기서 누군가와 배틀을 했고, 높새가 많이 다쳤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지…. 갈색시티에 돌아와서 높새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머물러 있다가, 그대로 다른 지방으로 멀리 떠나버렸고.”

하운은 파트너의 끔벅거리는 눈을 힐끗 쳐다보고 쓴웃음을 흘렸다.

“오빠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그것도 모르겠고, 이 전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도 잘 모르겠어.”

자신의 세계관 내 최강자였던 그가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패배했다. 그 인물이 과연 누구일까, 하운은 이를 악물어 정체를 짐작해보려는 시도 자체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런 건 딱히 중요치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오빠가 섬까지 찾아왔다가 여동생에게 기별도 주지 않고 훌쩍 떴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하운은 그 장본인이 아니었으므로 이유를 가늠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공허해졌다. 이때껏 드래곤 조련사의 저택에 붙잡혀 열심히 감정을 깎고 원망감에 치를 떨었던 게 전부 무위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해야 하나?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도 깊이 없이 서글퍼지기만 했다. 이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더욱 답답했다.

화풀이삼아 책상 서랍을 열어서 안을 뒤지려던 하운은 잡동사니의 맨 위에 놓여 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번쩍 치켜떴다. 책상의 주인이 발견하기 쉬우라고 누군가가 일부러 그 자리에 둔 듯해, 하운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쪽지를 허겁지겁 펼쳤다. 쪽지를 펴내는 손길이 너무나도 다급했던 나머지 종이가 하마터면 찢길 뻔 했으나 그는 기어코 그 안에 적힌 필체를 눈 안으로 들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오빠가 개인 연락처를 남겼어. 진작 알려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말도 있는데… 어차피 내가 알고 있어봤자 본가에서 연락도 못하게 했으니 상관없는 얘기고."

하운의 혼잣말을 들은 포켓몬들이 저마다 의아하게 갸웃거렸지만, 그는 이들의 궁금증에 관심을 기울일 여념 없이 포켓기어를 꺼내 들었다. 쪽지에 쓰인 번호를 기어에 입력하고 녹색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지루한 통화 연결음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딱 그만한 길이만큼의 감정 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으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는지, 여동생이 언제 집으로 돌아올 줄 알고 이런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연락처를 남긴 이유가 무엇인지, 적어도 외가 주소로 편지 한 통쯤은 보내줬어야 하지 않느냐고,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정도는 알려줬어야 했다고…. 가차 없이 퍼부어 줄 의문형이 착실히 쌓여가고 있었다.

… …

… …

… …

그러기를 한참 기다려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음률은 끊어질 기미가 없다. 하운은 바닥이 드러난 인내심을 동력 삼아 인상을 있는 힘껏 구겼다. 주인의 저기압 상태를 알아챈 포켓몬들이 덩달아 숨을 죽이고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 …

… …

… …

달칵,

그것은 두뇌를 와글와글 치닫던 것들이 흔적조차 없이 싹 사라지는 소리였다. 하운은 그리 착각하고 나서도 한참을 말없이 기다렸다. '이상하다,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아.' 느닷없이 다가온 정적에 기시감이 천천히 떠오를 즈음이었다.

- …여보세요?

헉, 하는 숨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운은 눈치 없이 튀어나온 탄성을 꿀꺽 삼켰다. 줄곧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꽁꽁 뭉쳐진 감정 덩어리를 덜커덕 건드리고 지나쳤다. 하운은 거듭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오빠.”

당장은 파도에 휘말릴 때가 아니라며, 몇 번이고 자기암시를 반복한 뒤 비로소 꺼낸 단어였다. 단어를 들은 그믐이 반짝 고개를 들어올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선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소리없는 줄다리기 하기를 몇 초가 더 흘러갔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쪽은 상대방이었다.

-하운이니? 하운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연달아 부르자, 북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에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앞뒤없는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야, 오빠. 나… 그 동안 안 보고 싶었어? 홍련섬까지 왔었다며. 왜 나 안 보러 왔어?"

하운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술술 흘러나오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당황하기로는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은엽은 말을 더듬는 듯이 '어, 어.' 하는 얼빠진 소리만 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하운아, 지금 어디니? 외가에 있는 거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면 바로 나 만나러 올 거야? 아니잖아."

'내가 홍련섬에 갇혀 있을 때도 날 무시했으면서.'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아서 불만이 차오른 나머지 가시 돋힌 말을 쏘아낸 하운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오빠가 처했던 상황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데도 함부로 말을 뱉고 있음을 자각해낸 것이다. 하운은 자신의 감정이 갑작스레 들끓었던 만큼 빠르게 냉정을 되찾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말문이 막힌 듯 침묵을 지키는 은엽에게 무엇이든 운을 터 줘야 했다.

"나는 지금 트레이너 캠프를 끝마치고 여행하는 중이야. 그보다 높새는 괜찮아? 높새 많이 다쳤다면서. 포켓몬 센터에서 들었어. 대체 누가 높새를 다치게 한 거야?"

건너편에서 숨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이번에 꺼낸 질문도 딱히 효과적이진 않은 모양이다. 이어지는 긴 한숨 소리에 하운은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남매가 서로 한숨을 쌓기만 하는구나.' 마음이 심란한 정도는 아무래도 부상을 입은 포켓몬의 주인 쪽이 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하운은 자신의 오빠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면서 잠자코 쏘드라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쏘드라는 제 주인이 침착을 되찾았음을 인지하고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 …높새는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 격렬한 배틀을 하다가 다쳤던 것뿐이야. 자, 높새야. 하운이 목소리 듣고 싶었지?

'범인은 끝내 알려주지 않는구나.' 하운은 일부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에 입술을 뾰족 내밀었으나, 스피커에서 힘차게 흘러나오는 플라이곤의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불만감을 저 멀리 날려보냈다. 서둘러 통화를 스피커 모드로 전환해서 그믐에게 들려주니 당장 파트너의 안색이 밝아진다. 물짱이와 쥬쥬는 낯선 포켓몬의 울음소리를 듣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기웃거렸다. 포켓몬의 언어로 이루어진 대화의 장이 얼마간 펼쳐지는 동안 하운은 한결 나아진 마음의 상태를 느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울음소리를 들어보니 높새가 건강하다는 사실은 맞고, 그럼 누구를 상대했는지 캐묻는 건 일단 건너뛰기로 할까.' 하운은 그믐과 높새 사이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의 알고 싶었던 점을 물었다.

"편지 말야, 오빠한테 한참 보냈었는데 어디론가 다 증발해 버렸어. 오빠가 받아본 편지는 없었어?"

-편지… 딱 한 장만 왔었지.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답장을 보냈었는데, 아무래도 네게 닿지 않은 모양이네.

"…역시 누가 중간에 죄다 빼돌렸구나."

-네 말을 들으니 그게 맞는 것 같다…. 본가 사람들은 날 어지간히도 견제하니까.

본가에서 자신의 편지를 검열하고 있다는 의심이 심증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불퉁하게 튀어나오는 아랫입술을 애써 어루만지던 하운은 불현듯 떠오르는 또 다른 의심에 손길을 우뚝 멈추었다. '홍련섬에서 오빠가 배틀로 상대했다는 사람도 본가의 인물인가?' 자신이 맨 처음 오빠에게 편지를 보냈던 시기와 은엽이 홍련섬에 방문했던 시기가 얼추 들어맞는데다, 하운은 라씨 가문이 중시하는 '드래곤의 본성을 일깨운다'는 드래곤 조련사의 정신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드래곤끼리 난폭한 배틀이 벌어졌다면, 어느 쪽이건 심각한 부상을 입은 포켓몬이 있었을지도…. 그리고 그게 높새였다면.'

-하운아?

뜬금없이 상념에 빠지느라 들인 뜸이 꽤 길었던 모양이다. 하운은 자신의 오빠가 부르는 목소리에 황급히 의심을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넣었다. 당사자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일테니 이 문제를 제대로 따져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는 쪽이 나았다. '추궁할 대상이 오빠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운은 별 것 아니라는 듯 헛기침을 서툴게 뱉고는 새로이 떠오른 궁금증을 상대에게 풀어놓는다.

"오빠가 보냈다는 답장에는 뭐라고 썼어? 어차피 내가 읽었어야 할 내용이니까 지금이라도 알려 줘."

-음… 떠오르는 대로 다 써서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하나지방에서 새로운 동료 포켓몬을 두 마리 더 만났고, 성도지방에 있는 경찰학교에 입학할 거라고 썼었지. 하운이가 건강하게 지내고, 꼭 보고 싶다고도… 썼고.

'오빠는 경찰이 꿈이었구나.' 하운은 자신의 오빠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 물어볼 때마다 으레 '아직 생각 안 해봤다'는 답을 들어왔는지라 새로 듣게 된 소식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언제부터, 그리고 어째서 그러한 진로를 정했는지 묻기를 망설이던 하운은 그 대신으로 응원을 내 주었다.

"오빠는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쭉 날 지켜줬잖아? 그만큼 멋지고 강한 오빠니까 꼭 훌륭한 경찰이 될 거야."

딴에는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했는데, 어째서인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운은 한참을 기다려도 끝나질 않는 침묵에 애꿎은 기어를 만지작거리다가 불안스레 상대방을 불렀다. 곧바로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와, 하운은 통화가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안도하며 짐짓 짓궂은 말을 던졌다.

"오빠 지금 우는 거 아니지?"

-아냐! 누가 운다고 그래, 아, 안 울어.

극구 부정하는 목소리가 어딘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운은 그러려니 여기고는 이제 슬슬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어를 다른 손으로 옮겨쥐고 조용히 말했다.

"응. 나 말야, 여행을 하면서 강해질 거야. 드래곤 조련사니 뭐니 하는 거 다 뛰어넘을 거야. 내가 엄청 강해지면, 그때 오빠랑 배틀할래. 나의 챔피언은 오빠니까."

이번에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는 게 맞았다. 하운은 자기가 돌이켜봐도 낯뜨거웠을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데 대한 미량의 미안함을 느끼며 코를 훌쩍인다. 그믐은 자기 정수리 위에 똑 떨어지는 뜨거운 액체에 화들짝 놀라 선잠에서 깨어났다.

"보고 싶어… 오빠."

이쪽이 완전히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자 은엽은 선 너머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나도 하운이가 보고 싶어.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해….

"으응, 아냐… 울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꼭 경찰 돼야 해. 알았지?"

-응… 그래. 그럴게. 고마워, 하운아.

"…끊어."

억지로 끊었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 상태에서 통화를 더 이어나갔다가는 포켓기어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면 꾹꾹 눌러참고 있던 울음보가 터질 수도 있었다거나. 하운은 안절부절못하는 쏘드라를 달래며 어느 쪽이든 곤란하다고 여겼다.

"배고파…. 저녁 먹을 때가 한참 지났구나, 그러고보니…."

감정 널뛰기를 신나게 한 탓에 허기가 금세 찾아왔다. 하운은 시간의 흐름을 새삼스레 느끼며 방바닥에 널브러져 잠든 두 마리 포켓몬을 볼 속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급하게 눈물을 훔쳐서 지저분해진 얼굴로 쏘드라에게 어설프게 웃어보이는 것이다.

"나가서 밥 먹고 집에 돌아와서 목욕할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집에서 자고, 내일부터 다시 힘차게 여행 시작하는 거야."

쏘드라는 주인의 얼굴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만 해도 일어난 일이 여간 적지 않은데다 주인은 격한 동요까지 겪었음을 쏘드라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포켓몬은 제 주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바라는 것은 그저 하나뿐,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이 어린 소녀가 홀로 버티기만 하다가 제풀에 지쳐 무너지는 상황에 다다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쏘드라는 어린 드래곤다운 결론을 내렸다.

"돈은… 이 정도면 오늘 저녁은 해결해 볼 수 있겠다. 가자, 그믐아."

하운이 강해지려면 내가 먼저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하운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능히 꺾어버릴 수 있으니까.

하운은 제 팔을 휘감는 꼬리의 힘이 평소보다 강하다고 느끼며 자신의 방을 떠났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